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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을 닦아 없애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내가 대법수련에 입문한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나는 수련의 엄숙함, 책임의 중대성과 사람 구하는 긴박함을 깊이 느낀다. 여기서 자신의 수련 과정 중 사심(私心)에 대해 깨달은 것을 말해보고 싶다.

1. 사심의 해악

나는 깨달았다. “사(私)는 생명을 가라앉히며 최종에는 속인 사회 중으로 떨어져 내려오게 했고 삼계 중에서 윤회전생하며 영원히 솟아오를 날이 없게 한다. 금생에 행운으로 대법을 만났기에 생명은 다시 수련하여 되돌아갈 수 있게 됐고 이는 천지개벽 이래 한 번뿐이다.”라고.

미국 서부법회 설법 중 어떤 제자가 물었다.

제자: ‘사(私)’가 관통할 수 있는 층차는 얼마나 높습니까? 저희는 어떻게 이 층차를 돌파할 수 있습니까?[1]

사부: 생명이 법을 빗나갈 수 있고 생명이 고층차에서 떨어질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들에게 이 사심(私心)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사심이 있는 원인은 사람의 사상 중에서 후천적으로 형성된 많은, 좋지 못한 관념이 조성한 것으로서 실제로는 사상의 오염이다. 그럼 더욱 높은 층차에 있는 신, 그는 더욱 순결하고,더욱 성결하다. 만약 그에게 응당 있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순수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층차의 개념과 형식이 없다.[1]

한번은, 나는 기술 수련생 A와 함께 수련생 B에게 기술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갔다. B는 컴퓨터가 두 대 있었고 두 대 모두에 오피스(Office)를 설치하려고 했다.그러나 A는 한 대만 오피스를 설치하라고 고집하며 다른 한 대는 인터넷 접속용으로 쓰고 안전을 위해서 오피스를 설치하지 않겠다고 했다. 내 생각은 두 대 다 오피스를 설치하는 것이 비교적 좋을 것 같았다. 노년 수련생은 기술 배우기가 쉽지 않고 USB메모리로 반복해서 문건을 복사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을 말했지만, 기술 수련생 A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어찌 융통성이 조금도 없지? 기술상의 안전은 강조할 줄 알면서 수련인의 정념의 작용은 도리어 소홀히 한다.’하고 생각했다.

그다음 프린터 잉크 헤드를 세척하고 A가 많은 양의 잉크로 세 번 씻어냈다. 다른 색깔은 모두 정상인데 검은색이 인쇄되지 않았다.그녀(A)는 B에게 “매일 2~3번 세척하고 다음 날 다시 많은 양의 잉크로 씻어내십시오!”하고 말했다. B는 한마디 응수하고는 밖에 나가 다른 일을 했다. 나는 옆에서 듣고 ‘대법제자가 어찌 속인의 이치를 따르는가?’하고 은연중 비웃었다.

내가 컴퓨터를 받아서 두말없이 많은 잉크로 5~6번 세척하자 모든 색깔이 정상이 됐다. 나는 기뻐하며 A에게 말했다. “세척은 연속 씻어내는 것이 가장 좋아요. 그렇지 않으면 이전에 공들인 것이 헛것이 돼버리지요. 너무 융통성 없이 일하면 안 돼요.” A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융통성 없다(死板)’라는 용어를 쓰면 안 되지요. 그건 사당(邪黨) 용어예요.” 나는 듣고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와 몇 마디 논쟁하려고 했었으나 돌려 생각해 보니 제3자도 없고 두 사람이 다퉈 설령 이긴다고 해도 보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B가 들어와 말하기를 “증인이 되어 줄 심판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쟁투심이 나온 것을 의식했으며 또 과시심과 수련생을 눈꼴사나워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사실 배후는 모두 사심이고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이었다. A가 나에게 사당 문화의 독소가 존재한다고 지적했을 때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그녀와 다투지 않았지만, 맘속으로는 이미 균형 잡지 못했으며 B가 있을 때 그녀와 다시 한바탕 겨루고 싶었을 뿐이었다.이때 나의 표현은 이미 수련생 같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어떤 제자의 문제에 회답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어떤 하나의 항목,어떤 하나의 일을 하든지 간에, 하지 않으려면 당신은 하지 말고, 하려면 반드시 잘해야 하며,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상에서 어떻게 당신이 낭비한 이러한 시간을 당신에게 기재(記載)해 주겠는가? 어느 한 가지 일을 이루지 못했다면, 그 한 가지 일은 바로 실패이다. 이 일은 반드시 당신의 생각에 따라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성공해야만 당신은 비로소 위덕을 수립할 수 있는데, 당신이 협력함에 있어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움직이고, 협력하여 일을 함에 어떻게 하는가 하는, 이것이 비로소 수련의 과정이다.”[2]

법으로 가늠해 보자 비로소 ‘B에게 기술 문제를 해결해 줄 때 나는 단지 A와 협력을 잘하기만 하면 됐지만, 오히려 협력하는 중에 자아를 실증하려는 사심이 생겨났다. 자신의 행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자 또 환희심이 생겼다. 이러한 사심이 초래하는 행위는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며 해악이 극심하다. 그것은 생명이 승화하지 못하는 커다란 하나의 장애이다.’라고 하는 점을 의식할 수 있었다.

사를 제외하고 또 사람을 속박하는 다른 것들도 있다. “인간의 이기ㆍ탐욕ㆍ우매(愚昧)ㆍ무지와 인간의 선량한 본성이 한데 뒤섞여 무지하게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체를 만들면서 바야흐로 사회를 삼키고 있다.”[3]

2. 사심의 표현

사실 사심은 항상 표현돼 나오는데 겉으로 드러난 사심은 그래도 붙잡기가 쉽다.

한번은 어떤 수련생이 문건을 복사하는 데 쓰려고 휴대전화 메모리 카드를 갖고 싶어 했다. 당시 내게는 십여 개의 빈 카드가 있었지만 나는 도리어 아무 생각도 없이 “당신 USB를 쓰면 되지 않겠어요?”하고 말했다. 한사코 주지 않았는데 그때 나는 수련생이 기분 나빠하는 것을 느꼈다. 나도 내키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수련생에게 메모리 카드를 주고 싶지 않았던 배후는 역시 사심이었으며 아까워하는 마음이었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사심(私心) 문제에 관하여 내가 조금 전에 당신에게 이 이치를 말했을 때 당신들은 모두 손뼉을 치면서 마음속으로 아주 기뻐했다. 미래의 우주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내가 말했을 때 당신들은 모두 기뻐했다. 왜 이럴 수 있는지 여러분은 아는가? 어떤 사람은,사람이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사실 당신들은 아직 모르는데,이 사(私)는 아주 높은 층차에까지 관통되어 있다. 과거, 수련하는 사람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하겠다.’, ‘나는 무엇을 얻겠다.’, ‘나는 수련하고 있다.’, ‘나는 성불하겠다.’, ‘나는 무엇에 도달해야 하겠다.’고 말하는데 사실 모두 그 사(私)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들이 진정으로 순정(純正)하고, 무사(無私)하여, 진정한 정법정각(正法正覺)으로 원만(圓滿)을 이루는 것인데, 그래야만 비로소 영원한 불멸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 준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당신들은 우선 다른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4]

나는 깨달았다.사(私)의 주된 표현은 문제를 생각할 때 위타(爲他)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사고한다는 것이다. 위사(爲私)의 이런 속성은 생명이 자신을 변화하려고 하지 않고 남을 변화시키려고만 생각한다.

사부님께선 말씀하셨다. “사(私)를 위하는 것은 과거 우주의 근본 속성이었는바, 성주괴멸(成住壞滅)과 생로병사(生老病死)도 이 속성이 가져온 필연성이었다. 장래의 법은 원용(圓容)한 것이고 공(公)을 위하는 것으로,우주의 근본속성이 개변됨으로써,우주의 과정과 생명의 특징(特點)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했다.”[5]

내가 느끼는 사심의 표현은 쟁투심, 균형 잡지 못하는 마음,과시심 등등 다른 마음도 동반하는데 사심은 다른 집착하는 마음이 생존할 수 있는 공간과 토양을 제공한다.

3. 깊이 감춰진 사심을 찾아내다

우리는 수련인으로서 반본귀진해야 하기에 먼저 자신의 사심을 찾아내야 한다.

제자가 “주관적 소망과 무사무아는 어떤 관계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실 때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속인의 생각과 수련의 상태를 함께 뒤섞지 말라. 당신이 말한 주관적인 소망은 틀림없이 속인의 집착일 것이다. 무사무아(無私無我)는 내가 당신들에게 요구한 수련 중에서 도달해야 하는 것으로서 당신들에게 인위적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수련 중에서 노력하여 이 한 점을 해내지 못한다면, 그럼 또한 수련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억지로 하면 안 되는바 시작하자마자 나는 이렇게 무사무아(無私無我)하게 해냈다고 하지만 어떻게 무사무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일체는 모두 수련에 따라 제고되는 중에서 인식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해낼 수 있다.”[6]

겉으로 드러난 사심은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깊이 숨어 있는 사심은 신경을 좀 써야 한다.

한번은 내가 수련생과 교류했는데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사심이 한 차례 폭로된 과정을 이야기했다. 이 수련생은 물 공급 사업을 하며 이용자에게 생수통을 배달했다. 점포에는 한 젊은이를 고용했는데 젊은이는 정직하고 무던하며 일도 잘했다. 대략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이 젊은이가 팔에 고약을 붙이고 있는 것을 봤다. 물을 운반하는 것은 힘이 좀 드는 일이라 자비의 마음이 일어나 젊은이에게 진상을 알렸고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알려주며 그가 진상을 알고 복을 받기를 바랐다. 수련생은 당시 이 일을 위타의 각도에서 한 것으로 생각했고 또 잘한 일이었다. 일이 지나고 며칠 된 오늘 그녀는 다시 지나간 일을 나에게 이야기하며 교류했다. 수련생은 말했다. “겉보기엔 당시 자신이 타인을 위한 것이고 젊은이를 위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후에는 사를 위하는 마음이 깊이 숨겨져 있었지요. 그 젊은이가 진상을 알고 신체가 좋아져 나를 위해 물통을 더 많이 나를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듣고 위사의 마음은 정말 찾아내기가 쉽지 않으며 깊게 파지 않으면 정말 찾지 못하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에 수련생과의 교류를 통해 나는 생활 중에서 깊이 감춰져 발견하기 쉽지 않은 사심을 찾아봤다.

한번은 아내 수련생이 내게 장아찌를 자르라고 했다. 나는 아무 소리 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녀가 벌써 몇 번이나 말했어도 나는 행동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나는 벌써 착수하여 장아찌를 잘게 썰고 고추, 간장 참기름 등 조미료를 아내 앞에 내놓았을 것이다. 전에는 장아찌를 자를 때 나는 무사(無私)하며 아내를 위한 거로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나는 왜 움직이지 않는가? 수련인으로서 내가 전에 장아찌를 잘랐던 동기를 자세하게 찾아보니 겉으로는 그녀를 위한 것이었고 아내를 위해 장아찌를 잘랐다고 하지만 그 배후에는 나도 장아찌를 먹고 싶은 사심이 숨어 있었다. 아내도 장아찌를 먹고 싶어 하고 나도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한데 중첩됐었다. 그 때문에 나는 아내를 위해 장아찌를 자른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위사의 목적을 실현했으면서도 입으로는 허울 좋게 나는 공평무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왜 질질 빼며 손을 움직이지 않는가? 원인을 깊이 생각해 보니 원래는 이전에는 우리 두 사람 다 좋아했던 갓김치(짠지)가 없었는데 이번에 아내는 좋아하지만 나는 좋아하지 않는 아삭아삭하는 무짠지만 있었다. 자기가 먹기 싫어하기 때문에 손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 사심을 찾아내고 나는 사심이 폭로된 과정을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는 웃으며 “이 사심은 정말 교활하네요.”하고 말했다.

4. 사에서 걸어 나와 자아를 내려놓다

이 사심을 찾아내자 나는 즉시 그것을 배척하고 부정하며 발정념으로 그것을 제거했는데 이것은 우리가 수련해 제거해야 할 사람의 집착심이다. 사실 한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어떤 집착심을 찾아내고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배척할 수 있을 때는 이미 생명의 승화 과정 중에서 걷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7]라고 하기 때문이다. 사는 자아와 한데 연계되는 정도가 매우 크기에 사를 수련해 제거하는 과정은 사실 자아를 내려놓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한번은 아들이 숙제할 때 몇 글자를 반듯하게 쓰지 않았기에 나는 한바탕 꾸짖었다. 결과 아들은 이전의 온순한 성격과는 다르게 내게 대들었으며 심지어 작은 주먹을 꽉 쥐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매우 놀랐는데 이전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아버지로서의 위엄이 매우 큰 도전을 받았다. 아들이 어떻게 부친에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마음속의 노여움이 한창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노여움을 억누르려고 했고 천백 년 이래 속인 사회에서 형성된 이치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 화내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나는 자아를 내려놓겠다. 그 충격 당한 자아가 편치 못하게 느끼는 것은 그 이기적인 나의 존엄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이번에 나는 이기적인 나를 보호하지 않고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웃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어떻게 그리 시비를 가리지 못할 수 있느냐? 네가 글자를 쓴 것이 이렇게 부족해 아빠가 몇 마디 한다고 너는 좋아하지 않는구나! 아빠는 네가 글씨를 잘 쓸 수 있다고 믿는다.” 아들은 말을 따르며 다시 한번 몇 글자를 썼다. 아들은 내가 이처럼 부드럽고 또 화내지 않는 것을 보고 글씨를 반듯하게 썼는데 한바탕 풍파가 이렇게 가라앉았다.

내가 이기적이고 잘난 척하는 나를 버릴 때, 내 생명 본래의 진정한 선량과 자비로 아들을 대할 때, 아들도 그의 귀엽고 온순한 일면을 내게 보여줬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의 선하지 못한 일면의 폭발을 피할 수 있었다.

5. 사를 제거해야만 항목의 협조를 더 잘할 수 있다

만약 사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자기 수련이 제고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체가 법을 실증하는 항목에도 영향 줄 수 있고 정체가 진상을 알리는 데도 방해가 있을 수 있으며 중생을 구도하는 것도 지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부 수련생은 어떤 일에 대해 법에서의 인식이 서로 달라 논쟁이 생기고 모순을 격화하는데 결과적으로 일부 지역의 법을 실증하는 항목이 잘 전개되지 못하게 했고 인위적으로 대법제자 내부에 장애를 형성했다.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는 바로眞(쩐)·善(싼)·忍(런)을 실증하고 신우주(新宇宙)를 성취하게 한 대법을 실증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다.”[8]

만약 자신의 사심으로 인해 원래 법을 실증해야 할 어떤 항목이 잘못됐다면 상상해 보라, 이 문제가 얼마나 엄중한가!우리는 정법시기 대법제자이며 조사정법의 사명을 띠고 있는데 이 역시 우리의 사전 서약이다.

인간의 이기심, 무지, 탐욕, 우매함은 우리를 우주의 ‘진선인’특성으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게 했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견정하게 사심을 제거하고 더욱 순정한 정념으로 세 가지 일을 잘해야지 속인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법의 위력이 없게 된다.

사부님께서 구세력과의 관계를 이야기하실 때 말씀하셨다. “그것들이 이 일을 할 때 우주의 가장 높은 생명에서부터 가장 낮은 생명에 이르기까지 모두 참여하였으며 전반 체계가 세트로 내려왔는데 층차마다 20%의 생명이 참여하였고 매 층차에서 또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를 도와 정법 하겠는지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층층의 생명이 모두 불순해졌고 최후의 그 생명까지도 다 불순해졌다. 나를 도와주는 이면에 그것들은 그것들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심(私心)을 숨겨두었으며, 다른 사람을 개변시키려 하면서도 자신은 개변하려고 하지 않고, 누구도 자신을 움직이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이 집착하여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을 최대한도로 보전(保全)하려고 한다.”[9]

법을 실증하는 항목에서 자신이 힘을 내야 할 때는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하고 사심을 내려놓고 법을 크게 생각하며 중생 구도를 중히 여겨야 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미국 서부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11 – 2010년 뉴욕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인류를 다시 만들다’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스위스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5 – 2004년 미국 서부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미국 중부법회 설법’
[7]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8]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 -길을 바르게 걷자’
[9] 리훙쯔 사부님 저작: ‘북미순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6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 체득>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6/25/3891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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