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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꼭지를 바꾼 후 약간의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이전에 집 수도꼭지가 망가져 새것으로 바꾸었다. 나는 손을 씻으려고 습관적으로 수도꼭지 밸브를 아래로 눌렀는데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새로 간 수도꼭지 밸브는 위로 들어야 물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밸브를 위로 들었을 때 아주 어색했고 은근히 마음이 아프기까지 했다. 장기간 아래로 밸브를 눌렀던 동작이 관념이나 집착으로 되었다.

당시 나는 놀랐다. 평소 주의하지 않던 행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사상 속에서 관념과 집착으로 되었다. 이때 나는 십여 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십여 년 전의 어느 날 나는 어린 여자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당시 중국에서 인기 있던 드라마를 보기 좋아했다. 나는 그녀와 내기를 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말했다. “너 그 드라마를 20분간 보지 않는다면 고비를 넘긴 것으로 쳐줄게.” 그 아이는 문제없다고 말했다. 잠시 후 텔레비전에서 그 드라마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아이를 불러 텔레비전 화면과 등을 돌리고 앉아 있게 한 후 텔레비전을 무음에 놓았다. 그 아이는 처음에 아무 반응이 없었는데 몇 분 후 안절부절못했고 귀를 긁적이고 볼을 긁적였으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꼭 견지하라고 격려했다. 나는 그 아이가 아주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약 5분이 지나자 그 아이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면서 발광적으로 몸을 돌리더니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하고 기갈이 난 듯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한 마약 중독자가 며칠 마약이 없었는데 갑자기 마약을 보고 발광적으로 덮쳐 게걸스럽게 마약을 먹는 것과 같았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집착심은 확실히 생명이고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무섭게 통제하는지를 알았다. 우리가 평소 끊임없이 한 가지 행위를 중복하고 끊임없이 한 가지 사유나 인식을 강화하면 우리 사상 속에서 집착의 물질과 생명이 형성된다. 그것을 접촉할 환경이 없으면 우리는 정말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한동안 나는 수련생이 NTD TV를 보는 것에 대해 이런 수련생이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고 법에 있지 않다고 여겼다. 수련생이 NTD TV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것을 보거나 들었을 때 늘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끊임없이 이 인식을 강화했고 차츰 이 인식이 절대화되었는데도 나는 법에 있다고 여겼다. 후에 나는 수련생이 NTD TV를 보는 것을 보면 답답했고 심지어 ‘왜 텔레비전이 망가지지 않지? 수련생이 이렇게 집착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자신을 망치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그제야 나는 내가 옳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자신을 찾기 시작했다. 수련생을 눈에 차지 않아 하는 마음을 찾았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마음을 찾았지만, 아직 문제의 근본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도저히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나를 점오해주셨다. 나는 사부님의 법이 생각났다. “사람이 의념(意念)을 한 곳에 집중하여 시간이 길어지면 에너지덩이가 생겨 단을 맺을 수 있다.”[1] 나는 깨달았다. 내가 늘 ‘수련생이 NTD TV에 집착하는 것이 수련생이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고 법에 있지 않다.’라는 이 일념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매번 수련생이 NTD TV에 집착하는 것을 보거나 들었을 때 나는 이 일념을 나도 모르게 강화했다. 이 일념이 이미 집착하는 물질을 형성했고 유형의 생명을 이루었다. 그것이 NTD TV에 집착하는 수련생에게 반감을 품은 것이지 나의 본성이 인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이전에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 집착심을 즉시 해체하는 일념을 내보냈다.

물론 수련인으로서 NTD TV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지만 내가 늘 그것을 생각하고 강화하는 것도 옳지 않으며 집착심이 형성될 수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당신에게 알려주는데, 조금도 중요하지 않으며, 당신이 생각을 많이 하면 곧 집착심이다. 당신이 지나치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바로 집착하여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1]

여기까지 쓰니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부동(不同)한 층차(層次)에는 부동한 층차의 법이 있다”[1]라는 말씀에 더 깊은 한 층을 이해했다. 수련인으로서 서로 다른 층차 중에서 다른 층차의 법리를 깨우치고 본인이 깨달은 법리가 얼마나 좋다고 여기든지 고집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을 지도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깨달은 이치를 고집하고 그것을 강화하면, 더 심한 사람은 본인이 깨달은 이치를 절대화하면 극단적으로 법을 벗어나는 일종 물질이 형성되어 우리가 승화하는 데 장애가 된다. 우리는 무위의 마음으로 어떤 층차의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대법에서 끊임없이 승화할 수 있다.

나에게 왜 이런 집착심이 형성된 걸까? 나에게 과시심,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마음, 밖으로 구하는 마음 이외에 줄곧 이해하지 못했고 인식하지 못했던 원인이 있다. 대법 수련형식과 상태를 이해하지 못해 집착이 생긴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대법제자들이 오늘날 직면한 것으로 구세력 등의 교란으로 말미암아 조성된 수련형식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수련과정 중에서 오직 당신이 잘 수련되었다면 그 면은 넘어가며 격리된다. 잘 수련되지 않은 당신의 일체는 여전히 반영되어 나올 것이고, 사람 마음 역시 반영되어 나올 것이며, 좋지 못한 요소 역시 반영되어 나올 것이다.”[2]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기왕 오늘 내가 진일보로 수련형식, 수련상태를 여러분에게 똑똑히 말해주었으니, 그럼 수련생 사이에 서로 협력하는 데 있어, 당신들은 더는 다른 사람을 경계하는 다른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박수) 서로 책망하며 서로 사람의 마음으로 배척하는 모든 각종 상태는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이는 모두 수련형식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여 생긴 새로운 집착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 그 때문에 수련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새로운 집착이 생겨서는 안 된다. 이 집착 자체 역시 당신이 수련하고 전진(前進)하는 데 있어 거대한 장애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도 제거해야 한다.”[2]

사부님의 설법에서 나는 수련생에게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은 수련생이 잘 수련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정상이고 수련상태의 표현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나는 수련생이 반영해 낸 정상적인 수련상태를 집착하고 자기를 닦지 않으면서 오히려 수련생이 법에 있지 않다고 말했고 장기간 이런 인식을 고집했다. 사실 내가 이미 법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대법제자의 수련형식을 이해하지 못해 생긴 새로운 집착이 아닌가? 한 수련인으로서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보면 우선 자기를 찾은 후 호의적으로 상대방에게 부족한 점을 지적하는 것이 대법 수련인이 표현해야 할 수련상태이다. 수련은 자기를 수련하는 것인데 기어이 다른 사람을 수련시키려 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나는 호의적으로 일깨워주면 된다. 이러면 새로운 집착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사부님께서 대법제자에게 안배한 이런 수련형식과 표현해낸 수련상태를 진정하게 이해하지 못해, 수련생의 부족한 점이 나타나기만 하면 즉시 수련생의 수련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눈을 수련생에게 두었다. 이때 당신이 얼마나 상냥하게 상대방에게 지적하든 상대방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신이 전혀 법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때 나를 찾은 다음 상대방이 변화되길 집착하지 않고 상대방과 교류했는데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나의 사상은 불편했다. 속으로 ‘그만두자. 강제로 다른 사람에게 수련하라고 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스스로 법에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원인을 찾지 않았다.

며칠 전 밍후이 법회 중의 밍후이 수련생의 깨끗하고 정확하며 착실하고 겸허하게 자신을 수련한 교류문장을 읽고 계발을 받았다. 내가 수련생에게 부족한 점을 지적해줄 때 표면상에서는 수련생을 위하고 평온한 것 같지만 배후에 나의 목적과 표준이 숨어있었다. 사(私)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선의’로 다른 사람의 부족한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니다. 나의 소위 ‘선의’로 수련생을 돕는 것은 나의 기점에서 나의 표준, 나의 소원으로 지적했다. 한 마디로 사념이다. 이것은 진정하게 선의로 돕는 것이 아니다. 대법이 요구한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하고 아무런 자기 목적이 없는 진정한 선과 거리가 너무 멀다. 우리가 어떤 때 소위 노파심에서 거듭 충고하며 수련생을 돕지만, 수련생은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우리가 세인에게 진상을 알리는데 그들은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많은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전에 가족(수련생)이 늘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나는 수련을 괜찮게 하여 가족의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후에 점점 옳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수련하고 수련했는데 여전히 좋은 사람이면 수련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지금 나는 내가 왜 한동안 수련했지만, 내면이 전혀 변화되지 않았는지를 인식했다. 한동안 나는 표면적으로는 대법의 요구대로 했지만, 내면에 많은 사람마음이 숨어있었다. 예를 들면 모순에 부딪혔을 때 내가 안으로 찾는 목적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모순이 나를 괴롭게 했기에 나는 애써 모순 속의 그런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지 무조건 자기를 찾고 닦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련이 아니다. 수련이라는 이런 초상적인 이치로 속인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나는 이전에 사부님의 ‘논어’를 여러 번 배웠다. “세인이 그에 부합할 수 있으면 진정 좋은 사람이며 동시에 선보(善報)와 수복(福壽)이 따를 것이다. 수련인으로서 그에 동화하면 당신은 바로 득도자(得道者)-신(神)이다.”[3] 나는 줄곧 무엇이 ‘부합’이고 무엇이 ‘동화’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인식한 것은 표면적으로 대법 표준에 따라 ‘하고’ 내심에 사람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은 대법에 동화된 것이 아니다. 동화된 그때 당신의 언행이 보여준 것이 바로 당신이 동화된 그 한 층차의 법이며 당신 주위의 모든 바르지 않은 것을 바꿀 수 있다.

션윈 배우가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아도 관중은 왜 진상과 대법의 아름다움을 아는가? 바로 그들이 순정하고 선량한 마음으로 법을 실증하려는 진정한 소원이 있어 법이 그들의 매 공연 동작을 통해 펼쳐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 중국 대법제자가 생각났다. ‘장쩌민 고소’ 후 우리 매 수련생이 거주하는 주위의 세인은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인 것을 거의 다 알게 됐다. 매일 우리의 일언일행, 일거일동이 이런 세인의 눈에 우리의 수련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진상을 알리는 것이다. 우리가 션윈 배우처럼 우리의 환경을 공연 무대로 여기고 시시각각 엄격하게 대법으로 자기를 요구하고 시시각각 대법에 동화하면 우리가 보여준 모든 것이 대법의 위력인 것이다.

개인의 현 층차의 약간의 인식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7-미국수도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논어’

 

원문발표: 2019년 6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6/24/3886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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