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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속에서 안으로 자신의 집착을 찾아내다

글/ 허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얼마 전 모 진상항목을 할 때 자료선별에 관해 수련생은 저에게 다른 아이디어를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련자의 기점에서 문제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저의 기점을 수호하는 각도에서 제가 정확하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는 근거들을 꺼냈습니다. 각자 자신을 고집하는 과정에서 제 집착심이 폭로됐습니다. 이후에 법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니 자신을 실증하려는 완고한 집착심을 차츰 보아냈기에 오늘 그것을 분석하고 여러분과 교류하려 합니다.

일이 발생한 후 제 첫 번째 반응은 즉시 선별한 자료를 검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검사한 후 자료선별에 문제가 없었고 게다가 근거도 충분했기에 수련생에게 자료 선별에 문제가 없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때 자신을 고집하는 마음이 남몰래, 그것도 그럴듯하게 표현되어 나왔습니다. 수련생은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고 이 일도 잠시 내려놓게 되어 제 마음이 더는 부풀어 오르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련생들과 함께 교류할 때 다른 수련생이 또 이 일을 꺼냈습니다. 그럴듯한 표면적인 근거가 있었기에 저는 여전히 제 생각을 고집했고, 각자 자신을 고집하는 가운데서 심지어 사부님의 법을 꺼내 자신을 위한 근거를 찾았으니 이미 대법제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견지하고 실증하는 마음은 부딪히는 가운데서 충분히 부풀어 올랐습니다.

1. 처음 안으로 찾다

일이 지나간 후 마음을 고요히 하고 자신을 찾아보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법을 실증했는가 아니면 자신을 실증했는가?’ 답안은 분명히 후자였습니다. 수련생과 표면의 잘잘못을 따질 때 사실 자신을 실증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지금부터 시작해서 또 이러해야 하는데, 당신이 옳든 그르든, 이 문제는 한 수련인에 대해 말한다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논쟁하고 논쟁하고 하지 말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강조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줄곧 자신이 옳다고 강조하는데, 당신이 옳았고 당신이 잘못이 없다 한들, 또 어떻단 말인가? 법에서 제고했는가? 사람의 마음으로 옳고 그름을 강조하는, 이 자체가 바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속인의 이치로 당신 자신을 가늠하고 있고, 다른 사람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이 볼 때 세간에서 한 수련인의 옳고 그름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사람 마음의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며, 수련 중에서 당신이 어떻게 사람 마음의 집착을 제거하는가가 비로소 중요한 것이다.”[1] 사부님의 법은 표면의 잘잘못을 따지는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저를 단번에 일깨워주었고 문제점이 바로 보였습니다. 겉보기에 정말 제가 옳더라도 저는 이미 틀렸습니다. 그건 이 일에서 자신을 닦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이 발생한 후 대법에 비추어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의 표면적인 잘잘못을 따질 것이 아니라 마땅히 이 과정에서 자신을 닦고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살펴야 했습니다. 그 후 이 일을 통해 진정으로 안으로 찾아 자신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2. 다시 안으로 찾다

제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을 잘 닦고 싶은 강렬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법에 비추어 문답형식으로 이 일에서 나타난 생각과 마음가짐들을 차츰 정리했습니다. 자신에게 왜 수련생과 시비가 일어났냐고 묻자, 답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고집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것은 마땅히 견지해야 한다.” 얼마나 그럴듯한 구실입니까! 무엇이 배후에서 ‘자신이 옳다는 것을 고집하는’ 생각을 떠받쳐 주고 있을까요? 저는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이 시종일관 강렬한 작용을 일으켰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럼 왜 기어이 자신을 실증하려 했을까요? 결국 명(名)을 추구하는 마음이 말썽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명과 체면을 중히 여기는 마음이었고, 명을 추구하는 강렬한 마음이 뒤에서 작용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수련 중에서 ‘명·리·정(名利情)’ 가운데 가장 닦기 쉬운 것이 ‘명’이라 여겼고 스스로 명을 아주 담담하게 본다고 여기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제 수련 과정에서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지만 명과 체면을 중히 여기는 마음은 의외로 그토록 강렬하게 작용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3. 세 번째 안으로 찾다

사실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은 진작 인식했고, 모순이 발생한 후에야 늘 이 집착심을 인식했습니다. 흔히 이 마음 때문에 모순이 발생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늘 닦아버리려 생각했습니다. 법에서 제고한 후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을 유난히 주의해 닦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담담해지고 내려놓게 됐지만 부주의하거나 느슨해질 때면 다시 부풀어 올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한 번도 이 마음 뒤에 명을 구하는 마음, 체면을 중히 여기는 마음이 말썽을 피운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에 단지 표면으로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을 버리려 했습니다. 그래서 표면만 치료하고 본질은 치료하지 못했기에 종종 이런 집착들이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을 끄집어내 제 정념과 마음가짐을 교란했습니다. 정말 이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오늘 끝내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의 진정한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되었고, 폭로해 아무런 숨김도 없이 그것이 생존할 수 있는 일체 환경을 폭로하려고 합니다.

그다음 ‘자신을 실증하는’ 것과 ‘명을 구하는 마음’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려운 것은 구세력의 사악이 만들어 놓은 층층의 연막탄에 빠진 것으로 그것은 당신이 일의 표면에 빠져 진정한 원인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건 당신이 보아내면 그것이 숨을 수가 없고 해체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일이 발생한 후 며칠 동안 고통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려 할 때 사악은 심하게 교란했고 줄곧 제 머리에 제가 옳다는 생각을 주입하여 교란을 받았습니다. 반복해 사부님께 빌면서 정념을 강화했고 ‘진심으로 착실하게 자신을 닦으려는’ 생각을 확고히 하자 사부님께서는 제가 반복해 교란을 받는 근본원인을 깨우쳐주셨습니다.

동시에 수련생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수련생이 제기한 관점도 맞고 저의 관점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아냈습니다. 모두 원칙적인 문제가 없었기에 시비가 붙을 필요가 없었지만 수련생이 자신을 고집하는 강렬한 자아의 표현과 마치 자신의 관점이 진리라는 식의 오만한 표현을 보고 뭔가 마음이 불편했고 평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금에야 단번에 수련생이 자아를 고집하고 잘난체하는 표현이 바로 제 예전의 표현이고, 평소 저의 진실한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불편하다고 여긴 것은 제 공간마당에도 이런 물질이 있기에 그것이 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수련생은 표현은 저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수련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수련생에게 안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건 아주 좋은 일이 아닙니까?

이걸 깨닫자 수련생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단번에 사라졌고 수련생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에 가득 찼습니다. 또한 심혈을 기울여 배치해주신 사존에 대한 감사로 가슴이 벅찼고, 수련 승화 후의 개운함, 기쁨, 희열, 아름다움이 공간장에 꽉 찼습니다.

4. 네 번째 안으로 찾다

명을 추구하는 마음과 체면을 중히 여기는 마음이 말썽을 부렸다는 것을 깨달은 후 얼마 뒤 수련생 문장에서 마음이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질투심의 표현이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때서야 단번에 수련생이 저에게 다른 의견을 제기할 때 저 역시 마음이 평형을 잡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혹은 수련생이 제기한 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대로 따라 하려면 뭔가 마음이 평형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것이 바로 질투심의 표현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일부러 사부님의 ‘전법륜’에서 ‘질투심’에 관한 소절을 읽어보았습니다. ‘질투심’ 이 소절에서 사부님께서는 ‘마음이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질투심의 표현이라고 총 일곱 번 언급하셨습니다. 알고 보니 자신을 실증하고 명을 구하는 마음 배후에 진정으로 작용을 일으킨 것이 바로 질투심이었고 정말 깊이 숨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이 질투심을 닦아버리지 못했기에 보기에는 닦아버린 명을 구하는 마음과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이 아주 취약하게 변해 버렸습니다. 평소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일이나 모순에 부딪혔을 때 깊이 숨어있던 그 질투심을 건드리기만 하면 이런 집착들은 질투심의 이끌림 하에 부풀어 오르고 심지어 제방이 무너진 것처럼 닦아버린 마음들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진정으로 질투심의 해로움을 느꼈을 때 저는 자신의 일사일념에 질투심의 요소가 있는지 새롭게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철저히 뿌리째 제거하려 했습니다. “집착을 내려놓으면 가벼워진 배 빠를 것이요”[3]의 아름다움과 뛰어남을 깨닫게 해주신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시 이 일을 되돌아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옳고 내가 틀리고는 모두 중요하지 않고 관건은 제가 이 일에서 그걸 수련으로 여기지 않고 과정에서 자신을 닦지 않았으며 표면의 잘잘못만 따졌다는 것입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들을 가장 빠르게 제고되게 하는 방법은, 바로 당신들 상호 간의 모순 속에서, 당신들의 약점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일단 모순에 부딪히기만 하면, 오히려 그것을 밀어내고 다른 사람의 결점을 지적하며 자신을 보지 않는데, 그러면 어찌 닦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당신들이 제고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므로 당신들의 관념은 반드시 바뀌어야 할 것이다.”[4]

모순이 나타나고 교란이 발생한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운 것은 법에서 수련하고 깨닫지 않으며 자신의 집착과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 제때에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방임하거나 표면에 머물러 닦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지 않고 본질적인 것을 개변하지 않으면 어찌 수련해 승화할 수 있겠습니까?

현 단계의 일부 인식으로 법에 있지 않은 부분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10-맨해튼 설법’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 2-심자명(心自明)’
[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싱가포르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6월 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6/9/3884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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