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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집 한 채, 유서 두 개

글/ 중국 대법제자 유란(悠然)

[밍후이왕] 우리 시아버지는 2018년 6월 말에 세상을 떠나셨고 향년 90세이셨다. 살아있는 시어머니도 이미 89세가 됐다. 시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직접 유서를 작성했고 고향에 있는 그의 집을 누구에게 주는가에 관해 쓰셨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유서는 아주 특별했다. 시아버지는 잇따라 2개의 유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유서 2개는 비록 모두 집을 이후에 누구에게 주는가에 관해 썼지만,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첫 번째 유서에서는 고향에 있는 집을 두 딸에게 남겨준다고 했지만 두 번째 유서에서는 고향 집을 막내아들 즉 나의 남편에게 처리권을 준다고 했다.

시아버지는 비록 90세 고령이지만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정신이 없었던 적이 없었고 명절 때 친척들이 모일 때마다 그는 강연하듯 몇 마디씩 했다. 노망한 적이 없던 시아버지는 왜 2개의 다른 유서를 남겼을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1. 남편과의 인연

나는 남편과 대학 때 만났고 남편은 나보다 2년 선배다. 그는 날 따라다녔던 많은 남성 중 한 명이다. 다른 사람과 비하면 남편은 각 방면에서 조건이 출중한 편이 아닌데 도대체 왜 그를 좋아하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른다. 날 따르는 한 대학 동창이 편지에서 직접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소똥에 꽂혔다.’라고 했다. 남편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약간의 점수 차이로 원하는 대학원에 떨어지자 한순간 짧은 생각에 사로잡혀 빈번하게 학교를 떠났고 한동안 정신이 흐리멍덩하기도 했다. 우리 둘의 연애 관계에 대해 우리 집에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아버지가 특히 심했다. 아버지는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아버지의 말로 말하자면 “어찌 남자가 속이 이렇게 좁아 내 딸을 불구덩이 속으로 미는가.”라는 것이다.

아버지보다 12살 많은 시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반대하는 것을 알고 아들이 정신적 타격을 받고 무너질까 봐 걱정해서 할 수 없이 몸을 낮추고 직접 사정하러 왔다. 시아버지가 왔을 때 아버지는 일어나 웃으며 반겨주지도 않았고 똑바로 보지도 않았다. 시종 두 손으로 팔짱 끼고 다리를 꼬며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소파 변두리에 걸쳐 앉아 줄곧 웃으며 좋은 말이란 좋은 말은 다 했다. 장면은 아주 어색했다.

졸업하기 전 남편의 표현에 대해 사실 나도 이해되지 않아 속이 답답했다. 그런데 왜 그와 함께 있겠다고 고수했는지 자신도 잘 몰랐다. 착한 내 마음이 그를 떠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련한 후에야 이것이 바로 인연이고 하늘에서 정한 인연은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누구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됐다. 나의 고집은 아버지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한숨을 내쉬며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느냐?”라고 하여 나는 “손가락을 빨아도 그를 따라갈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아버지는 할 수 없이 우리의 연애를 동의했고 시댁에서는 기뻐했고 양가 부모도 서로 만났다.

2. 시아버지와 원한을 맺다

졸업한 후 우리는 잇따라 고향을 떠나 같은 도시에 직장을 잡았으나 직장 사이의 거리가 비교적 멀었다. 우리 생활의 편리를 위해 아버지는 주동적으로 우리의 결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후 나는 남편과 혼인신고를 했다.

아버지는 우리 결혼에 관한 일로 시아버지를 집으로 불렀는데 시아버지는 게이트볼 스틱을 들고 왔다. 아버지의 생각을 들은 후 시아버지는 “혼인신고를 했으면 결혼한 것과 마찬가지에요.”라고 했다. 시아버지의 어이없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해야 적당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아버지는 글을 잘 쓴다고 이름난 사람이며 말이 막힌 적이 없다. 아버지는 한참 침묵했다가 “그럼 이렇게 하죠, 사돈댁에서 결혼식을 올리려고 하지 않으면 차로 아이를 데려가요. 저희 친척들은 우리가 알아서 식사도 대접을 하겠으니 상관하지 말고 사돈께서는 문 앞에서 폭죽을 터뜨리고 아이보고 친척들 앞에서 정식으로 아버님, 어머님을 부르라고 해요.”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안 돼요. 너무 번거로워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이때 이미 아주 화가 났지만 참고 그 자리에서 폭발하지 않았다. 계속 한참 침묵한 후 또 “그럼 저희가 차를 보낼 테니 사돈댁에서는 폭죽만 터뜨려요.”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또 “안 돼요. 사돈댁에서 그렇게 상을 잘 차리면 우리 집과 너무 비교돼요……. 안됩니다.”라고 했다.

이때 아버지는 시아버지에게 속았고 굴욕을 당했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우리 결혼을 동의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 아버지는 원래 유일한 딸을 시집보낼 때 멋있게 시집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척들마저 시집을 보낼 때 공주처럼 시집을 보낼 것으로 생각했다. 이때는 후회하기에 너무 늦었다. 나와 남편은 이미 혼인신고를 했고 이대로 갈라진다면 이혼과 마찬가지라 아버지는 딸의 명성이 이렇게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사돈과 여기에서 시간을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게이트볼을 치러가야 해요.” 이것은 시아버지가 우리 집을 떠날 때 아버지에게 남겨준 한마디다. 이 한마디 때문에 1999년 내가 파룬따파를 수련할 때까지 아버지와 시아버지는 10년 가까이 삐져있었다. 시아버지의 “혼인신고를 했으면 결혼한 것과 같다”라는 말에 나와 남편은 결혼기념일이 없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대법을 수련하기 전에 나는 남편과 10년 동안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며 늘 싸웠다.

우리가 외지에서 출근하기 때문에 시아버지는 우리가 그들 곁에서 효도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나와 남편 앞에서 직접 “잘 나갈수록 더욱 쓸모없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결혼할 때 시부모는 아직 단층집에서 살았는데 후에 고향에 잇따라 층집을 짓자 그들도 층집을 샀다. 층집으로 이사한 후 그는 단층집을 팔았는데 집값을 직접 큰아주버님께 줬다. 큰아주버님의 딸은 시부모님이 직접 키웠다. 태어나서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데리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움직일 수 없게 되면 누가 날 돌보지 않아도 손녀는 날 돌봐야 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 집에 아이가 태어난 후 줄곧 친정집에서 봐줬고 키워줬다. 도움이 절박할 때 70세 넘은 둘째 이모도 우리 집의 도우미가 됐었다. 돌 전에 남편이 시부모를 우리 집으로 모셔온 적이 있고 아이를 좀 돌봐주길 바랐다. 그때 남편이 아주 바쁘고 늘 집에 없었으며 나도 당시 승진자격 시험을 보느라 바빴고 아이를 돌볼 수 없어 할 수 없이 남편에게 염치불구하고 시부모에게 입을 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부모가 온 지 며칠 안 됐는데 어느 날 아침에 운동하러 나간 시아버지가 남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했을 때 고향 주소를 말하자 그 사람이 “아, 외지인이에요.”라고 했다. 이 한마디 때문에 시아버지는 하루도 더 있지 않고 기차표를 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말로 말하자면 고향에서는 노간부인데 여기에서는 남들이 깔본다는 것이다. 이후로 어린이집에 갈 때까지 우리는 이 집 하루, 저 집 하루 아이를 보냈다. 당시 우리의 어려움은 시아버지의 체면과 존엄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시아버지가 층집을 살 때 우리에게 1만 위안(한화 약 170만 원)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우리는 내놓을 수 없었다. 그해 우리도 집을 바꿨기 때문이다. 직장의 직급에 따라 복지주택을 나눠줬는데 40여㎡에서 80여㎡로 바꿨고 전액이 6만 위안(약 1020만 원)을 넘었다. 당시 우리도 이 돈이 없어 동창에게 4만 위안(약 680만 원)을 빌렸다. 시아버지가 집을 살 때 시아버지는 여러 번 전화했고 매번 미친 듯이 질책했다. 시아버지의 인지상정(人之常情)에 어긋나는 행동에 화가 치밀었다.

3. 시아버지의 첫 번째 유서

시부모는 곁에서 효도할 수 있는 사람은 큰아주버님이라고 생각하고 전력으로 큰아주버님을 도와줬다. 큰아주버님의 집은 시부모가 지어준 것이고 결혼식도 그들이 준비해준 것이고 손녀도 그들이 키워줬다. 그러나 우리 결혼은 혼인신고서 한 장밖에 없었고 우리 집은 직장에서 나눠준 복지주택이고 우리 아이는 우리가 키웠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 큰아주버님이 효도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길흉화복을 예측하기 어렵다. 큰아주버님은 두 번째 입원한 후 반신불수가 되어 시부모를 돌볼 수 없게 됐다.

남편에게 누나 둘이 있는데 양가의 아이도 모두 시부모가 돌봐주고 키워줬기 때문에 줄곧 딸에게도 그들의 공로가 있다고 생각했다. 큰아주버님이 반신불수가 된 후 시부모는 곁에서 효도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딸일 것으로 생각했다. 시아버지가 집을 살 때 우리는 돈을 준 적이 없지만 누나 둘은 당시 집값 일부분을 빌려준 적이 있어서 시아버지는 첫 번째 유서를 남길 때 집을 두 딸에게 남겨준다고 했다. 이때 집값은 이미 몇 년 전 몇만 위안이 아니고 많이 올랐다. 이 유서를 작성할 때 나는 이미 수련을 시작했기 때문에 집은 시부모의 것이니 누구에게 주고 싶으면 그에게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유서는 큰아주버님을 화나게 했고 남편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4. 시아버지와 원한을 풀다

1999년 비바람을 무릅쓰고 수련에 들어섰다. 파룬따파(法輪大法)수련 중 인생의 참뜻을 알게 됐고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했으며 다시는 시부모를 미워하지 않았고 그들의 각도에 서서 그들을 생각하도록 노력했다.

나는 끊임없이 시부모에게 생활용품을 사줬다. 몇 위안으로부터 몇천 위안의 물건을 사줬다. 시부모의 생활에 필요하다면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시부모는 나의 노력에 대해 좋은 말을 해준 적이 없고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매번 물건을 집안으로 들일 때 이런 말들만 들었다. “이런 물건들은 쓸모없다.” “이 물건은 인체에 해롭다.” “이 물건은 돈을 괜히 썼다.” 나의 노력에 대해 시부모가 좀 의심하는 것 같았다. 왜 그들을 더는 미워하지 않는지를 몰랐고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법이 한 사람을 안에서부터 밖으로 천지개벽의 변화를 일으켜 줄지 정말로 몰랐기 때문이다.

다시는 남편과 지나간 사소한 일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 일들은 정말로 별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남편과의 관계는 갈수록 좋아졌다. 무슨 일로 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거의 없었고 설령 의견이 같지 않을 때가 있어도 우리는 적합한 방법을 찾아 해결했고 이전처럼 당신이 틀렸다 내가 옳다는 것을 따지지 않았다. 대법은 내 마음속의 원한을 풀어줬고 행복한 큰 집과 작은 집을 줬다.

큰아주버님은 연속 3번 입원했는데 매번 우리가 돈을 냈을 뿐만 아니라 시간도 내줬다. 큰아주버님의 집이 소형 마트를 해서, 문을 닫지 않기 위해 형님은 병원에 와서 큰아주버님을 돌본 적이 없다. 언제나 남편이 직장의 모든 일을 내려놓고 매일 아침 일어나,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매일 저녁에 아이를 마중하는 일을 전부 내게 넘겨주고, 병원의 일을 모두 도맡아 했다. 비록 매일 아이를 보내고 데려오는 것은 아주 힘들었지만,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다. 수련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큰아버지의 어려움을 돕고 싶었고 또한 남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시댁 모든 친척과 관계가 아주 좋아졌고 윗사람 눈에 나는 현모양처였고 동년배 눈에는 사리에 밝고 아랫사람 눈에는 그들과 세대차가 없었다. 남편의 생질녀는 “외숙모를 보면 무서워요. 결혼한 후 저도 외숙모처럼 시댁에서 이렇게 일을 해야 하나요?”라고 했다. 남편은 누가 나와 함께 있으면 밝게 변한다고 했다.

2016년 시아버지는 이미 88세, 시어머니는 87세의 고령이 됐다. 줄곧 건강이 좋았던 시아버지는 넘어지는 바람에 스스로 생활할 수 없게 됐다. 시어머니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벌써 시아버지가 돌보고 있었다. 이때 곁에서 효도하는 것은 급선무였다. 큰아주버님은 반신불수가 되어 노인을 돌볼 수 없고 큰시누이는 추간판 탈출증, 둘째 시누이는 간낭종 때문에 모두 가사도 할 수 없는 정황이라 시부모를 돌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어머니가 줄곧 사랑했던 손녀도 이미 먼 다른 도시에 정착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돌볼 수 없었다. 이때 우리는 그들의 유일한 선택이 됐다.

이런 선택은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들이 80세를 넘은 후 그들을 우리 곁으로 모셔오기로 했지만, 그들은 줄곧 거절했다. 심지어 시아버지는 화를 내며 “이 이야기를 꺼내지 마라,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라고 하기도 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고향 현지에서 가장 좋은 노인위탁센터에 보냈다. 그들은 처음에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청소해주는 사람도 있어 좋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길어지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양로원에 몇십 명의 노인이 있어서 그들을 위해 전문적으로 채소요리를 할 수 없어 먹고 싶은 것은 먹지 못하고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먹어야 했고, 간병인도 가족처럼 그들을 챙겨줄 수 없고 가족이 오면 양로원에서는 노인에 대해 이것저것 돌보는 척하지만, 가족이 가면 노인을 한쪽에 내버려 뒀다. 그들은 남에게 얹혀사는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지난 후 남편은 또 그들을 우리 곁에 와서 살라고 요청했다. 이번에 시아버지는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조심스레 “아이도 돌봐주지 않았는데.”라고 했다. 그들 마음의 매듭을 안 후 장난하며 시아버지에게 “아버님, 그 일 때문이에요. 마음 놓으세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가 없어요. 그건 아버지 어머니의 일이에요. 손자가 커서 아이가 생기면 저도 봐주지 않을 거예요.”라고 했다. 내 말을 듣자 시아버지는 웃었다. 이후로 그들은 우리 집에서 살았다.

그들이 우리 집에 온 후 비록 가정부를 고용했어도 신경 쓸 일은 여전히 많아 먼 길을 떠날 수 없었다. 두 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해결해줄 수 없을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활습관과 신체 정황에 따라 매일 채소와 약을 준비했다. 시아버지에게 당뇨병이 있어 늘 당뇨병의 지표를 체크해야 했다. 시어머니는 노망하기 시작했다. 매일 시어머니가 끊임없이 큰 소리로 욕하고 질책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어떤 때 남편조차 참지 못한다. 가정부는 “아내분은 정말 대단해요.”라고 했다. 남편은 나에 대해 미안해했다. 그들이 늙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소연하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노망하면 늙은 아이로 봤다.

시아버지가 온 후 몇 번 입원했는데 모두 남편이 병원에서 간호했다. 남편이 밤샐 수 없어 저녁이 되기만 하면 병원에서 간호하는 것이 내 몫이 됐다. 시아버지의 나이가 많아 링거를 맞을 때 천천히 맞아야 하기에 늘 밤새도록 맞아야 했다. 눈을 붙일 새도 없이 대소변을 보면 바로바로 치워줘야 했다. 언제나 견디지 못할 정도로 피곤했다. 첫 번째 시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경험이 없어 고무장갑을 가지고 가지 않아 시아버지가 대변을 볼 때 맨손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온종일 손에 똥냄새가 났고 아무리 씻어도 없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에 간호사에게 소독제를 빌려 씻어서야 냄새가 없어졌다. 병원에서 의사든 간호사든 기타 환자와 가족이든 모두 내가 시아버지의 딸인 줄 안다.

가정부는 매달 며칠 휴식하는 날이 있고 명절 때도 쉰다. 나와 남편이 출근하는데 가정부가 휴식하는 날이면 오히려 우리가 일하는 날이 된다. 시부모가 온 후 친정집에서 하루 편히 있어 본 적이 없다. 2017년 설 명절 때 초하루부터 초닷샛날까지 시부모 곁에 있었다. 초엿샛날 둘째 시누이가 시부모를 돌보는 짬에 그날 밤에 남편과 함께 고향 친정집에 갔다. 우리가 집에 도착했을 때 밤 11시가 넘었다. 이튿날 오후 4시에 친정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남동생은 우리가 총망히 왔다 가는 것을 보고 장난으로 “누나, 언제 돌아왔어요?”라고 했다. 동생이 장난하는 것을 알고 웃으며 “어제야. 정말 어제야.”라고 했다. 어제는 어제지만 한 시간일 뿐이다.

2017년 6월 시아버지는 뇌졸중에 걸렸다. 전에는 부축하면 혼자서 걸을 수 있었는데 침대에 누운 후부터 대소변은 전부 침대에서 해결했다. 가정부가 휴식하는 시간에는 나는 간병인처럼 소변을 받아내고 대변을 치우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낮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저녁이 되면 시어머니의 소변을 받아내고 시아버지에게 기저귀를 갈아주기 위해 몇 번이나 일어나야 하는지 모른다. 저녁에 대변을 보면 변이 몸에 끈적이게 붙어있어, 기저귀, 오줌막이를 모두 갈아야 한다. 어떤 때 이불에 묻히면 이불도 갈아야 했고 시아버지의 몸도 깨끗이 닦아줘야 했다. 다 치우려면 매번 30분 넘게 걸렸다.

2018년 설날에 가정부도 휴가 가고 남편도 일이 있어 먼 길을 떠났다. 또 혼자서 해야 했다. 그 며칠은 마침 ‘감기’소업 하느라 콧물 눈물이 계속 흘렀다. 잠을 푹 자고 싶었다. 막 자려고 하면 시어머니가 부르지 않으면 시아버지의 몸을 돌리고 기저귀를 갈아야 할 시간이 됐다. 당시 정말로 극한에 이른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어려워도 시부모의 침대 곁으로 가면 꼭 따뜻한 얼굴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정부가 돌아왔을 때 시아버지는 힘든 나를 보더니 이불 아래로 손을 내밀고 왼쪽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장난으로 시아버지에게 “아버님,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노력했어요.”라고 했다. 시아버지는 아이처럼 웃었다.

5. 시아버지가 대법과 인연을 맺었다

시아버지는 나의 수련에 대해 줄곧 의견이 있었다. 고향에 있을 때 이미 나의 변화를 봤지만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고 파룬궁은 정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비록 여러 번 진상을 알렸고 사실에 할 말이 없을 때도 있지만 여전히 오랫동안 형성된 사당 문화로 파룬따파가 널리 전해지는 것을 가늠했다.

시부모가 우리 곁으로 온 후 나와 친한 파룬궁수련생은 번갈아 가며 그들을 보러 왔고 모든 파룬궁수련생은 자신이 대법 중 받은 혜택을 시아버지께 알려줬다. 점차 시아버지의 관념은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몇 달 후에 시아버지는 주동적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읽기 시작했고 대법을 모욕한 언행들을 모두 내게 알려주기도 했다. 내가 도와서 기록했고 시아버지는 서명했을 뿐만 아니라 밍후이왕에 보내 정중성명하고 잘못을 고치겠다고 했다.

시아버지는 침대에 들어 누운 후에도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읽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 날 시아버지께 “파룬따파 좋아요 안 좋아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큰 소리로 “좋다!”라고 했다. 그는 진심으로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앓아누웠을 때 시아버지의 당뇨병은 이미 아주 심각했지만, 몸에 아무런 어혈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고 혈압과 심장박동 등 지표도 모두 정상이었다. 둘째 시누이가 시아버지에게 몸이 아프지 않은지 물어봤었는데 시아버지는 아프지 않다고 했다. 시아버지는 다만 오른쪽 몸을 혼자서 움직일 수 없을 뿐이었다. 시아버지가 성심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읽어 대법이 대부분 고통을 대신 없애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아버지가 화를 내며 밥을 드시려 하지 않을 때 남편은 설득시킬 수 없었다. 그러면 대법 중 수련해낸 선으로 시아버지를 권유하면 시아버지는 달갑게 밥을 드신다. 침대에 앓아누운 기간에 무슨 일이 있든 날 찾았고 아들이 앞에 있어도 날 불렀다. 간병인이 “어르신 무슨 일이에요, 아들에게 말해요.”라고 하면 시아버지는 다급하게 날 불렀고 날 찾았다. 이럴 때마다 침대 옆에 다가가 웃으며 “아버님, 무슨 일이에요? 말씀하세요.”라고 했다. 사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말해주는 것을 듣기 좋아했다. 대법 중 이야기를 들려줬고 사람에게 업이 있으면 갚아야 하고 고생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이생에 고생하면 다음 생에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알려줬다. 시아버지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해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것도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6. 시아버지의 두 번째 유서

2018년 6월 말, 시아버지는 혼수상태에서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을 나는 직접 봤다. 시아버지의 얼굴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었고 숨을 가쁘게 쉬지도 않았다. 마치 누가 그를 데리고 한 문에서 나와 또 조용히 다른 문으로 완전히 달갑게 여기며 따라 들어간 것 같았다.

시아버지의 유해를 화장한 후 화장터 직원이 유골을 거둘 때 ‘이 분은 발이 아주 아팠겠어요, 뼈가 다 까매요.’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상 시아버지는 발이 아픈 적이 없었다. 우리가 매일 발을 문지르면서 감각이 있는가를 시험해 봤지만, 발이 아프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곁에 가족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병상에 드러누운 후 손녀가 보러 왔었다. 오래 보지 못한 손녀를 만나면 시아버지가 격동하고 눈물을 흘릴까 봐 걱정했는데 손녀가 병상 앞까지 걸어왔을 때 그의 표정은 아주 침착했다. 그가 못 알아보는 줄 알고 “이 애는 누구예요?”라고 했더니 서슴없이 손녀의 이름을 말했다. 손녀도 할아버지의 반응이 좀 의외라고 여겼다. 후에 남편이 내게 말했다. “아버님은 격동하지 않을 거예요. 옛날 계획은 모두 터무니없는 것이고 결국엔 여전히 가장 신임하지 않는 며느리의 보살핌을 받았다는 것을 벌써 잘 알았기 때문이에요.”

장례를 치를 때 둘째 아주버님이 술자리에서 남편의 동료에게 “정말 좋은 며느리예요. 딸들도 따라가지 못해요. 딸이 해내지 못한 것을 며느리가 다 했어요. 이런 며느리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요.”라고 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남편은 내게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온 반년 후 두 번째 유서를 남겼고 증인은 아버지의 두 조카딸이라고 했다. 이 유서도 시아버지가 직접 쓰신 것이다. 내용은 고향에 있는 집의 처리권을 우리 남편에게 준다는 것이다. 남편의 두 사촌 여동생은 “큰아버지가 여기에 온 후 처음에 마음이 불안해 암암리 막내 제수씨가 진짜로 그들에게 잘 대하는지를 관찰했는데 후에 막내 제수씨가 진심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을 보고 큰아버지는 옛일에 대해 아주 후회한다고 했어요.”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유서를 꺼내지 않았고 남편의 형과 누나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부모의 집을 갖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시부모를 돌봐주고 무엇을 얻으려 하는 마음이 없었고 수련인이므로 시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응당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유서는 시아버지의 나와 남편에 대한 신임이기도 하고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시아버지는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여기까지 쓰고 무슨 말로 끝을 맺으면 좋을지 잘 모르겠지만 제일 하고 싶은 말은 잘 알고 있다. 즉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대법은 마음속에 10년간 쌓인 원한을 없애줬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얻은 동시에 진정한 행복을 얻게 했다.

 

원문발표: 2019년 5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5/12/3859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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