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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부함에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글/ 랴오닝 대법제자

[밍후이왕] 우선 한 가지 분명히 밝히는데, 파룬따파(法輪大法)제자로서 종래로 감히 가볍게 ‘법공부’와 ‘집착’을 한데 연결시키지 못했지만, 오늘은 용감하게 이 주제로 수련생들과 교류하여 긍정적인 작용을 일으켜 진정으로 법을 얻고 공동으로 정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인식하기에 법공부는 집착이 아니고 법공부 자체도 집착이 아니지만,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법공부하면 곧 집착이 되고, 법공부 형식 자체에 집착하는 것 역시 집착이다.

모두 알다시피 법공부는 사존께서 대법제자에게 반드시 잘해야 한다고 요구하신 ‘세 가지 일’ 중의 하나로,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하는 일이다. 이는 수련인이 원만득도하는 근본적인 보장이고, 대법제자에 대한 대법수련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며, 진정한 수련인이 반드시 구비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련 소양이다. 그 중요성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며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사부님께서 매 회 설법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대법제자는 반드시 책을 많이 보고 법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늘 자비롭게 신신당부하셨다.

그러나 장기간 나는 수련생 사이에서 오히려 일부 현상을 발견했다. 적잖은 수련생이 많거나 혹은 적게 이 방면의 방식과 사상이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는 어느 수련생을 지적하거나 누구와 옳고 그름을 다투려는 것이 아니며, 단지 이 현상에 대해 수련생과 교류를 진행해 공동으로 정진하고 제고하려는 것이다.

이런 수련생이 한 명 있다. 그녀의 집은 단체법공부 장소로,우리가 매번 그곳에 가서 단체법공부를 할 때면 그녀는 꼭 웃는 얼굴로 맞이하고 열정적으로 대했다. 마음속에는 환희가 가득했고, 안에서 밖으로 새어나오는 기쁨이 정말 그녀의 미소에 줄곧 걸려 있었다. 그녀 자신 역시 법공부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으며, 특히 수련생들이 그녀의 집에 갈 때면 법공부를 하든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하든지 그녀는 종래로 귀찮아하지 않았다. 나는 단체법공부에 대한 이 수련생의 열정과 적극성에 정말로 줄곧 탄복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법공부를 시작하기만 하면 정신을 집중해 이 수련생의 정진함과 신사신법의 표현을 보고 사부님의 말씀을 잘 듣는 대법제자라고 여겼다.

그런데 사람을 난해하게 하는 점은, 이미 몇 년이 되었는데 이 수련생은 오히려 난이 겹겹이고 번거로움을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수련생은 수련하기 피곤하고 피곤해 때로는 매우 실의에 빠졌고, 수련할수록 곤혹스럽고, 예전의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것’처럼 정진하여 제고하는 감각이 없으며, 수련할수록 더욱 수련할 줄 모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일단 법공부를 시작하면 정신은 즉시 깨어나지만 책을 놓고 단체법공부 환경을 떠나기만 하면 또 그대로였고, 거의 속인 상태처럼 돌아왔다. 이런 상태는 이미 아주 오래갔고, 지금까지 그리 큰 변화나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법공부팀에서도 이 문제를 반복적으로 교류한 적이 있다. 그런데 관련 문제를 교류하기만 하면 아이고,이 수련생이 끊임없이 말을 하는데, 무엇이든 다 알고 있고 사부님의 법리도 다 아는 것처럼 보인다. 즉, “아, 방금 법공부할 때,사부님의 이 단락 설법은 바로 ‘저’를 점화하시는 거네요.”라고 한다. 그런데 구체적인 상황에 부딪히면 여전히 사람 마음이 범람하여 또 안 된다. 속인 중에서 수련하는 과정에서 독자적으로 어느 한 부분을 담당하지 못하고 의존심이 강하며, 모르는 사이에 주위 수련생이 대량의 시간과 정력으로 그녀를 도와야 하는 일이 생겼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법공부팀의 수련생들도 따라서 곤혹스러워져 이 마음 저 마음을 지적해 주었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일이나 번거로움이 나타나기만 하면 사람 마음, 집착이 한 무더기나 되었다. 이 수련생을 포함해 법공부팀 수련생들도 ‘안을 향해 찾아’본 적이 있지만 문제는 오히려 줄곧 존재했고 반복되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모두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 “구함이 없어야 스스로 얻는다(無求而自得)”[1]를 알고 있다. 오늘에서야 나는 좀 명백해진 것 같다. 이러한 수련생의 수련상태가 반복되는 까닭은 물론 다양한 원인이 있는데, 지금 나는 이것이 마치 법공부하는 ‘집착’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수련생은 왜 이렇게 단체 법공부의 형식에 정신을 쏟겠는가? 왜 이렇게 단체 법공부의 형식과 수련생의 도움에 의존하겠는가?

제일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수련생은 항상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법공부를 한다는 것인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공부하고 수련한다. 신체가 견디기 힘들고 어딘가 불편할 때, 서둘러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한다. 수련하면서 속인 중의 무슨 번거로움이 나타나면 이것은 구세력의 교란이니 서둘러 법공부 하고 안을 향해 찾거나, 나 한 사람으로는 역량이 한계가 있으니 서둘러 수련생을 찾아 단체 법공부, 단체 발정념을 하자고 한다. 그런데, 흔히 이런 것은 모두 개인이 해결하거나 해낼 수 있는 일들이다. 예를 들면, ‘아, 나는 사부님께서 관여하고 계시니 장래에 나는 분명 원만득도할 것이나 내 자녀들은 어찌하는가? 그들이 이렇게 큰 연분으로 우리 가정에 왔는데, 내가 가버리면 그들은 어떻게 하는가? 나는 그들에게 법공부를 시키고 따라서 수련을 하라고 해야겠다. 장래에 가더라도(원만을 향해 가다) 함께 가야하며 누구도 놓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구하는 것이다.

처음 이런 것을 듣고 볼 때는 역시 이치가 있고 잘못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방법의 배후에는 사람 마음이 너무 많고 정이 너무 깊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어른을 거역하지 못하고 형식상으로 책을 보고 법공부하는데, 도대체 마음에 들어가겠는가 안 들어가겠는가? 단지 억지로 따라서 ‘법을 염하고, 법을 읽을’ 뿐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아이에게 법공부에 저촉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반대하는 심리가 생기는데, 결과적으로 이것은 바라는 바와 정반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강제로 수련하게 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 당신이 아이에게 수련하는 환경과 조건을 제공해주고, 사람 마음과 이 정을 내려놓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되어감에 따라 기연이 닿으면 아이는 반드시 본심에서 우러나와 자연스럽게 대법수련으로 걸어 들어올 것이다. 이것은 물이 흐르는 곳에 도랑이 생기듯 조건이 성숙되면 마땅히 자연히 이루어질 일이다.

이어서 깊이 파내려 가보면, 법공부의 배후에는 사람 마음이 여전히 아주 많다.

어떤 수련생은 정법 형세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따라잡지 못해 원만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이것은 개인이 원만에‘집착’하는 표현이다.

동시에 또한 적지 않은 수련생은 법공부를 열성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법공부 형식 자체에 열성적이고 북적북적 대는 것을 꾀한다. 단체 법공부할 때 사람이 많으면 역량도 커 그참에 수련생을 찾아 생활 속의 일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움을 청할 수 있다. 속인 친지나 친구는 이런 사람의 정에 응답해줄 수 없어 수련생에게 도움을 청하면 곧 이 근심이 없어진다. 수련인이니까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명(名)을 구하지 않으며 보답을 바라지도 않으며 빚을 진다는 사상적인 부담이 없다. 여기에 아주 깊은 동수간의 정과 강한 의존심이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이 역시 참되고 완전하게 신사신법을 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속인 중에는 세상사가 난잡하고 자질구레한 일이 몸에 덕지덕지 붙어 어떤 수련생은 ‘세 가지 일’을 완전하게 하거나 잘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스스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을 꽉 틀어쥐는데,그것이 바로 시간을 꽉 잡고 법공부하는 것이다. 비록 정진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미 지나간 것으로 친다. 이것은 대강대강하는 마음이다. 이 외에도 집에서 법공부하면 안전하고 편하며 무슨 큰 문제나 번거로움이 없으나 나가서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여긴다! 이것은 안일심, 두려움이 아닌가? 무릇 이런 일은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일부 수련생이 법공부 해도 법을 얻지 못하고,법에서 제고하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이 법공부 형식 자체만 중시하고 심성의 제고는 홀시하면서 착실하게 자신을 수련해야 함을 인식하지 못하고,이 한 집착의 배후에 있는 각종 사람 마음을 닦아 없애는 것에 주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공부’ 이 한 가지 형식의 배후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 마음이 뒤섞여 있는데, 대법의 내포가 어찌 당신에게 드러날 수 있겠는가? 법리가 드러나지 않으면,당신이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깨달아’낼 수 있겠는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당신은 어떻게 법에서 승화하고 제고하겠는가? 당신이 법에서 승화, 제고하지 못하면, 속인의 번거로움이 끊임없는 중에 자신을 곤경에 빠뜨리고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어떤 수련생은 ‘아, 보귀한 ’전법륜‘을 받쳐 들고 법공부를 하기만 하면 어떤 사람 마음도 없어진다. 세속의 모든 혼란스러움이든 무엇이든 다 잊는다.’고 느낀다. 법공부팀에 와서 수련생과 만나 법공부만 하면 정신이 아주 맑게 깨어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감사함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존의 위대함이고,그것은 사존의 끝없는 법력과 위덕의 표현이며, 그것은 “불광이 널리 비치니,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도다(佛光普照,禮義圓明).”[2]와 같다. 대법제자로서 이것을 어찌 감히 자신이 수련한 것이 어떠어떠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우리가 속인 중에서 수련할 때 갑자기 난과 고험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당신이 대법책을 받쳐 들기를 기다렸다가 오는 것도 아니고, 수련생과 함께 있을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나타나 당신을 고험하거나 교란하는 것이 아니다. 수련은 결국 자신의 일인데, 어떻게 줄곧 대법에서 구하기만 하고, 줄곧 수련생에게 의지하겠는가? 지팡이를 손에서 놓기만 하면 곧 넘어지는데,그럼 어떻게 해내겠는가? 그것이 무슨 진정한 수련이고 착실한 수련인가?

법공부에 관해 사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러분 알다시피, 어떤 마음가짐으로 법을 보아야만 법리(法理)를 볼 수 있는가? 이는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다 알고 있다. 당신의 눈은 법을 보고 있지만 마음이 법에 있지 않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그럼 당신은 헛되게 본 것이 아닌가? 그럼 누구에게 보여준 것인가? 자신은 공부하지 않았다. 내가 여러분에게 반드시 당신 자신이 진정하게 공을 얻으라고 알려 주지 않았는가? 법 공부를 할 때, 마음이 법에 있지 않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법 공부를 시키는 것인가? 나무라는 게 아니라 이는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바, 이 상황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바쁘더라도 당신들이 법 공부를 할 때는 그 어떤 생각도 모두 내려놓고, 일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바로 법 공부만 하라. 아마 당신이 법 공부를 하는 중에 당신이 생각하는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을 것이다. 매 글자마다 배후에 모두 불도신(佛道神)이 있는데, 당신이 무엇을 해결하려고 하는지, 지금 무엇을 급하게 하려고 하는지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한 가지가 있다. 당신은 반드시 얻고자 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법 공부를 해야 한다. 여러분은 이미 이 문제를 알고 있다. 집착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으로 법을 보지 말아야 하며, 조용한 상태에서 보면 얻은 효과가 틀림없이 아주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법 공부를 할 때 여러분은 형식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반드시 마음을 내려놓고 보아야 하고 진정으로 배워야 하며, 사상이 다른 데에 가 있어서는 안 된다. 주의력이 분산되어서는 헛되게 배운 것과 같다. 달리 말하면,법 공부를 할 때 사상이 법에 있지 않는다면,이는 단지 형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법에 대해서 그리 공경하지 못한 것인데, 그렇다면 법이 드러내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 점에서 말하더라도 내가 생각하건대, 여러분은 반드시 마음을 내려놓고 법 공부를 해야 한다. 바쁜 상황에서도 법 공부를 할 때,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3]

파룬따파 진수제자로서 반드시 사부님의 말씀을 들어 책을 많이 보고 법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러나 단지 책을 보고 읽고 외우거나 베끼거나 혹은 단체로 좀 읽고 팀에서 교류하는 등등 이런 형식상의 것을 정진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신이 정법진도를 따라가는 것으로 치며, 이런 것을 완전히 수련 자체로 동일시하는 것은 바로 일부로써 전체를 평가하는 것이며, 이미 빗나간 것이다. 정법시기에 대법제자는 반드시 ‘세 가지 일’을 모두 해야 하고, 나란히 전진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정법수련에서 용맹정진하는 것이다.

법공부할 때, 우리는 정말로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도대체 왜 법공부를 하는지, 법공부의 목적이 무엇인지, 도대체 어떻게 법공부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법공부해서 법을 얻을 수 있는지와 관련되어 있고, 수련하여 원만할 수 있는지 여부의 관건 부분이다.

이는 개인의 층차에서 깨달은 것으로서, 법공부에 대한 집착의 배후, 수많은 사람 마음의 배후, 개인 원만에 대한 집착,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2-미국플로리다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5월 3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5/31/3879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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