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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후 안으로 찾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놀람’은 속인의 7정 ‘희(喜), 노(怒), 애(哀), 사(思), 비(悲), 공(恐), 경(驚)’ 중의 하나다. 나는 속인사회에서 갑작스럽게 명예와 이익상의 변고를 만났을 때 여러 번 놀랐다. 그때의 증상은 아랫배가 ‘솨’하며 온몸이 저린 느낌이었다. 나는 며칠 전 현지 협조인 교류회의 때 또 놀란 증상이 나타났다.

그날 우리 현지 협조인 8, 9명이 교류회의를 할 때 나는 개인 수련과 수련생의 현 상태를 말했다. 그러자 수련생 A가 갑자기 내 화제를 단칼에 끊었다. 내가 말한 것이 혼란스럽다며, 자기 얘기를 하다가 수련생 얘기를 하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수년간 없던 놀란 상태가 갑자기 또 나타났다. 수련생 B가 A의 말을 이어받아, 내가 본 것은 모두 가상이라고 했다. 당시 나는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수련생이 말을 마치자 나는 겉으로 겸허한 태도를 보이며 내가 잘못했으면 고치고 수련생 말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난감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후에 수련생 C가 발언하는데 A는 또 반대 의견을 냈다. A가 “수련하는 가운데 일사일념은 단계가 있어요.”라고 말하자 나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 말을 끊고 부정했다. 내 옆에 앉은 수련생 E가 나와 A가 논쟁하는 것을 보더니 바로 내게 화제를 바꾸라고 일깨워주었다.

회의 때 겉으로는 넘어갔지만 회의가 끝나자 정서가 침체되고 마음이 무거웠다. 마음에 돌덩이 하나를 눌러놓은 것처럼 답답했고 머릿속에서는 당시 정경을 돌이켜보고 있었다. 수련은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술은 더더욱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정서가 화장을 지운 후의 진실한 자기이다. 그 작은 일에 놀란단 말인가? 그러나 당시 내 상태는 바로 그랬다. 그때 나는 자기가 이렇게 수련을 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차 마음이 가라앉았고 나는 꼭 안으로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왜 놀랐을까? 도대체 깊이 숨은 무슨 집착을 건드린 것일까? 계속 반성하면서 수련생과 교류하며 도움을 청해서야 깨달았다. 내가 남보다 잘하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며 의심하지 않는 허영심, 그것이 갑자기 충격을 받고 놀란 것이다. 직장이나 현지에서 나는 가장 학력이 좋았다. 나는 국어교육에 몇십 년 종사했다. 당 문화에 잠겨서 교묘한 언어로 변명을 잘하고 억지 부리는 악습을 키워왔다. 학생에게는 교사의 말이 바로 진리라, 수년간 내게 변명하는 사람도 질의하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이것이 내 본업이라며 내가 주제를 벗어난 말을 하지 않았고 간결하고 세련되고 조리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또 현지에서 수련생들의 협조인 역할을 했다. 교류회나 법회가 우리 지역 및 현 단위, 성 단위로 수없이 열렸는데 나는 거기서 말하기 시작하면 늘 거침이 없었고 수년간 질의도 없었다. 잠재의식 속에서 차츰 안하무인하고 잘난 체 하는 허영심이 생겼다. 이렇게 부풀어 오르고 연약한 마음이 부딪혔으니 평온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는 현지 기술 문제를 책임져서 수련생이 각 방면에 어려움이 있으면 내가 가서 해결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늘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고 반대 의견을 듣기 어려웠다. 그래서 점점 부풀어 오른 자아가 더 커졌다.

자신에게 또 물어봤다. 수련생이 다 말하기도 전에 왜 갑자기 말을 끊었지? 막 체면이 손상된 것을 만회하려고 반격하려 한 것이 있지 않나? 이것이 원망하는 마음, 보복심이 아닌가? 얼마나 더러운 마음이 깊이 숨어있었던가! 여기까지 찾고 스스로 크게 놀랐다.

이어서 또 자신에게 물었다. 왜 수련생과 말다툼을 하지? 계속 나아가 안으로 찾으니 논쟁에는 쟁투심이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싸운 목적은 자기를 실증하고 자기를 과시하려는 것이다. 자기 과실을 덮어 감추고 자아를 수호함으로써 그 내려놓지 못한 자아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논쟁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찾으니 사부님 시에 나오는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건 나이니 다툴 게 뭐 있느냐”[1]가 생각났고 심신이 단번에 홀가분해졌다.

사부님께서 내가 안으로 찾는 것을 보시고 한 가지 일로 나를 점화해주셨다.

최근 사무실에서 내 옆자리 창문 부근 위치에 새로운 동료가 왔다. 겨울이면 다른 사람들은 난방이 부족해 히터까지 켜는데 이 동료는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보통 한참 열어놓고는 가버렸다. 오늘 그는 또 창문을 열어놓고는 한참 뒤에 내게 비켜달라며 나가려 했다. 나는 그가 창문을 열어놓고 나가려는 것을 보고 “창문 좀 닫아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허허 웃으며 “저 나가려는 게 아닌데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억지를 부리며 논쟁하려는 것을 보고 “정말 성가시네요.”라고 말했다. 다른 동료도 한마디 했다. 이때 나는 문득 깨우쳤다. 그는 내 모습의 반영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이 동료가 논쟁으로 과실을 덮어 감추려 하는 표현을 통해 나를 깨우쳐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나는 찬바람으로 자기를 한번 깨우쳐야 한다. 집착심이 너무 깊게 덮여있다.

어느 날 저녁, 일이 있어 수련생 D(그날 교류회의에 참가한 수련생 중 한 명)를 찾았다. D는 나와 교류했다. D는 어쩌면 다른 사람은 주의하지 않아 모를 수 있지만 자기는 내 표정이 아주 보기 싫은 것을 봤다면서, 내 마음속 깊은 것을 건드린 것이 아니냐고 했다. 나는 내 진실한 생각과 체험을 교류했다. 당시 특별히 홀가분했다. 수련에서 안으로 찾으니 정말 좋았다.

후기

문장을 다 쓰고 아내(수련생)에게 보여줬더니 아내는 다 보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분명히 말하기는 어려운데 다른 수련생에게 한번 보라고 해보세요. 제가 당신을 비교적 잘 아니까 아마 관념을 가지고 보아서 그럴지 모르잖아요. 여하튼 말하기 어렵지만 뭔가 있어요. 좀 꾸민 듯한 것이 있어요.” 나는 “다 정말인데?”라고 말했다. 아내는 안다고 했다. “진실하지 않은 것 같아?” “정말인 것은 알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것뿐이에요.” “선하지 않은 것 같아?” “그런 것도 아니에요. 말하기가 어려워요. 안으로 찾은 것이 여전히 표면적인 것 같아요. 수련생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 같아요.”

평소 법공부 때 나는 법의 내포를 보게 된 경험이 적다. 사상적으로 제고한 바가 있어서인지 이튿날 ‘휴스턴 법회 설법’을 배우는데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바로 그러한 일념(一念)의 차이이다. 사람과 신(神)의 구별은 이 일념의 차이에 있다. 내려놓을 수 있으면 곧 수련인이고 당신이 내려놓지 못하면 당신은 바로 사람이다.”[2] 이 단락을 배우고 문득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나는 내가 쓴 문장이 아직 순수하지 않고 선량하지도 않으며 진실하지 않고 바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이 문장을 쓰려는 데는 도대체 어떤 생각이 숨어있단 말인가? 문득 발견했다. 이 문장은 표면적으로는 안으로 찾은 것 같지만 그 자아에는 아직도 좀 억울하고 불복하는 마음이 있고 밍후이왕에 발표해서 자기를 실증하려는 미묘한 심리가 있었다. 이 순수한 성지(聖地)에서 자기를 방할하는 동시에, 부지불식간에 수련생을 가리키려는 극히 좋지 못한 마음이 있는데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가짜, 악, 투쟁’의 당 문화가 아닌가. 내 마음에 정말 깊이 숨어있었다!

다시 아내와 교류하자 아내가 기뻐하며 말했다. “맞아요. 바로 그거에요. 이번에 제대로 찾은 것 같아요.”

초고를 다 쓰고 오늘 문장을 완성하기까지 20여 일이 걸렸다. 안으로 찾고 또 찾으면서 여러 번 수정해서 여기까지 찾고 나자, 내가 놀란 원인은 원래 이러했다. 사부님께서, 내가 늘 큰소리치고 일사일념을 닦아야 한다고 실컷 말하면서 자기는 전혀 착실히 닦지 않는 것을 보시고는 수련생의 말로 나를 방할하시고 깨우쳐주신 것이다.

두 손 모아 허스하며 사부님의 자비로운 점화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수련에서 승화하게 되었습니다. A, B 수련생의 사심 없음과 정직함에 감사드립니다. 안으로 찾아서 자기를 착실히 닦게 되었습니다. 줄곧 번거로워하지 않고 나를 도와 안으로 찾아보게 한 수련생들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끊임없이 안으로 깊이 자기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 ‘홍음3-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휴스턴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5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5/18/3844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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