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그 해 4.25를 회상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1999년 4월 20일 톈진 파룬궁수련생들은 현지 공안에 의해 불법적으로 체포됐고 여러 사람이 구타당해 다쳤다. 그 후 4월 25일 1만 명의 파룬궁수련생들이 자발적으로 베이징 국무원 민원처에 가서 평화적으로 청원했고 당국에게 자유롭고 합법적인 연공 환경을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모두 직접 겪었고 수련생들의 진솔하고 선량하며, 고도로 억제하면서 곳곳마다 타인을 배려했던 장면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아래에 나는 그날에 겪은 몇 가지 작은 일을 이야기하겠다.

시안먼가에서 보게 된 것

전날에 톈진 경찰이 수련생을 때리고 붙잡은 사건이 있다고 들어서 정부에 상황을 알리려 했다. 1999년 4월 25일 아침, 연공을 마친 후 집에 돌아가서 아이를 돌보고 국무원 민원처 소재지인 시안먼가(西安門街)로 달려갔다. 시안먼가에 도착한 후 일찍이 도착한 수련생들이 푸유가(府右街) 서쪽에 서 있는 것을 보았고 나는 푸유가와 시안먼가 서남쪽에 서 있었다.

시안먼가에서 오가는 차량과 행인이 많아서 파룬궁수련생들은 길옆에 2~3줄로 서서 보행로를 비켜주었고 길가에 길을 가로막는 자전거를 잘 비치해 놓아 교통질서가 아주 좋았고 차가 막히지 않았다. 시안먼가는 그 당시에 상가와 작은 점포, 주택이 있었다. 문 열고 영업하는 가게, 주택가 출입구 등에서는 우리는 자발적으로 비켜서 있었고 인근 바닥에 있는 담배꽁초와 종잇조각 등을 수시로 주웠다. 수련생들이 서 있는 길가는 온종일 아주 깨끗했다.

끊임없이 수련생들이 왔고 시외의 현에서 오는 이들, 다른 성에서 밤차를 타고 올라오는 이들도 있었다. 갈수록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내가 서있던 위치는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동료이자 또 칭화대학교 동창생인 H와 만나서 함께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흐뭇했다.(H는 두 번째로 불법 노동개조를 당한 후 소식이 끊긴지 12년이 됐다. H여, 안녕하신가!) 이후에 알게 됐는데 알고 있던 수련생 대다수가 모두 왔으며 이들은 푸유가, 창안(長安)가, 시안먼가에 모두 분산되어 있었다. 그날 오후 또 가족들은 무슨 좋지 못한 소식을 들은 후 수련생을 찾아와 설득하고 억지로 끌고 집에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골목의 공중화장실

점심이 거의 다가와 화장실에 가야 했다. 나는 한 주민에게 어디에 공중화장실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같이 걸어가자고 했고 한 골목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 보였는데 10~20m나 됐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따라 줄을 서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당시 공중화장실은 독립적인 칸막이가 없었고 벽을 따라 6~7개의 구멍이 배열되어 문에 들어서면 전부 노출이 됐다. 두 개의 자리가 있었고 그녀는 바로 건너갔다. 이때서야 나는 반응을 했는데 줄을 선 이들이 모두 파룬궁수련생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가서 다시 줄을 섰다. 화장실은 시종 빈자리가 없었고 아울러 다른 화장실보다 더 깨끗했다.

오래 서 있을 수 있었던 수련생들

점심 이후 약간 검고 체형이 마른 30세 좌우의 일반인이 차를 타고 왔고 차에서 내린 후 파룬궁수련생 사이에 서 있었는데 나와 1m 넘게 떨어졌고 옆에 있던 수련생들이 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그곳에 서서 앞을 보고 뒤를 보고 좌우를 보고 또 책보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는데 수다를 떠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 후 그는 옆 수련생에게 이곳에 서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수련생은 국가 지도자에게 문제를 보고하려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조금 서 있다 줄에서 물러났는데 온몸을 불편해했다. 이후에 그는 더는 머물지 못하고 가버렸다. 주위 수련생들은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수련생 중에는 나이가 많은 이와 적은 이들, 각 업종 수련생들이 모두 있었다. 서로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서로 예의 있게 양보하는데 매우 친절하게 느껴졌고 서로 잘하는 것이 느낌이 아주 좋았다. H는 내 앞줄에 서 있었고 나는 자신에게 반듯하게 서 있을 것을 요구했으며 만약 반듯하게 서 있기 힘들면 뒷줄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행인들이 우리가 파룬궁수련생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중에 생각했는데 그날 모두 앞줄에 서 있었고 앉지 않아도 힘들지 않았다! 그 당시 H는 연공인에게는 모두 오래 설 수 있는 공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 알게 됐지만 그것은 사부님의 가지(加持)였다!

입으로 전하다

들은 말에 의하면 수련생들이 아주 많이 와서 길을 따라 몇 Km나 서 있고 창안가에도 적지 않게 있다고 했다. 또 경찰차와 경찰들이 많이 왔고 그들은 또 녹화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가서 보고 싶었고 무슨 상황인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푸유가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갔고 푸유가 서쪽 길가에 수련생들이 3~4줄 서 있었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서서 책을 보고 있었다. 경찰차는 길가에 멈춰 있었고 경찰들은 차 옆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한담을 나누었다. 그들 발 아래에 일부 담배꽁초가 있었는데 꽁초가 매우 눈에 띄었다. 행인이 없었고 상황을 파악한 수련생들이 반드시 서로 알릴 방법이 있을 것이니 혼자서 알아볼 필요 없고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이후에 푸유가 방향에서 뒷줄에 있던 수련생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전해왔는데 전해온 말은, 상황을 반영할 대표가 있는지 전했다. 한참 있다가 또 전해왔는데 수련생들이 들어갔다고 했다. 그 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날이 모두 저물었지만, 또 소식이 없어서 여전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경찰차가 또 왔다.

저녁 9시가 거의 되어서 푸유가 방향에서 수련생들이 전달해주었다. 총리가 나섰고 톈진에서 사람을 석방했으니 집에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떠나는 이는 없었고 이러한 상황을 확실히 확인한 후에 비로소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더 기다린 후 떠났는데 자신이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일부 사람들이 쓰레기를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바닥의 휴지조각을 보면 주워서 담는 것을 보았다. 아주 빠르고 조용하게 나도 자전거를 타고 떠났다.

파룬따파의 수련생들은 대법 ‘진선인(眞善忍)’의 요구에 따라 자각적, 자발적으로 가서 잘했고 ‘4.25’ 사건은 평화롭게 해결됐다. 장쩌민은 질투심으로 평화 청원을 ‘중난하이 포위 공격’이라고 왜곡했으며 중국공산당 국가기구를 발동해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지금까지 행하고 있다. 파룬따파 수련생은 한결같이 올바른 믿음을 견지하고 있다.

나는 직접 겪은 작은 일들을 전했는데 사람들이 거짓말에 속지 말기 바라며 진지하게 한번 사고하고 진정으로 한번 알아보기 바란다. 파룬따파가 무엇을 말하고 있고 파룬따파의 수련생들은 어떠한 사람인지 알아보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정확한 선택을 하기 바란다.

 

원문발표: 2019년 4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4/20/385283.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