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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시어머니 이야기

글/ 네이멍구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법을 얻은 지 20여년 된 대법제자입니다. 여기 저와 시어머니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한때 불운했던 나

나는 기억이 있고부터 항상 머리가 아프고 기침을 했다. 설 무렵이 되자 복통까지 매우 심했고 머리가 아파 기운을 차릴 수 없었으며 고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방구들에 누워 놀러나가지도 못하는 데다 두 다리까지 오랫동안 아팠다. 당시 겨울은 몹시 추웠지만 주거 여건은 좋지 못했다. 겨울에 잠을 잘 때면 나는 다리를 밖에 내놓고 차게 했는데 그러면 통증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때 나는 5~6살이었는데 발병할 때마다 어머니는 약을 먹이셨지만 나는 어떤 약도 거부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약들은 쓸모가 없었는데 먹더라도 병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매번 약을 몰래 토해내고 흙으로 덮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자 그곳이 큰 자루처럼 부풀어 올랐다.

병고는 나이가 들수록 심해졌다. 중학교 졸업 후 나는 심장도 좋지 못해 항상 아팠고 복통도 더욱 심해졌으며 게다가 저혈당에 저혈압까지 있었다. 몇 킬로미터 정도의 길을 갈 때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올 때는 밀고 돌아와야 했다. 머리가 어지러워 견디기 힘들었고 신경쇠약에다 장기간 불면증을 앓았다. 겨우겨우 잠들 수 있었고 잠이 들면 잠꼬대를 2~3시간이나 한다고 아버지가 알려주셨다. 변비로 7~8일이나 배변하지 못했다. 신장도 좋지 못해 소변이 자주 마려웠으며 심할 때는 불과 몇 분 만에 다음 화장실을 찾아야 했다. 시력은 근시였고 심한 과민성 천식에도 걸렸는데 이때 내 다리는 더 심하게 아팠다. 심지어 방바닥에 누울 수조차 없었는데 무릎이 10여 년간 계속 마비된 상태였다. 선천적으로 꼬리뼈가 어긋나 있어 끝까지 바르게 앉아있을 수 없었으며 신체를 앞으로 숙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꼬리뼈가 아파 견딜 수 없었다.

내 성격은 더욱 괴팍하게 변했다. 성질은 갈수록 사납고 거칠어졌으며 쉽게 화를 냈다. 부모님은 내가 시집가지 못할까 봐 걱정하며 나와 상의하기를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집으로 시집가라고 하셨는데 그렇지 않으면 3일도 못가 쫓겨날 것이라고 했다.

이때 나는 남편과 약혼했다. 그의 집은 유난히 가난했으며 우리 집과는 200~300킬로미터였다. 부모님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지만 내 건강 상태를 고려해 묵인하고 동의하셨다. 3월에 약혼하고 당시 결혼 증서는 받지 않았다. 8월에 임신했는데 나에게 임신중절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남편과 상의해 섣달에 결혼하기로 합의했다. 친정에서 마련한 연회 때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에게 단지 새 옷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고 시댁도 별로 돈이 든 것이 없었다. 우리는 친정의 작은 문간방에서 임시로 살았는데 그 방은 두 사람이 겨우 잘 수 있는 정도였으며 당시 나는 시댁과는 아직 인사도 하지 못했었다.

이듬해 5월 나는 아들을 낳았다. 몇 달 후 시어머니가 오셨는데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며 말씀하기를 “또 아들이야? 네 큰 동서도 아들이 셋이고 둘째 동서도 둘이나 낳았는데 또 아들을 낳았어? 나는 손녀가 하나도 없네”라고 하셨다. 그 시기 나는 미혼이었지만 먼저 임신하게 됐고 시댁에선 예물 비용 한 푼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자 쪽에서 돈을 대는 형편이었다. 그러한데도 나는 자주 시댁 식구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했고 미움을 받았다. 시어머니는 오신 후로 자주 큰 동서와 둘째 동서의 결혼 때의 이런저런 일을 무심코 언급하셨다. 초라해진 나는 이 모든 것을 꾹 참았다.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지, 그 도도한 나는 어디로 간 것인가?

아들은 1995년 출생했고 이듬해에 나는 일을 해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당시 남편의 월급이 많지 않아 겨우겨우 지냈는데 평상시엔 아들을 치료해줄 돈도 없었다. 그래서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돌봐달라고 부탁했고 시어머니도 별말씀이 없으셨다. 당시 날씨가 추워지려 했지만 나는 채소밭에서 하루 10시간 노동을 하고 6위안(한화 약1천원)을 벌었다. 하지만 그것도 수입이 아닌가! 나는 아들의 사진을 끌어안고 잠들곤 했는데 깨어나면 베개 수건이 흠뻑 젖었다.

대법이 나를 탈바꿈하게 해줬다

대략 1개월 후 어떤 사람이 내게 파룬궁(法輪功) 학습반에 가보라고 소개해줬다. 내가 말하기를 “파룬궁은 기공 아닌가요? 나는 기공을 연마하지 않겠습니다. 배우지 않겠습니다. 병을 치료하려고도 생각하지 않고요. 내 병은 누구도 치료하지 못해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단호하게 말했다. “파룬궁은 다른 기공과는 같지 않습니다. 가서 한번 해보세요! 만약 당신 생각에 정말 좋지 않다고 느껴지면 (그때) 가면 되지요.” 나는 ‘가서 한번 보고 결정하자’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내가 가려고 마음을 먹자 뜻밖에도 연이어 3일 간이나 저녁 시간에 일이 있어 가지 못하게 됐다. 나의 급한 성미가 올라왔다. “나는 뭔 일을 해도 제대로 되는 것이 없구나. 이번에는 단단히 마음먹고 파룬궁 학습반에 참가하겠어.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못해!” 넷째 날, 나는 날이 밝기 전에 학습반에 가서 연공동작을 배웠다. 그때 내게는 ‘전법륜(轉法輪)’을 살 돈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것을 돌려서 봤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보자 나는 대단히 격동했다. “이것은 수련하는 ‘천서(天書)’가 아닌가! 나는 꼭 배워야겠다!”

남편은 나를 동정하며 지지했다. 집에는 돈이 없었지만 내가 대법 책을 사려고 할 때는 딱 그만큼 있었고 법상(法像)을 사려고 할 때도 조금도 많지 않게 역시 그 정도 돈이 있었다. 나는 녹음기를 사서 사부님의 설법을 듣고 싶었는데 남편이 때마침 알맞게 돈을 벌어 와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사러 갔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으며 당시의 곤궁함을 말로는 다 형용할 수도 없다.

이때부터 나는 ‘진선인(眞善忍)’의 요구에 따라 처신하고 일했다. 채소밭에서 일할 때 아무도 면포(바닥에 까는 용도)를 메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둘러멨고 남이 싫어하는 더러운 일도 내가 했으며 아무도 잔업을 하지 않으면 비록 시간당 6자오(1자오=1/10위안)뿐이었지만 내가 했다. 채소를 수확할 때도 토마토와 참외를 훔쳐 먹지 않았다. 때문에 관리인은 안심하고 항상 나에게 수확하도록 했다. 나는 무슨 일이든 참고 양보했다. 한번은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데, 당시 경리가 자기 친척이 와서 채소를 살 때 거스름돈을 잘못 주었다고 내게 말했다. 50위안짜리를 100위안으로 알고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잘못 보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차분하게, 비굴하거나 거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첫째 그 사람이 누구였든지 간에 나는 거스름돈을 잘못 주지 않았습니다. 둘째 제가 부족하게 돈을 줬다면 모자란 만큼 물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당시 비록 하루에 6위안을 벌었지만 나는 대법을 배우는 사람이기에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처신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현장의 관리인과 동료들 모두 그 경리가 잘못 봤고 그런 일이 없으며 내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경리는 이 일을 더는 말하지 않았고 이 일은 지나갔다. 사후에 마을 간부가 이 일을 조사하러 갔는데 떠나면서 “사람들이 파룬궁을 배우면 달라”라고 말했다.

수련을 시작하고부터 나는 모든 약을 끊었다. 약을 끊었어도 신체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좋아졌으며 일을 아주 잘할 수 있었고 힘도 세졌다.

내 오른발 발등에 골 증식 때문에 작은 뼈마디가 튀어나왔는데 이 튀어나온 부분으로 인해 나는 겨울에도 방한화를 신지 못하고 끈을 매서 신는 홑겹 신발을 신을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남편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당신 그 튀어나온 뼈가 어떻게 없어졌지? 아들이 당신 발을 만질 때마다 아파서 소릴 질렀는데 오늘은 아무 반응도 없으니 내가 봐도 이상하네.” 그는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내가 보니 정말로 없어졌다. 나는 기뻐하며 그에게 말했다. “사부님께서 소업(消業)해 주셨네요. 이제 나았어요.” 남편도 기뻐하며 말했다. “당신의 다른 병도 나았는데 당신 혼자만 알고 있고 다른 사람은 알지 못했군. 이번 것은 정말로 볼 수 있는 거네. 이 파룬궁은 정말 좋아. 연마를 열심히 해봐.”

딸처럼 친한 며느리

1997년 여름, 나는 남편과 아들을 보러 고향에 갔으나 아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파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아들을 위해 그렇게 고생을 했건만 아이가 이제 나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시어머니가 나의 유쾌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화를 내며 소리치고 욕을 하셨다. 남편에게 나와 이혼하라고 했다. 남편의 둘째 형도 참견하며 있는 것 없는 것 다 말하고는 또 우리 부모님을 만나 얘기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 광경은 그야말로 나를 대문 밖으로 내쫓을 기세였다. 아들이 이런 상황을 보자 오히려 나를 꼭 껴안으며 내 손을 놓지 않았고 남편도 내 손을 잡고는 놓지 않았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여전히 트집을 잡았다. 아들은 놀라 크게 울었다. 나는 침착하게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이 만약 우리 모자와 함께 가겠다면 내가 당신을 10분 동안 기다릴 테니 가서 짐을 챙겨 오세요. 가지 않겠다면 우리 모자만 가겠어요.” 남편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날 기다려.”

남편의 큰조카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보다는 불과 몇 살 아래였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몇 십 킬로미터 밖 기차역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기차에 오를 때 그가 나에게 말했다. “숙모님, 할머니가 성격이 좋지 못해 양보할 줄 모르세요. 화내지 마세요.” 나는 아주 감동했다. 나는 당시 자신이 수련인임을 잊어버렸고 심성을 지키지 못했다.

집에 돌아온 후 남편은 거듭 내게 사과하며 어머니의 성격이 그래서 아무도 고칠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옳지 않다고 말하지만 아들이 어머니를 어떻게 하겠는가? 나도 아주 괴로웠으며 이 고비를 잘 넘기지 못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고 섣달 28일 저녁, 나는 ‘밍후이주간’에서 수련생의 교류 문장 한 편을 봤다. 내용이 나와 시어머니와 유사한 상황이었고 심지어 우리의 갈등보다 훨씬 크고 더 오랜 기간 지속됐으며 쌓인 원한도 매우 깊었다. 하지만 수련생은 사부님의 점화로 일체 사람 마음의 집착을 조용히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시어머니와 화해했는데 이때부터 가정은 화목해졌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글을 다 봤을 때는 벌써 새벽 5시였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남편을 흔들어 깨워 그가 듣게끔 문장을 읽어주었다. 그는 다 듣고도 말이 없었다. 내가 말하기를 “남의 그 층차, 그 경지를 봐요. 정말 수련을 잘했어요! 나는 차이가 멀어요. 내 잘못이죠. 기회를 봐서 우리 다시 가서 어머님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요!”라고 했다. 그러자 남편은 매우 감동했다.

이때의 나는 원래 일했던 채소밭 일보다 몇 배나 힘든 일이긴 했지만 당시로는 돈을 아주 잘 버는 직장이 있었다.

그해 겨울 남편의 큰조카가 결혼을 하는데 와서 축하주 한 잔 하라고 큰 아주버니께서 소식을 전해오셨다. 남편은 직접 대답하지 못하고 갈 것인지 나와 상의했다. 나는 말했다. “당연히 가야죠. 그해 큰조카가 우리를 기차역까지 데려다줬잖아요. 그렇지 않았으면 그렇게 먼 길을 우리가 어떻게 갈 수 있었겠어요? 게다가 아이까지 데리고요. 또 나는 시어머니께 사과도 해야 하잖아요. 우리 가요.” 남편은 매우 감동했다.

조카며느리가 그 지역 사람이라 혼례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사이였다. 마을이 크지 않았기에 당시 나와 시어머니와의 요란한 갈등을 사람들은 다 들었었다. 모두들 내가 그런 꼴을 당했으니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방에 들어가자 나를 알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이 작은 소리로 “어디 저런 며느리가 있어?”하고 중얼거렸다. 나를 보고 칭찬하는 눈빛을 보내면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이 일은 시댁에 큰 화젯거리였다. 특히 시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네 두 동서 결혼 때는 내가 부족함 없이 준비해줬는데 네 결혼 때는 내가 늙어서 하지 못했고 준비도 못해줬다. 네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구나. 우리 이곳에는 결혼 때 새 며느리에게 양모 담요를 꼭 선물하는 풍습이 있는데 네게는 해주지 못했다. 너에게 미안하구나”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 저는 괜찮아요. 저렇게 큰 아들을 길러 제게 주셨는데 제가 뭘 더 바라겠어요? 게다가 우리는 집도 없어서 양모 담요를 가져간다 해도 둘 곳도 없어요”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이 바보 같은 며느리야, 내가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라고 하시며 쓴웃음을 지으셨다.

이번 일을 통해 형님(남편의 누나)들은 나를 특히 중시하게 됐다. 내가 36세가 되자 형님들이 단체로 기차를 타고 나의 출생 띠의 해를 기념해주러 오셨다. 형님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우리 아버지보다도 한 살이 더 많은데 또 각기 나에게 돈까지 주셨다. 받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꼭 받아야 했으며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님들은 모두 대법의 위대함을 가슴에 새겼고 내가 대법을 배우는 것을 지지하셨다. “모든 며느리가 다 대법을 배우면 얼마나 좋겠어!”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형님들이 머무는 며칠간 나는 대법의 요구 표준에 따라 형님들을 선하게 대했다. 형님들 모두가 내 부모님 또래의 나이인지라 먹는 것과 기거하는 것을 보살펴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이미 우리 소유의 새집이 있었는데 시부모, 친정 부모의 돈 한 푼 쓰지 않았고 우리 힘으로 생활했다. 형님들은 “요 며칠을 정말 화끈하게 잘 지냈다”라고 만족해하셨다. 이번에 와서 보고 동생이 아주 잘 살고 있고 부부 사이도 화목하다는 것을 알고는 형님들은 마음을 놓게 됐다.

이 일 이후에도 시아버지 병을 치료하고 장례를 모시는 것을 포함해 우리 부부는 할 수 있는 만큼 했으며 돈도 낼 수 있는 만큼 냈다. 몇 명의 고모가 일마다 나를 마음에 들어 하시며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효도를 다했다. 막냇자식(나를 지칭)이 좋구나!”

그 이후로 나와 시어머니는 더욱 친해졌다. 우리가 남편의 막내 누나 집으로 가서 시어머니를 찾아뵈면 시어머니는 벌써 나와 문 앞에서 기다리신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껴안고 웃으며 “네가 왔구나!”라고 말씀하신다. 시어머니의 사위도 감격해 웃으면서 말하기를 “오셨군요. 보세요, 장모님 앞에는 사위도 있고 아들도 딸도 있는데 오직 당신만 껴안네요. 이것은 장모님이 당신만을 편애하신다는 뜻이에요. 우린 다 안 되겠네요!”라고 했다.

한번은 우리가 고향으로 시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당시 마을엔 점쟁이가 왔었고 시어머니는 나에게 점을 보러 가자고 했다. 나는 “어머니, 저는 대법을 수련합니다. 저는 그런 것 안 봐요!”하고 말했다. 그 이후로 내가 갈 때마다 시어머니는 마실 나온 사람들에게 “우리 며느리는 대법을 수련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요 몇 년간 나는 이미 여러 번 시어머니에게 대법 진상을 말했기에 시어머니는 사부님이 좋다는 것과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내가 한마음으로 선을 향하며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함을 알고 계셨다. 그녀는 매우 동의하며 항상 내가 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라고 하는 인쇄물을 지니고 다니며 외우신다. 그녀는 신체가 내내 건강하며 농촌이 바쁠 땐 일손을 거드는데 밥을 짓고 집안일을 하신다!

2016년 동짓날 시어머니가 위독하며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부부가 이튿날 서둘러 병원에 갔을 때는 그중 남편 3명의 누나가 모두 와 있었다. 그녀들은 이미 며칠 입원했으며 지금은 위험에서 막 벗어나 회복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연세가 이미 80여 세나 되기에 그녀들도 마음속으로는 확신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내가 병실에 들어가자 곧장 앉아 정신을 차렸고 먹고 마시기 시작하셨다. 형님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며칠을 보살폈어도 정신을 차리시지 못하셨는데”라고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지금 말하고 웃으며 또 이렇게 먼 길에다 바쁘기도 한데 누가 전화했느냐고 원망하셨다. 내가 알지 못하게 했어야지 알려줘 걱정하게 했다면서 나에게 돌아가라고 하셨다. 시어머니는 좋아졌으니 즉시 퇴원하겠다고 하셨다. 형님들은 거기서 듣고는 웃고만 있었다. 나는 형님들 모두 돌아가서 쉬게 하고 내가 시어머니를 돌보려 했다. 형님들은 모두 안 된다고 했다. 나는 방금 기차에서 내렸으니 먼저 둘째 시누이 집에 가서 하룻밤 쉬었다가 내일 다시 와서 그녀들과 교대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내심에서 말했다. “저는 시어머니를 간호하러 왔지 친척 집에 가서 쉬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형님들은 모두 60이 넘었는데 우리 대신 간호하셨네요. 우리가 아들이고 며느리인데 불효했네요! 형님들께 고생을 끼쳤어요!”

그녀들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둘째 형님이 울며 말씀하셨다. “200~300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오기도 하는데 우리 집과 큰형님 네는 한마을에 살면서도 두 식구는 보러 오지 못했고 돈도 내지 않았어. 게다가 전화조차 하지 않았지.” 나는 형님들을 위로하며 자책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남편에게 시어머니가 침대에서 내려오기 편리하도록 슬리퍼를 사 오게 했다. 둘째 형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딸이 되어가지고 슬리퍼를 사드릴 생각도 못했는데 막내 네는 오자마자 바로 슬리퍼가 없는 것을 보고 사드리려고 하는구나. 이것이 진정한 효심 아닌가! 우리 모두는 비교할 수도 없어!” 내가 말했다. “형님들이 요 며칠 고생 많이 하셨는데 어떻게 이런 것까지 신경 쓰실 수 있었겠어요!”

밤에 나는 남편에게 자리를 찾아 잠을 자도록 했는데 그는 깊게 잠들면 깨어나기가 쉽지 않기에 그에게 시어머니를 돌보도록 한다면 내가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병실의 침대형 의자에서 쉬면서 시어머니 침대를 마주 봤는데 복도 불빛으로 시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는데 그녀가 화장실 가다 넘어질까 걱정되었다. 당시 병원에는 환자가 가득했고 복도에도 사람이 누워있었으며 화장실에는 곳곳이 물이었다. 한참 후 시어머니는 내가 자는 줄 알고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오셨다. 나는 즉시 일어나 시어머니를 부축해 함께 화장실에 갔다.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들을까봐 걱정했다. 한숨 자도록 하고 싶었는데 시끄럽게 해 너를 깨웠구나!” 내가 말했다. “저는 전혀 잠들지 않았어요. 내내 어머니를 보고 있었어요!” 시어머니는 웃었다. 대략 한 시간 후 시어머니는 다시 침대에서 내려오셨는데 이번에는 슬리퍼를 신지 않으셨다. 나는 얼른 일어나 슬리퍼를 신겨드렸다. 시어머니가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신을 신으면 소리가 나고 네가 들을까 봐 신지 않았다.” 그 후로도 시어머니는 두 번 더 화장실에 가셨고 나도 함께 따라갔다. 그날 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병원 가까이 사시는 둘째 형님이 조반을 가져오셨다. 시어머니가 지난밤 얘기를 하자 둘째 형님은 혀를 내두르며 내가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 오후에 수액을 다 맞고 나서 내가 말했다. “어머니, 양말 빨아 드릴게요. 잠시 후에 발도 씻겨드리고 나면 좀 편해지실 거예요.” 시어머니는 씻으려 하지 않았다. 발이 너무 더럽다며 나에게 씻기도록 할 수 없다고 하셨다. 나는 “저는 싫지 않아요. 어머님이 조금이라도 편해졌으면 하는 생각뿐입니다”하고 말하자 시어머니는 동의했다. 당시 양말은 5~6차례 빨아서야 깨끗해졌고 발은 두 번을 씻자 깨끗해졌다. 둘째 형님은 옆에서 보면서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같은 병실의 할머니 환자가 나도 딸인 줄 알고 말했다. “여기 이 막내딸이 참 잘하네요!” 둘째 형님이 말씀하셨다. “딸은 여기 서 있고요! 저기는 며느리랍니다!” 할머니가 계속 ‘아이고, 아이고’라고 감탄하셨다. “노인네가 정말 복도 많네! 내 며느리는 내가 입원한 후 와보지도 않는데!”

시어머니는 기분이 좋아져 계속 마음속 얘기를 나에게 하셨다.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내려와 나와 함께 창틀 앞에 서서 쉬지 않고 오가는 차량들을 보면서 입도 쉬지 않고 말씀하셨다. 나는 웃으며 그녀의 한담에 응대했는데 내심은 매우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우리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원래 둘째 아주버니가 간병하고 있었는데 둘째 동서가 아주버니가 쉬어야 하고 견디지 못한다는 등 말을 하며 이어받았다. 형님들은 볼 수 없어하며 “내일은 돈을 내고 그들은 떠나야 해”라고 말씀하셨다. 돈을 낼 때 우리도 내야 했다. 그런데 둘째 형님은 동의하지 않으며 말씀하셨다. “어머니에게 돈이 있으니 먼저 내면 돼. 우리는 낼 필요가 없어.” 여러 가지 원인으로 내가 이틀 밤을 간병하고 나자 남편이 나를 먼저 집으로 돌아가도록 결정했다. 이틀 후 오후에 시어머니는 퇴원하셨다. 남편도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 일을 치르면서 시댁 사람들은 나를 더욱 대단하게 보게 됐다. 남편이 돌아와서 누나들이 모두 감동했으며 대법을 배우는 사람들을 칭찬하며 일반인과 다르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남편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마음속 말을 했다. “큰며느리, 둘째며느리, 막내며느리 (나를 지칭함) 다 있지만 막내뿐이네. 이전에 시어머니와 그렇게 큰 갈등이 있었지만 노인을 욕한 적이 없고, 비록 가장 미움을 받았지만 오히려 가장 효도하지.” 그는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수련을 잘해! 난 당신만 바라보고 있어. 당신 신세를 좀 지려고 말이야!”

시어머니는 지금 벌써 88세 고령이시다. 어쩌다 작은 감기라도 걸리면 며칠이면 괜찮아진다. 집안일도 그대로 하시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시어머니께 용돈을 드리지만 사실 시어머니 자신도 돈이 아주 많다. 수년 동안 남편이 고향에 가면 시어머니께 돈을 적잖이 드렸는데 나는 물어본 적이 없고 또 장부를 대조하거나 조사해본 일도 없다.

작년 섣달 23일 시어머니 생신 때 남편이 옥팔찌를 선물했다. 나는 일이 있어 가지 못하고 시어머니가 팔찌를 받지 않을까 봐 걱정돼 전화로 그 팔찌는 내가 보고 괜찮아서 골랐고, 왼쪽 손에 착용하시되 내려놓지 말고 항상 착용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다른 노인들이 차고 있는 걸 봤는데 나도 갖게 될 줄은 몰랐다며 좋아하셨다.

맺음말

나와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이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았는데 나는 단지 자신이 직접 겪은 것으로 진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파룬궁에 대해 많이 아는 것도 괜찮으며 당신 주위의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는 사람에 대해 많이 알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당신의 혜안으로 선악을 분별하고 진상을 이해하며 자신을 위해 밝은 미래를 선택하시길 바란다!

 

원문발표: 2019년 4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4/20/3783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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