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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을 바꾸자 가정 수련환경이 열리다

글/ 허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작년 수련 중에 제가 관념을 바꾸자 가정환경도 달라진 두 가지 작은 이야기를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려 합니다. 법에 부합하지 않는 곳은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내 남편은 내가 수련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 수련이 집안일을 그르칠까 봐 염려하기 때문이었다. 수련생이 나를 찾아오는 것을 보면 남편은 냉랭한 얼굴을 하고 반갑지 않은 모습으로, 심지어 한 번은 욕설을 내뱉은 적도 있었다. 남편의 이런 태도에 대해 나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수련생들에게 미안하단 생각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세 가지 일을 한다는 것은 남편이 모르게 해야 했기에 완전히 사람의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했기에 내 수련에 어느 정도 지장을 초래하게 됐다. 한 번은 내가 법회에 참가하면서 한나절 가게 문을 닫았다(장사하기 때문). 남편과 나는 한바탕 소동을 피웠으며 끝까지 서로 용서하지 않는 태도였다. 당시에 자신은 법에서 깨닫지 못하고 단지 사람의 방법으로 그에게 이치를 말해서야 풍파가 잠잠해졌고 또 법에서 제고하지도 못했으며 다만 이후 일할 때는 더욱 신중했을 뿐이었다.

작년에 관념을 바꿔 법으로 자신의 사유와 언행을 지도하자 가정환경도 아주 큰 변화가 생겼다.

정념은 주위 환경을 바꿀 수 있다

작년 ‘5.13’ 전야에 나는 수련생 네 명과 함께 밤에 농촌에 가서 진상 스티커를 붙이고 진상 현수막을 걸었다. 다섯 개 마을을 계획했는데 다섯 개 마을은 개울을 따라 쭉 뻗은 평탄한 길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가게에서 살림하지는 않았기에 남편과 나는 함께 농촌 고향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므로 출발 전에 남편은 “너무 늦으면 안 돼. 9시 반까지는 집에 와야 해”라고 말했다. 나는 “몇 시라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고 게다가 나 혼자가 아니에요.”라고 했다. 남편은 강경한 말투로 “안돼. 9시 반을 넘으면 안 돼.”라고 말했다. 이러했기에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우리는 수련생의 차를 타고 먼저 가장 먼 마을로 가서 되돌아오면서 스티커를 붙이고 현수막을 걸었다. 첫 번째 마을을 끝내고 시계를 보니 벌써 9시였다. 마음속으로 ‘9시 반까지 집에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어쩌지?’하고 생각했다. 이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하나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만(萬) 가지 움직임을 제압할 수 있다(一個心不動能制萬動).”[1]라고 하신 법이 생각났다. 그렇다. 나는 정념을 가져야 한다. 기왕 왔으니 마음을 편히 하자. 아무리 늦어도 상관하지 않고 나는 계획대로 진지하게 다섯 개 마을을 다 끝낼 수 있었다. 과정에서 나는 불안해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대법으로 자신의 일사 일념을 바르게 세웠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러분 알다시피, 지상(地上)의 사람은 대다수 천상에서 왔을 뿐만 아니라 많게는 천상에서 파견해 내려온 대표로서, 그 한 곳(一方)의 천체, 그 한 곳 우주의 중생들을 대표하고 있는데, 목적은 최후에 구도 받기 위해서다. 구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세상에서 대법이 전해진 후 대법에 대한 이 사람의 표현을 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표현 또한 그가 대표하는 배후 우주 생명의 정법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2]라고 하셨다.

그렇다. 남편은 나와 한 가족이 됐으니 역시 큰 연분이 있는 것이고 그의 생명도 법을 위해 온 것이다. 만약 내 사람 마음으로 인해 내가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을 남편이 교란하게 된다면, 그것을 남편의 ‘진정한 생명’의 처지에서 말하자면 지극히 큰 유감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대법을 실증하는 것을 남편이 교란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이 비로소 그에 대한 자비요, 그가 대표하는 중생에 대한 자비이다. 법리(法理)가 또렷해지자 내 마음은 조용해졌다. 순정한 마음으로 수련생과 순조롭게 대법의 복음을 다섯 개 마을에 전했고 그곳 중생이 구원받는 데 좋은 기초를 깔아두었다. 이때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작은 별들을 보니 기쁘고 위안이 됐다. 우리는 대법제자가 해야 할 일을 했다.

수련생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이미 넘었다. 내 마음은 또 불안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늦었는데 남편은 가게에서 어떻게 하고 있을까? 불같이 화내지는 않을까? 나는 즉시 내가 사람 마음을 움직이고 있음을 의식했다. 그것을 억제하며 정념(正念)을 지켰다. 남편도 법을 위해 왔다. 내가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을 잘할수록 그의 명백한 일면은 더욱 기뻐할 것이다. 그는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정념이다. 오는 도중에 이 일념을 단단히 지켰다. 내가 차에서 내려 가게 앞에 도착하자 남편은 오토바이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오토바이에 걸터앉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 뒤에 앉아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의념으로 그의 명백한 일면과 교류했다. 나는 ‘당신도 법을 위해 온 것이다. 당신은 대법에 대해 정념(正念)을 가져야 하며 대법제자가 사람 구하는 것을 교란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당신의 미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했다. 아울러 쉬지 않고 그를 향해 발정념을 하며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하는 것을 교란하도록 그를 조종하는 다른 공간의 일체 사악한 생명과 요소를 해체했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남편에게 밖에서 얼마나 나를 기다렸는지 물었다. 그는 “막 집에 가려던 참이었어. 당신을 기다리지 않았지.”라고 말했다. 내가 “믿기지 않는데요. 당신이 나를 상관하지 않을 수 있나요?”라고 말하자 남편은 웃었다. 그는 조금도 화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깨달았다. 대법제자가 법 중에서 수련해낸 정념과 자비의 힘은 일체 바르지 않은 요소를 해체할 수 있고 주위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 밝도다(佛光普照, 禮義圓明).”[3]라고 하신 바와 같았다.

우리 집에 법 학습팀을 만들다

한 수련생이 나와 같이 법공부를 하고 싶다고 제안했고 이후 또 한 명이 참여하게 됐다. 이렇게 돼 우리 가게에는 세 사람의 법 학습팀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남편에게 감히 알리지 못했고 남편이 간혹 돌아오면 우리는 책을 내려놓고 그가 보지 못하게 했다. 수련생들은 이런 상황을 보고 나와 교류했는데 마땅히 그가 알게 해야지 법공부를 몰래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나 감히 알리지 못했다.

안으로 찾아봤다. 왜 그가 모르게 해야 하는가? 남편은 내가 장사에는 신경 쓰지 않고 연공 하는 일만 생각한다며 항상 불평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내게 물어봤다. 마음을 다해 장사하고 있는가? 확실히 아니었다. 수련을 시작해서부터 나는 수련을 첫 자리에 놓았고 장사하는 일은 늘 이것저것 손이 빠졌다. 들여와야 할 물건을 제때 보충하지 못했고 어떤 물건은 어디에다 두었는지도 몰라 자주 찾지 못했다. 계산대와 진열대는 언제나 어질러져 있었다. 이렇게 찾아보고 나서 나는 크게 깨달았다. 나는 자신을 올바르게 되돌려야 한다.

수련을 첫 번째 자리에 놓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다른 일도 형식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수련인으로서 먼저 좋은 사람이 돼야 하고 가정과 사회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돼야 하며 일을 잘하는 자체가 바로 대법제자 수련 중의 한 부분이 아닌가. 내 수련에 누락이 있다. 깨달았으니 누락을 보충해 장사를 잘하고 남편이 트집 잡을 것이 없게 해야 한다.

이튿날 한나절 걸려 진열대와 계산대를 진지하게 한번 정리했는데 마음에 쏙 들게 했다. 물건을 정리하자 이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 됐다. 이전에는 이렇게 하는 것을 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참에 그것을 내 수련으로 받아들이자 마음은 도리어 조용하고 편안했는데 이것이야말로 수련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였다!

나는 내 마음을 가다듬고 남편에게 우리 몇 명이 가게에서 법공부하는 일을 얘기하자 그는 조금도 반대하지 않았다. 만약 이전대로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로부터 나는 수련의 엄숙성과 신성함을 인식하게 됐다. 우리가 난관에 부딪히면 우리는 대법의 요구에 따라 무조건 안으로 찾아 자신을 바로잡고 우리가 현재 위치한 단계의 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정말로 고난 속에 광명이 있음(柳暗花明又一村)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3]

우리는 대법제자 신변에서 발생한 일체가 모두 대법제자의 마음이 촉성한 것임을 법으로부터 배워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신을 잘 수련하는 문제는 지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법에서 수련해낸 바른 에너지는 일체 부정확한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우리의 바른 에너지장의 제약 아래 우리의 가정, 직장, 사회 환경 모두가 바르게 될 것이고 우리가 만나는 중생도 모두 대법 중에서 이익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들도 대법과 대법제자에 대해 확고한 정념을 품고 고층차에서 이 홍진세상 속으로 곤두박질하며 구르고 굴러온 것이며 그들 역시 구세력이 각기 다른 배역을 배치했는데 그중에는 대법제자를 교란하는 배치가 있고 대법제자에게 시련을 조성하는 배치도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가 법리(法理)에 명백하고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비로소 구세력의 배치를 제거할 수 있고 중생이 대법과 대법제자에게 맡긴 생명이 구원받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구할 수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 저작: ‘각지 설법 11-2010년 뉴욕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발표: 2019년 4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언행으로 대법실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4/13/3827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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