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구술, 수련생 정리
[밍후이왕] 저의 큰아들은 중국공산당 군대로부터 십여 년 동안 세뇌를 받은 군인이자, 향진(鄉鎮)에서 파룬궁(法輪功)을 관리하는 정부의 간부이기도 했습니다. 파룬궁을 수련하던 남편은 아들의 강력한 반대에 수련을 포기해 생명을 잃었습니다.
큰아들은 장기간 저의 대법수련도 반대했습니다. 십여 년 이래,제가 노력하여 자신을 잘 수련하고, 꾸준히 정법 수련의 길을 바르게 잘 걸어옴에 따라, 깊이 독해 받은 곁에 있던 이 아들도 마침내 변하게 되었고, 미혹되어 길을 잃었던 생명은 드디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저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던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잘하려면 우선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1]는 이 단락의 법에 대해 실감 나는 체득이 있게 되었습니다.
1. 대법을 수련하여 마음의 매듭을 풀다
저는 산간 지역의 시골 여성으로 올해 66세입니다. 하루도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습니다. 1998년, 저의 18살이던 막내아들이 외지에서 일하다가, 높은 건물에서 추락하여 객사하였습니다. 막 성인이 된 아이가 갑자기 생명을 잃게 되어,저는 거의 숨이 끊어져 죽다시피 되다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저를 타이르고 인도하였지만, 저는 걸어 나오지 못했고오히려 갈수록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사람은 흐리멍덩해졌고머리는 멍해져, 길을 걸을 때면 기우뚱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했고,몸은 나풀거리며 무게감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마침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제가 사는 향진에 널리 전해지던 무렵이었습니다. 언니와 여동생은 저에게 향진에 가서 단체 법 공부와 연공에 참가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집은 향진과 몇십 리 거리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연속 3일 참가하여 연공 동작을 배워서 익혔습니다. 저는 하루도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어서 법 공부를 해도 글을 몰랐으므로 마을 수련생들이 읽는 법을 들은 다음, 집으로 돌아와 사부님의 설법 녹음을 스스로 들었습니다. 사부님께서 강의하신 법은 분명하고 알기 쉬웠으며, 듣자마자 저는 파룬궁은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수련하는 것이며, 사부님께서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수련생을 위해 신체를 정화해주신다는 등의 법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누가 당신의 어머니고, 어느 누가 당신의 자녀인지, 두 눈을 감기만 하면 누구도 누구를 알아보지 못하며, 당신이 진 업(業)은 그대로 갚아야 한다. 사람은 미혹 중에 있기 때문에 곧 이런 것을 내려놓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자녀를 내려놓지 못하여 어떠어떠하게 좋았는데 그가 죽었다 하고; 그의 어머니가 어떠어떠하게 좋았는데 역시 죽었다고 그는 그지없이 비통해하는데, 그야말로 후반생에 마치 그것을 따라가려는 듯하다. 당신은 생각해 보지 않는데, 이것은 당신을 시달리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이런 형식으로 당신을 편안히 지내지 못하게 한다.”[2] 사부님의 법은 저의 마음속에 자식을 잃은 울분을 풀어주셨고, 저는 확 트여 밝아졌으며, 혈육의 정이 괴롭히던 마장(魔障)에서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파룬따파를 확고히 수련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저는 오십견, 요추병, 류머티스성 관절염, 저혈당, 저혈압, 머리가 자주 어지러운 등 많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저의 남편도 고혈압, 관상동맥성 심질환을 앓았습니다.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은 파룬궁을 박해했고, 정상적인 수련 환경이 파괴되어, 우리는 강제적으로 수련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남편이 발병했고, 저 역시 머리가 어지럽기 시작했습니다. 링거 주사 한 병을 맞으려면 28위안(한화 약 4천7백 원)이 들어, 두 사람이 모두 링거 주사를 맞으며 치료를 받다 보니, 가정 경제가 갑자기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불현듯 자신이 마땅히 확고하게 파룬궁 수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무렵, 마침 저의 동서(수련생)가 저를 찾아왔고, 모두를 불러서 우리는 그래도 계속 법 공부를 하고 연공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박해의 공포와 높은 압력 하에서우리 마을의 수련생들은 비공개적으로 단체 법 공부, 연공을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저와 함께 다시 새롭게 법 공부를 하고 연공을 시작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 두 사람은 무슨 병이든 다 나았고,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2. 아들의 제지로 수련을 포기한 남편이 세상을 떠나다
중국공산당 군대의 세뇌를 매우 심하게 받은 저의 큰아들은 십여 년간 군 복무를 하여, 깊은 독해를 받았습니다. 2005년 고향으로 전역하여 작업 배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파룬궁 수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큰일이 났습니다. 아들이 맡고 있던 서기와 비서 업무는 사악한 공산당이 사람들을 세뇌하는 일에도 협력해야 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파룬궁 문제는 군에서 매우 엄격히 다룹니다. 사람마다 모두 보증서를 작성해야 합니다. 자신 및 자신의 가족, 친지와 친구를 포함하여 모두 아무도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을 것을 보장해야 합니다.” 아들은 손바닥을 펴고 한 자(약 30㎝) 높이 정도 가늠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제가 군에서 작성한 보증서는 모두 이만큼의 더미입니다. 당신들이 파룬궁을 수련하면 저의 업무 배정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아들은 저의 ‘전법륜(轉法輪)’책을 집어 가서 모두 태워버렸고, 저는 화가 나서 사흘 동안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으며,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가부좌를 트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아들은 손을 대 제지했습니다. 하루는 식탁에서 아들은 남편의 목덜미를 잡고 두 눈으로 노려보다가 주먹을 들어 남편의 머리를 치려고 했습니다. 주먹은 비록 남편의 몸에 닿지 않았지만 남편의 마음은 부서졌습니다.
분노와 증오의 공포 하에, 남편은 그로부터 파룬궁을 감히 수련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온종일 카드 놀이판에만 매달렸습니다.
외손자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것이 편하도록, 우리는 진으로 이사를 하여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남편은 매일 다원(茶園)에 가서 카드놀이를 했고, 아침부터 밤 열두 시까지 놀았으며, 점심 식사조차 하러 집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밤에 돌아오면, 남편보고 저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해도 그는 원하지 않았고, 옆집 천(陳)씨 할아버지가 듣게 될까 봐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저의 남편은 원래 향진의 공급판매 협력사에서 근무하다가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시골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낮이면 남편은 소몰이하고,밤이면 우리는 함께 법 공부를 했으며, 그가 읽어주면 저는 듣곤 했습니다. 그는 온 가부좌도 할 수 있게 되었고, 병업이 나타나더라도 심성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혈변이 분수와도 같았으며, 한 번 보면 반달씩 지속되었고, 바닥에 튀긴 핏자국만 해도 한가득하였습니다. 남편은 제가 보고 두려워할까 봐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튿날이면 혈변이 한결 나아졌고, 며칠이면 곧 지나갔습니다.
중국공산당의 강도 높은 탄압에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아들의 이 관을 그는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관을 넘는 것이라고 일깨워주면서 그에게 계속 수련하라고 권유했지만 아무리 얘기해도 남편은 듣지 않았습니다. 2006년 가을 무렵의 어느 날, 그는 카드놀이 하던 책상 위에서 발병했고, 비틀거리며 다원을 나와 몇 걸음 걷고는 거리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이미 다른 향진에서 일하던 아들이 서둘러 돌아왔습니다.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아버지의 시신을 마주한 아들은 사람들 앞에서 노발대발하면서 중국공산당의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파룬궁을 수련하면 사람이 죽지 않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왜 죽었을까요?” 이렇게 방안에 가득했던 사람들은 단번에 저의 남편이 파룬궁을 수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론이 자자했고, 어떤 사람들은 이 기회를 틈타 누군가 파룬궁을 수련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했으며, 사람들은 한동안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TV 속에서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에 대한 먹칠과 홍보가 전 국민을 독해한 것만 해도 이미 가슴 아프지만, 이번의 이 부정적인 영향은 현지 시민들의 파룬궁에 대한 오해를 더욱 심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저는 입이 있어도 변명하기 어려웠고, 급한 나머지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법제자는 마땅히 대법을 보호해야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진상을 똑똑히 알려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사람들에게 일의 진상을 분명하게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릇 제가 아는 사람이고,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바로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파룬궁을 수련하면서, 고혈압과 관상동맥성 심질환이 모두 나았습니다. 아들은 수련하지 못하게 했고, 남편은 그 화를 견디지 못하여 감히 수련하지 못했으며, 이미 수련을 하지 않아 1년이 넘는 시간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진정하게 수련하는 제자를 보호해주시며, 수련인에게 연장해주신 수명은 수련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며, 속인의 생활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남편은 이미 속인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온종일 카드놀이를 하는 남편을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상관해주실 수 있었겠습니까? 병이 재발했지만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또 사람들에게 “저는 파룬궁 수련을 확고하게 배워나가려고 합니다. 파룬궁은 좋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3. 굴곡진 길의 곤경에서 벗어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아들은 저를 시골 고향집에 혼자 머물게 하지 않고, 자신의 곁에 거처를 마련하여 마을 정부 기숙사에 머물게 했습니다. 밥을 저에게 하지 못하게 했고, 손자를 돌보지 않게 했으며, 입을 것과 먹을 걱정 할 필요 없이, 온종일 마음껏 놀 수 있게 해줘서 사람들은 모두 제가 복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저를 수련하지 못하게 했고, 낮에는 법을 듣지 못하게 했으며, 발정념 시간이면 마침 아들이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을 때였습니다. 아들은 “어디든 놀러 가실 수 있지만, 고향집에 가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친척들과는 왕래할 수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며느리에게 묻곤 합니다. “어머니는 어디에 계신가?”
하루는 마을 정부에서 몇몇 사람들이 집에 놀러 왔습니다. 아들은 제가 이어폰을 꽂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눈을 사납게 뜨고 저를 노려보았습니다. 저는 서둘러 이어폰을 넣어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님이 가고 난 후에도 계속 저의 트집을 잡으며 한바탕 책망했습니다. 저는 밤이 깊어 아들과 며느리가 모두 잠이 들고 난 후에야 자신의 방 안에 있는 모기장에 숨어서 설법을 듣고 연공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번은 아들이 현에 회의하러 갔다가, 두 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세뇌반으로 납치를 당하여 박해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 그날 밤, 몇십 위안(한화 약 몇천 원)을 들여 택시를 타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은 허겁지겁 저의 방을 샅샅이 뒤졌고, 옷가지마다 털어보았고, 주머니마다 뒤집어보면서, 제가 파룬궁 관련 물품을 갖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그는 저의 두 권의 대법 책을 속여서 가져갔고, 저를 대신하여 사무실의 금고에 넣어둬서 보관해준다고 말했습니다.
법 공부를 할 수 없으니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런 ‘복’을 누리니 저는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습니다. 저는 남편이 아들딸의 관, 혈육정의 관을 넘지 못했고, 견디어 내지 못하여 수련을 포기하고 생명을 잃게 되었으며, 또 대법에 그렇게 심각한 부정적인 영향까지 끼치게 된 이 교훈은 너무 비통하므로, 저는 다시는 이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008년 8월, 저는 고향집으로 되돌아가서 혼자 생활하기로 했습니다.
아들은 제가 고향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저를 옥죄면서 한 푼어치의 돈도 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집으로 돌아간 4개월 동안 저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저의 고향집은 몇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누수도 있었고 헐었으며, 집에 기름과 소금, 땔감과 쌀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석탄 한 덩어리도 빌려와야 했습니다.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좀 벌어서 생활을 일구었습니다.
아들이 사는 곳에서 살았던 2년 동안, 저는 명목상의 대법제자일 뿐, 법 공부와 발정념 그리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세 가지 일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건강 상태도 매우 나빴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었고, 이전에 요추를 다친 적이 있어서, 허리도 아프기 시작했으며, 무릎 관절염도 재발하여,계단을 오를 때 한 걸음 내디디면 한 번씩 통증이 있어서 한 번씩 주저앉곤 했습니다. 고향집으로 되돌아와 수련생들이 단체 법 공부를 하는 환경 속에서 저는 정진하며 착실하게 수련하여 건강도 갈수록 좋아졌습니다. 1년 동안, 글을 모르던 문맹인 저는 ‘전법륜’을 통독할 수 있게 되었고, 점차 ‘각 지역 설법’도 모두 읽을 수 있게 되었으며, 세 가지 일을 질서정연하게 했습니다.
아득한 밤길 속에서, 우리 몇몇 노년 수련생들은 하룻밤 동안, 70, 80리 거리의 산길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진상자료를 배포했고, 진상 현수막을 걸어놓았는데, 중생을 구도하는 그 신성함과 마음이 승화하는 아름다움과 미묘함은 언어로 형언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비록 돈 한 푼도 예금하지 못했지만, 얼마만큼의 돈을 가진 것보다도 더 행복했습니다.
4. 병업관을 잘 넘어 대법의 훌륭함을 실증하다
아들과 함께 사는 동안, 한번 저는 매우 심한 기침을 했고, 한번 기침을 시작하면 온몸이 진동하면서 가슴이 몹시 아팠습니다. 아들 며느리는 제가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고 기침하는 견디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의사를 불러와 링거 주사를 맞게 하고, 복용할 약을 사주겠다고 했으나 저는 모두 거절했습니다. 저는 “나는 수련인이야. 아무 일 없이 나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며느리는 저에게 얼음사탕 두 봉지를 사주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얼음사탕 반 봉지를 먹었고, 기침은 나았습니다. 며느리는 수련인이 소업하고, 신체를 정화하는 상황은 속인이 병이 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 딸과 사위가 외지에서 돌아와 우리는 모두 아들 집에 가서 설을 쇠었습니다. 섣달 스무이렛날, 저는 설을 쇨 물건을 준비하다가 마치 누군가의 손에 밀린 것처럼, 높다란 돌계단에서 넘어지면서 떨어져, 비틀거리다가 바닥의 돌 위에 쓰러졌습니다. 이때, 이마가 부딪혀서 계란만한 크기의 혹이 올라왔고, 얼굴에는 피가 가득했습니다. 잠시 후, 얼굴 반쪽이 붓기 시작했고, 눈도 가늘게 뜰 수 없을 만큼 부었습니다. 앞니가 빠졌고, 입술도 삼각형 모양으로 갈라져 지혈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언저리는 퍼렇고 불그레한 녹자색을 띠어 마치 안경을 쓴 것 같았습니다.
딸과 사위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는 저의 모습을 보고 모두 “너무 무서워요. 감염되겠어요. 얼른 링거 주사를 맞아서 소염해야 해요. 이틀 후면, 설날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아들은 제가 따뜻한 물로 세안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병원에 가보라고 저를 독촉하며 말했습니다. “하필, 섣달 그믐날, 정월 초하루 날에 이런 모습이에요?”(시골 사람들은 새해에 들어 병에 걸려 병원에 가는 것은 일 년 내내 운이 나쁘다고 생각함)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확고하게 말했습니다. “지켜봐. 연공하는 사람은 아무 일 없어. 이틀이면 나을 거야.”
이틀 후, 저의 그렇게 심각했던 부상은 정말 대부분 나았습니다. 저의 갈라졌던 입술을 속인의 이치대로 처리한다면 몇 바늘 꿰매야 하지만, 저는 단지 깨끗한 물로 씻었을 뿐이지만 자연스럽게 나았습니다. 자식들은 묵묵히 저를 관찰하면서 입으로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모두 울림이 있었습니다.
2017년 정월, 또 아들 집에서 설 명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심각했던 천식 병업이 이때 밀려 나왔습니다. 정월 팔일 동이 틀 무렵, 아들과 며느리가 차를 타고 외지에서 돌아왔는데 때마침 제가 기침하면서 숨을 헐떡거렸고, 숨이 차면서 숨을 쉴 수 없었으며, 언제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이 맹렬했습니다.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 정도의 기침은 안 돼요. 의사에게 보이지도 않고 약도 안 드시고, 미룬다고 미뤄서 나아지나요? 미룰수록 더 심해져요.” 저는 소파에서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속인이야. 가서 링거 주사를 맞아야 하고,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야만 병이 나을 수 있어. 나는 수련하는 사람이야. 수련 과정에서 신체를 정화해야 하고, 병업을 제거하여 없애야 해. 누군가 책을 나에게 읽어줘서 들을 수 있으면 좋겠구나.” 아들은 듣자마자 크게 화를 내며 저와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지경이 되었는데 미룬다고 미뤄서 나을 수 있겠어요?!”
아침 날이 아직 밝지 않았고, 저는 아침 버스를 타고 고향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직통 버스가 없어, 헐떡거리며 기침을 하면서 저는 어쩔 수 없이 30리 길을 걸어가서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수련생들은 번갈아 가면서 저에게 책을 읽어주었고, 제 곁에서 법 공부를 하였습니다. 이틀 사흘 동안 맹렬하던 천식은 종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아들과 며느리는 저의 ‘병’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으므로 저를 보러 찾아와서 저를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제가 정말 나아서, 편안하고 평온한 모습을 보았고, 집 앞마당과 뒷마당에 심은 채소와 옥수수가 생기가 넘쳐흐르는 것을 보고 그들은 마음 놓고 돌아갔습니다.
대법의 신기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훌륭함은 제가 말할 필요 없이 그들은 눈으로 보았고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5. 글을 알게 된 경험으로 대법의 초범성을 실증하다
저는 글을 모르므로 막 법을 얻어 법 공부를 할 때, 수련생과 남편이 읽을 때 듣는 것에 의존했습니다. 2008년, 고향집으로 되돌아온 후, 단체 법 공부에 참여하면서, 수련생들과 함께 ‘전법륜’을 읽을 수 없어 저는 몹시 속상하여, 눈물을 흘렸고 책상에 엎드려 울곤 했습니다. 저는 허스(合十)하고 사부님께 청을 드리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부님, 저는 이 책을 제일 읽고 싶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점화하여 주시고, 저에게 가르쳐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하여 단체 법 공부를 한 후,저는 사부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기억을 되돌리면서, 집에 돌아가 스스로 책을 펼쳐 읽었습니다. 읽다가 막히면 녹음을 들으면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책 속에 ‘뭐 호들갑 떨 게 있느냐!(脦瑟)’ 이 두 글자를 모르면 녹음을 듣고 알 수 있게 됩니다. 사부님의 가지 하에, 1년의 세월을 거쳐 ‘전법륜’을 저는 통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와 우리 작은어머니는 모두 글을 모릅니다. 지금은 제가 책을 그녀에게 읽어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향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이 외지에서 돌아왔습니다. 저는 딸에게 저에게 글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딸이 말했습니다. “한 글자, 두 글자를 모르면 그래도 제가 가르쳐드릴 수 있지만, 그렇게 많은 글자를 모르시는데, 제가 어떻게 가르쳐요?” 이듬해 딸이 돌아와 TV를 보다가, 제가 책을 들고 유창하게 읽는 모습을 보고 매우 신기해하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잘못 읽은 곳이 없는지 제가 봐드릴까요?” 딸은 책을 보면서 제가 한 단락 읽는 것을 듣고 신기해하며 물었습니다. “누가 가르쳐드렸어요?” 저는 사부님께서 가르쳐주셨다고 답했습니다. 딸은 웃었습니다.
2016년 딸이 돌아왔습니다. ‘홍음3’, ‘홍음4’에 일부 어려운 글을 제가 잘 몰라서 딸에게 가르쳐달라고 했습니다. 딸은 번체자를 모르며 배운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옆에서 말했습니다. “저는 알아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에게 안 알려줘요.” 제가 말했습니다. “너에게 부탁하지 않아. 언젠가 사부님께서 내가 알게 해주실 날이 있을 거야.” 사부님의 가지와 수련생들의 도움으로 ‘홍음3’, ‘홍음4’를 저는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11권의 ‘각 지역 설법’을 저는 모두 두 번 통독했으며, 신경문의 약간의 글을 몰랐지만, 수련생들이 한번 읽는 것을 듣고 저는 알게 되었으며,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전화를 걸어와 그의 여동생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좀 이상해? 어머니는 하루도 학교에 다닌 적이 없잖아. 한 글자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책을 들고 읽을 수 있게 되고, 통독할 수 있게 된 걸까? 이 대법은 정말 좀 신기해.” 단단했던 얼음이 조용히 녹아내리기 시작했고, 아들의 뇌리에 중국공산당이 주입한 독소가 소멸하고 있었습니다.
6. 파룬궁을 관리하던 간부가 변하다
몇 년 전, 아들이 마을 정부에서 사무실 주임을 맡고 있을 때, 한 직원과 함께 두 개 마을의 파룬궁 수련생들을 관리하였습니다. 아들은 파룬궁을 관리하는 사람으로서, 집에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있고, 또 일부 친척들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그 압력의 크기는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저에게 진상 자료를 배포하지 말고 집에서 수련하라고 하면서 말했습니다. “나가서 일하게 되면 붙잡힐 거예요. 그러면 어머니를 구할 방법이 없어요. 어머니를 보석해서 내올 만한 돈도 없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감옥에 감금된 사람들과 세뇌반으로 납치당해 박해를 받고 있는 파룬궁 수련생들,그들은 모두 나쁜 사람이 아니야. 훔치지 않았고, 빼앗지 않았어. 억울하게 교도소에 갇혀 있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야.” 아들이 말했습니다. “그런 훔치고, 빼앗아서 체포되어 수감된 사람들은 물건을 좀 얻기라도 해서 수지가 맞지만, 파룬궁 사람들처럼 그런 나쁜 일을 하지 않고 감금되는 것은 가치가 없고, 너무 수지가 맞지 않아요!”
아들은 비록 협박을 받고 박해에 가담하는 위치에 있지만, 생각은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아들은 파룬궁의 편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미세한 변화는 중국공산당의 거짓말이 깨지고 있으며, 아들의 머리도 깨어나고 있으며, 아들은 전혀 파룬궁을 박해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파룬궁 수련생이 박해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사실상, 아들이 관리하는 그 마을의 파룬궁 수련생들을 그는 정말 가서 박해하지 않았습니다.
2017년, 현지의 마을 정부, 지역 사회에서 노크 교란을 하면서 파룬궁 수련생에게 서명하여 파룬궁 수련을 하지 않겠다는 태도표명을 하라고 했습니다. 현지 마을의 사회치안종합관리사무실과 지역사회 요원이 저를 찾아오기 전, 먼저 아들에게 알려,외지 마을에서 근무하는 아들이 그들과 협조하여 저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시도했습니다. 아들은 저를 보호해주었고, 제가 박해를 당하게 될까 봐 두려워 말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이전에 수련했지만 지금은 수련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요.”
찾아온 사람은 저에게 파룬궁 수련을 하는지 여부와, 왜 장쩌민을 고소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정정당당하게 대법의 훌륭함을 실증했습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이전에 저의 약병만 해도 한가득이었고, 약과 술은 모두 몇 동이나 되었어요. 파룬궁을 수련한 이후 온몸의 병이 모두 나았어요. 그런 약병과약통을 전부 버렸어요. 저는 독립적으로 스스로 생활하고 있어요. 아들과 딸에게 번거로움을 가져다주지 않고, 십년 이래에 자식들의 의료비에 들어갈 돈을 한 푼어치도 소비하지 않았어요. 며느리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늙은이 저 혼자서 며느리를 도와 둘째를 돌보면서, 병원에 가서 며느리를 보살폈어요. 파룬궁이 이렇게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장쩌민은 파룬궁을 해치니 저는 그를 고소해야 해요.” 저는 그들에게 서명하는 것을 거절하자, 그들은 저에게 그들이 서명을 대신하는 이름 위에 지문을 찍을 것을 요구하면서, 저를 달래며 말했습니다. “지문을 찍는 것은 아무 상관없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지문을 찍어야 하는 이유를 제게 설명해보세요. 지문은 함부로 찍을 수 있는 건가요?” 그들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아들이 전화를 걸어와 물어보았고, 저는 사실대로 그에게 일의 경과를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은 한마디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현지 마을 정부 직원에게 제가 진상을 알린다고 보고했고, 아들은 외지 마을에서 소식을 듣고 여동생을 통해 저에게 조심하고, 안전에 주의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2015년, 저의 휴대전화가 고장이 났습니다. 아들은 저에게 휴대전화를 가져다주러 왔습니다. 집에 사람이 없어 친척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우리 7~8명의 사람들이 단체 법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안색이 크게 변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파룬궁을 박해하지 말고, 나쁜 일을 하지 말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저를 향해서 할 수 있어도, 현지 마을 고향 사람들을 박해하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은 한편으로 저를 뒤따라오면서, 다른 한편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로 알렸습니다. “파룬궁 모임이 있으니, 사람을 빨리 보내요.” 사실 아들은 가장하여 행동한 것이며, 진짜 전화를 걸지 않고, 퇴각하기 쉽도록 공격하는 척하며, 저에게 휴대전화 사용방법을 알려준 후 돌아갔습니다.
2018년, 아들이 마을의 한 술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집으로 돌아왔다가, 문을 열자마자 우리 세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이 책을 들고 법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표정이 너무나 평온해서 이 모든 것이 매우 정상적인 것 같았습니다.
7.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중생을 구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좀 명확하게 말하자면 지금이 정법 중이라 할지라도 중생이 역사상 얼마나 큰 죄를 지었고 얼마나 큰 잘못이 있든 오로지 정법 기간의 중생의 대법에 대한 태도와 대법제자에 대한 태도만 볼 뿐이다.”[3] 저의 아들은 마을 정부의 간부이고, 사람들은 모두 어미인 제가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지금 아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저를 언급할 때, “저의 어머니는 70~80세까지 사시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고 늘 자랑스레 말하며, 자신의 대법제자에 대한 태도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였습니다.
2017년 아들 집에 가서 설 명절을 쇨 때, 아들과 며느리는 새 옷을 장만해주었습니다. 2018년, 아들 직장에서 쫑쯔(糉子), 월병, 과일, 사탕을 나누어주면 바로 제게 가져다주었고, 더우면 더울세라 추우면 추울세라 정성껏 보살펴주었습니다. 누수 방지를 위해 지붕을 만들면서 6천 위안(한화 약 102만원)을 썼고, 이 돈을 저는 이미 지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기어코 저에게 돈을 주려고 했으며, 자발적으로 이 비용을 부담했습니다.
처음으로 되돌아가 생각해보면, 아들이 제대하고 돌아와, 저의 보서 ‘전법륜’을 태워버려 저는 화가 나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손을 대고 몰아붙이던 그 기세등등했던 싸움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지금 저는 아들 집에서 가부좌를 틀고, 거실에서 책을 읽어도 그들은 저를 간섭하지 않고, 제가 책을 제 방안에 놔두어도 그들은 건드리지 않으며, 사부님의 법상을 제 방 안에 걸어두어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중국공산당 군대에서 십여 년 동안 사악한 공산당 문화의 독해를 깊이 받아, 대법과 대법제자를 적대시하던 군인이자, 부모의 수련을 강하게 반대하여 가족이 수련을 포기하게 하였던 아이, 그리고 파룬궁을 관리하던 정부 직원인 아들이 정말 변했고, 선악을 똑똑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정념이 있게 되어, 미혹되어 길을 잃었던 생명은 마침내 구원받을 희망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제자가 한 사람을 구했다면, 단지 한 사람의 개념이 아니라, 거대한 생명 군(生命群)을 구한 것이다.”[4]
사람들은 아들이 진장(鎮長)으로 승진할 것이라고 의론이 분분했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위치에서, 힘닿는 대로 대법제자가 한 지역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보호하고, 대법이 널리 전해져 그 지역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것을 지지할 수 있기를 정말 희망합니다. 근면하게 정무를 보고 국민을 위하며, 선행을 하여 덕을 쌓아, 대법 수련의 귀한 기연을 심어, 자신을 위해 아름답고 훌륭한 미래를 창조하기 바랍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을 구도하는 일을 잘하려면 우선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한다.”[1] 저는 사부님의 이 단락의 법에 대해 이런 체득이 있습니다. 아들의 변화로부터, 한 생명이 구원을 받는 것은, 대법제자의 비바람 속의 수련의 여정을 따라, 십여 년 동안의 긴 세월을 거쳐 온 것입니다. 애당초,저 역시 남편처럼 가족의 정 앞에서 타협하고, 아들과 며느리의 보호 아래 속인의 ‘복 누리기’를 탐내며, 병업 앞에서 속인에 순종하거나 또는 수련 과정에서 태만하여, 잘 수련하지 못하고, 바르게 걷지 못하며, 심지어 각종 박해의 교란 속에서 중도에서 그만두었다면, 또 어떻게 은연중에 꾸준히 곁에 있는 아들을 변화시키고, 그를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을 잘 수련”[5]하는 것은 수련인에게 있어서 끊임없이 정진하고, 끊임없이 제고하는 장기적인 고험입니다. 뿐만 아니라, 특히 박해가 일어나는 환경에서, 중생이 독해를 받는 미혹 속에서, 우리가 법에 부합하고, 바르게 걸으며, 잘 행한 일언일행은 모두 속인의 눈으로 새겨지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사람들이 구도 받게 하는 씨앗이고, 남에게 구원받는 계기입니다.
과거 저의 성격으로 볼 때, 저는 일리가 있다고 지나치게 몰아붙였고, 일에 부딪히면 반드시 이겨야만 그만두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개인적인 이익에서 약간의 손해를 보아도 안 되었습니다. 관개하기 위한 물이 좀 더 일찍, 좀 더 많이 자신의 밭으로 흘러들도록, 이웃과 물을 다투었고 때리고 욕하며 조금도 참아내지 못했습니다. 대법 수련 이후, 저는 곳곳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해야 하고, 일을 함에 있어 타인을 먼저 고려해야 하며,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등 대법의 법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수련인은 우선 참는 것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제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할 때, 저는 참았고, 밭 가장자리를 다른 사람이 다투어 빼앗아 가면 저는 참았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것은 바로 당신이 속인의 이익 중에서 명명백백하게 손해를 볼 때, 절실한 이익 앞에서 당신이 마음을 움직이는가 움직이지 않는가”[2] 다른 사람이 제가 따서 두었던 호박을 훔쳐 갔고, 밭에 있던 옥수수를 다 털어갔으며, 집에 쌓아 두었던 베어둔 땔감을 훔쳐 갔습니다. 저는 어느 집에서 한 일인지 알고 있었지만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술자리에서 남은 음식을 좀 얻기 위해 저에게 욕설을 퍼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평온하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저는 이제 파룬궁을 수련하는 수련인입니다.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계속 도발하며 말했습니다. “이 이틀 동안의 일이 지나도 나는 계속 욕할 거야.” 저는 말했습니다. “아주머니께서 대형 스피커를 들고 욕한다 해도 저는 모두 대꾸하지 않을 거예요.” 때로는 다른 사람과의 충돌을 참기 어려울 때, 곧 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진선인(眞善忍)’을 생각하면, 마음은 바로 평온해지게 됩니다.
대법에서 수련해 낸 선념과 선행은 사람들이 진선인(眞善忍)의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보도록 했고, 저와 주변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융화시켰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긴장감과 냉담했던 관계는 자연히 완화되었고, 좋아지기 시작했으며,자신의 마음도 편해졌습니다. 이전에 저와 갈등을 빚었거나 또는 저의 물건을 훔쳐 갔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저는 그것에 대해 따지지 않았고,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 삼퇴를 권했으며, 그들을 구하기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저는 같은 마을의 몇몇 수련생들과 단체 법 공부를 견지하면서 공동으로 정진했고, 공동으로 사람을 구하는 환경을 열었습니다. 우리 마을의 대대장과 지부 서기를 포함한 백여 가구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삼퇴를 했습니다. 우리는 또 외지의 마을에 가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삼퇴를 권유합니다. 우리 일부 사람들은 글을 쓸 줄 모르기 때문에,삼퇴를 권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쓰게 하며,그들에게 진상 자료를 주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날 사부님을 따라 정법 수련의 길에서 이 일보까지 걸어오면서 우리는 반드시 대법의 요구에 따라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하고, 자비와 인자함을 닦아내야, 정법 수련자가 지닌 바른 에너지장이 갈수록 커지고, 우리들의 수련의 길도 갈수록 넓어지며, 걸을수록 순탄해져, 구원 받는 중생도 갈수록 많아진다는 것을 실감 나게 체득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가르침 은혜에 감사드리고, 사존의 자비로우신 보호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브라질법회에 보냄’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8-2007년 뉴욕법회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11-2010년 뉴욕법회설법’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북미 순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3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27/3844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