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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구하는 마음을 똑똑히 인식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며칠 전 나는 경미한 병업 반응이 나타나 안으로 찾아보았지만, 심성에서 원인을 찾지 못했다.

이때 수련생A가 우리 집에 와서 내 남편이 다시 새롭게 대법수련에 돌아오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사실 나 역시 그가 다시 수련에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런데 A가 도와준다고 하니 속으로 약간 언짢았다. 나는 수련에서 적지 않게 곤두박질쳤고 남편은 이런 일들을 다 알고 있었다. 수련생이 그와 교류하자 남편은 내가 잘하지 못했던 지난 일들을 꺼내면서 자기가 오늘 이 상태가 된 것이 모두 내 책임이고 내가 조성한 것이라고 했다. 그의 현재 상황은 주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만, 내가 저지른 잘못을 수련생이 아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이때 내게 병업이 나타난 원인을 문득 깨달았다. 바로 명을 지키려는 마음이었다. 원인을 찾고 나서 더는 자신의 완벽한 이미지를 수호하려 하지 않았고 용기를 내어 수련생 앞에서 과거에 잘못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명을 구하는 마음을 인식하고 뿌리째 제거해버렸다.

여태껏 나는 줄곧 자신이 명리심이 담담하고, 심지어 없다고 여겼다. 학력이 높지만, 겉으로 볼 때 줄곧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 나에게 명리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명리심이 얼마나 강한지 이번에 문뜩 깨달았다. 명을 수호하려고 심지어 수련생이 남편을 도와주는 것도 원치 않았으니 말이다. 얼마나 명을 구하는 마음이 강하고 이기심이 큰가. 포도줄기를 집착심의 뿌리에 비유한다면 내가 집착심의 뿌리를 캐내자 명을 구하는 마음의 다른 표현들은 마치 한 알 또 한 알의 포도송이처럼 끌려 나왔다. 그래서 이후 며칠 사이에 연이어 수많은 명을 구하는 표현을 똑똑히 인식했다. 그러면서 집착심을 찾으려면 뿌리를 찾아야지 표면에 머물러서 집착심이 조성한 표면반응만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석하게 깨달았다.

우리 부부는 결혼한 지 10여 년인데, 남편이 장기간 내게 손찌검을 했지만 나는 줄곧 참고 이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쁜 영향 때문에 중생을 망쳐서는 안 되며, 내가 이 정도 감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사 그가 현재 제대로 수련하지 않더라도 구세력이 그를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세인이 오해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속인들은 모두 그가 수련하는 줄 알고 있음)

예전에는 줄곧 내 마음이 똑바르고 법에서 깨달았다고 여기면서 늘 수련생에게 이 방면의 심득을 얘기했다. 지금 갑자기 내가 늘 말하는 배후에는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이 아주 대단하고 위대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생을 구도하려는 마음 뒤에 명을 구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전법륜’을 배울 때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자비심(慈悲心)에서가 아니다. 그는 그 명리심(名利心)을 전혀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비심이 아예 생길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명성을 잃을까 두려워, 자기가 이 병을 얻지 못함을 한스러워한다. 그는 이 명성을 잃을까 봐 몹시 두려워하는데, 명성을 추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렬한가!”[1] 당시 화들짝 놀랐고 갑자기 내가 남편이 강제로 가한 시련을 이용해 명을 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남편이 가한 시련을 감당한 이유가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서까지 자신의 ‘위대한 이미지’를 고수하려 한 것이다. 명을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가! 하지만 줄곧 깨닫지 못했다. 사실 많은 집착심이 보기에는 올바른 생각과 행위 뒤에 숨어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이 우주 중에는 이런 이치가 있는데, 당신 자신이 가지려고 하는 것은 누구도 상관할 수 없으며, 또 당신을 좋다고 할 수도 없다.”[1] 그때 또 한 번 화들짝 놀랐다. 알고 보니 남편이 나에게 가한 시련은 명을 구하기 위해 나 스스로 원한 것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상관할 수 없고 사부님께서도 도와주시지 못하며 나를 좋다고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가정에서 존재하는 명을 구하는 마음을 똑똑히 인식하니 갑자기 교류문장을 쓸 때의 명을 구하는 마음을 깨달았다.

여태껏 나는 밍후이왕에 보낸 수련심득이 발표된 사실을 주위 수련생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주위에 나를 잘 알고 있는 수련생들이 알아채면 그들에게 다른 수련생에게 말하지 말라고 알려주었다. 게다가 진심으로 다른 수련생이 알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내가 교류문장을 쓰는 부분에서 명을 구하는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교류문장을 쓸 때 자신이 깨달은 법리를 쓸 때는 매번 모두 제1인칭인 ‘나’라고 썼고, 곤두박질치고 잘못을 저지른 후 자신의 심성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경우에는 ‘수련생A’로 대체했다. 이 배후에도 아주 강한 명을 구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 마음은 현지 수련생 가운데서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내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밍후이 수련생이 알까 봐 두려워하는 데서 표현되었다. 문장을 발표할 때 자신이 밍후이 수련생 마음속에 있을 완벽한 모습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사실 나를 모르는 밍후이 수련생 앞에서까지 이 명을 수호하려 한 것이다. 어느 날은 문장을 쓸 때 마음을 굳게 먹고 자신이 어떻게 곤두박질쳤는지를 써서 투고했다. 그리고는 불안해하면서 속으로 ‘밍후이 수련생이 알게 됐으니 어쩌지? 이후에 투고하면 수련생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 문장을 발표하지 않으면 어쩌지?’라고 생각했다. 명을 구하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가.

이것만이 아니다. 문장 속에 만약 ‘내’가 곤두박질친 후 법리를 깨달은 부분이 나오면 이렇게 생각했다. ‘전 세계 대법제자가 모두 볼 테니 얼마나 망신스러운가. 또 교류문장을 본 수련생들이 나를 얕보지 않겠는가?’ 명을 구하는 마음이 정말 한도 끝도 없었다.

계속 생각해보니 나는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사람을 만나면 주저하며 말을 잘 하지 못하고 대인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다. 사실 근본 원인은 말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었다. 처신을 잘하지 못해서 망신당할까 봐 두려워한 것이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열등감을 느낀 것은 역시 명을 구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놀이나 행사 활동에 별로 참여하지 않았는데 수련한 후에는 사람 마음이 담담한 것이고 잘 깨달은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에야 놀이나 행사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가 자신이 행사 중에서 망신을 당할까 봐 두려워서 그런 것이고, 모두 명을 구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면해 진상 알리기를 잘 못하는 원인도 두려움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말을 거는 것이 아주 부끄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전히 명을 구하는 마음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명을 구하는 마음을 똑똑히 인식했고, 앉으나 누우나 명을 구하는 마음이 돌덩어리처럼 내 몸속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온몸이 너무 홀가분해졌다. 내가 명을 구하는 마음을 인식한 것을 보시고 사부님께서는 또 한 가지 작은 일로 나를 점화해주셨다.

어느 날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이제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 잘 하자. 나는 지금부터 집안일을 잘 할 것이고 더는 시간을 낭비한다고 여기며 귀찮아하지 않을 거야. 대법제자는 어디에 가든 모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거든. 예전에 나는 집에 손님이 와야 바로 정리했는데 이 마음은 바르지 않아. 이건 무엇 때문에 잘하는 거지?” 아이는 내 말을 이어 말했다. “명리 때문에요.” 나는 말했다. “네 말이 딱 맞아. 나는 명을 구하기 위해 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자 아이는 명에 대한 그의 이해를 얘기하고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진심으로 한 가지 일을 잘하려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잘하려는 것은 명을 구하는 마음이에요.” 듣고 나서 또 마음이 흠칫했다. 명을 구하는 마음을 얼마나 똑똑히 말했는가.

아이는 아홉 살이 채 안 되고 마음이 깨끗하기에 명을 구하는 마음을 이렇게 똑똑히 보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많은 일에서 나는 진심으로 잘하려 한 것이 아니라 모두 생색내기이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명을 구하는 마음이 아닌가! 알고 보니 명을 구하는 마음은 이미 내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모두 표현되었고 너무 많아 자연스러워졌다.

사부님께서는 질투심을 이야기하실 때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질투심의 표현이 극히 강렬하며, 강렬함이 이미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자신마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1] 그리고 과시심 부분에서 말씀하셨다. “우리 많은 수련생이 속인 중에서 수련하기 때문에 많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데, 많은 마음이 이미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지만, 그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한다.”[1] 그제야 내가 느끼지 못한 마음들이 나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강렬해서 이미 자연스러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는 감히 나에게 이 마음, 저 마음이 없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속인 속에 있으면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집착들을 모두 갖고 있고 다만 정도만 다를 뿐이다. 표현되어 나오거나 숨어있거나를 불문하고 모두 하나씩 찾아내 닦아버려야 한다.

나중에 어느 날 ‘진심이 아닌 겉으로만 잘 하려는’ 명을 구하는 이러한 표현에 대해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었다. 수련하면서 나의 많은 행위가 바로 이러했다. 속인에게 대법이 좋다고 인식하게 하려고 잘 표현했는데, 예를 들면 일을 좀 더 많이 하거나 채소를 살 때 이것저것을 고르지 않는 등등이었다. 안으로 찾아보니 사실 일을 전혀 더 많이 하고 싶지 않았고, 손해를 보면 마음도 불편했다. 법에 용해되어 완전히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속인에게 내가 좋고 파룬따파가 좋다고 말하게 하려고 일의 표면에서 잘 한 것으로 실은 유위(有爲)였다.

오직 내심에서 법을 인식하고 생각과 행위가 법에 동화돼야만 그 층차 법의 자비와 위엄이 드러난다. 그래야 비로소 법을 실증할 수 있고 우리와 왕래하는 속인들이 우리의 행위에서 내심으로 대법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다.

개인의 일부 인식으로 법에 있지 않은 부분은 수련생들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9년 4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4/7/3847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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