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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심성 고비를 반복적으로 넘은 데에서 생각한 것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의 수련 경과를 반성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에게 있는 교훈, 촉진이 있었던 점과 수련생에게 거울이 될 수 있는 내용을 다듬어냈다. 자신이 걸어온 수련 상태를 자세히 검토하고 사존의 최근 설법을 반복적으로 배우면서 나는 갑자기 내가 수련의 길에서 부딪힌 난관, 어려움이 모두 ‘정(情)’에서 비롯된 것임을 또렷이 느꼈다. 정은 내가 수련의 길에 들어선 근본 집착은 아니다. 내가 법을 얻기 전의 반평생을 돌이켜보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가정에서부터 사회에 나간 후의 불운했던 과정, 인생에 대한 막막함에서 나는 고달프고 힘들게 살았다.

나는 연분이 있으므로 기쁘게 대법을 얻은 것이다. 내가 법을 얻은 것은 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무슨 명확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처음 ‘파룬궁(法輪功)’ 책을 보고 사존의 지난 설법을 들었던 그 날부터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았다. 그때부터 정말 생명 해탈의 즐거움과 생활의 행복감을 느꼈으며, 이후로 모든 것을 담담히 보고 생활이 고달프고 힘든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수련의 요구가 높아지면서 특히 몇 차례 심성 관 중에서 나는 때때로 수련하기 전에 있었던 인생의 고달픔과 힘든 느낌이 나왔다. 그러나 세 가지 일을 하면서 고달프고 힘든 것은 아닌데,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 곤혹이 나를 괴롭혔고 나를 한동안 의기소침하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원인을 따져보니 내가 진정으로 법에서 ‘정’의 해로움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몇 차례 난관을 넘을 때 모두 같은 문제였지만 다른 방식으로 나타났다. 나는 진정으로 ‘정’이 나의 수련에 준 교란을 인식하지 못했고 내 수련 제고의 장애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정법을 수련하는 제자는 서약을 실천해야 한다. 정을 닦아버리지 않으면 어찌 자비가 있을 수 있고 더 많은 중생을 구할 수 있겠는가? 이 점을 인식하고 이 기회를 빌려 이 방면의 경과와 개인 층차에서 약간의 체험을 말하고자 한다. 교류하고 공동으로 높이려는 뜻에서이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일이든지 모두 인연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사람은 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바로 사람에게는 정(情)이 있으며, 사람은 바로 이 정을 위해서 산다. 육친정ㆍ남녀지정ㆍ부모지정ㆍ감정ㆍ우정, 매사에 정분(情份)을 중시하며, 곳곳마다 이 정을 떠날 수 없다. 하려고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기뻐하거나 기뻐하지 않거나, 사랑과 미움, 전반 인류사회의 모든 것이 전부 이 정(情)에서 나온 것이다.”[1]

나는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전후 인생 과정이 단조로워 경험한 것이 적고 심지어 삶에서 ‘정’을 체험하지 못했다. 특히 어른이 된 후 악당의 ‘네 가지 정돈(四清)’, ‘문화대혁명’, ‘반우파 투쟁’, ‘비림비공(批林批孔)’의 계급 투쟁 연대에 생활했고 결혼 후 시댁과 친정 모두 ‘5종 반동분자’에 속해 투쟁 대상이었다. 정말 인간 세상의 쓸쓸함을 다 겪는 느낌이었다. 정을 갈망하면서, 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였다.

‘정’은 수련의 대 금기(大忌)

법을 얻은 후 사존을 굳게 믿고 대법을 굳게 믿어 오늘까지 꿋꿋하고 바르게 걸어왔다.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정법 노정을 따라간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인간에게 갈망하여 얻을 수 없는 ‘정’을 자기도 모르게 수련에 끌어들였다. 그래서 전체에, 수련생에게, 자기의 수련에 일정 정도 부정적인 영향과 손실을 끼쳤다.

예를 들면 내가 유리걸식할 때 수련생 A가전력을 다해 도와준 것에 감격스러워하는 정을 잊기 어려웠다. 그가 노동교화를 받고 형기를 마치기 전에 나왔는데, 그 후 나는 그가 사오(邪悟)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떤 수련생이 나에게 “그가 세뇌 반에서 유다와 밀모(密謀)하여 당신을 붙잡으려 한다.”고 통지했는데도, 그는 나의 친구이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며 나와 다른 한 집을 떠난 수련생의 거처를 그에게 알려주었다. 결국, 그가 직접 경찰을 대동해서 나와 그 수련생을 납치하러 왔다. 이 교훈을 거울로 삼아야 했지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줄곧 자기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었고 그 수련생에게도 메울 수 없는 손실을 빚었다.

수련생 B는 재혼한 아내를 데리고 옮겨 다니다 우리 지역에 와서 도움을 청했다. 나는 열성적으로 감당하려 했다. 수련생 B는 여러 번 불법적으로 갇혀 박해받아 직장을 잃은 데다 본처는 아들을 데리고 그를 떠나갔기에, 그들의 경제 상황과 안전을 고려하여 최선을 다하고 세심하게 그들을 돌봐 주었다. 어려움에 부닥친 수련생을 돕는 것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몇 년간 왕래하면서 나는 모르는 사이에 정을 수련에 섞어 넣었다. 내가 그들의 일부 기술에 의지했으니 그들의 정을 빚졌다고 생각해 그들을 우리 집에 와서 먹고 마시고 살게 한 것이다. 당연한 줄로 여기고 아무 말이나 다 했다. 오래되자 엄숙한 수련, 수련생 사이의 신성한 인연이 속인의 친근함으로 변했다. 인정으로 왕래하면서 가까운 수련생과 먼 수련생으로 나누었다. 수련생은 보고 있었고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정을 대법에 끌어들이지 마세요!”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결국, 내가 바르게 걷지 않아 일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법에 있지 않았는데, 수련생 B 부부는 한 수련생이 내가 수련생 B의 말을 한 몇 마디 말을 단장취의해 한 말을 듣고 믿어 아주 큰 간격이 형성되어 나를 떠나갔다. 고통 속에서 나는 여전히 안으로 원인을 찾지 않고 불평하는 사람 마음으로 생각했다. “내가 다년간 애써 한 일이 단장취의 한 몇 마디 말보다 못한가?” 여전히 정욕이 넘치는 사람이며 정을 뛰어넘어 수련 중의 일을 대하지 못했다. 이 일은 당시 현지 많은 수련생에게 심리적으로 교란을 주었고 전체 수련 환경과 중생 구도(救度)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정 때문에 나와 수련생에게 빚어진 유사한 일들이 적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일일이 예를 들지 않겠다.

이 한 번 또 한 번의 심성 고비로 나는 수련하면서 고달프고 힘든 느낌이었다. 지금 나는 마침내 안으로 찾을 줄 알게 됐고 법에서 깨달았다. 나는 사람들 속에서 갈망하며 얻지 못한 정을 수련생 몸에 쏟았고 보답을 갈망했다. 기점이 어긋났고 마음이 불순했으며 법에 있지 않았다. 정을 나의 선량함으로 여겼고 사람 마음, 사람의 이치로 수련 중의 문제를 보았으니 당연히 힘들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다.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했다.

사존께서는 나에게 한 번, 또 한 번 이 정을 닦을 기회를 주셔서 나는 반복적으로 같지 않은 형식의 같은 난관을 겪었다. 제자가 깨달음이 너무 부족하여 이제야 인식하고 깨닫게 된 것이 유감입니다. 인식했으니 지금부터 반드시 하루빨리 바로잡고 수련 중에 끌어들인 정을 닦아버리겠습니다.

‘정’의 여러 가지 표현

우리 수련인은 대부분 시간을 수련생과 접촉하고 왕래한다.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 마음을 닦아버리지 못했을 때 사람의 정이 생긴다. 이 방면의 표현은 수련에서 제고됨에 따라 수련생들이 중시해야 한다. 내가 본 것과 겪은 체험에서 보면 사람의 정, 감정, 수련생 간의 정이 깊어져 수련생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정체(整體)적인 협력을 이루지 못한다. 예를 들면 감정이 맞는 수련생과는 말이 끝이 없고 일이 있으면 열성적으로 돕지만, 맞지 않는 수련생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이 있어도 들은 채 만 체하고 본인과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법 공부할 때도 마음에 드는 수련생을 찾고 본인이 눈에 차지 않는 수련생은 배척하고 함께 법 공부하려 하지 않는다. 당 문화와 같은 마음으로 ‘삼삼오오’ 어느새 소집단을 이룬다. 이런 행위는 본인의 제고를 가로막고 수련생 간에 간격을 더 크게 하고 중생 구도에 영향을 끼친다.

육친의 정, 자녀에 대한 정, 부부 정이 있는 수련생이 수련과 가정 관계를 바로잡지 못한 것을 보았다. 가족이 누리는 단란함을 만족하게 하려고 모든 명절, 주말에는 반드시 가족과 모여 식사한다. 음식, 과일을 사고 만들면서 하루하루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 그러나 20년을 수련하면서 여전히 남몰래 세 가지 일을 하고 가정에서는 여전히 ‘파룬궁(法輪功)’ 세 글자를 언급하지 못한다.

어떤 수련생은 배우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속인 상태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종종 가족과 함께 국내 국외에 여행을 간다. 그러나 집에는 대법 책을 감히 두지 못하고 친척, 친구들에게 본인이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을 감히 알리지 않고 수련생이 그의 집에도 오지 못하게 하면서 종일 조심스럽게 생활한다. 아울러 나무랄 데 없이 육친을 돌보지만 가정 수련 환경은 20여 년이 되어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어떤 수련생은 전력을 다해 손자와 자녀를 위해 봉사하면서 많은 정력과 시간을 소모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진정으로 대법을 수련하나니 오로지 이것만이 큰 일이로세”[2]를 해내지 못하고 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수련을 바로 놓지 못하면 자기를 해치고 가족도 해친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육친정(親情)에 집착함은, 기필코 그로 인해 지치고 얽매이며 마에 사로잡히게 됨이라, 그 정사(情絲)를 잡아 쥐어 일생토록 방해받으니, 나이가 들면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다.”[3]

‘정’은 집착의 뿌리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에게는 정이 있기 때문인데, 화를 냄도 정이요, 기뻐함도 정이요, 사랑함도 정이요, 증오함 역시 정이요, 일하기 좋아함도 정이요, 일하기 싫어함 역시 정이며, 누가 좋고 누가 나쁘게 보이며, 무엇을 하기 좋아하고 무엇을 하기 싫어하는 일체가 다 정이라, 속인은 바로 정을 위해 산다. 그렇다면 한 연공인(煉功人)으로서, 한 초상(超常)적인 사람으로서는 이런 이치로 가늠할 수 없으며 이런 것을 돌파해야 한다. 그러므로 정(情) 중에서 파생되어 나온 많은 집착심을 우리는 그것을 담담히 보아야 하며 최후에는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1] 사실 ‘정’은 결과적으로 사(私)에서 파생해 나온 것이다. 질투, 쟁투, 명을 구하고, 원망, 이기심, 자대(自大)한 것은 모두 정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수련생 사이에 간격을 조성하고 정체(整體)적인 협력, 잘 조율하는 것에 영향 주고 수련자가 정진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한 수련자로서 정법시기 대법제자는 반드시 넓은 흉금이 있어야 하고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여도 여유가 있듯이 평온해야 자비이다. 자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하는 무사(無私)의 경지이고 영원한 박애이며 상해가 있을 때 마음에 전혀 파문이 일지 않고 편들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정은 위사위아(爲私爲我)한 삼계 내 물질이다. 그것을 똑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닦아버려야 한다. 그것은 수련의 금기이고 집착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많은 중생의 구도(救度)를 가로막는다.

개인의 현 단계 수련의 약간의 깨달음이니 적당하지 않은 점은 수련생께서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시: ‘홍음-법을 얻다’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수련자 금기(修者忌)’

 

원문발표: 2019년 3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15/3827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