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80년대 후반 한 지식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온실의 화초처럼 좌절도 없고 어려움도 없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1996년 부모님은 잇따라 파룬궁을 수련했다. 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기이한 효능이 부모님의 몸에 나타났다. 더욱 신기한 것은 대법을 수련한 후 아버지는 더는 초조해하며 쉽게 화를 내지 않았고 돈과 권력의 이욕(利欲)이 가득한 상업계에서 도덕을 굳게 지켜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어머니는 의술이 정밀하고 뛰어나지만, 사례비와 수수료를 받지 않는 보기 드문 의사가 되었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환자가 점점 많아졌다. 나도 대학 입시를 몇 달 앞두고 대법 수련에 들어왔다. 나의 세계는 이때부터 다른 한 문이 열렸다.
마난(魔難) 속에서 굳게 견지하다
1999년 7·20, 중국공산당, 장쩌민은 파룬궁 박해를 시작했다. 부모님과 잘 아는 수많은 대법제자가 하룻밤 사이에 감옥에 갇혔고 나도 공개적으로 신앙하고 수련하는 환경을 잃어버렸다. 이때 남자친구가 나의 생활에 들어왔다. 그런 두려운 환경하에서 대법 수련을 이해해 주고 지지해준 그가 매우 기특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우리는 바로 결혼했다.
시골에서 태어난 남편은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시부모님은 순수한 농민이며 지식이 없었다. 나의 가정환경과 커다란 차이가 있었지만, 부모님과 나는 대법 “진(眞)ㆍ선(善)ㆍ인(忍)”의 법리로 자신을 요구하고 모순에 부딪히면 자신의 잘못을 찾고 시댁을 너그러이 대했다. 후에 남편이 대학원에 다닐 때 생계는 거의 나의 월급으로 유지했다.
남편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남편이 돌아오면 경제부담이 적어지고 집안 형편이 좋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은 나와 상의도 없이 시부모와 80여 세의 시할머니를 모셔와 함께 생활하겠다고 결정했다. 이에 나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매우 억울했고 그가 너무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큰일을 나하고 상의도 안 한다는 것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후에 생각해 보니 자신은 대법제자이고 마땅히 시부모를 돌봐드리고 포용해야 옳은 것이었다. 하여 현실을 마주했다.
이때부터 우리 일가족 6명은 4대가 함께하고 시어머니 두 명에 며느리 두 명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생활했다. 할머니는 연세가 많으셔서 행동이 느리고 시아버지는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오랫동안 우울했으며 시어머니는 성격이 거칠어서 화를 내면 끝까지 밀어붙였다. 집의 자물쇠도 두 개나 부수어 버렸다. 남편은 고집스럽고 게으르며 퇴근하면 전자게임을 했다. 하지만 나는 업무가 매우 바빴고 퇴근하면 매일 이런 가족을 마주해야 했는데 어떤 때는 정말로 어려웠다!
속상할 때마다 나는 사존의 말씀을 생각했다. “내가 과거에 수련할 때에 많은 고인(高人)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1] 모순을 만나면 억지로 참았는데 매우 고생스러웠다. 그때는 법을 적게 배우고 정진하지 않았으며 안으로 자신을 찾을 줄도 몰랐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2] 그런데 나는 이런 “참음”이 아니었다. 집착심을 내려놓지 못했기에 무리한 참음에 마음속에 매우 큰 원망이 쌓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자신은 대법에 대한 이해가 매우 얕았다.
비록 원망을 품고 참았지만, 남편은 여전히 대법 수련의 좋은 점을 보아 냈다. 그는 대법 진선인의 법리를 인정했다. 우리 이 세대의 사람으로 말하자면 만약 내가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그들 온 가족 4대가 도시에서 함께 생활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안다. 그렇다. 만약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나처럼 어려서부터 호강하며 살아온 도시의 외동딸이 어떻게 이렇게 큰 가족을 포용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대법제자에 대한 미친듯한 박해 속에서 더욱 큰 폭풍이 가정으로 닥쳐왔다.
시부모는 사악한 당의 선전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시아버지는 신불(神佛)을 믿지 않았고 대법제자가 알리는 진상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사악한 당의 박해가 나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특히 자기 아들의 앞길에 영향을 끼칠까 봐 걱정했다. 나의 아이가 첫 돌 넘었을 때 아버지는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리다가 모함당했다. 시어머니는 아버지가 경찰에 연행되고 가산을 몰수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매우 무서워했다. 매일 집에 돌아오면 울상을 짓는 시부모의 얼굴을 보아야 했다. 우리가 대법을 수련한 걸 원망하고 아버지가 진상을 알린 걸 원망했으며 심지어 아이에게 나의 부모와 접촉하지 못하게 했다. 남편의 성질도 점점 나빠졌다.
나는 그들이 받는 압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안다. 그때 나와 어머니는 사악의 위협을 감당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악한 박해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남편 일가가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매일 웃는 얼굴로 명랑하게 그들을 대함으로써 그들의 압력을 완화하고자 노력했다. 서서히 시부모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1년 후 아버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일가족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뜻밖에 남편은 큰 소리로 자신은 더욱 좋은 사람을 찾았으니 나와 이혼하겠다고 나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박해당한 음영에서 나오지도 못했는데 남편의 불가사의한 행동은 나에게 방할이나 다름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은 친구들 사이에서 나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해졌는가를 말하면서 자신의 외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남편의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이혼은 별거 아니라고 여겼다. 진짜로 내가 당신 아들의 앞날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더욱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여겼다.
놀람, 억울함, 원망, 기만당하고 자존이 짓밟힌 느낌, 얼마나 되는지 모를 고통스러운 정서가 제방이 무너지듯 한꺼번에 마음속에서 올라왔다. 그때 “나는 대법제자다”라는 일념밖에 없었고 아무리 고생스럽고 어려워도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붕괴되지 않았고 남편이 외도한 추행에 보복하지도 않았다.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하고 그와 소통했다. 솔직하게 그 여성을 만나보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은 굳이 나와 이혼했다. 그러나 그 여성은 곧 그를 떠났다.
나는 내심 감개가 무량했다. 대법이 널리 전해지고 사존께서 자비로우셔서 남편의 일가족도 대법 속에서 혜택을 받았지만, 공산당의 두려운 고압 하에 어쩔 수 없이 양심을 묻었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 자비로운 사존께서 나를 가지(加持)해 주셔서 지나올 수 있었다.
이혼한 후 딸을 데리고 부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다시 예전의 조용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회복했다. 얼마 안 되어 전 남편은 재혼하여 또 딸을 낳았다. 시부모님은 이미 시골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전 남편 일가족은 그리 잘 살지 못했다. 그는 주식을 하면서 십여만 위안(약 2천여만 원)의 빚을 져 딸의 양육비도 자주 밀렸다. 시부모님은 고향에 돌아간 후 아들 걱정에 건강이 점점 못해졌다. 나는 그들이 대법에 저촉했기에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됐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속의 원망으로 인해 그들과 거의 왕래가 없었다. 시부모님은 나의 딸을 보고 싶다고 전화에서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얼버무리며 회피했다. 대법제자로서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나에게 한 가지 일을 말해 주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와 잘 아는 한 아주머니가 있는데 큰 사장인 남편이 밖에 여인을 두었지만, 아주머니는 비난하지 않았다. 어느 날 남편이 또 그 여인에게 가려 하자 아주머니는 대법 진상 호신부를 하나 주면서 그 여인에게 전해 주라고 했다. 그녀가 성심껏 “파룬따파 하오(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워 평안을 보장하기 바랐다. 그녀의 남편은 눈물을 흘렸다. 그 후부터 사악이 어떻게 그녀를 박해해도 남편은 그녀를 보호해 주었다. 듣고 나서 나도 눈물을 흘렸다.
한 수련생이 말했다. 대법 속에서 선을 수련하면 자그마한 보답도 보이지 않는데 당신은 그래도 베풀고 선을 행할 것인가? 이 말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대법제자는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한다. 무수한 수련생이 거대한 난(難) 속에서 은혜와 원한을 내려놓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데 수련해낸 것은 어떠한 흉금이고 어떠한 선인가? 그런데 나는 여전히 ‘개인적인 원한’ 속에서 맴돌고 있다. 정말로 부끄럽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생각에, 법이 커서, 우주대법 이잖은가, 일체를 풀 수 있으며, 오직 마음만 열어놓으면, 오직 관용할 수만 있으면 내 생각에 무엇이든 모두 개변할 수 있다.”[3] 다른 사람을 바꾸려면 반드시 자신을 바꾸고 자신을 바꾸려면 반드시 수련 중에서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매일 많은 양의 법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법 속에서 자신의 원한이 점점 약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것으로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반드시 선행으로 전남편 일가족을 대해야 한다. 전남편이 딸을 데리고 놀러 가거나 그의 집에서 묵고 오면 나는 사전에 안배를 잘하여 서서히 걱정과 우려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딸의 낡은 옷과 완구, 서책도 정기적으로 전남편에게 가져가라고 했고, 또 그의 작은딸에게 주게 했다. 딸은 아줌마가 매우 기뻐하고 여동생도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줌마가 자신도 잘 돌봐준다고 했다. 목욕도 시켜주고 빨래도 해주며 함께 놀아준다고 했다. 한번은 케이크 가게 앞에서 전남편 가족과 딸이 화기애애하게 웃고 말하면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마음속에서 여전히 꿈틀했다. 하지만 얼른 자신에게 나는 대법제자이다, 무엇이든지 모두 직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피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면서 그들과 인사했다. 전남편은 좀 어색해했지만, 그의 아내는 미소를 지으면서 나에게 응답했는데 모든 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사존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대법 속에서 선을 수련하면서 나의 원망은 점차 사라졌다.
후에 어머니의 격려 하에 직접 딸을 데리고 연로한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시골에 내려가기로 했다. 이 결정에 나의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친구들은 내가 대법을 수련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설득했다. “생각 잘해, 애초에 그들은 너 한데 어떻게 했는데, 만약 나라면 평생 보지 않을 거야.” 나는 말했다. “이렇게 많은 대법제자들이 모두 선으로 은혜와 원한을 풀 수 있는데 나도 분명 해낼 수 있어.”
말은 이렇게 해도 나에게는 여전히 자아를 내려놓고 심령이 승화하는 과정이었다.
첫해 방학에 북방의 친척을 방문했는데 마침 전 남편의 고향을 지나갔다. 나는 딸을 데리고 하루 묵었다. 비록 하루뿐이지만 어색했고 마음속의 원망은 여전히 매우 강했다. 하지만 나는 참았다. 억지로 직면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시부모와 별말도 하지 않았다. 짧은 하루였지만 시부모는 매우 기뻐하셨다. 돌아온 후 마음은 여전히 개운하지 않았다. 이 원망하는 마음을 안고 어떻게 갈등을 풀고 대법을 실증할 것인가? 아직도 바꿔야 한다.
이듬해 방학에 또 딸을 데리고 갔다. 이번에 시아버지는 심각한 혈전이 있었다. 걸으면 숨이 차서 골목을 걸어 나오는 것도 어려웠다. 할머니는 90여 세여서 침대에 누워만 계셨는데 전부 시어머니가 안아서 올리고 내리면서 시중을 들었다. 그들이 이렇게 어려운 것을 보고 나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며칠 매일 밥을 해 주고 집안일도 거들어 주었다. 나는 또 한 번 용기를 내어 시부모에게 대법 진상을 알리고 대법이 세인들에게 가져다준 아름다움을 알렸다. 시아버지께 호신부를 드리자 이번에는 웃으면서 받았다. 시어머니는 호신부를 시아버지의 베게 밑에 놓았다.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성심껏 ‘파룬따파 하오(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 하오(진(眞)ㆍ선(善)ㆍ인(忍)은 좋습니다).’를 외우라고 당부했다. 시아버지가 말했다. “그래, 기억했어. 매일 일어나면 외우마.”
집에 돌아온 후 시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아버지는 정말로 매일 아침 일어나면 곧 ‘파룬따파 하오(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웠다고 했다. 후에 시아버지에게 문안 전화를 걸었다. “다음번에 제가 다시 뵈러 갈 텐데 연공을 배우실래요?” 시아버지가 말했다. “좋아!”
세 번째 방학에 다시 딸을 데리고 시부모를 뵈러 갔다. 물론 보물-사존의 설법, 연공 동작이 담긴 MP4도 가지고 갔다. 시골에 있는 그 며칠에 매일 시아버지께 연공을 가르쳐 드렸다. 시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열심히 배우는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얘야, 네 시아버지가 견지할 수 있는지 없는지, 건강이 좋아질 수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너의 이 효심만으로도 우리는 만족한단다!”
다섯 가지 공법을 시아버지는 매우 빨리 배웠다. 포룬(抱輪)을 한 번에 반시간 견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아버지와 함께 사존의 광저우설법 제1강을 들었다. 어느 날 저녁 시아버지는 기계로 자신의 산소 포화도를 측정하고 갑자기 기뻐하며 소리쳤다. “정상이야, 정상이야!” 나와 시어머니는 기뻐서 달려가 보았다. 내가 말했다. “대법이 신기해요!” 시아버지는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의 부모님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후에 나를 위안해 주면서 말했다. “장쩌민 그 사람들이 진 빚은 어느 날엔가는 반드시 청산할 거야.” 시아버지는 정말로 변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기뻐했다.
떠날 때 시어머니는 정거장까지 배웅했다. “아이를 데리고 우리를 보러 와 줘서 고맙네. 이웃들은 모두 자네가 양심이 있다고 말한단다!” 나는 말했다. “우리 온 가족은 대법을 수련하여 혜택을 받았어요. 어머님도 혜택을 받기 바라요.”
얼마 전에 시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아버지는 요 반년 새에 건강이 크게 좋아져 기분이 좋아졌으며 그리 숨차 하지도 않고 골목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시부모가 대법에 대한 놀라운 태도에 나도 놀랐다. 사존의 무량한 자비를 체험하고 목격했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사실 자비는 거대한 에너지이며, 바른 신(正神)의 에너지이다. 자비로울수록 이 에너지는 더욱 커서 어떤 좋지 못한 것도 모두 해체할 수 있다. 이는 과거 석가모니든 그런 수련인이든 모두 말한 적이 없다. 선의 최대 표현은 바로 자비이다. 그는 거대한 에너지의 체현이다. 그는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모두 해체할 수 있다.”[4]
대법 수련자의 선에 어떠한 힘이 있는지 나는 마침내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대법이 전 세계에 널리 전해지고 사존의 무량한 자비는 무수한 억울함과 원한을 풀었으며 무수한 세인이 심신에 수혜를 입었다. 나는 알게 됐다. 대법제자는 오로지 이런 순진하고 사심이 없는 선이 있어야만 에너지가 있고 사람 마음을 바꿀 수 있으며 진정하게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제자는 사존의 자비로운 제도에 감사드립니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
[3] 리훙쯔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설법’
[4] 리훙쯔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9-2009년 워싱턴DC국제법회설법’
원문발표: 2019년 3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23/38418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