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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담축제’ 무적수가 부처의 인연을 만나다

글/ 네이멍구 대법제자 바터얼

【밍후이왕】 나는 몽골족 목축민 가정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생활이 곤란했다. 철이 들면서 나는 부모 모두 병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간질환자로 한 번 발병하면 1~2주 일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고아였고 십여 세에 밖에 나가 노동하며 독립생활을 했는데 오랜 노동은 질병이 돼 불과 이십여 세 때 온몸이 병이었다. 우리 형제는 사 남매이다. 형은 어려서 학업을 중단하고 양치기가 됐고 누나는 절름발이라 일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셋째로 아래로 누이동생이 하나 더 있다.

내 기억에 부모님은 유달리 선량하셨다. 거지가 집에 오면 집안의 맛있는 음식을 밖으로 내가서 남은 음식을 남에게 다 주었다. 상대방의 옷이 다 해져 몸도 가릴 수 없음을 보면 아버지는 자기 옷을 가져가 걸인에게 입혀주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제자 중에 의료 행위를 하며 세상을 구제한다는 라마가 한 명 있었는데 여러 번 우리 집으로 피신한 적이 있었다. 기억에 그는 별로 말이 없었고 가부좌하고 앉아 밤새도록 경(經)을 읽었다.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마을엔 가뭄이 들어 작황이 좋지 않았다. 집마다 식량이 바닥나자 다들 밖에 나가 나물을 뜯어 먹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인근 한족 현성(縣城)에서 옥수수가루 한 포대를 얻어 왔는데 주위의 이웃이 모두 와서 먹었다. 그들이 가고 나자 한 포대나 됐던 옥수수가루는 겨우 한 사발만 남아 이후 우리 집은 아주 오랫동안 무로 요기를 해야 했다. 그 당시 나는 무 냄새만 맡아도 징징거렸다. 나중에 우리 집은 외삼촌이 사는 마을로 이사를 갔는데 그제야 생활여건이 조금 나아졌다.

아버지는 대대에서 방목하는 양떼를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해야 했지만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 서기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어 아버지의 일을 조금이라도 줄여주지 않았다. 방법이 없어 할 수 없이 다만 나의 형이 아버지의 일을 대체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형은 나이가 어리고 체격도 왜소해 어른들의 도움으로 비틀거리면서 나귀에 올라타야 했다. 겨울은 날씨가 춥기에 두터운 솜옷을 입는데 어른들은 형이 나귀에서 떨어질까 봐 걱정한 나머지 헝겊 끈으로 그를 나귀에 묶었다. 그가 화장실에 가려면 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어머니가 끈을 풀어줘서야 용변을 볼 수 있었다.

부모의 병이 중했기 때문에 나는 십삼 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매일 나가서 소똥을 주워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차오미(炒米-쌀을 기름에 볶아 만든 몽고 음식)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형을 따라 나가 같이 양을 돌봤다. 그 무렵 형과 나는 온종일 인적이라곤 없는 드넓은 초원에서 보냈는데 사람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주변의 목축하는 사람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오면 우리는 아주 반가워했으며 그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간에 모두 가족을 만나는 것 같았다. 너무나 무료했기에 양을 돌보지 않는 시간에는 고성을 지르고 노래를 부르면서 좋은 목소리를 연마했다. 외삼촌댁에 있는 당나라 때 저술한 ‘쿠시촨(苦世傳)’ ‘쵄쟈푸(全家福)’ 등 다섯 권을 반복해서 여러 번 읽었다.

당시 나는 늘 초원에 누워 망망한 하늘을 바라보며 맘속으로 “나귀가 세상에 태어나도 일을 할 수 있는데 내가 인간으로 온 것은 무엇을 하러 온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십팔 세 때 나는 노래를 잘해 지역의 문예 팀 시험에 응모했고 합격했다. 당시 후오위앤쟈(霍元甲-곽원갑) 등 무술 영화가 한창 인기리에 방영됐는데 문예 팀의 TV에서 그걸 보자 내 가슴속은 항상 영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용솟음쳤다. 초원에서 양을 칠 때 어린이 친구를 만나면 말 몇 마디하고는 곧 서로 붙잡고 씨름하며 권법을 겨뤘었다. 나는 키가 크고 배짱도 있었기에 발을 한 번 날리면 상대의 얼굴을 차버릴 수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명성도 좀 얻게 됐고 이 때문에 종종 다른 사람과 겨루게 됐다.

이후로 문예 팀의 임금이 너무 낮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쑤무(蘇木-몽고 목축 지역의 행정 단위로 향, 진에 해당)에서 초원을 보호할 릴레이 팀을 만들었는데 나는 기량이 좋아서 팀의 부책임자가 됐다. 팀이 설립된 배경은 어떤 사람이 항상 초지에 몰래 들어와서 마황초(麻黄草)와 전초(田草)를 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기현(旗縣-蘇木보다 큰 몽고의 행정 구역)과 기현 사이의 초원 자원에 대한 싸움으로 발전했다. 상대 쪽의 인원이 백 명이 넘게 되자 그들은 자주 한밤중에 출몰하며 뾰쪽한 칼과 삽을 들고 다니며 현지 사람을 만나면 싸움을 걸었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팀원들은 밤중에도 나를 찾아왔다. 내가 팀의 선봉장이라고 하면서 빨리 달려가서 재빨리 손을 써야 하며 내가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그들도 갈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보통 1m 되는 쇠막대기를 무기로 했으며 혼자 열 사람을 타격할 수 있었다. 상대방은 이백여 명이 와서 우리를 포위했는데 그때 싸움은 현지 경찰과 정부를 매우 놀라게 했다. 우리 대원 사십여 명이 상처를 입었고 십여 명이 치료를 받았으며 그중 두 명은 응급 치료를 받아야 했다. 상대방의 사상자는 더 심각했다. 포위망을 뚫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입고 있던 흰옷이 온통 피였다. 옷을 벗어보니 신체는 다친 곳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피였다. 후에 현지 경찰이 출동해 무력으로 진압하고 총을 쏘며 위협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을 물리쳤다. 맞아 죽은 사람은 땅에 묻었다. 일이 끝나고 모두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경찰국장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칭찬했다. 그리고는 이후로 기현(旗縣)에서 사람을 때리고 욕해도 아무도 나를 상관하지 못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내 뜻대로 해도 된다’라고 하는 특권을 나에게 준 것과 같았다.

이때부터 나는 더욱 목에 힘주고 다녔다. ‘나담축제’에 참가하러 택시를 타고 돈도 없이 갔고 지역 건달을 보면 가서 윽박지르며 “나와 한번 붙어볼래 치겠으면 한번 쳐봐라. 치지 못하면 이번 축제의 숙식비, 교통비를 전부 네가 내는 거다”라고 했다. 건달들은 감히 내게 덤벼들지 못하고 나를 마치 ‘나으리’ 모시듯 모시는 수밖에 없었다. 내 뒤에는 보통 몇 명의 아우들을 데리고 다니는데 나 이 형님이 있기에 그들의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 당시 ‘나담축제’에서 나와 겨룰 사람은 없었다. 나는 당나귀와 경주해도 400m 이내에선 내가 앞섰다. 하지만 400m를 벗어나면 동물인지라 내가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쑤무(蘇木-몽고의 말단 행정 구역) 내(內)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두려워했으나 가족들은 나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술에 취해 의식을 잃고 발광하면 그 왜소한 체격의 내 형만이 다가와 따귀를 때리며 깨어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태까지 형을 맞받아친 적이 없었다. 나는 부모(兩親)를 매우 공경하며 효도했다. 어려서부터 위중한 아버지를 업고 한밤중에 병원을 찾았고 자라서 돈을 벌면 부모님께 약을 사드리고 집안의 비용으로 드렸다. 이후로 형이 데릴사위가 되고 집안의 자매도 잇달아 출가함에 따라 부모를 봉양할 책임이 모두 나 한 사람에게 떨어졌다.

나중에 나는 몇 명의 친구와 함께 베이징의 벽돌 공장에 가서 일하게 됐다. 소수민족인데다 또 새로 온 터라 자주 업신여김을 당했다. 낮에 일을 다 마치고 나면 밤에는 상대의 발 씻을 물을 부어주어야 했다. 하루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친구들에게 오늘밤 손 좀 봐주겠다고 알렸다. 그 싸움에서 나는 혼자 십여 명을 쓰러뜨렸다. 다음 날 공장에 한 무리가 삽을 들고 와서 나를 에워싸고 때렸고 나는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퇴원 후에는 다시 하나하나씩 그들을 찾아 두들겨 패줬다. 때론 상대방이 나를 보면 발길을 돌려 달아났지만 그들이 어찌 나보다 빨리 달릴 수 있겠는가! 이렇게 나에게 앙갚음을 당한 후 공장 사람들은 나에게 새로운 별명을 붙였는데 ‘동북 이리’라고 불렀다. 하루는 한밤중에 자다가 갑자기 낮에 싸웠던 일이 떠올라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척이다가 한 젊은이가 식칼을 들고 나를 내리찍으려는 것을 봤다. 나는 베고 있던 베개로 즉시 피했는데 정말 어둠 속에서 신불(神佛)이 보호해 주신 것이 아닌가.

벽돌 공장엔 별사람이 다 모여드는 곳이라 관리가 쉽지 않다. 이듬해 공장장이 다른 사람이 나를 모두 두려워하는 걸 보고 나에게 공장을 맡아보라고 했다. 8시간 1개 반인데 나는 1개 반을 맡았고 80여 명을 관리하게 됐다. 어느 겨울날 흙을 분쇄하는 기계가 막혀 작동하지 않았다. 내가 기계를 살필 때 한 사람이 부주의 하는 바람에 내 오른쪽 다리가 기계에 말려들어 갔다. 그때 코와 입에서 피가 흘렀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주변 사람이 삽을 들고 컨베이어 벨트를 절단하자 벨트가 반대로 돌았고 그제야 나는 기계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당시 두 다리의 길이가 서로 다르게 됐는데 오른쪽 다리는 온통 헤집어졌었다. 여러 병원에 보내졌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그때 난 이미 정신이 혼미했다. 하지만 남이 말하는 것은 들을 수 있었다. 마음속 느낌은 특별히 편안했으며 단지 신체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것을 느낄 뿐이었다. 마치 자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어떤 병원이 나를 받아줬다. 깨어나 보니 다리는 깁스를 하고 있었고 위는 타는 듯이 고통스러웠다. 자주 벌컥벌컥 피를 토했고 기침을 하면 뼈까지 아팠다. 벽돌 공장에서 그 몇 년 간 적잖은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지금 남은 것은 한 푼도 없다. 한쪽 발을 절뚝거리며 집에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다 인연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쑤무(蘇木) 초등학교 교장이 우리 집의 곤란한 형편을 보고 내게 앉아서 쇠고리를 구부려 만드는 일자리를 제공해줬다. 1998년에는 우리 집 동쪽 큰 강에 홍수가 났다. 하지만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안 됐기에 내가 사람을 끌어 모아 그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했다. 이로써 돈도 벌었다. 그해 겨울 초원의 목축산품(畜牧産品) 회사에서 가수를 뽑았다. 당시 내 나이는 이미 서른 살로 나이가 많았지만 시험 삼아 한번 보겠다는 자세로 대회에 참가했다. 결과 1등을 했고 이어 회사 예술단에 묵게 됐다.

1999년 파룬궁 박해 사건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우리에게 성악을 가르치는 몽고족 선생님은 “파룬궁은 좋은 것이며 당시 7~8년 사이 1억이 넘는 사람이 파룬궁을 수련했고 그때 베이산(北山-지린성 북서부 위치) 쪽은 어디든 다 수련생이었다. 칭화(清華) 대학교와 베이징(北京) 대학교 학생과 중앙의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수련했다. 장쩌민(장마두)이 몹시 화를 내며 박해를 시작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듣고 나서 “이 파룬궁 속에 분명 신기한 뭔가가 있다. 이 책을 구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염원했다.

2001년 나는 회사를 따라 베이징으로 출장을 갔다. 모두 제각각 물건을 사러 가기로 하고 정오에 톈안먼(天安門) 광장 깃대가 있는 곳에서 모이기로 약속했다. 시간이 돼 나는 깃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기다렸는데 나이 든 사람, 젊은 사람 할 것 없이 남녀 많은 사람이 각기 현수막 하나씩을 들고 광장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경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정·사복(사복과 제복)을 한 많은 경찰이 광장의 사방에서 또 경찰차에서 뛰쳐나와 현수막을 든 군중을 쓰러뜨려 밟고 그들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악랄하게 발길질했다. 나는 보고 몹시 분개했으며 경찰이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맘속으로 나는 “현수막을 든 젊은 남자들은 신체가 건장하니 그들이 가서 손찌검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젊은 여성과 할머니들은 무슨 기력이 얼마나 있겠는가! 단지 현수막을 들었을 뿐인데 그녀들을 왜 이렇게 폭력으로 대하지?”라고 생각했다.

이듬해 나는 지금의 아내를 만났는데 한 번은 그녀가 친척 집에서 돌아와서 내게 말하기를, “그녀의 올케가 경찰에게 붙잡혔는데 조카가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엄마의 보살핌이 없게 돼 불쌍하다”라고 했다. 당시 나는 그녀의 올케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랐다.

2004년 아내의 올케가 집에 돌아오자 우린 오빠 집으로 함께 문안드리러 갔다. 집에 들어가자 올케가 특별히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임을 느꼈다. 그녀는 우리에게 차를 타주고는 파룬궁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야 파룬궁을 수련한 것 때문에 몇 년 전 박해당하고 불법적인 형을 산 것을 알게 됐다. 당시 나는 파룬궁이 좋다는 것만 알 뿐 수련이란 개념에 대해서는 아주 모호했었다.

이후에 회사를 따라 하얼빈에 가서 공연하게 됐다. 내 여관방 문 앞에 매일 CD가 딸린 소책자 한 권이 틈새에 끼워져 놓인 것을 보았고 룸메이트와 함께 VCD를 틀어서 봤다. 보니 파룬궁 관련 진상과 또 보다 자세한 설명이 있었다. 나는 각지로 자주 출장 다니며 식사하기 때문에 폭주하기 시작했는데 도수가 높은 고량주를 열세 사발이나 마실 수 있고 도수가 낮은 술은 아예 기별도 안 온다. 아내와 결혼한 후 술 때문에 적잖이 다퉜는데 아내도 성깔이 비교적 있는 편이라 그때 우리 집은 매우 긴장된 분위기였다.

오래지 않아 장인이 암으로 위중하게 됐다. 가족들은 아내의 올케에게서 대법 책을 모셔왔고 올케의 영향 아래 아내와 자매들이 잇달아 법을 얻어 수련했다. 장인은 가장 고통스럽다고 하는 췌장암에 걸렸는데 대법 책을 본 이후 고통을 조금 덜 느꼈다. 죽음에 직면한 시각에 가족들이 어르신을 둘러싸고 앉아 멈추지 않고 계속 “파룬따파 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 하오(真善忍好, 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웠다. 어르신은 호흡이 없다가 갑자기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아이고! 나 아주 편안하다! 많은 불도신(佛道神)이 불경을 읽는 것을 들었다”라고 했다. 말을 마치고는 침대에 누워 세상을 떠났다.

몇 년 후 아내 자매들의 권유로 나도 파룬궁을 수련했다. 수련 이후 나는 즉시 술 마시는 악습을 끊었다. 그때 나는 외지에 있었는데 손에는 다만 사부님의 설법 녹음이 있을 뿐이었고 연공 동작은 제5장만 배웠다. 이렇게 해서 한 세트의 공법을 다 배우는 데 반년이 걸렸다. 대법을 만난 이후 내게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맘속으로 나는 이것은 정법이며 법을 얻는 것이 내가 세상에 온 진정한 소원임을 깨달았다.

우리 부부가 법을 배움이 깊어짐에 따라 가정환경도 좋게 변했고 부부 사이도 화목하게 됐다. 우린 이혼해야 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대법이 우리 가정을 구해준 것이다.

내가 유목민이기 때문에 핏속에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단순한 천성이 담겨있다. 더욱이 수련한 이후 더는 술 마시거나 싸움질하지 않았고 몸에 밴 건달 습성을 제거하고 누구를 보더라도 웃으며 선하게 대한다. 나를 잘 아는 친구가 이 때문에 나에게 “남들은 너를 모두 바보라고 한다. 사실 너는 매우 좋은 사람이고 정말 선량한 사람이다. 넌 조금 약삭빠르게 구는 걸 배워라”라고 말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웃으며 배우려고 해도 배우지 못한다고 말했다. 평상시 동료와 친지와 함께 지낼 때 나는 몽골어로 그들에게 불교 중의 고사(故事)를 이야기한다. 그런 다음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정법(正法)이며 불가(佛家) 8만 4천 법문 중의 한 법문이라고 알려주는데 이렇게 진일보로 진상을 알린다.

이들 소수민족 무리의 ‘청중’들은 어려서부터 몽골어 TV를 보고 자라 기본적으로 사당(邪黨: 중국공산당) 문화의 해독을 입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진상을 받아들이고 대법을 인정하기가 훨씬 쉽다. 내가 수련 중의 고사와 진상을 말할 때마다 그들은 흥미진진하게 들으며 동시에 내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고사를 아는지 궁금해한다.

법을 배운 이후 나는 반년의 시간을 들여 체계적으로 한자(漢字)를 공부했고 지금은 이미 중국어판 전법륜(轉法輪)을 읽을 수 있다. 수련 기간 전에 길에서 차 사고와 다른 위험에 부딪힌 적이 있지만, 사부님의 보호가 있었기에 매번 위험은 없고 평안했으며 탈이 없었다.

얼마 전 내가 노래하는 화면이 현지 TV에 방영되자 고향 사람들이 마침 나를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TV 스크린에 나의 형상이 나타났다. 뭇사람들이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얼굴 표정은 마치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변했다. 정말 있기 어려운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운 좋게 정법을 만났기에 원래 거기 초원에 누워 멀리 하늘만 바라보며 막연해 했던 소년이 가슴에 희망과 바른 믿음을 품은 사람으로 변했다. 싸움질 좋아하고 몸뚱어리 하나로 필사적으로 살아온 ‘동북 이리’가 용모가 선량한 키만 멀쑥한 바보로 변했다. 술을 목숨처럼 즐기고 머지않아 가정도 잃을 중독자가 자상한 좋은 남편으로 변했다.

매번 전법륜(轉法輪)을 펼치고 매 한 글자를 읽을 때마다 나는 사부님께서 자비하신 어조로 제자가 듣도록 옆에서 법을 말씀해주신다고 느끼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여러분 모두 사부님의 자비를 소중히 여기고 대법을 소중히 여기기를 희망한다.

 

원문발표: 2019년 3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11/3836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