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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한 차례 수심(修心)의 기회를 소중히 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며칠 전, 거의 50년 만의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친구들에게 “너는 그때 유난히 진지했어.”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다.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나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진지함’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완벽을 추구했고, 늘 다른 사람의 어떤 행위가 좋고 나쁜지를 관찰했다. 이로써 좋은 점은 본받고 나쁜 점은 경계했다. 주관적으로 볼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해서 해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무엇을 하든지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나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사람들은 항상 내가 일을 처리하면 안심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성공하든 안 하든(이것은 숙명이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련 중의 일도 이런 엄숙한 마음가짐에 따라 대했고, 진지하게 법공부하고 법으로 대조하여 안으로 찾으며 일을 할 때마다 스스로 검사하는 것을 최대한 해냈다. 예전에 이런 경험이 있다. 사부님의 경문 ‘뿌리를 캐다(挖根)’가 막 발표되었을 때, 밤에 꿈을 하나 꿨다. 꿈속에서 나는 낑낑대며 삽으로 온 힘을 다해 대뇌 송과체 부위를 팠는데, 좋지 않은 것을 뿌리까지 깨끗이 제거했다.

그런데 마침 이런 소위 높은 수준에 도달하려 하고 진지하게 임하는 태도가 주위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나 자신이 최대한 높은 수준에 도달하려 했고, 또 다른 사람도 내 기준으로 평가했다.

나의 한 대학 동기(사회적으로 꽤 유능한 친구)가 다른 한 동기와의 대화에서 내 눈을 쳐다보질 못하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나의 바름(正)이 너의 바르지 못함(不正)을 폭로시켜서 그래.’라고 생각했고, 나 자신도 자신이 꽤 괜찮다고 여겼다.

예전에 어떤 한 수련생(같은 회사 동료)은 한동안 아침 연공장에 나오지 않다가 어느 날 나와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부님의 신경문이 있는지 물었다. 훗날 이 수련생은 내게 “그때는 감히 당신하고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어요.”라고 했다.

사실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내 눈빛, 표정, 어조에서 나의 불만, 지적, 냉혹, 관용이 없는, 이런 것들이 드러나 상대방이 ‘강한 기세’와 ‘압력’을 느낀 것으로 생각했다.

다른 사람은 항상 무슨 ‘마음의 매듭’이 있을 때만 나와 얘기하기를 원했고, 매번 얘기를 끝낸 후에는 다들 수확이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편안할 때는 다른 사람을 찾지 나를 찾지 않았다. 예전에 나는 “다른 사람은 나와 즐거움을 나누지 않고 고통만 나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이는 나의 ‘강한 기세’와 ‘고압적인 태도’에 상대방이 불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수련하면서 안을 향해 찾는 것을 안 후에 자신의 냉혹함, 무관용을 의식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줄곧 ‘다른 사람 그 자신이 한 것이 부족해서 압력을 느끼는 것이다’에 머물러 있었고, 내가 닦아야 할 점은, ‘다른 사람에게 부족함이 있어도 나는 상대방을 포용해야 한다.’라는 것이라고 여겼다. 한데 이런 기점은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부족함이 있다’에 놓여 있다.

2017년 4월 어느 날, 재봉으로 생계를 꾸릴 때, 바느질함에 항상 들어 있던 골무 두 개 중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보시기에는 내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 달이 지나고 남은 골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연이 아님을 알았다. 이것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점화일까?’ ‘골무(頂針:ding zhen)’를 생각하며 내가 우선 떠올린 것은 ‘진(眞: zhen)’과 ‘진수(眞修)’의 문제였다.

8월에는 심각한 ‘탈모(脫髮: tuo fa)’ 현상이 나타났다. ‘법에서 이탈하다(脫法: tuo fa)’는 수련에서 내게 큰 누락이 생겼음을 설명하는데, 무엇일까? 안을 향해 찾아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찾을 길이 없다고 느꼈다. 평소에 이미 일마다 안을 향해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의 경문 “공(功)을 수련하는 길은 마음이 지름길이라 / 대법은 끝없나니 고생을 배(舟)로 삼을지니라”[1]가 막 발표되었을 때, 어머니(수련생)께서 외지에서 나에게 편지로 부쳐주셨다. 나는 반복해서 이 시를 외우다가 갑자기 수련의 ‘지름길’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바로 ’수심(修心)‘, ’고생을 겪는 것(吃苦)‘이다.’ 당시 이 네 글자를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고 그때부터 모든 수심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며, ‘안을 향해 찾는 것’은 이미 기제를 형성했다.

그래서 설령 밖에서 무엇을 보든지 미간이 찌푸려지면 즉시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왜지? 아, 그녀가 입은 옷이 유별나서 내 눈에 거슬려서 그러는구나.’ 나는 이렇게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이는 다른 생명에 대해 냉정하고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것이고, 선(善)은 더욱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 즉시 미간의 주름이 펴졌다. 이 기제가 이미 형성되었기에 앞서 언급한 ’찾을 길이 없다‘가 생겼던 것이다. 사부님께서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타파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2]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때 오직 법공부를 많이 했다. 안을 향해 찾고자 하고 자신을 바꾸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기에 법에서 한 층 높은 층차의 표준이 펼쳐졌고, 이때 자신을 보니 정말로 온갖 문제가 다 있었다.

세 가지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 행동의 효과, 그리고 개인의 일상생활 등 모든 면에서 안을 향해 찾아보았다. 예를 들면, 면을 먹는 것을 꽤 좋아하는 이런 작은 일에 대해서도 안을 향해 찾았는데, 두 끼 중에 한 끼는 꼭 면을 먹어야 했다. 나는 이것도 집착이고, “먹어도 음미하지 않으니 / 입의 집착 없도다”[3]를 해내지 못했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맛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고 적게 먹기로 했다.

이 기간에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지속해서, 나는 더욱 마음을 써서 착실하게 수련했다. 법을 통독하던 것을 외우는 방식으로 바꾸고, 매일 정공을 한 번 더 했다. 법을 외울 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설법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것은 바로 홍대한 자비임을 떠올렸다. 설령 제자의 문제를 지적할지라도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해, 포용, 아낌, 격려이고, 조금의 압력도 없으며, 단지 제자를 더 정진하도록 격려하실 뿐이다. 나는 다시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는 부끄러워 진땀이 났다.

11월 어느 날, 갑자기 골무가 원래 자리에 나타난 것을 발견했고, 두 달 후에 다른 골무 한 개도 원래 있던 곳에 나타났다.

이번에 심성 관에서는 주로 ‘진(眞)’과 ‘진수(眞修)’ 방면에서 안을 향해 찾았다. 법공부팀의 한 수련생이 나의 이런 국한성을 보고 그는 골무(頂針)는 내게 ‘비타협(頂)’하고 ‘쟁투하는 마음’이 있음을 점화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정말로 그 수련생이 나의 가장 큰 문제를 가리켰다고 느꼈다.

나는 일반적으로 무슨 일이든 마음속으로 옳고 그름을 심사하기에 늘 자신과 다른 사람의 문제를 볼 수 있다. 나는 자신의 문제를 아직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변명했고, 인식했을 때는 그것을 숨기지 않았으며, 수련생의 문제에 대해서는 수련생의 제고를 위해 늘 지적하기를 좋아했다. 기연이 닿지 않아 지적할 기회가 없을 때는 때로 정말로 눈으로 보면서 마음으로 조급해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 수련생 A의 딸(수련생)이 여자아이를 낳아 타오타오(淘淘: 말썽꾸러기)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나는 이 이름에 바른 에너지가 없다고 생각해 A에게 전화를 걸어 내 생각을 말하고는 밝은 이름으로 지을 것을 건의했다. 만물에는 모두 영(靈)이 있고 각자의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름도 바르게 지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나는 아이가 무슨 영향을 받을까 봐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대법제자의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사부님의 어린 제자이고, 모두 사부님께서 관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어떤 일에서든 대법제자가 최대한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날, A가 나에게 자기 외손녀에 대해 말하면서 “타오타오는······”이라고 하기에 나는 “아직도 그렇게 불러요?”라고 한마디 했다. 그러자 이 수련생이 단번에 폭발하여 “다른 사람에게 늘 당신 생각대로 하라고 강요하면 안 돼요. 이름을 계속 바꾸면 사위(속인)가 그걸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그 수련생의 반응에 나는 멍해져 “나는 단지 이 문제가 생각나서 말했을 뿐이에요. 당신에게 강요하려는 뜻은 없어요.”라고 변명했다. 주위 사람이 보기에 당시 우리 두 사람의 표현이 냉정하지 못했다.

나중에 이 수련생의 반응을 떠올려보니 아마도 딸(수련생)에게 확실히 내 말을 전혀 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본래 상대방에게 좋으라고 일깨워준 것이었는데, 오히려 이런 결과를 낳았다. 상대방의 반응은 또 이렇게 강렬했는데, 마치 큰 상처를 입고 내 호의를 전혀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내게 반드시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법공부를 하고 안을 향해 찾으면서, 수련 후에 우리가 사물을 대하는 좋고 나쁨의 표준이 이미 속인과 달라지긴 했지만, 수련생마다 법공부를 통해 깨달은 바가 있어, 어떤 한 문제에 대해 같은 인식을 갖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나의 인식이 높든 낮든 한 번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상대 수련생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다시 말하면 바로 상대방을 강제로 바꾸려는 것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수련생의 격렬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로 내가 예전에 이미 인식했지만 잘 해내지 못했던 문제 하나가 떠올랐다. 한 수련생(직장동료)이 과거에 “사무실 직원들이 무슨 일로 대화를 나눌 때, 당신이 말을 마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은 누구도 대꾸를 안 하는데, 그것을 아나요?”라고 나를 일깨운 적이 있다. 수련생 사이에서도 이러했는데, 교류할 때 마지막에 발언하는 사람은 통상적으로 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수련생들은 모두 참고 더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또 내가 그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쟁투가 아닌가? 이로써 나의 어조, 사용한 어휘가 얼마다 셌는지 알 수 있는데, 말할 때 단호했고 자신이 말한 것을 정론처럼 여겼다. 문제를 지적할 때, 직설적으로 정곡을 찌르면서 자신이 그래도 문제를 비교적 정확하게 본다고 여겼다. 자아를 표현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강렬한가. 여기까지 쓰고 보니, 수련생은 줄곧 나를 포용했지만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수련생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너무 부끄럽다.

재차 이 문제를 폭로해내는데(이전에 여러 문장에서 언급한 적이 있음), 이 문제에서 자신에게 환골탈태의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예전에 밍후이에 ‘늘 수련생의 문제를 지적하길 좋아하는 습관을 바꾸다’라는 문장을 투고했었는데, 이 제목은 밍후이 수련생이 바꾼 것이고, 원래 내가 쓴 제목이 아니다. 내게 이런 마음(수련생에게 문제를 지적해주는 마음)이 매우 강렬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당시 제목이 변한 것을 보고 우연이 아니고 나의 이 마음을 겨냥한 것임을 알았다.

바로 며칠 전에 거의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다. 하루는 수련생 A의 집에 갔다가 아이의 방 벽에 그림 몇 장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중에 두 장은 선과 그림이 없이 완전히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 검은색은 내게 안 좋은 느낌을 주었지만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돌아온 후에 이 일이 머릿속에 두 번 떠올라 수련생에게 말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직접 수련생 A의 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 후에 자신이 이 일을 한 출발점, 심태를 살펴보았다. 단지 내 느낌을 참고로 말해주고자 했을 뿐이었고, ‘나의 말로 무슨 결과를 얻으려는’ 집착이 없었다. 나는 이 방면에서 내게 이미 자그마한 변화가 생겼음을 알았다.

자신의 현재 층차에서의 몇 가지 수련 체득을 수련생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반드시 작은 일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수련에는 작은 일이 없다). 모든 작은 일에서 사람 마음을 하나하나 닦아 없애면 그래 큰일이 생기겠는가?

안을 향해 찾을 때도 반드시 깊이 찾아 뿌리를 캐야 한다. 자신의 집착심을 깊이 분석할 수 있을 때는 이 마음이 곧 당신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만약 자신을 깊이 분석할 수 없거나 다른 사람이 지적할 때 변명하고 감춘다면 이 집착이 자신의 공간장에 여전히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아울러 아직도 그것을 자신이라고 여기기에 그것이 아마 붙을 것이다.

심성에 충격을 주는 고험에 부딪혔을 때, 이 한 관을 잘 넘었는지의 여부는 자신이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고마워할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왜냐하면 그(그녀)가 당신에게 소업, 제고, 공이 자라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내 수련의 일부 체득을 써냈는데, 잘못된 곳이 있다면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가: ‘홍음-法輪大法(파룬따파)’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교란을 배제하자(排除干擾)’
[3] 리훙쯔 사부님 시가: ‘홍음-도(道)중에서’

 

원문발표: 2019년 1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11/3802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