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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난에 처한 수련생을 정념으로 도와야 한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정법노정이 빠르게 돌파됨에 따라 곧 소멸될 사악한 마는 최후의 발악을 시작했다. 따라서 대법제자가 수련 중에서 받는 사악의 교란은 갈수록 복잡한데 특히 ‘병업’가상의 교란이 매우 심각하다.

중국에 ‘행백리이반구십(行百裏而半九十)’이라는 말이 있다. ‘100리를 가려는 사람은 90리를 가고서도 이제 절반쯤 왔다고 여긴다’는 뜻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때 중요한 것은 마무리임을 지적한 말이다. 우리는 최후 정법수련의 중요함과 엄숙함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병업가상’ 교란을 받는 수련생은 보편적으로 두개 방면의 문제가 존재한다. 즉 신사신법(信師信法)이 부족한 것과 밖으로 구하는 문제이다. 어떤 수련생은 바른 믿음이 부족해 신사신법 하지 않아 ‘병업’가상을 부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병원에 가서 난을 넘기려고 한편으로는 법공부와 연공을 하고, 한편으로는 약을 먹으면서 병을 보인다. 각종 방법으로 ‘병’을 제거하려 해서 결국 구세력에게 틈탈 기회를 주어 박해가 가중되고, 장기적으로 걸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수련 중에서 매우 심각하면서도 비교적 보편적인 문제이다.

“사람이 관건적인 시기에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고, 소위 행복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을 내려놓고 그 한 걸음을 내디디며 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이 바로 당신에게 설치한 관이 아닌가?”[1] 큰 난관 앞에서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속인과 수련인의 구별이다. 착실하게 수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말씀하셨다.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 / 일마다 대조하여 / 해 내어야 수련이로다”[2]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생사를 내려놓지 못하면 법공부를 하여도 법을 얻지 못하고, 법의 요구대로 하지 못하게 되는데 어찌 착실하게 수련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근본적으로 법에 대하여 아직 견정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3]

그러나 돕는 수련생은 그 자신이 스스로 그 한 걸음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누가 병원에 가지 말라고 했어요? 누가 약을 먹지 말라고 했냐고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정념이 아니고 사람마음이다. 남이 잘못될까 봐 두려워하면서 돕는 것은 책임지지 않는 형식이다. 비록 병원에 가는 것을 강제로 제지할 수는 없지만, 진심으로 수련생이 마난에서 걸어 나와 바른길로 갈 수 있게 도와주려면 반드시 먼저 그가 어디에서 잘못했는지, 어디야말로 정말 도움이 필요한 곳인지, 그의 사상과 행위가 어디에서 법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지를 찾아야 한다. 그런 다음 주요문제나 드러난 집착심을 틀어쥐고 법에서 교류하면서 관련된 법리로 사상과 행위를 바로 잡고 이끌어야 한다. 또 솔직하게 그의 잘못을 지적해주어, 그가 자신의 집착심을 정확히 보고, 사람마음을 바로잡아야만 비로소 마음에서 우러나와 협조할 수 있다. 눈으로 그가 어디에서 잘못했는지 보고, 실질적 문제와 접촉하지 않고, 많은 사람을 데려다 발정념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밖으로 구하는’ 수련생은 처음에 사부님께서 ‘병업’을 제거해주실 것이라고 간절히 바란다. 두 번째는 수련생들의 도움에 강력히 의존한다. 어떤 수련생은 마난이 올 것 같으면 바로 수련생의 집에 가서 머무는데 심지어 ‘안으로 찾는’ 법보를 생각하지도 않는다. 또 수련생의 장소를 빌려 함께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하자고 요구한다. 물론 수련생을 돕는 것은 마땅하지만 집착심을 지적하면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반감을 품고, 또 부족점을 지적하면 그에게 좋지 않은 요소 같은 것을 더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많은 수련생이 오랜 시간 발정념을 해주어도 오랜 시간 돌파하기 어렵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련이란 자기의 일로서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4]

수련은 엄숙한 것이다. 마난에 처한 수련생은 정념을 확고히 하고, 안으로 찾는 것을 통해 제고해 올라와야 하며, 주관적으로 수련생에게 의지해서는 안된다. 기타 수련생들도 정념으로 법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수련생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정(情)에 빠져서 일일이 논하거나 요구대로 다 들어주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주제넘게 남의 일에 나서면 그의 밖으로 구하는 사람마음을 조장시킨다. 그 자신이 움직일 생각이 없고 갈수록 외부의 힘에 의존하면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오히려 그의 마난을 가중시킬 수 있다.

그 외, 수련의 길이 서로 달라서 수련생을 돕는 방식도 천편일률적으로 같아서는 안된다.

물론 마난에 처한 수련생을 격려해주고, 이해해주고, 포용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수련의 길과 심성 경지가 다르고, 부딪친 마난의 크기와 처한 환경도 달라서 돕는 방식도 사람에 따라 달라야 한다. 만약 수련생의 사람마음 집착을 지적하고, 선의로 인식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수련생에게 상처 주는 것이라면서 부정적인 작용을 일으켜 그에게 나쁜 물질 같은 것을 가중시켰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를 이끌어 법에서 바로잡겠는가? 법에서 바로잡지 않으면 그가 어떻게 마난에서 걸어 나올 수 있게 하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정체적으로 수련생을 돕는 목적은 수련생의 결점을 말하지 말고, 각자 모두 자신을 찾아, 돕는 사람들이 모두 제고 해 올라오는 것이라면서 이런 과정은 결과를 바라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것이 다른 하나의 예와 방법을 공식화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면 수련생 A가 갑자기 몸에서 위험한 상태가 나타나면 그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드러난 집착과 원칙문제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면 돕는 수련생은 그의 정념이 강화되도록 격려해주고, 마음이 안정되게 가지 해주어 대담하게 관을 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정념정행하지 못하고, 잘못된 인식 속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워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수련생 B의 경우에는, 돕는 수련생은 구세력으로부터 사람을 빼앗아 와야 한다. 반드시 핵심문제를 틀어잡고, 인내심을 가지고 일깨워 주고, 법의 위력으로 사람마음을 바로잡아 마난에서 걸어 나오게 해야 한다. 사부님의 정법노정을 따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가 도달하려는 목적이다.

그러나 수련생 A를 격려하고 포용하는 방법을 수련생 B에게 직접 사용하면 안된다. 정체적으로 (마난 중의 수련생을 포함) 착실하게 수련하고, 제고하는 과정은 최후의 효과를 결정한다. 마난 중에 있는 수련생의 수련도 바로잡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은 수련생의 마난 중에서 어떻게 수련할 것인가? 또 돕는 수련생과 도움받는 수련생들이 모두 정념이 부족하고, 실질적인 문제를 틀어쥐지 못하고, 장기적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면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 되는데 어찌 정체제고를 말할 수 있는가?

얕은 견해로서 여러분과 교류하는 것이니 적절치 못한 곳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캐나다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착실한 수련’
[3] 리훙쯔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누구를 위해 수련하는가’
[4] 리훙쯔 사부님 경문: ‘정진요지-견정’

 

원문발표: 2019년 3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2/3833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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