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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진상 전화를 거는가?

글/ 재미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처음에 전화를 거는 목적이 매우 이기적이었습니다. 2016년 법회에서 사부님의 설법을 들은 후, 자신이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것과 특히 중국대륙 사람들을 겨냥하는 부분에서 제가 너무 한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스스로 점수를 매겨본다면 아마 20점 정도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내심에서 자기를 걱정하는 마음에 조급했고 좀 더 많이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저는 시력이 나빠서 무언가 많이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전화하는 것을 선택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에게 있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낯선 사람과 상대하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습니다. 지금 대륙 주민들에게 전화를 걸어 진상을 알리고, 삼퇴시켜야 하는데 될지 안 될지, 전혀 자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평생 성격이 ‘속지 않으려 하는’ 것이 있었는데 실제로 예민하고 소심한 편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말하거나 일하는 배후의 마음 또는 동기를 매우 쉽게 느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의 그런 나쁜 생각을 견디지 못합니다. 저는 시험해 보고, 안되면 전화를 거는 수련생에게 발정념을 해주자는 정도의 태도로 전화 거는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RTC 플랫폼에는 교육 진행자가 있었고, 완벽한 교육 시스템은 저에게 단번에 전화 걸기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때, 교육 담당 수련생이 저에게 원고도 주지 않았지만, 저는 녹음을 했고, 한 글자 한 글자씩 필사했으며, 수정을 다 하면 스스로 집에서 아내에게 읽어주었습니다. 나중에 아내가 귀찮아할 무렵이면 저는 원고대로 읽으면서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상대방이 제 음성과 어조를 들으면 원고대로 읽는 것을 알 수 있었겠지만 결국 마찬가지로 삼퇴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었고, 탈퇴율은 나중에 제가 능숙해졌을 무렵보다 별로 낮지 않았습니다. 사부님께서도 저를 격려해주셨고, 저에게 입을 열어 진상을 알리는 힘을 주셨습니다.

저는 매우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삼퇴시킨 숫자가 증가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매일 삼퇴시키는 숫자에 신경을 매우 많이 썼습니다. 왜냐하면, 그 숫자가 바로 제가 전화를 거는 주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때 탈퇴하는 사람이 많으면 기분이 매우 좋았고, 노래를 부르며 식사하러 가곤 했습니다. 탈퇴하는 사람이 적거나 아무도 탈퇴하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으며, 말조차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3일 동안 제가 한 명도 탈퇴시키지 못한 채로 거기 앉아있는데 마치 열이 나는 듯했습니다. 어쩐지 급하다 못해 화(火)가 난다 하듯, 아내가 와서 체온을 재보니 정말 열이 났습니다.

한 명을 삼퇴시키면 기뻐하고, 잘하지 못하면 자신을 위해 괴로워했습니다. 특히 상대방이 삼퇴에 동의해서 어디에 가입했었는지 물어봤을 때 상대방이 아무것에도 가입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마음속으로 저도 모르게, ‘아깝다. 하나라도 좀 가입해서 내가 탈퇴시키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자신도 제가 사상경지가 너무 낮다고 여겨졌습니다.

안으로 찾았는데, 사실 찾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듯, 저는 삼퇴의 수에 너무 집착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삼퇴를 권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인식이 들어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라고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법의 요구와 얼마나 차이가 크겠습니까. 저는 애써 극복하면서 자신을 위해 진상 전화를 하는 이 이기적인 마음을 닦아버렸습니다. 자기를 위해 삼퇴 숫자를 높이려고 전화거는 이 마음이 나오자, 저는 곧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은 어느 부처가 술단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는가?”[1] 저는 곧 생각했습니다. ‘한 불(佛) 또는 도(道)가 나처럼 이럴까? 나는 왜 내 수련 중의 득실을 위해 그처럼 정서적으로 동요할까?’ 그 염두가 나오자 곧 경계했고, 점차 부지불식간에 제가 전화를 거는 목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전화를 거는 목적이 매우 명확합니다. 진상을 알리고 삼퇴시켜 사람을 구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자신을 닦기도 합니다.

저는 왜 전화를 걸까요? 사부님 말씀에 따라 하고, 진상을 알려 중생을 구도하며,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책임을 이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자신을 닦아 제고해 올라오는데, 이렇게 해야 자신의 책임을 더욱 잘 이행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제고되어 올라온 자체에도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제가 제고해야만 저의 생명에 대응하는 더욱 높은 층차의 생명으로 하여금 미래로 들어갈 기회가 있게 합니다. 저는 정법(正法)수련, 이것은 개인 수련의 과정, 방식, 목적, 무게감 등이 모두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한층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거는 목적이 바뀐 후, 저는 자연스럽게 전화거는 것을 견지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을 기울여 걸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거는 동시에 자신을 닦고 있으며, 전화를 거는 것은 수련 과정입니다. 저는 한편으로 상대방 마음의 매듭을 세심하게 살피고, 한편으로는 저의 마음이 법의 요구에 부합하는지 관찰하고는 합니다. 저의 마음은 더는 삼퇴시키는 수량에 그리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수련하고 있는 것이며, 진상을 알리고, 중국인들의 선념을 계발하거나 돕는 것인데, 그들은 선택하고 있습니다. 전화를 거는 목적이 단순하게 바뀌었고, 전화를 거는 과정에서 어떤 마음이 올라오면 곧 그것을 붙잡고, 법의 요구와 비교해서 자신이 깨우친 법의 표준에 따라 그 마음을 닦아 없앴습니다. 저는 제가 매우 빠르게 제고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어느 날, 저를 욕하는 중국 사람을 만났을 때, 저는 웃었습니다. 아마 상대방이 좀 특별하게 욕을 해서인지 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웃고 난 후, 저는 문득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이전에 도달할 수 없던 마음의 태도에 도달한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1999년 이전 우리 지역에 어떤 수련생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그를 욕하고 때리려 할 때, 그가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에게 ‘그때 당신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했어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당시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아마 제가 영원히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뜻밖에 전화를 건 후,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저는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직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고, 상대방이 어떤 태도이건 상관없이, 저는 곧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단지 이뿐입니다.

저는 어떤 목적으로 전화를 거는가 하는 것은 결정적인 문제라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권유로 탈퇴하는 사람이 많고, 쉽게 탈퇴시키면 떨어지게 되고, 탈퇴시킨 사람이 적고, 탈퇴시키는 것이 어려우면 포기하게 되며, 전화를 거는 목적은 그리 순수하지 않게 됩니다. 매번 플랫폼 조직에서 교육할 때, 오는 사람은 많지만, 진정하게 남아서 전화를 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저 역시 일부 이전에 전화를 거는 것을 중단했다가 다시 와서 교육받는 수련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중 어떤 사람은 다른 항목에 참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자신이 전화를 거는 효과(실제로 삼퇴시킨 수)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며, 전화를 거는 것이 너무 어렵거나 자신은 전화 거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 어쩔 수 없이 포기하였습니다.

우리가 전화를 거는 목적이 바뀌어, 내가 바로 이것을 위해 온 것으로 생각하고, 동시에 이 과정에서 자신을 닦는다면, 이런 상황은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과정과 어려움을 마주하면 우리의 각종 사람마음이 폭로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이런 사람의 마음을 닦아 없애면, 제고되어 올라올 수 있습니다.

물론, 먼저 전화를 거는 목적을 바꾼 다음 다시 전화 거는 것을 시작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목적을 갖고 전화를 걸든 상관없이, 전화를 거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차 그런 위사위아(爲私爲我)의 부분을 닦아 없앨 것입니다. 전화 거는 것이 어려워 마음의 정서가 동요되면, ‘어떤 마음이 내 기분을 동요시키는가? 나는 왜 전화를 거는가? 법의 요구와 대조해 보면, 나의 이 마음은 자신의 층차에서 인식하고 있는 법의 요구에 부합하는가?’ 한번 생각해봅니다.

교육받으러 온 신수련생을 마주하면 저는 의식적으로 그에게 시범을 보여줍니다. 제가 건 10통의 전화 중 3통에서 7통은 받지 않는 전화이며, 받은 전화라도 상대방이 매우 빠르게 끊어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이 받지 않고, 어려운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다음 그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서로 의견을 나누고, 또 그에게 이렇게 받지 않는 것과 끊어버린 것은 우리가 진상 전화를 거는 것에 있어서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알려줍니다. 탈퇴를 얼마나 시켰고 또는 한 번호로 몇 명을 탈퇴시켰는지 늘 지켜보아도 안 됩니다. 오직 가서 하기만 하고, 닦기만 하면 되며, 견지해나갈 수만 있다면,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돌이켜보면 삼퇴시킨 수가 자연히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신이 전화를 거는 유일한 목적이 아닙니다.

어떤 목적을 갖고 온 사람이든지 우리가 전화를 거는 과정에서 자신을 닦고, 마주친 각종 사람과 각종 정황에서 자신의 여러 마음이나 관념이 폭로되어 나오면, 그것을 붙잡아 그것을 닦아 없애면서, 사람을 구하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쓰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전화를 거는 하나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놓고 되돌아보면, 모두 사람의 마음으로 한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일을 한 것이지, 정념으로 한 것이 아니므로, 그 속에는 대법제자의 위덕이 없다. 바꿔 말하면, 신이 보기에 비록 일은 했지만, 그것은 일을 얼버무려 한 것이고 위덕이 아니며 수련도 아니다. 비록 했지만 말이다. 당신이 말해 보라. 이것은 헛되게 한 것이 아닌가?”[2] 이 단락의 법에서 “사람이 사람의 일을 한 것이지”, “일을 얼버무려 한 것이고”, “헛되게 한 것”이라는 말씀이 저를 깊이 환기해주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션윈을 홍보하고, 매체가 진상을 알리며, 전화를 걸거나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는 등의 일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일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닦아 제고하여 올라오는 이것을 첫 자리에 놓아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한 수련생이 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오늘 저는 아직 표를 한 장도 팔지 못했어요. 하지만 동수님은 공덕을 많이 쌓았겠군요.” 저는 무심결에 말했습니다. “저는 공덕을 쌓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닦으러 온 것입니다. 티켓 한 장을 팔면 당신의 공이 좀 자라고, 한 사람을 삼퇴시키면, 공이 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집착심을 조금 제거하여 없애면, 공이 좀 자라는 것입니다.”

각종 분야에서 모두 수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 분야에서 모두 자신의 집착심, 사고방식 및 관념이 폭로되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길을 걷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법을 실증하는 것이며, 미래의 우주와 관계됩니다. 엄숙하고 진지하게 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구하는 것은 대법제자의 책임이자 사명이며, 단순히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닦아야 하고, 심성을 제고해야 하며, 진정하게 자신이 제고되어 올라와 정념이 강해지면, 사람을 구하는 효과는 자연적으로 높아집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진상 전화를 거는 목적입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11-대법제자는 반드시 법 공부를 해야 한다’

 

원문발표: 2019년 03월 0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3/3/3834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