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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표현에서 안으로 자신을 찾다

글/ 지린 창춘 청년대법제자 샤오단(曉丹)

[밍후이왕]

매우 깊이 숨어 있는 집착을 제거하다

나는 농촌 대가족에서 성장했고, 언니들과 남동생이 있다. 자녀가 많아 부모님은 우리를 똑같이 대할 수 없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고 모두 인연관계가 있다. 사부님께서 “사람은 제각기 운명이 있다!”[1]고 말씀하셨다. 부모는 자녀를 똑같이 사랑하고 잘 되길 바라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많은 일은 정말로 숙명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인은 이런 것을 모른다. 언니 중 한 명은 자신이 집에서 가장 고생했고 부모님께서 자신을 매우 차별했다며 늘 원망했다. 이럴 때마다 다른 사람은 매우 평온했으나 나만 특히 괴로웠다. 그때 나는 법리로 언니를 인도하지 못했으며 또 참지도 못했고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는 더욱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냥 언니가 이것저것 원망만하고 부모님께 불경하며 효심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원망은 언니 자신에게도 좋지 않아 늘 수구를 잊고 끝없이 논쟁하다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건드려 좋지 않은 기분으로 결말이 났다. 그 외에 나는 조카들에게도 불만이 있었다. 조카들은 성격이 급하고 식탐이 많으며 화를 잘 낸다는 등등이다. 몇 년간 계속 이러했다.

어느 날,밍후이왕에서 수련생의 교류 글을 보았다. 우리가 자신의 부족함과 집착을 보아낼 수 있게 속인이 매우 고생스럽게 연기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그날 저녁이었을 것이다. 나는 언니가 그렇게 원망하고 남을 탓한 이유, 그리고 조카들의 부족함을 많이 보아낸 이유는 내가 언니들과 동생에게 원한심, 질투심, 원망심이 있고, 이익에 대한 마음과 정에 대한 집착, 조급한 마음, 수구하지 않는 것, 화를 잘 내고 식탐이 많은 등 마음이 매우 깊이 숨어 있어서라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쳐서야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알고 보니 자신에게 이렇게 많은 집착심이 있었다. 정말로 가족에게 미안했는데, 그들은 내가 스스로 집착심을 보아내도록 이렇게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있었다.

짐을 내려놓고, 원망심과 다른 사람이 나를 원망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버리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70대 노년 수련생이시다. 두 분은 노년에 가정을 이뤘고 새어머니는 재혼하시고 얼마 안 돼 아버지를 따라 수련을 시작하셨다. 한 번은 새어머니께서 병업의 고비를 넘지 못하시고 병원에 가셨고, 나중에 교류를 통해 깨달으셨다. 이 일에서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 원망할까봐 두려운 마음이 매우 강해 힘들어하셨다. 아버지는 법리로 교류하지 않고 새어머니의 두 딸을 부르셨다. 새어머니도 정념이 조금도 없어 병원에 가시는 일을 촉성시킨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다른 사람이 원망할까봐 두려워하시는 주요 원인은 나의 친어머니의 사망에 있다. 아버지는 많은 속인의 원망과 비난을 감당하시느라 압력을 많이 받으셨다. 아버지는 당신께서 부딪친 고비는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나, 새어머니께서 고비에 처하셨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매우 힘들어하셨다. 나는 이는 속인의 집착심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라고 인식하는데, 바로 마음속의 짐을 내려놓지 않은 것이다. 사실 대법이 있고 자신이 바르게 했다면 속인의 원망과 비난이 무슨 대수겠는가?

사부님께서 “당신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 집착한다고 말할 때 자신의 집착이 충격을 받아 거꾸로 다른 사람이 집착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집착을 덮어 감추는 것이 아닌가?”[2]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했다. 생각해보니 내게도 다른 사람이 원망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동수였던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때 나는 수련한 지 1년이 됐었는데, 속인인 언니에게 전화해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사실 이 역시 근심이 앞서서 다른 사람이 원망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었다. 훗날 어머니께서 퇴원하겠다고 말씀하시고서야 내 마음이 든든해졌다. 의사도 치료할 수 없다고 해서 순조롭게 퇴원했다.

퇴원 후,어머니는 병원에서 고생한 것을 말씀하셨으나 나는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았다. 훗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어머니께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신 후의 일이라고 여겨 유감스럽지 않았다. 다만, 동수인 가족들이 관건 시기에 정념이 없어 어려움에 처한 동수를 끌어당기지 않고 오히려 많은 마난을 만들어줬다는 점이 유감스러웠다. 게다가 나도 법리에서 청성하지 않아 어머니의 상태를 소업으로 여겨 도움을 드리지 못했다. 훗날에야 그것은 구세력의 박해이고, 이로써 동수인 큰언니와 그 외의 동수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났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했으면서 그들은 왜 이러한 일도 깨닫지 못한 것이냐고 생각했다.

나는 여기까지 글을 쓰다 문득 깨달았다. 나에게 다른 사람의 원망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타인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이 마음의 짐을 계속 놓지 않아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핸드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다

동수인 큰언니는 핸드폰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항상 이 문제로 대화를 나누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고 늘 상관하지 말라며 네 일이나 잘 하라고 했다. 지금 나는 왜 언니가 핸드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 내가 그토록 반감을 가졌는지를 깨달았다. 바로 내가 핸드폰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인데,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도 부끄럽다. 나는 소설과 동영상에 빠져있었다.머릿속에는 모두 색정적이고 폭력적인 더러운 물질이 주입되었다. 또 색욕과 정이 매우 깊어 나의 수련에 매우 큰 교란과 파괴를 일으켰으나 늘 끊으려 해도 끊지 못했고, 수련도 갈수록 느슨해졌다.

그러다가 사부님의 설법에서 다음의 법 구절을 보고나서야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았다.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는 핸드폰을 사라. (뭇 제자 큰 웃음,박수) (사부님 웃으심) 극복하고자 하면 언제나 방법은 있다.당신들은 아는가? 산에 있는 많은 대법 어린 제자들은 교란을 받지 않으려고, 전화로만 쓰며,인터넷을 하지 않는다.”[3]

며칠 전 나는 구식 버전 핸드폰을 구매했다. 집에서 이 핸드폰을 사용하니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었으며, 인터넷을 할 수 있는 핸드폰은 직장에 두고 다녔다. 결과적으로 이 집착심을 자제할 수 있었다. 구식 버전 핸드폰을 사용하면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핸드폰을 포기하지 못한 주된 이유는 체면이었다. 직장 동료가 보면 부끄러울 것 같았고,이 핸드폰을 구매할 때 판매원이 누가 사용하는지 묻기도 했었다. 나는 내가 사용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명(名)을 구하는 마음이 이렇게 강했다.

내가 일찍 자신을 바로 잡았다면 동수인 큰언니가 그렇게 연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 인터넷을 할 수 있는 핸드폰이 없어지자 나는 많이 홀가분해졌다. 더는 버리지 못하는 집착심으로 고통스럽지 않았으며 마음이 청정(淸靜)해졌고 시간도 많아졌다.

다른 사람이 업신여기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억울함을 버리다

며칠 전 동료 사이에서 작은 일로 매우 큰 다툼이 발생했다. 그 후에 대각선 쪽에 앉은 동료가 화가 나서 이직하겠다고 말해 그를 다독였다. 그는 자신은 개의치 않을 수도 있지만 상대방이 너무나 타인을 업신여긴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다른 직장에서 업신여김을 당했던 일을 언급하며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라는 마음이 없으면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주로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알려주었다.

나중에 나는 왜 자신이 그 직장에서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느꼈는지 생각해보았다. 나에게 억울한 마음이 강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억울한 마음이 있기에 일부 일을 통해 그것을 나타나게 하고 제거해야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회사 화장실의 청소는 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계속 하던 몇 명이서 하다가 나중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나도 때로는 화가 났다.더러운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공공장소의 위생은 여럿이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사람이 하지 않으면 나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잘못된 생각이었고, 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되었다. 나는 대법 수련자이고 속인과 같을 수 없으며, 직장의 많은 동료도 내가 수련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법에 나쁜 영향을 끼치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 “그러나 대법제자는 움직임에 휩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거슬러 올라간다!”[3]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불만을 참으며 억지로 청소를 했다. 매우 억울했고 업신여김을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한번은 발정념할 때,사부님의 설법이 떠올랐다.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4] 그 뒤로 나는 더는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수련을 하는데 이런 작은 일에 두려워해서야 되겠는가? 업신여김을 당했다는 마음과 억울함도 점차 담담해지다 사라졌다.

수련을 이렇게 오랫동안 한 뒤에야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을 닦을 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마침내 사부님의 말씀 “당신은 안으로 수련해야 하며 밖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1]를 깨달았으니 괜찮다. 아마 이것이 조금씩 진보하는 것이리라!

부족한 곳은 수련생들이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미국동부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8년 워싱턴DC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

 

원문발표: 2019년 2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2/19/3829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