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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걸음을 내디디면 달라진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새로운 연공음악에 1시간 빠오룬(抱輪) 음악이 포함됐다. 이는 나에게 있어서 난도가 매우 높았다. 이전에 30분 빠오룬도 매번 하고나면 발꿈치가 저리고 아프거나 몸이 힘들었다. 지금 한 시간으로 증가돼 속으로 덜컥 겁이 났다. 나는 마치 산기슭에서 산꼭대기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수련생에게 들은 말도 있다. “사부님께서 우리의 신체를 쾌속으로 정화해주시려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나는 속으로 심성을 잘 수련하면 모든 것이 다 있는데, 심성을 제고하지 않고 연공만 해서 무슨 소용이겠는가? 또 이 생각은 구실에 불과한 것도 알고 있었으며 어쨌든 이 한 시간 빠오룬을 에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한 걸음을 그렇게 내딛기 어려운가? 난 대법제자가 아닌가? 요만한 일에 봉착해 물러난단 말인가? 오직 마음에서 행할 수 있다고 여기면 꼭 따라갈 수 있다. 비록 마음에서 선택이 오가고 있었으나 이미 그 한 걸음을 내딛기로 마음먹었다.

이로 인해 나는 몇 가지 수련 중에서 매 단계가 떠올랐다. 따라가는가 따라가지 못하는가는 다르다. 가깝게는 장쩌민 고소에서 장쩌민을 고소한 것과 고소하지 않은 것이 같겠는가? 만약 생사의 마음을 내려놓지 않는다면 그때 그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당시수련생들이 적잖은 쟁론이 있었다. 결연히 고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좀 지켜보자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나도 며칠이나 망설였고두려운 마음이 있었다.아직 고소도 하지 않았는데 경찰이 며칠에 한 번씩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데 만약 고소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비록 망설였으나 속으로는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염두가 있었다. 이 일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됐고 또 사부님의 점화가 있어서 나는 단호히 그 한 걸음을 내디뎠다. 나중에 경찰이 찾아왔을 때 내 표현은 당당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니나 당시는 마치 큰 산을 힘들게 오른 것 같았다. 내가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 마음은 가볍고 즐거웠다. 그 한 걸음을 내디딘 느낌은 달랐는데장쩌민 고소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체험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위챗을 삭제할 때 나는 또 며칠 망설였다. 장사를 하고 있고 몇 개 단체 채팅방이 있으며 업무연계와 물품구매, 계좌이체가 매우 편리했는데 단번에 삭제한다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아 삭제하고 싶지 않았으며 삭제하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위챗은 사람의 것으로 수련인은 한 경지에서 배회해서는 안 되며 어서 빨리 제고하는 것이 관건이다. 또 경지가 취사선택을 결정한다. 비록 일부 삭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를 찾아냈으나 법은 다른 층차가 있고 위로 올라가야 한다. 아래로 갈 수 없으며 사람의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됐다. 위챗을 사용하면 즐거움과 편리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지니고 원만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단호히 삭제했다.

삭제 후 몇 달이 지나 위챗이 없는데 습관이 되자 매우 홀가분했고 많은 번거로움이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일은 아무것도 아니나 당시 그 한 걸음을 내딛기란 매우 힘들었다. 삭제 후 마음은 깨끗한 푸른 하늘을 느낄 수 있었으며 위챗을 삭제하지 않은 사람은 체험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빠오룬 한 시간을 하는 문제에서도 나 역시 며칠이나 망설였다. 한 수련생이 물었다. “새로운 연공음악이 나왔습니다. 칩이 필요하세요?” 나는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수련생이 “빠오룬을 할수록 가볍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나도 해봐야지 하다가 ‘안 돼, 원래 30분으로 할 거야’ 했다. 하지만 내가 처음으로 빠오룬을 한 시간을 했을 때 힘들어 얼굴이 땀범벅이었고 두 팔이 시큰거렸으며 전혀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연공하고 나서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마음이 밝아졌으며 몸이 샤워하고 난 것 같아 가뿐하고 흥분됐다. 또 며칠이 지나 한 수련생이 말했다. “우리가 매일 이렇게 바쁘고 시간 또한 매우 빨리 가는데 일주일에 두 번 하고 나머지는 30분으로 합시다.” 이 말은 바로 내 속마음과 같았다. 나 역시 한 시간으로 견지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법학습 팀에 갔을 때 수련생이 매일 빠오룬을 한 시간 하는 것을 발견했고 또 몇 명 수련생을 만났는데 그들 역시 한 시간을 견지하고 있었다. 일부 수련생은 연공에서 그다지 착실하지 않으며, 한 시간 빠오룬 연공은 말할 나위도 없이 어떤 수련생은 며칠 동안 연공하지 않으며 어떤 상태도 다 있다. 나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만약 이런 사람들에 이끌려간다면 그건 바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시작이다. 나는 또 새로운 연공음악이 발표된 후 다수의 수련생은 누구나 떨어지려 하지 않는 것도 발견했다. 나는 단번에 수련생과의 격차를 보아냈고 경지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갑자기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고생 중의 고생을 겪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대인지심(大忍之心)이 있어야 하며,”[1] 한 시간 빠오룬 역시 고생을 겪으며 마음을 닦는 일부분이다. 그리하여 나는 새로운 연공음악에 따라 빠오룬 한 시간으로 연공하기로 결정했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나의 신체를 빠르게 연화하시는지 볼 수 없고, 얼마나 깊은 내포가 있을지 깨닫지 못했으나 나는 한마음으로 사부님을 믿고, 따라갈 것이며 반드시 따라갈 것이다.

며칠이 지나서 느낌이 좋아졌고 가부좌와 빠오룬에서 잡념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며 또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수련인은 많은 고비와 난에 봉착하며, 고비마다, 난관마다 모두 자신을 성취하는 기념비로서, 힘을 내 올라간 후 다시 아래로 내려다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느낌과 그 경지에서의 깨달음은 올라가지 못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체험으로 법에 있지 않은 곳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발표: 2019년 2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2/18/3828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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