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난 대법제자
[밍후이왕] 1997년 대학생 시절에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해 지금까지 21년이 넘었다. 1999년 전에는 전국적으로 파룬따파가 좋다고 했다. 1999년 7월 20일 이후 중국공산당이 대법과 대법수련인에 대한 박해를 발동해 지금까지 멈추지 않았다. 나는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잘 안다. 사부님께서는 가장 바르고, 대법은 진정하게 사람들에게 마음을 수련하고 선을 지향하며 좋은 사람이 되게 가르친다는 것을 잘 안다. 비록 잔혹한 박해를 당했지만 나는 여전히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가정에서, 사회에서 엄격히 자신을 대하고 마음을 수련하여 좋은 사람이 되고 있다.
1. 잔혹한 박해에도 여전히 ‘진선인(眞善忍)’을 굳게 지키다
2000년 나는 베이징에 대법을 실증하러 갔다가 붙잡혀 감금당하고 박해받았다. 나의 생활환경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불법적인 감금과 사악한 박해로 나는 학업을 지체하여 대학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부모님께서는 나를 키우느라 매우 큰 대가를 치렀지만, 나의 미래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감금된 기간에 어머니는 매일 눈물로 보냈고 아버지는 머리가 다 하얗게 세었다. 여러 가지 유언비어에 부모님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내가 당당하게 노동수용소에서 나올 때는 이미 2003년이었다.
나와 함께 박해당한 다른 한 수련생은 우수한 학생이었다. 잔혹한 박해로 노동수용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각혈로 사망했다. 그의 부모는 하나뿐인 아들이 사망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아들이 명문대학에 붙은 것은 온 가족, 온 마을의 영광이었다. 지금 중국공산당의 박해로 그의 부모는 자식을 먼저 보냈다. 연로한 그들은 여생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이 수련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여동생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나의 아내가 된 그녀도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대법제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줄곧 대법을 지지했다. 결혼한 후 우리는 아들 둘을 낳았고 작은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했다. 두 노인의 마음에 위안을 드린 셈이다.
사악이 나에 대한 경제적 박해를 타파하기 위해 시내에 집을 구매하고 장인, 장모를 우리와 함께 지내게 했다. 노인의 편리를 위해 3층 집을 샀다. 1층은 다용도실로서 실은 2층 반 높이밖에 안 된다. 아내는 언니가 둘 있는데 그들의 아파트 층수가 높아서 장인, 장모는 우리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가정 관계를 평형 시키기 위해 나와 형은 또 시골에 새집을 지어 나의 부모님의 평생소원을 들어 드렸다. 새집은 한 쪽이 넓고 한 쪽이 좁았다. 나는 내 명의로 되어있는 넓은 쪽을 형과 형수에게 양보했다. 당시 아내가 내키지 않아 하기에 아내와 상의했다. “대법제자는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을 선하게 대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항상 시골에 사는 것도 아니고 시내에도 집이 있는데 형과 형수를 위해 많이 생각해야 한다.” 아내도 도리에 밝아 넓은 쪽을 형과 형수에게 양보했다. 나의 부모님도 매우 기뻐했다. 이 일은 원만한 해결을 보았다.
2. 사부님께서 나와 가족을 보호하시다
1998년 학생인 나는 매일 아침 공원에 연공하러 갔다. 토, 일요일에는 대형 연공 홍법활동이 있었다. 어느 주말 새벽 4, 5시쯤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공원의 연공장으로 갔다.
날이 아직 밝지 않았고 가로등도 없었다. 갑자기 자전거 앞바퀴가 붕 뜨더니 자전거와 함께 매우 깊은 구덩이에 빠져 버렸다. 당시 두 손은 반사적으로 구덩이 안의 자갈을 짚었다. 자전거는 뒤에서 머리 위로 360도 회전하여 내 몸 위에 떨어졌다. 원래 그 길은 공사 중이라 깊은 구덩이를 팠는데 앞에 표시가 없었다.
나는 수련인이고 사부님께서 보호해 주시기에 아무 일도 없다. 아픈 것도 상관하지 않고 즉시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덩이에서 기어 나왔다. 자전거도 고장 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연공장에 갔다. 가부좌할 때에야 두 손바닥에 피와 멍이 생겼다는 것을 발견했다. 깨끗이 닦은 후 아무런 처치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전부 아물었다. 이런 신기한 일은 매우 많았다.
또 한 가지 신기한 일이 큰아들에게 나타났다. 대략 2009년 나는 자주 외지로 출장을 다녔기에 큰아들을 시골 부모님에게 보냈다. 어느 날 어두워져 가는데 집에서 키우는 오리가 우리로 들어왔다. 이웃집 아이와 아들은 함께 오리 보러 갔다. 둘은 크고 무거운 흙벽돌을 잡아당겼다. 흙벽돌이 넘어오면서 아들의 두 종아리를 찧었다. 아들은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얼른 가 보았다. 당시 날이 어두웠기에 제때에 병원에 가지 못했다. 그날 저녁 아들은 아파서 줄곧 울었다. 이튿날 의사 친척을 찾았다. 두 종아리가 골절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즉시 현(縣) 한의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후에 골절로 확인됐다.
그때 나는 난징(南京)에 출장 중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괴로웠다. 하지만 사부님을 확고히 믿었다. 속으로 사부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우여곡절을 겪고, 의사인 친척이 아이를 데리고 한의원에 가서 사진을 찍고 골절 위치를 찾아 석고 깁스를 하고, 총 몇백 위안(약 몇만 원)을 썼다.
대략 한 달 후 아들의 종아리뼈는 잘 붙었다. 놀랐지만 위험은 없었다. 지금까지 아들의 두 종아리는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줄곧 아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사부님께서는 수련하는 나를 보호해 주실 뿐만 아니라 내 가족도 보호해 주신다.
3. 전반 사회는 모두 수련의 도장(道場)이다
대법은 속인 사회 중에서 수련하고 대법제자는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청년 대법제자로서 자신의 직업이 있다. 대법이 박해당한 지금까지 19년 동안 여러 가지 압력도 매우 컸다.
2004년 생계를 위해 나는 상하이에 왔다. 대법제자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외에 자신의 업무를 잘 해야 하고 또 세 가지 일을 잘 해야 한다. 집에서는 가족 관계를 잘 평형 시켜야 하고 회사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업무를 잘 해야 한다. 처음 3년 나의 월급은 가족을 부양하기도 어려웠다.
4년째에 다행히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 수입도 크게 늘었고 자주 전국 각지로 출장을 갔다. 잘 하면 시장(市場)은 의외로 돈을 더 준다. 나는 수련인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며 받지 않았다. 여러 가지 경비를 결산할 때도 실사구시로 결산했다.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모두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됐다.
한번은 기차에서 한 승객이 자신의 아내와 함께하고 싶다며 나에게 아래층 침대와 바꾸자고 했다. 나는 기꺼이 바꾸어 주었다. 그는 매우 고마워했다. 나는 말했다. “감사할 것 없어요! 인정을 베풀면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는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되어 연락처를 주면서 말했다. “선양(沈陽-그가 있는 도시)에 오면 저에게 연락하십시오.” 후에 나는 선양에 가서 연락했더니 그는 음식을 대접했다. 나는 그에게 파룬따파의 진상을 알려 주었다. 그는 자신은 자주 공안과 접촉한다고 말했다. 그의 한 동료는 바로 파룬궁을 수련했기에 박해당해 사망했으며 지금까지 화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내가 신고할까 봐 걱정되지 않아요?” 나는 말했다. “나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신고하지 않을걸요.” 그에게 내가 박해당한 경력을 말해 주었다. 나의 큰 처남이 박해로 사망한 사실을 말해 주고, 박해 중에서 줄곧 나는 수련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러한 수련인들은 모두 좋은 사람이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사회는 바로 하나의 수련장이라고 생각한다. 어디에 가도 모두 수련할 수 있고 모두 세 가지 일을 잘 할 수 있다.
또 한 번은 기차에서 나의 침대 맞은편에 한 아저씨가 수심을 띄고 있는 것을 보았다. 대화중에서 그의 아들이 상하이에서 집을 샀는데 지금 신장병을 앓고 있어서 한편으로 주택구매 융자금을 갚고 한편으로 병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아들이 병으로 직장에 영향을 주고 대출을 갚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나는 그에게 주변에 만성 신우염을 앓는 아이가 대법을 수련하여 완쾌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이는 만성 신우염을 앓았고 온갖 치료방법을 다해 봤지만, 효과가 좋지 못해 휴학했다. 대법을 수련한 후 신장병이 나았고 다시 복학했다. 그의 아들에게 파룬따파를 찾으라고 하고 그에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묵념하게 했다. 그는 근심이 바뀌어 기뻐하며 나에게 감사했다. 그는 내가 기차에서 내릴 때 차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어디에 가든 선의를 전달했다.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차 안에 마오(毛). 마두의 두상(頭像)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 두상을 걸면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노인들은 묻혀서 평안을 얻는다고 말하는데 그의 시체는 아직 톈안먼 광장 기념관에 있고 망령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평생에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그리고 공산당이 어떻게 세인을 박해했는지, 어떻게 장쩌민과 서로 결탁하여 파룬궁을 박해했는지를 말해 주고 마지막에 삼퇴를 권했다. 기사는 듣고 바로 삼퇴했다. 후에 두 번째 택시를 탔는데 절묘하게도 또 그의 택시를 탔다. 마오의 두상을 아직도 걸고 있는 것을 보고 진상을 명백하게 알리지 못한 것 같아 또 진상을 알려 주었다. 이번에 그는 정말 명백해 졌다. 그리고 그 두상을 걸지 않겠다고 명확하게 말했다. 사부님의 정법 형세의 추진에 따라 전국 각 지역의 천만의 대법제자가 세인을 향해 진상을 똑똑히 알렸다. 지금까지 형세가 호전되고 있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전에는 집으로 전화를 해도 밖의 공중전화로 해야 했다. 집에 있는 전화를 도청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한 수련생이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하는 바람에 후에 공안과 현지 정부의 인원이 그의 집에 가서 그의 대법 서적을 모두 불법적으로 압수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고향의 공안이 곳곳에서 나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하지만 환경은 여전히 매우 열악했다. 평소에 신분증으로 핸드폰 카드를 구매하지 못하고 은행카드를 만들지 못했다. 정보가 남아 악인이 찾아낼까 봐 두려웠다. 지금은 사악한 요소가 제거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주동적으로 악인을 찾아 사악을 청리하고 있다.
한번은 내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회사에서 출국 여행을 장려했다. 출국하려면 여권을 만들어야 했다. 현지 공안국 출입 관리국에 갔는데 공안과 국가안보에서는 컴퓨터에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 정보가 있다는 이유로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 나는 시민으로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것은 잘못이 없으며 출국은 나의 정당한 권리임을 주장했다. 중간에 많은 곡절이 있었고 심지어 현지 공안국에서 회사에 전화하여 조사까지 했다. 그리고 회사에 매우 많은 압력을 가져다주었고 회사 사장도 내가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임을 알게 됐다. 마지막에 나는 오히려 당당하게 여권수속을 마쳤다. 업무를 출중하게 완성했기에 출장하고 돌아온 후 대표이사는 친히 호텔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나를 중간에 앉히고 다만 말 속에서 한번 암시했을 뿐이다. 당시 나는 거리낌이 없었기에 개의치 않았다. 연말에 회사에서는 나에게 뛰어난 공로상을 수여했다.
“제자가 정념이 족하면 사부는 회천력(回天力)이 있노라.”[1] 한 길에 사존의 자비로운 가호가 있기에 위험에서 벗어나 평온하게 될 수 있었다. 사존님 감사 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 2-師徒恩(사도은)’
원문발표: 2019년 1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11/3799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