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대당 정관 17년, 당 태종은 명령을 내려 능연각에 24명 공신의 화상을 그려 그들의 탁월한 공로를 표창하도록 했다. 이 문신, 무신들은 모두 당 태종을 보좌하여 ‘정관지치’를 개창한 공이 있는 신하들이었다.
24명 공신 중에 두 명의 명장이 있는데 이정(李靖)과 후군집(侯君集)이다. 이정은 병법에 정통했고, 남북을 정벌하였으며 문무를 겸비했다. 그는 검교 중서령, 병부상서 우복사(승상), 봉위 국공을 역임했다. 당 태종이 존경하고 의지한 인물이다. 예로부터 많은 공을 세웠고 입덕·입언(立德·立言)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명장이다. 후세에서 평가가 지극히 높고, 역대로 이정을 공신으로 여겼다. 후군집은 수나라 말기부터 당 태종을 여러 해 동안 따랐고, 당 태종의 등극에 큰 공을 세웠으며 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병부상서, 봉진국공 관직을 맡았지만, 태자 이승건의 반란에 가담하여 사형당했다. 지위와 명예를 잃었고, 천추의 한이 되었다. 후세는 그를 앞전에 세운 공을 모조리 잃은 반면교사적인 교훈으로 본다.
두 사람은 모두 당과 태종에게 공을 세웠지만, 결말은 완전히 달랐다. 선명한 대비를 형성했는데 왜 이럴까? 역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는 그들의 사람 됨됨이의 원칙과 소양에 따라 초래된 것임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우리 오늘날 정법 시기의 대법제자가 깊이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이정은 큰 공이 있지만 겸손하고 오만하지 않았으며 담담하게 억울함을 참았다
이정, 자는 약사(药师), 섬서성 고옹(古雍)주 삼원 사람이다. 원래 수나라 관리였고 후에 당나라에 귀순했다. 군사를 신같이 다뤘고, 각종 전쟁터에서 변화무쌍한 용병술로 승리를 거뒀으며 평생 패한 적이 없다. 당나라개국 초기, 전투에서 이정은 당 태종이었던 진왕 이세민 다음으로 공훈이 혁혁했다. 당고조 이연은 “고대 명장 한신, 백기, 위청, 곽거병 그 누구도 이정과 비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정의 실전 경험에 따라 여러 부의 병서를 저술했다. 당나라에서는 ‘군신(军神)’이란 명예를 누렸다.
이정의 사람됨도 사람마다 칭찬했는데 그는 일생 왕에 충성했고, 국민을 사랑했으며,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 반란을 제거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사리를 도모하지 않았고, 재물을 탐하지 않았으며, 권세에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했다. 많은 공신, 명장들과 비교했을 때 이정의 가장 대단한 점은 오만하지 않고 시종 겸손하며 신중하고 권력을 탐하지 않은 것이다. 조정에서 국사를 의논할 때 늘 공손하고 온화했으며 사람들과 다투지 않았다. 상서우부를 4년간 재임한 후 다리질환으로 사직할 때 당 태종에게 사직서를 제출할 때도 아주 진솔했다. 태종 황제는 감동하고 칭찬했으며 “모든 신하의 모범”이라고 했다. 이정은 비록 관직을 더 맡지 않았지만, 그의 인품과 재능을 소중히 여겨 당 태종은 이정에게 ‘특진’을 하사하여 중대한 군사와 국정 대사에 참석하게 했고, 또 장군들에게 병법을 가르치게 했다.
그러나 이정에 대하여 더욱 탄복할 부분은 갑작스럽게 억울한 누명을 당했을 때 논쟁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았으며 조금의 원망도 없다는 것이다. 사건이 발생한 후 예전처럼 온 마음을 다해 국가에 충성했다. 이정은 두 번이나 모함을 당했는데 모두 큰 공을 세운 후였다. 이정은 당 태종의 매우 슬기롭고 총명함과 공명정대함을 믿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첫 번째는 정관 4년(기원 630년) 1월, 이정은 3천 명 정예기병을 이끌고 추위를 무릅쓰고 마읍(금산 서삭현)을 출발해 악양령으로 향했다. 정양에서 동돌궐족을 크게 물리쳤는데 동돌궐족 수령은 황급히 적구로 도망갔다. 같은 해 2월, 이정은 또 1만 정예기병을 선정하여 백도에서 음산으로 장기간 돌진하여 돌궐족을 습격했다. 최종적으로 돌궐족 1만여 명이 사망했고 십여만 명의 포로를 붙잡았는데 수령 갈력가한(颉利可汗)도 포로가 되었다. 이로써 동돌궐족은 멸망했다.
수나라 때부터 돌궐족은 서북지역의 강국이었고 병사와 말이 강했다. 끊임없이 남하하여 침략했는데 중원에 거대한 위협을 조성했다. 이정은 동돌궐족을 멸망시켜 당나라 서북변방의 우환을 제거했다. 또 이연과 이세민이 그 당시 돌궐족에게 당한 치욕을 씻어주었다. 이는 당나라 초기에 대외적으로 적을 물리친 대승리였는데 적은 인원으로 큰 승리를 얻어 의미가 크다. 당나라 군사의 위험이 사방을 비췄고 주변 여러 나라에서는 당 태종을 ‘천가한(天可汗)’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승리 소식이 빨리 전해왔는데 온 나라가 경축하였고 당 태종은 이정의 승리를 높이 치하했다. 그날 태상황 이연과 이세민은 고위 관리, 왕, 귀족들을 모두 능연각에 불러 연회를 열고 새벽까지 경축했다.
그러나 큰 공을 세운 이정이 조정에 돌아왔을 때 뜻밖에 어사대부 소우(萧瑀)가 탄핵 상소를 올렸는데 이정이 군사를 잘 다스리지 못해 돌궐족의 천막을 습격할 때 보물을 병사들에게 약탈당했으니 사법부가 심판하여 죄를 물을 것을 청했다. 당 태종은 이정을 혹독하게 훈계했는데 억울함을 마주한 이정은 쟁론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았으며 ‘고개를 숙여 사죄’할 뿐이었는데 원망함이 전혀 없었다. 진상을 조사한 당 태종은 이정을 위안했다. “어떤 사람에게 당신이 비방당했는데 짐이 진상을 알았으니 자네는 절대로 이 일을 마음에 두지 말게.” 이정에게 많은 재물을 주면서 그를 상서우부로 승진시켰다.
두 번째는 정관 9년(기원 635년)에 ‘토욕혼(선비족의 한 갈래가 세운 옛 나라 이름. 지금의 칭하이(青海)성 북부, 신장(新疆) 동남부에 있었음)이 중원을 침범했을 때 이정은 다리질환과 고령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나섰다. 여러 갈래로 군사를 거느리고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며 천 리 길을 뒤쫓아 습격했는데 두 달간 피를 흘리며 작전에 임하여 토욕혼을 함락 시켰다.
이정이 토욕혼을 추격할 때 염택도 총관 고증생(高甑生)이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아 군기를 지체해 이정의 질책을 받았다. 고증생은 불만을 품고 전투가 끝난 후 광주 도독부 부장 당 봉의와 결탁하여 이정이 반역을 꾀했다고 모함했다. 또 한 번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이정은 모함을 마주하고 여전히 원망도 변명도 없었다. 태종 이세민은 이 일을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결과 진상이 밝혀졌는데 고증생을 무고죄로 변방에 유배시켰다.
당 태종은 바로 이런 사건으로 이정의 충성과 고상한 인품을 알게 되어 그를 아주 존경했다. 이정의 병이 위중할 때에 태종 황제는 자신의 병든 몸을 이끌고 여러 번 이정에게 병문안했는데 눈물을 흘리며 무척 괴로워했다. 이정을 위해 깊이 걱정을 했다고 한다. 이정은 정관 23년에 사망했는데 향년 79세였다. 이정이 사망했을 때 태종은 무척 비통해하며 이정을 소릉에 묻힐 특별한 영을 내렸다. 당 태종은 천고에 없는 현명한 왕이었다. 이정은 큰 뜻을 품고 품격이 고상한 태종을 만나 마침내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그들이 함께 한 왕조는 명군 양신(明君良臣)으로 서로를 소중히 아끼며 역사에서 좋은 이야기를 만들었고 후세의 제왕과 장군, 재상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이정이 태종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는 과거에 천자의 위력을 빌려 약소한 공헌을 했을 뿐입니다.” 자고로 큰 공을 세운 사람 중에는 이정처럼 할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았다. 바로 이정은 흉금이 넓고 겸손하고 자만하지 않으며 선에서 시작하여 선으로 마무리하는 명장 중의 모범이 되어 후세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게 되었다. 당 현종 때 이정은 자고로 10대 명장 중의 한 명으로 ‘무성왕묘(武成王庙)’를 누릴 수 있었다. 역대로 이정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높았다. ‘구당서’에는 이렇게 이정을 평가했다. “위 공(이정을 가리킴)은 장군 가문에서 태어나 위양지풍(渭阳之风)에 못지않은 품행을 지녔다. 돌궐의 침입에 군사를 이끌고 위풍을 떨쳐 나라를 지켰으나 개국공신이나 중책은 시행했고, 공명과 이익에 항상 겸손했다. 그 이름을 당재자전(唐才子传)에 새겨도 참으로 빛나 개국공신 경, 등(耿,邓)에 못지않다.”
후군집은 교만하고 방종하여 죄를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았다
후군집은 처음에 일대 명군 이세민을 보좌하여 황위에 오르게 한 중요한 공신이다. 조정에서 당 태종을 도와 지략과 대책을 냈고, 전쟁터에서도 용맹하게 적을 무찔렀다. 태종을 도와 당나라 강산을 공고히 했고, 관직은 병부상서, 국공까지 올랐다. 그러나 후군집은 공로가 커질수록 교만하기 시작했고 재물과 권력을 탐했다.
정관 14년(기원 640년) 후군집은 대군을 거느리고 고창국(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1천 년간 투루판 일대를 지배)을 멸망시킨 후 당 태종에게 정황을 보고해 일부 죄가 없는 사람을 귀양 보냈고, 재물을 탐하여 고창국의 보물을 자신의 소유로 했다. 수하 장군과 병사들은 이 내용을 알고 금, 은, 재물을 도둑질하기 시작했다. 후군집은 자신이 한 추한 일이 폭로될까 봐 장군과 병사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조정으로 돌아왔다. 일부 사람들이 이 일을 고발했는데 태종은 진상을 파악하고 사법관에 명하여 후군집을 옥에 가두었으나 차마 그의 죄를 벌하지 못하여 석방했다.
그러나 후군집은 태종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자신의 공을 크게 보고, 재물을 탐한 위법행위는 적게 생각하고 별일 아니라고 여기면서 반성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정처럼 그렇게 담담하게 질책을 마주하지 않고, 반대로 태종 황제가 자신한테 공평하지 않다고 불만스러워하며 곳곳을 다니며 분노를 퍼뜨렸다. 자신이 배척당한다고 여겨 점차 반역의 욕망이 싹텄다. 후군집은 이전에도 ‘대장 장량’을 부추겨 반역하게 했다. 장량은 후군집이 반역하려고 한다는 말을 태종에게 고했지만, 태종은 따지지 않고 단지 장량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와 후군집은 모두 공신들이요. 이런 말을 후군집이 자네한테만 했다면, 그때 가서 후군집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네. 그러면 자네도 별 방법이 없을 거네.” 그리고 당 태종은 이런 말을 마음에 두지 않고 변함없이 대했다. 정관 17년, 태종은 염입본에게 24명 공신의 초상화를 그려 능연각에 비치할 것을 명했는데 후군집은 17번째로 열거되었다.
그러나 후군집은 당 태종의 넓고 큰 도량을 결코 영예와 기회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교만에 빠진 그는 이미 순응하지 않았으며, 좌절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감당하지 못했다. 마음에 태종에 대한 원한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였고 이지를 잃고 일심으로 반역을 꾀하려고 했다.
당시 당 태종은 태자 이승건을 폐하려 하고 있었는데 후군집은 이 기회를 빌려 태자에게 반역을 꼬드겼다. 그들은 비밀리에 준비했으나 정관 17년(기원 643년) 반역음모가 발각되어 태자 이승건은 폐위되었고 후군집은 감옥에 갇혔다. 그 당시 당 태종은 후군집을 죽이려 하지 않고 전에 세운 큰 공을 생각하며 그를 사면하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문무백관은 동의하지 않았다. 반역은 대역죄이므로 처형하지 않으면 국법을 바로 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천지도 용인하지 않으니 후군집을 처형해야 한다고 신하들은 앞다투어 상소를 올렸다. 후군집의 교만함과 횡포로 많은 사람이 해를 입었다. 당 태종은 어쩔 수 없이 후군집을 처형해야 했다. 그리고 후군집의 요구를 들어 그의 아내와 아들딸은 살려 유배를 보냈으며 또 그들을 잘 보살펴주었다.
후군집을 처형하기 전에 태종이 눈물을 머금고 후군집에 말했다. “경을 위해 더는 능연각에 가지 않을 것이요.” 후군집은 이제야 그에 대한 태종 황제의 은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눈물을 비 오듯이 흘렸지만 후회막급이었다…….
후군집은 초기에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었지만 용맹스러웠다. 나중에 진 왕부에 들어가서 이세민을 따라 전쟁에 나갔고, 점차 공을 세워 이세민을 설득하여 현무문사변을 일으켜 태종을 보위에 등극하게 했다. 당 정관[당(唐) 태종(太宗)의 연호] 이후 후군집은 관직이 갈수록 높아졌고, 공부를 시작했으며, 인재선발 등에 참여했다. 또 이정을 따라 병법을 배웠다. 그러나 품행이 낮고 사욕을 제거하지 않아 권력과 재물을 탐했다. 공이 크다고 잘난 체하였고 안하무인이었다. 결국, 명예와 육신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천년의 세월 동안 후군집의 이야기에 대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다.
‘구당서[중국 오대 후진 유후(劉昫) 등이 칙명에 의해 편찬한 역사서]’는 그에 대해 이런 평가를 했다. “후군집은 적을 멸하고 쓸모가 많았으나 총애를 믿고 공을 자랑하고 경솔했으며 주의하지 않아 세운 공을 잃었고 후환을 남겼다. 어리석은 명장이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 말했다. “후군집은 당나라에 공을 세웠지만, 법을 어겨 처형되었다. 태종은 살려주려 했지만, 법이 허락하지 않아 처형되었다. 태종이 공신의 노고를 잊은 것이 아니라 세운 공을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게 스스로 법을 어긴 것이다.”
이정과 후군집의 이야기가 정법시기 대법제자에게 주는 시사
후세 사람들이 이정과 후군집을 평가할 때 감개하여 “군자가 공을 세우면 겸손하나, 소인은 지위를 얻으면 자신을 해치기 족하다.”라고 한다. 여기서 군자와 소인은 우리가 볼 때 바로 사람의 성품과 사람 됨됨이의 준칙의 차이다.
역사는 사람들에게 즐기라고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대법제자는 역사의 긴 세월 속에서 윤회전생 하며 위대한 사존을 따라 일조일대의 각종 부동한 역할을 연출했는데 중화의 찬란한 문명과 전통문화를 새로 시작했다. 역사에서 지금까지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인물과 역할은 모두 대법제자가 연출한 것이다. 정반의 역할과 교훈은 모두 그의 내포와 의미가 있다.
만고의 일들은 모두 법을 위해 온 것이다. 멀고 오랜 역사의 배치는 사실 모두 정법의 최후시각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정법시기에 조사정법과 중생구도의 신성한 사명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사명을 완성하려면 우리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하는 것이 기초이고 전제이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그럼 표면에서 보면 우리는 고립되어 싸우는 것인바,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잘 건설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자기의 수련 상에서, 이 사람으로서의 준칙상에서, 자기를 좀 더 잘 수련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을 완성하기가 아주 어렵다.”[1]
왜 역사에서 당 태종 수하에 이정과 후군집의 두 가지 전혀 다른 배역이 나타났는가? 두 공신의 품행은 다른 결말을 초래했는데 오늘날 대법제자의 수련에 본보기를 주는 것이 아닌가? 참조와 시사가 아닌가?
오늘날까지 걸어오면서 국내외 많은 정법시기 대법제자들은 오랜 세월 사부님을 도와 정법하는 중에 거대한 위덕을 쌓았고 역사상 당 태종 밑의 그 한 명 한 명의 ‘공신’이 아닌가?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가 이정처럼 그런 흉금으로 공을 탐하지 않고 시종 겸손하고 신중할 수 있겠는가? 우리 수련의 길은 “최후에 이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2]이어야 하고 최후일수록 청성해야 한다. 후군집처럼 ‘공’을 세우고 교만하면 우리 자신의 수련을 엄숙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 마음과 욕망을 방종하면 착오를 범하고 자성하지 않는 것이며 자심생마의 길에서 뉘우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정은 마침내 속인으로 인내심의 뒤에는 꾹 참아야 하는, 사람의 주저하는 마음과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속인으로서 그가 했던 행동들은 무척 대단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로소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우리는 수련인으로서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반본귀진을 위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더 높은 데로 승화하기 위함이다. 모든 사람 마음과 집착은 마땅히 반드시 진정으로 깨끗하게 제거해야 한다. 우리는 수련의 각도에서 이런 역사적인 인물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시사점으로 대해야 한다.
그런 후군집 배역의 각종 표현은 우리가 수련의 각도에서 볼 때 재물을 탐하는 마음, 명리심, 원망심, 질투심, 자만심, 자아와 자심생마가 아닌가?
우리가 평소에 일을 대할 때 수련으로 여기고 일을 하고 난 후 “공이 있다.”라고 여기거나, 혹은 사부님을 따라 오늘날까지 왔는데 공로가 없어도 노고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또한, 내내 착실하고 성실하게 수련하지 않아 명리심, 금전에 대한 마음 등등을 제거하지 못했다. 또 자아팽창까지 더해져 생활과 일 속에서 혹은 법을 실증하는 중에서 신중하지 못했다. 그렇게 관건이 되는 시각에 잘못을 저지르고 이로 인해 좌절과 마난을 마주하게 될 때 안에서 찾지 않아 자신의 착오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오히려 “공이 있다.”는 심리로 사부님을 향해 흥정하고 조건을 말한다. 수련인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마난은 없어지지 않고 심지어 더욱 엄중해져 이로써 사부님을 의심하고 원망하여 최후에는 떨어지거나 반면으로 나아간다.
사실 이 시기에 이런 상태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질투심이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악자(惡者)는 질투심의 소치로 자신을 위하고, 화를 내며, 불공평하다고 한다.”[3] 이 질투심은 바로 전형적으로 안을 향해 찾지 않고 밖을 향해 보는 표현이다. 자신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아 안을 향해 찾는 기제와 습관을 형성하지 못하여 모순과 마난에 부딪치면 밖을 향해 보며 사람 마음을 추구할 때 건드려진다. 예를 들어 자신이 한 일이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의 소원에 만족하지 못할 때, 다른 수련생이 지적해주거나 자신의 법에 부합하지 못한 행위가 수련생에 의해 밍후이왕에 발표되었을 때가 자신이 안에서 찾고, 집착을 제거하여 착오를 바로잡고 높일 좋은 기회임을 모른다. 반대로 불공평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여 억울해하고 원망하면서 수련생과 밍후이왕을 배척하고 더욱 심한 자는 사부님을 원망한다.
일부 사람은 이때 질투심을 제거하지 않아 강렬한 원망과 보복심 때문에 대법에 난법 하는 일을 하는데 더욱 무서운 것이 아닌가? 한 수련인으로서 그것은 아주 높은 층차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련자가 마성을 닦아 제거하지 않으면, 공(功)이 크게 난잡해져 얻지 못하거나 마도(魔道)로 들어간다.”[4]
“사람이 수련하기는 어려우나 떨어지기는 너무나 쉽다. 한고비를 넘기지 못하거나 내려놓지 못하면 반면으로 갈 수 있다. 역사적인 교훈이 매우 많다. 떨어져 내려왔을 때야 비로소 알고 후회하지만 이미 늦었다.”[5]
역사상 각종 수련 중의 교훈이 아니더라도 후군집이 공신에서 죄인으로 변한 것도 역사의 교훈 중의 하나가 아닌가?
우리는 여러 해 동안 보아왔다. 수련인의 강렬한 질투와 원망은 진짜로 사악이 원하는 것이고 박해의 구실이다. 한 수련인이 일을 아무리 많이 했더라도 자아와 질투심 등 사람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수시로 사악에 틈을 타게 하는 것이고 이용되는 것이다. 사악은 천방백계로 대법제자가 수련 성취하지 못하게 한다.
정법은 이미 최후의 최후이다. 반복귀진 해야 할 정법시기 대법제자인 우리는 자신한테 물어봐야 한다. ‘최후에 정과를 얻을 수 있는지? 원만할 수 있는지? 거대한 질투심을 제거했는지?’ 사부님께서 아주 명백하게 말씀해주셨다. “질투심 이 문제는 아주 엄중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 우리가 수련하여 원만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에 연관되기 때문이다.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면 사람이 수련한 모든 마음이 모두 아주 취약하게 변해 버린다. 여기에 한 가지 규정이 있다: 사람이 수련 중에서 질투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정과(正果)를 얻지 못하는데, 절대로 정과를 얻지 못한다.”[6] 생각해보라! 질투심을 제거하지 않으면 사부님께서 이런 생명을 어디에 놓으실 것인지? 이렇게 오랜 세월 수련하고 정과를 얻지 못하면 얼마나 두렵고 슬프겠는가?
사실 대법제자가 한 일체는 모두 자신한테 한 것이고, 성공한 것은 사부님의 감당, 기여, 배치이시다. 만약 사부님께서 정법 하지 않으셨다면 이 구 우주의 역사는 이미 끝나 없어져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자아와 집착을 또 여기서 표현할 기회가 있는가?’ 이렇게 생각해보며 내려놓지 못할 것이 뭐 있겠는가? 사람 마음은 모두 우리 사상 속에서 반영되어 나오는데 정념으로 그것들을 제거하고 자신을 바로 잡을 좋은 기회가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우리 수련하는 사람 한 명도 빠뜨리지 않으시려 하신다. 그러나 대법은 표준이 있는 것이고, 수련은 지극히 엄숙한 것이다. 장래 우리의 위치는 우리가 최후까지 심성을 수련한 진실한 체현이며 조금도 차이가 없다. 대법제자의 과위와 층차는 안을 향해 찾고, 실질적으로 수련하여 거기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한 것이 아니고, 공로가 있고 자신이 얼마나 특수하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우주의 부동한 층차에서 그 한 층의 표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 생명이 실질적으로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런 정도로 순정하지 못하면 그곳에 머물 수 없다. 순정하지 못한 물질은 그런 강대한 에너지 속에서 감당하지 못하거나 해체된다.
수련은 속인의 일처럼 뒷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고 또 체면을 봐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후군집의 교훈을 보고 각성해야 한다. 또 이정의 이야기는 우리가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 모두 그들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받아들이고 시사를 얻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8 씬탕런과 따지웬 법회’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타이완 교류회에’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 요지-경지’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 요지-불성과 마성’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 요지-대법(大法)은 훔칠 수 없다’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8년 12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2/20/37855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