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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회족 대법제자의 수련길

글/ 중국 대법제자 구술

[밍후이왕]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구세력이 이미 막아버려서, 특수한 정황이 없었거나, 내가 특수하게 필요로 하지 않으면,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세력의 이치로는 고험이 이미 최후까지 왔으며, 가장 엄혹한 시기는 이미 지나갔고, 박해의 후기에 이르러, 고험하는 가장 험악한 환경이 이미 지나갔고, 배치한 나쁜 사람도 많이 죽었으며, 그런 환경도 없어졌기에, 다시 들어온다 해도 이미 대법제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위덕을 수립하기가 아주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힘껏 통제하고 있다.”[1]

제가 바로 이런 운이 좋은 사람이며 2012년 8월부터 대법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회족이고 조상대대로 다 회족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신앙이 있는 저는 대법을 얻는 것이 힘겹고 소중했습니다.

법 얻은 초기 기적이 나타나다

수련하기 전에 저는 고혈압, 고지혈증, 심장병이 있어 매일 약을 한 주먹씩 먹었는데 3~4년 후에는 심해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며 계단도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올케는 한족인데 1999년 이전에 법을 얻은 노대법제자입니다. 나중에 남동생도 대법을 수련했고 그들은 계속 제게 홍법했으나 저는 믿지 않았습니다.

저의 병은 갈수록 심해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정신상태도 차해 신경이 마비된 것 같았습니다. 큰 딸이 이혼하고 저와 함께 생활했는데 낮에는 출근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제게 밥을 해주며 매우 힘들게 살았습니다.

한번은 큰 딸이 운전해 저를 데리고 남동생 집에 가서 저를 돌보게 했습니다. 집에 오기 전에 딸은 남동생에게 제 상황을 말해주었습니다. 남동생과 올케는 듣고 저를 걱정했습니다. 남동생이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호신부를 책상위에 놓았는데, 이름 모를 두려움이 엄습해와 1초도 있기 싫어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남동생은 강제로 저를 돌아오게 했습니다. 저는 마지못해 남동생 맞은편에 앉았는데 책상 위에 있는 호신부는 감히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남동생은 이런 저를 보더니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호신부를 들고 봐봐, 그 위에 있는 글은 누나도 알아, 그 몇 글자를 한 번 읽어봐.” 저는 부들부들 떨며 호신부를 들었습니다. 한참 후에야 한 글자를 읽었고 간신히 나머지도 다 읽었습니다. 남동생은 안달이 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누나 동생이야. 누나를 해치지 않아!” 나는 그제야 호신부를 집에 가져왔습니다.

며칠 후 병세가 더 중해져 딸은 저를 남동생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남동생은 사부님의 설법을 들려주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남동생은 또 제게 ‘전법륜(轉法輪)’을 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몇 페이지를 보았습니다. 꿈을 꾸었는데 큰 뱀 두 마리가 도망갔습니다.

저는 이 꿈을 남동생과 올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잘 됐다고 했습니다. 그 꿈을 꾸고 저는 확실히 좋아졌습니다. 모든 병증은 증발한 것처럼 다 사라졌고 몸이 편해졌습니다.

남동생은 또 제게 연공동작을 가르쳐주고 많은 대법서적을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정식으로 수련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생과 올케는 그들이 약을 먹지 않아도 매우 건강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기억했습니다. ‘연공인은 약을 먹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집에 간 후 저는 지금까지 약을 한 알도 먹지 않았습니다.

20여 일 수련하고 저는 가족과 여행을 갔습니다. 가족과 친지들은 놀라워했습니다. 지금 저는 70이 넘었는데 자전거를 타면 젊은이 같습니다. 수련하기 전에는 집에서 짐이었는데, 수련 후 저는 일하는 주력이 되었습니다. 세 딸의 아이를 돌아가며 봐주고 가사일도 해주는데, 체력이 젊은이들보다 조금도 약하지 않고 원래보다 열 몇 살 어려보이며 예뻐졌습니다. 저와 나이가 비슷한 이웃들은 벌써 허리가 굽어지고 병이 많아, 매월 나오는 퇴직금은 병원비 내기도 모자랍니다. 그녀들은 저를 보고 다 부러워합니다.

심성을 닦아 환골탈태

저의 혼인 생활은 매우 불행했는데 남편은 성격이 난폭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결혼한 날부터 집안은 전운이 감돌고 아이들은 우리의 다툼소리, 때리고 욕하는 소리, 물건 던지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제가 딸 셋만 낳고 아들도 낳지 못해서인지 남편은 아이에 대해서도 냉담해 거의 상관하지 않았고, 세 아이 모두 저의 한 손으로 자란 아이였습니다. 남편은 돈을 벌줄 알고 나중에 또 공장을 하나 더 열었으나, 번 돈은 우리에게 주지 않고 남편 부모와 형제에게만 주었습니다.

여러 해 싸움으로 우리 부부는 사이가 점점 나빠졌습니다. 남편은 1, 2년간 저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각종 방법으로 저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스트레스가 늘 쌓여있어 저는 벌써 병이 났는데 특히 심장병이 심해, 큰소리를 듣지 못하고 놀라면 안 됐습니다. 남편도 알면서 도끼로 쾅! 쾅! 문을 부숴 저는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습니다. 남편은 또 갑자기 제 방에 들어와 커튼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병원의 장기 환자라 의사들도 다 제 병을 알고 남편을 떠나라고 권했습니다. 살기 위해 저는 그와 32년을 같이 산 후 온몸의 아픔을 안고 이 결혼을 마감했습니다.

이혼 후 법원에서는 집을 우리 두 사람에게 절반씩 나눠 주었습니다. 이혼 후 남편은 금방 재혼해 제가 집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6년 후 전남편은 또 이혼했는데 그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고 살 곳도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 큰 딸이 제게 아주 좋은 수련환경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남동생 집 근처에 집을 사겠다며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수련 기간이 짧지만 대법은 반드시 수련해야하고, 좋은 수련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에 남동생과 올케 외에 다른 수련생은 아무도 모르고, 게다가 전남편도 살 집이 없어, 저는 큰 딸네 집에 가 살기로 하고 집을 양보해주었습니다. 대법을 배우기 전이라면 절대로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의 결정을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웃들은 제게 집도 가지지 않는다며 어리석다고 했습니다.둘째 딸과 셋째 딸도 반대했습니다. 당시 셋째 사위가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떠나기 전 셋째 딸은 눈물을 흘리며 제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아이도 없는데, 이렇게 나를 팽개치는 거야.” 저도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대법을 수련하기 위해, 또 남편의 처지도 고려해 저는 큰 딸에게 갔습니다.

집은 전남편이 5년을 살았는데, 그 집은 세를 주어도 매달 4천여 위안은 받지만 저는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 집이 저랑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았고 이익에 대한 마음이 아주 담담해졌습니다.

집은 전남편에게 양보했지만 수십 년의 원한은 여전히 중해 그를 보기가 싫었습니다. 그는 둘째 딸네 애를 봐주는데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저는 3년을 둘째 딸의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3년 후 셋째 딸이 출산해 몸조리를 해줘야 해서 저는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가기 전에 저는 둘째 딸과 셋째 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있는 기간에너희 아빠가 오면 절대 안 된다.”

사실 이 3년 동안 전남편은 저와 재결합하기를 원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부탁해 말을 전했고 딸들도 권했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딸네 집에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전남편이었습니다. 저는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고 화가 나서 온몸이 다 떨렸습니다. 그는 문을 한참 두드리더니 열어주지 않자 그냥 갔습니다. 전남편은 많은 사람에게 부탁해도 소용없으니 직접 이야기해보러 왔던 것이었습니다.

저의 원한은 줄곧 지속되었으며 셋째 딸에게 몸조리를 한 달 해주고 난 뒤 전남편을 마주칠까 두려워 잘 가지 않았습니다. 딸과 갓난아이를 많이 보살펴주지 못해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중에 수련생들과 교류하면서 이것은 원한이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법공부와 안으로 찾는 것을 통해 점차 내려놓게 되었고 원한은 갈수록 담담해졌습니다. 한번은 전남편과 딸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는데 저는 태연했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딸은 제가 또 화가 난 줄 알고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저는 아주 태연했습니다.

원한을 내려놓으니 자비심이 나왔습니다. 얼마 전, 전남편을 만났는데이 생이 아주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이도 이렇게 많고 건강도 좋지 않은데,힘들게 딸들을 도와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생명의 일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원한을 제거한 후 아주 또렷한 꿈을 꾸었습니다. 큰 흙덩이가 하나 있어 저는 삽을 들고 한 삽 한 삽 퍼냈고, 흙을 다 퍼내고 고개를 드니 남편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그 흙더미가 전남편에 대한 원한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 원한은 반드시 스스로 닦아내야 합니다. 저 자신이 스스로 닦지 않으면 아무도 저를 도와 제거해주지 못합니다.

원래 전남편은 아이들에게 냉대하며 한 번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아이들도 그를 미워하며 잘해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원한을 내려놓고 딸들에게 자주 말했습니다. “잘해 드려야 한다. 어찌되었든 윗사람이다.” 저는 딸들에게 자주 노인에게 효도해야 하는 도리를 알려주었습니다. 지금은 딸들도 그에게 효도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하면 갖다 주고 1년 사계절 옷도 사다주어 가족이 더 화목해졌습니다.

우리 가족은 회족입니다. 셋째 딸과 셋째 사위는 그들의 신앙에 대해 아주 독실합니다. 제가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을 때 염려와 두려운 마음이 있어, 둘째 딸과 셋째 딸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딸들은 제가 수련하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저의 건강이 기적적으로 회복된 것을 보고는 묵인했습니다. 셋째 딸은 처음에 제가 대법 책을 보는 것을 보고는 집에 돌아간 후 속상해서 대성통곡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건강도 좋아지고 마음도 넓어지는 것을 보고 딸들은 제가 수련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제가 가서 머물 때면 딸들은 가급적 수련환경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법 공부, 연공할 시간을 내어주고 연공방석마저 준비해주었습니다.

딸들은 제가 수련하는 것을 지지해 모두 복을 얻었습니다. 셋째 사위는 유전자에 문제가 있어 아이를 낳지 못해 셋째 딸이 4번을 임신했었는데 태아가 모두 배안에서 사망했습니다. 제가 수련한 후 셋째 딸은 또 임신했는데 신기하게도 순조롭게 손자를 낳았고 지금은 3살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셋째 딸은 좋은 직업을 찾았고 셋째 사위의 사업도 잘 되고 있습니다. 둘째 딸은 40세 전에는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만 키웠는데, 나중에 마을에서 교통대대의 일을 찾아주어 일이 한가롭고 복지대우도 좋습니다.

저는 성격이 약하고 주견이 부족해 강한 의타심이 형성되었습니다. 수련하기 전에는 아이들에게 의지하고 수련한 후에는 수련생들에게 의지했습니다. 심성관에 부딪히면 신체에서든 심리에서든 자신이 법을 찾지 않고 도처에 수련생을 찾으며, 제가 아는 수련생은 다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법에서 깨달아도 자신을 믿지 않으며 수련생을 찾아 물어보고 수련생이 인정해야 마음이 놓였습니다. 수련생이 제게 어떻게 하라고 하면 저는 어떻게 했는데 자신이 법에서 깨달을 줄 몰랐습니다.

수련생들도 저와 교류하면서 제게 강한 의타심이 있다고 알려주었고, 저도 알고 있지만 줄곧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몇 달 전 저는 큰 심성관에 부딪혔습니다. 몸이 편치 않고 주변이 다 검은 입자였는데 오랜 시간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또 수련생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며 제가 아는 사람을 다 찾아갔어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 저는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수련생을 찾아가 제 상황을 말했습니다. 그 수련생은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찾지 말고 법을 배우면 어떤 문제도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수련생들은 다 자신의 그 층차에서 깨달은 것이라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법만이 당신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의 엄숙한 태도에 저는 충격이 컸습니다. 저는 법에서 수련해야 하고 반드시 자신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그 의타심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곁에 수련생이 한 명도 없다고 해도 나는 대법제자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

그때부터 저는 더는 수련생을 찾아다니지 않고 스스로 법 공부, 연공 시간을 배치하고, 일에 부딪히면 스스로 사고하고 깨달았습니다. 저는 강하고 독립적으로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작은 일에 부딪혀도 뜨거운 가마위에 있는 개미 같았는데, 지금은 흉금이 넓어져 일에 부딪히면 냉정하게 사고할 수 있습니다. 마침 그 기간에 저와 함께 나가서 진상을 알리던 수련생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혼자 나가서 진상을 알렸습니다. 예전에는 수련생들이 저를 이끌었지만, 지금 저는 혼자 나가서 진상한 지 이미 몇 달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살고 나서 마침내 진정한 자신을 찾았습니다. 이런 느낌은 정말 좋습니다.

중생을 구도하고 서약을 실현하다

1년 정도 수련하니 수련생이 저를 데리고 나가서 자료를 배포했는데, 아파트 단지에 집집마다 문고리에 걸어놓았습니다. 처음 나갈 때 저는 매우 두려웠습니다.바람에 풀잎만 움직여도 무서워서 벌벌 떨렸습니다. 계속 자료를 배포하니 두려운 마음도 갈수록 적어졌고 얼마 되지 않아 저는 혼자 자료를 배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줄곧 지금까지 견지했는데 자료만 있으면 나가서 배포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아파트 복도에서 자료를 배포하는데 한 젊은이가 문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태연하게 자료를 맞은편 문고리에 걸어놓고,웃으면서 자료 한 부를 꺼내 젊은이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직접 드릴게요.문고리에 걸 필요가 없네요.” 젊은이는 기뻐하며 받아갔습니다.

한번은 문고리에 자료를 걸려고 하니 집주인이 산책 갔다가 돌아와서 제 뒤에서 마른기침을 했습니다. 저는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이 자료를 직접 드릴 테니 갖고 가서 잘 읽어봐 주십시오.” 그는 기뻐하며 들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또 한 번은 문고리에 자료를 거는데 한 보안이 복도에서 보고 소리쳤습니다. “뭐하는 것이냐?” 저는 그와 거리가 좀 있어 웃으면서 큰 소리로 “오셨어요.”하고 응답했습니다. 저는 손에 자료를 들고 가방에 아직 다 배포하지 못한 자료도 갖고 다가갔습니다. 그는 제가 대법자료를 배포하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이것을 배포하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구하는 것입니다.좋은 일을 하는 겁니다. 몇 개밖에 남지 않았어요. 다 배포할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멍하니 있다가 말했습니다. “그럼 배포하세요.” 저는 남은 것을 다 배포하고 나서야 갔는데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복도에서 자료를 배포하면 마침 걸어오는 사람을 자주 만나는데 저는 그들에게도 한 부씩 줍니다. 한번은 한 집에 문이 열려 있었고 한 할머니가 서 있었습니다. 제가 “어르신, 소책자 한 권을 드릴게요.”라고 말하니 그녀는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파룬따파구나!”

저는 또 수련생과 협조해 스티커를 붙이고 달력과 ‘9평 공산당’을 배포했습니다. 달력은 몇 년 동안 배포한 것이 수 천부는 됩니다. 첫 해에만 우리는 천부를 배포했는데 모두 직접 대면해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다른 수련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저를 따라 오고 저는 가방을 메고 상가마다 배포했습니다. 큰 시장에도 가서 배포했는데 사람들이 앞 다투어 가져갔고, 몇 년간 ‘9평 공산당’도 적지 않게 배포했습니다. 우리는 자료를 배포하며 진상도 알렸습니다.

2년 전 수련생이 저를 찾아와 나가서 진상을 알리자고 해 저는 협조하며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대면진상은 대법 노제자의 일이라 저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능동적으로 가서 하지 않았고 다른 수련생이 찾아와야 나갔습니다. 나중에 법 공부를 통해 대면진상도 저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수련생과 함께 나가 진상을 알리는 외에 저 혼자서도 나가서 알렸습니다. 최근 의타심을 제거한 후 저는 혼자 나갔는데 몇 달간 거의 매일 나갔습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각 지역 설법11-2010년 뉴욕법회설법’

 

원문발표: 2018년 12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2/18/37724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