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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공부를 하고 안으로 찾아 ‘소극적인 데에서’ 걸어 나오자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며칠 전 한 수련생이 본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법 공부를 해도 법의 내포가 보이지 않았고 이로운 점을 얻으려는 생각을 내려놓지 못했는데 자신은 사람 중에서는 주견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지만, 수련에서는 이렇게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나도 금방 소극적이고 자책하던 데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소극적인 데에서’ 걸어 나온 일부 생각을 말해보겠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 공부를 해야 한다

우리는 대법제자이다. 법 공부가 부족하고 수련을 착실하게 하지 못하면 조그마한 교란이나 고난에 부딪혀도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 공부를 할 수 없으며 회피하려 한다. 이를 악물고 진정하게 자신을 개변하려고 결심하지 않고 그런 더러운 것을 닦아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련이 마지막에 이르렀는데 사람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어떻다는 둥, 어떻게 하고 싶다는 둥, 어떻게 하면 이로운 점을 얻는다는 등등 자신을 내려놓고 무조건 자신을 찾으며 대가를 치르고 고생을 해야 한다.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해내기는 어렵다. 사실 우리가 수련 중에 부딪힌 모든 일은 사부님께서 다 말씀하셨다. 우리가 심성(心性)을 지키기만 하면 심지어 어느 한 방면에서 해내고, 사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으면 그 배후의 좋지 않은 집착을 제거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보자. 자신을 위하는 사심(私心)을 내려놓았는지? 사부님의 말씀대로 실천했는지? 정말로 해낼 수 없는지? 사부님께서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忍能忍, 難行能行)”고 말씀하셨는데, 그럼 우리는 ‘행했는지?’ ‘참았는지?’를 말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과거에 한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거리를 지나다 갑자기 한 사람을 보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이 찾고 있던 도를 닦을 만한 사람이었다. 수도인은 이 사람을 제도하려고 그를 도제(徒弟)로 삼고자 했다.” “그가 말하면서 그 손바닥만 한 술 주전자를 땅에 놓고 마개를 열더니 단번에 술 주전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는 사부가 뛰어 들어간 것을 보고 역시 사부가 하는 대로 따라 술 주전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구경꾼들이 모두 그 술 주전자 입구에 엎드려 안을 들여다보았다. 야, 들여다보니 그 속은 광활한 세계였고 굉장히 컸다.”[2]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사람의 눈으로 보면 한 권의 책이지만 그것은 바로 사부님의 파룬따파(法輪大法)이다! 그 속의 층층이 모두 대법으로 구성된 층층의 세계와 우주이다. 위력이 끝없고 법력이 끝없으며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데 어찌 우리를 개변할 수 없겠는가?! 그러나 개변하려 하면 우리가 스스로 원해야 한다. 자원(自願) 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다시 만드는 것이기에 우리 자신이 아니고, 지금 사부님께서 중생을 구도하시는 방식도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구도하시고 모든 생명을 구도하고 계신다! 우리가 주동적으로 그 일보로 수련해 올라가고 심성이 그 일보로 제고하고 얼마나 높이 수련하면 파룬따파 속의 그만한 높이의 내포를 볼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한 승려가 가부좌하고서 연공(煉功)할 때 元神(왠선)이 극락세계에 가서 경관을 보고 하루 동안 돌아다니다 인간 세상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6년이 지났다는 이야기다. 그가 보았는가, 보지 못했는가? 보았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진상이 아니다.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그의 층차가 미치지 못해, 다만 그의 이 층차 중에서 그가 마땅히 보아야 할 불법(佛法)의 체현만을 그에게 현현(顯現)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는 바로 법이 구성해 낸 체현이기 때문에 그는 진상을 볼 수 없다.”[1]

우리는 어떤 심태로 법 공부를 했는가? 법에 대한 경의(敬意)가 있는가? 대법 책 배후와 다른 공간의 이 내포를 인식했는가? 본인이 수련에서 제고하지 않고 법의 더 높은 내포를 보지 못하며 오히려 사람 마음으로 대법을 대하면서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는 현상이 우리 제자 중에 늘 보이는데, 매우 큰 문제가 아닌가?

다른 한 방면에서 보면 우리는 정말 이렇게 무지몽매하게 인생을 살 것인가?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황제, 황후가 된들 또 어떻단 말인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可死). 무엇을 고민하면서 내려놓지 못할 것이 있는가? 시간이 별로 없다. 사람 마음을 내려놓지 않으면 사부님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럼 정말 더는 갈 길이 없는 것이다. 생명은 대법에 동화되는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우리는 늘 사람의 의지를 언급하는데, 대법제자로서 우리에게 의지가 있는가? 없다면 수련하고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가겠다는 의지를 세우고 항상 동요하지 말고 용맹정진하면서 끝까지 수련해야 한다! 그래도 수련하려는 의지를 세우지 못했다면, 본인이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는지, 무엇을 가지려 하는지? 도대체 뭘 선택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 함께 결심을 내리고 그 집착하면서 내려놓지 못하는 힘을 용맹정진하는 데 쓰자. 착실하게 한 글자 한 구절씩 법을 배우고 어떤 사상도 다 내려놓자. 배워 나가지 못하는 것은 사상이 불편해서가 아닌가? 가부좌할 때 다리가 아픈 것을 참듯이 시시각각 참고 견지하면서, 자신이 대법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열심히 법 공부를 해야 한다.

집착을 내려놓고, 대법에 동화되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실과 득의 이치를 말씀하셨다. 우리 수련 중에 어떤 때는 잃고 싶지 않은 것을 확실히 잃거나, 본인이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 착실하게 수련하지 못하거나 포기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격한 대법제자가 될 수 있는가? 바로 사부님을 믿고, 무조건 자신에게서 찾으며, 순정하지 않고 법에 부합되지 않는 사상 물질을 모두 제거하고, 어떤 결과도 집착하지 않으며, 본인이 얼마를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요행을 바라는 심리를 품고, 내가 심성을 제고하기만 하면 내가 가지려는 것을 잃지 않고, 잃고 싶지 않은 것을 지켜낼 수 있다거나 대법에서 수련한 복을 얻을 수 있고, 지금 부딪힌 고난을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병업 상태가 나타난 수련생이 고비를 넘지 못하는 것과 표면 형식이 같지 않을 뿐, 같은 성질이다.

심성을 제고하는 과정에서 뼈를 깎는 고통이 있을 수 있고 결과가 사람의 집착으로 가지려고 하는 것과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대법제자이기에 대법에서 수련하면서 마지막까지 가기만 하면, 구도될 수 있고 사부님을 따라갈 수 있으며 원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럼 우리 자신이 사부님을 믿었는가? 모든 것을 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으며 사부님을 따라, 대법의 선택을 따르려 하는가?

법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어야 수련할 수 있고 대법제자로 될 기연이 있을 수 있다. 천상의 신이 법을 얻으려면 그는 사람으로 전생해야 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미혹된 환경에서 그에게 선택하게 하고,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를 모르고 심지어 본인이 마지막에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도 모를 때, 이 선심(善心)이 나오는지를 보는 것이다. 선심이 있으면 고생하고 수련하면서 대가를 치르는 것을 선택할 것이고, 수련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앞에 반짝반짝 빛나고 눈부신 보물이 있는 것을 보고 가지러 가면 그것을 수련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손에 있는 좋지 않은 것을 내려놓고 이 법보(法寶)를 얻으려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미혹 속에서 선택하고 진상을 보지 못할 때 불성(佛性)이 나오는가를 본다. 우리가 부딪힌 매사에 우리가 대법으로 가늠하고 선택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원만하여 사부님을 따라 돌아갈 것이다.

나는 지금 다시 책을 외우기 시작했다. 수련생의 체험을 읽은 후 다시 사부님의 ‘각 지역 설법 11’을 보고 더 많은 인식을 했다. 나는 후회와 유감을 느꼈다. 법 얻은 지 20년이 되는데 왜 법 공부를 잘하고 수련을 잘하지 못했는지?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사부님의 정법 노정의 추진도 느꼈으며, 주저하거나 동요할 시간이 없다. 모든 집착, 내려놓고 싶지 않은 마음을 내려놓고 순정하게 사부님을 따라가야지, 멍청하게 제자리에서 맴돌아서는 안 된다. 공동으로 정진하면서 우리가 가야할 곳으로 돌아가자!

이상, 개인의 조그마한 인식이다. 수련생과 교류하려고 쓴 것이니 옳지 않은 점은 바로잡아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미국서부법회설법’

 

원문발표: 2018년 12월 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2/1/3778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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