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엄마의 ‘버드나무 회초리’를 잊어라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의 고향은 장난수이샹(江南水鄉)에 속하므로 물이 많고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강가의 버드나무다. 버드나무는 심기 쉽고 생존율이 높기 때문에 중국에 ‘무심코 꽂은 버들이 녹음 이루네’라는 속담도 이런 뜻에서 온 것이다.

봄에 버드나무 가지 하나를 꺾어 강가에 꽂아놓으면 살아날 수 있다. 여름 강물이 불어난 이후에 오래된 버드나무 뿌리의 줄기에 수염뿌리가 자라는데 동화 속 할아버지 수염처럼 생겼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것에 대해 끝없는 환상을 한다. 그러나 나는 어릴 적 버드나무에 관해 완전히 다른 기억이 있다.

어릴적 아버지가 타지에서 일하시느라 1년 내내 집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 혼자 집 안팎의 일을 하셔야 했다. 고독하고 힘들어 아이에 대해 감정 몰입할 시간이 거의 없었고 정력이 없었는데 심지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개념도 없었다. 어머니의 시각에서 교육이란 ‘엄한 스승 밑에서 뛰어난 제자가 배출된다’, ‘매맞고 자란 아이가 효자된다’였기 때문에 아이에 대해 특히 장녀인 나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회초리로 말했다.

버드나무는 어디서나 볼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는 언제나 즉석에서 재료를 구해서 썼다. 손 가는대로 버드나무 가지를 하나 꺾어 나뭇잎을 훑어버리면 때릴 수 있었기 때문에 몰래 그것에게 ‘버드나무 회초리’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어머니의 관점은 ‘버드나무 채찍’으로 때리면 피부만 아프고 살은 아프지 않기 때문에 상처가 나지는 않지만 인상은 각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래서인지 자신도 한동안 이렇게 생각했는데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후 사실상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버드나무 채찍’으로 때리면 살은 아프지 않지만 마음이 아프고 장기가 상하지는 않지만 마음에는 상처가 된다. 한 번은 세게 맞고는 문밖으로 나가며 ‘흥, 또 때려요, 지금은 아직 어리지만 이담에 크면……’라며 분해서는 씩씩거리며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이 기억난다. 비록 어린이가 말을 거리낌 없이 한다지만 마음속에 묻어둔 불만의 정서를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고통을 생각해 속으로 이후에 아이가 생기면 절대 때리지 않고 행복하게 자라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현실 중 만약 파룬따파의 진(眞), 선(善), 인忍)의 이치로 지도하지 않았다면 아이에 대해 나도 어머니의 전철을 밟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아이를 교육하는 방법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를 때리지 않고 행복하게 자라게 하겠다’라는 그 결심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아름다운 소원이 되었을 것이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남도 속이며 자신을 위로했을 것이다.

딸이 돌이 지나던 그해 여름, 매일 큰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시켰다. 욕조에 물을 많이 받아놓고 오리, 물고기 모양 등의 장난감을 넣어줘 딸이 즐겁게 놀게 하면 자연스레 순순히 목욕을 잘 했다. 목욕을 다 하면 파우더를 발라줬는데, 딸이 편안해하는 모습을 보면 속으로 기쁘고 행복했다.

그러나 어느 날 딸은 무슨 이유인지 울면서 욕조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안아 넣으면 나오고 넣어놓으면 또 달아났고 강제로 욕조에 눌러 놓아도 앉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참으며 얼렀다. “이것 봐, 물고기가 헤엄치네! 어, 오리가 물고기를 삼키려 하잖아. 빨리 와서 도와줘……”라고 했다. 어떻게 얼러도 딸은 욕조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왜 그러는지 물어도 대답 없이 울기만 했다.

더 참지 못하고 화가 치밀어 손바닥으로 ‘짜악’ 소리나게 엉덩이를 때렸다. 심지어 속으로 ‘애들은 정말 때리지 않고는 안되겠군!’이라며 분개했다.

매 맞은 딸은 ‘얌전하게’ 앉아 목욕을 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딸이 시름시름하며 부들부들 떠는데 몸을 만져보니 뜨거웠다. 그제야 화들짝 놀라 알게 되었다. 아이고! 엊저녁에 미열이 있어서 몸에 한기가 있어 물이 닿아 추워서 그런 것이었구나…… 나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이고! 아이가 철이 들지 않아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 엄마가 자격이 안 되는 것이구나! 아이가 어려 표현할 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고 아이가 열이 있다는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픈 아이를 돌봐주기는커녕 때리고 훈계했다. 어리고 힘도 없는데 설상가상 격으로 만들었구나.…… 이때 대법 사부님께서 가르쳐주신 ‘안을 향해 찾는’ 것이 생각났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또 말했다. 우리 사람마다 모두 안으로 수련한다면,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心性(씬씽)에서 찾고, 무엇을 잘하지 못했으면 스스로 원인을 찾아 다음번에 잘할 것이며, 일을 함에 우선 다른 사람을 고려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사회도 좋게 변하고 도덕도 되돌아 승화되며, 정신문명도 좋게 변하고 치안상황도 좋게 변해, 또 경찰이 없어질지도 모른다.”[1] 또 사부님께서는 개시해주셨다. “당신이 늘 자비롭고 선(善)으로 남을 대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 매번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가 안 되는가를 우선 생각한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1]

아가, 내가 잘못했다. 수련인으로서 잘못했고 엄마로서도 잘못했다. 확실히 내가 잘못했다! 속으로 사부님께 잘못했다고 말씀드리는 동시에 진심으로 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딸아, 다 엄마 잘못이야, 어제 추워서 목욕하기 싫은 것이었지?”라고 하자 딸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번 교훈은 아주 인상 깊었다. 이후에 까다로운 문제가 또 생기면 언제나 사부님의 말씀을 생각했고 마음을 진정하고 이지적으로 처리했다.

딸이 2학년 때쯤이었다. 2학년은 밖에 나가서 친구들을 찾아 노는 것을 금방 배운 시기였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놀기 좋아했고 즐거워서 아무도 집에 돌아가 숙제하기 싫어했다. 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동안 딸은 언제나 내가 퇴근할 때까지 놀고 나서야 비로소 숙제하려 했다. 어느 날 야근하고 귀가해, 거리에서 딸을 불러들여 숙제하라고 했고 나는 밥을 지으러 갔다.

그때 아이 아빠는 대법을 수련했는데 여전히 노교소에서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그러나 밥을 다 먹고 설거지하고 방에 들어가 숙제를 확인해보니 몇 글자밖에 쓰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고 아무리 물어봐도 입을 꼭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속이 바글바글 타고 어찌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또 화를 참지 못하고 자를 집어 딸의 작은 손을 잡아 당겨와서 때리려 했다. 당시 한 번에 손에 피가 나게 때리고 싶은 화급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자를 높이 든 순간 딸의 냉연하고 굴하지 않은 표정을 보고 어릴적 기억이 떠올랐고 갑자기 사부님의 가르침이 생각났다. “어떤 사람은 자녀를 단속하는 데도 화를 내며 그야말로 떠들썩한데, 당신이 자녀를 단속한다 해도 그럴 필요가 없으며, 당신 자신은 진정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좀 이지(理智)적으로 자녀를 교육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다.”[1] 그리하여 높이 든 자를 가볍게 아이의 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부드럽지만 엄숙하고 걱정스러운 어조로 “때리고 싶지만 또 아플까봐 못 때리겠어. 사실 자가 네 손에 떨어지지만 아픔은 엄마의 가슴속에 떨어지는 것이야. 그런데 놀기만 하고 숙제를 하지 않은 것은 올바르지 않는 것이야!”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자 뜻밖에 딸은 찌푸렸던 표정이 풀리더니 ‘와’ 울었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확실히 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딸은 그날 숙제를 순조롭게 완성했다. 저녁에 침대에 누워 딸은 내 목을 끌어안고 학교에서 발생했던 속상한 일, 엄마 아빠가 모두 노교소에서 박해당하고 있을 때 괴로웠고 외로웠다는 것을 말해줬다…… 그 한시각 우리의 마음은 아주아주 가까이 붙어있었다.

나중에 남편도 돌아왔다. 우리는 함께 사부님의 설법을 배웠고 함께 목전의 난관을 극복하며 노력해 앞으로 나아갔다. 딸의 성적은 반에서 40등이던 것에서 1등으로 올라갔고 담임선생님마저 아주 놀라워했다. 후에 딸은 명문대에 붙었다. 주변 사람들은 딸이 철들고 자랑스럽다고 칭찬했고 모녀지간이 화기애애해 부럽다고 했다.

이 과정 중에 부모가 자녀를 잘 가르치려는데 정확한 방법을 모를 때 마음 속으로 애타는 그런 마음을 더욱더 헤아릴 수 있었다. 어릴적 마음속에 부모에 대한 미움이 쌓였지만 이제 평화로운 마음으로 부모를 헤아릴 수 있어 부모에게 더욱 효도를 드렸다. 어느 날 어머니는 감동받아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은 다 너처럼 이렇게 좋니? 다른 사람만 생각하니 말이다!”라고 했다. 물론 내 대답은 긍정적이었다. “파룬따파를 참되게 수련하는 제자는 다 이렇게 할 것이에요. 우리가 아직 많이 부족해요. 우리보다 잘하는 사람은 더 많아요!”라고 했다.

파룬따파는 자신의 결점을 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문제가 생긴 근원을 찾게 했고 또 우리에게 정서를 통제하는 의지력을 부여했고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주었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밝은 미래로 나아가게 이끌어주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8년 11월 1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신수련생마당>안으로 찾아 심성을 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1/15/377158.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