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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친정을 내려놓고 심성을 제고하니 짓궂은 아들이 변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아들은 어릴 때부터 까불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의 눈에 규칙을 지키지 않는 말썽꾸러기 아이였다. 공부도 강요에 못 이겨 대강했기에 성적은 중하위였고 늘 학교 규칙을 위반하여 우리는 선생님에게 불려가 상담을 했다.

우리 부부는 모두 대법제자이기에 솔직히 아들이 생긴 후 우리는 속으로 대법제자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일반 생명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처음에 아들에게 기대가 컸다. 이 아이는 꼭 아주 우수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어릴 때부터 아들에게 ‘홍음’을 외우라고 강요하고 그에게 대법 이치를 알려주면 아들의 표현은 늘 미흡한 점이 많았다. 거짓말하고 게으르며 고생을 두려워하고 까불고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 아들은 갖은 방법을 다하여 공부하는 것을 피했다. 매번 선생님이 불러 학교에 가 상담한 후면 우리 둘은 정말 화가 나기도 하고 괴롭기도 했다. 아들이 왜 이런지 몰라 어떤 땐 심지어 아들을 때리고 욕하기도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후에 수련생과 교류할 때 수련생은 사실 아이의 상태가 바로 부모의 상태이고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부모로서 본인에게 도대체 어떤 집착이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련생의 이 말이 나를 깨우쳐주었다. 수련자로서 나는 아들의 문제를 나의 수련과 연계해보지 않았고 “아이를 잘 교육하지 못하면 죄가 있는 것이다.”로 나의 집착을 덮어 감추었고 줄곧 아들의 결점을 보고 아들을 교육하고 변하지 않으면 화가 몹시 나 늘 가족이나 수련생에게 슬퍼하며 탄식했다. 나의 제일 큰 번뇌는 바로 이 아들이었다! 나는 이것이 사실 나의 제일 큰 집착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수련생이 나에게 귀띔해서야 나는 안으로 찾고 나의 문제를 반성하기 시작했다. 우선 아들에 대한 집착은 육친정에 대한 집착이다. 다른 집 아들이 같은 착오를 범했다면 나는 걱정하지 않을 것이고 크게 화내지 않을 것이다. 바로 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 정에 이끌려 자신의 정서를 통제하지 못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자녀를 단속하는 데도 화를 내며 그야말로 떠들썩한데, 당신이 자녀를 단속한다 해도 그럴 필요가 없으며, 당신 자신은 진정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좀 이지(理智)적으로 자녀를 교육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자녀를 잘 교육할 수 있다.”[1]

나는 첫 번째로 변해야 할 것은 참을 인(忍)으로부터 시작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우선 이성을 회복해야 나는 자신을 더 분명하게 보고 아이를 더 잘 교육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나는 남편과 교류했다. 이전에 정에 빠진 우리의 간단하고 거친 그런 교육 방법을 토론하고 반성했다. 후에 선생님이 또 무슨 좋지 않은 소식을 알려주면 나는 정에 통제되지 말고 다른 집 아이를 교육하듯이 대하고 아들을 한 생명으로 대하자고 일깨워주었다. 몇 번 실천한 결과 효과가 과연 달랐다. 이전에 우리가 크게 화를 내며 아들을 교육할 때 아들이 우리의 말에 막연해하고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 아들 외면에 씌우개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아들의 마음과 소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지적으로 아들과 마음을 나누는 방식으로 교육했더니 아들은 우리의 물음에 그의 관점과 견해를 말했다. 이런 상호 교류는 마치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시는’ 것처럼 모르는 사이에 아들은 바른 관념을 받아들였다. 어떤 때 아들이 지나치게 행동했을 때 우리는 겉으로 화를 냈지만 속으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아들이 본인이 좀 엄중하게 잘못된 행위를 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실천 중에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크게 화를 내는 것보다 더 위엄이 있었고 아들의 정념을 움직이게 했다.

이성적으로 아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나는 아들에 대한 나의 많은 집착과 잘못된 관념을 보았다. 아들이 생긴 후 아들에 대한 기대가 바로 집착의 시작이었다. 소위 우수한 것을 정직하고 선량하며 인내하는 이외 많은 다른 방면은 속의 표준으로 가늠했다. 총명한가, 총명하지 않은가? 성적이 좋은가, 좋지 않은가?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장래 속인 중에서 일정한 지위가 있을까, 없을까? 등등 사실 이런 것은 모두 우리가 속인 중에서 형성된 관념이다. 그런데 우리 수련인은 속인의 이런 관념을 닦아버려야 하지 않는가? 늘 이런 관념으로 아들을 가늠해서 되겠는가? 아이가 우리 집에 온 것은 사람 중에서 그는 우리 아들이지만 사실 그는 독립적인 생명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우리의 사유 재산으로 여기고 마음대로 대하고 그에게 우리 자신의 많은 집착을 강요했다. 허영심, 높은 수준으로 비교하는 마음, 명리심, 육친에 대한 집착, 강요하는 마음 이런 관념이 현실 중의 아들의 행위와 모순되어 충돌이 형성된 것이다. 문제가 나타나면 우리는 우선 자신이 어디에 문제 있는지를 찾지 않고 덮어놓고 아이만 교육했다. 속인들도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을 한다. 아이 몸에서 우리는 자신의 많은 그림자를 보았다. 게으름, 고생을 두려워하고 안일하고 향수를 누리려하고, 꾸준한 마음의 부족과 끈기가 부족하고 외부에 쉽게 유혹되는 것은 모두 우리 자신에게 있는 문제이다. 근원이 모두 우리에게 있다!

이 측면에서 말하면 우리 자신의 문제를 보게 하고 우리 수련을 도와주었기에 우리는 아이에게 나타난 이런 문제를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어찌 그의 문제를 보기만 하면 마음대로 욕하고 때릴 수 있는가? 나는 이전에 정말 너무 잘못한 것이다! 나에게 이런 이치를 알려주시고 정에 빠진 먹구름에서 걸어 나오도록 가르쳐주신 사부님께 정말 감사드려야 한다.

점차 문제를 안으로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한 걸음씩 자신의 관념을 바로잡고 자신의 언행을 수정하고 세 가지를 견지하여 잘했더니 아이도 하루하루 진보했고 우리와 매우 양호한 소통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전례 없이 좋은 성적으로 순조롭게 현지 제1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걸어오는 과정에서 우리는 사부님의 가르침이 있었기에 우리가 제때에 방향을 바꾸었고 이렇게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감격했다.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때 공부가 바빴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와 얘기를 나누고 법 공부의 중요성과 한 사람의 덕행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했다. 아들은 매일 저녁 자습하고 돌아오면 우리와 30분간 법을 배우기로 결정했다. 주말이면 세 사람이 앉아 토론했다. 남편도 전통문화 이야기로 아들을 교육하면서 좋은 덕행을 유지해야 하고 하늘은 사람의 덕행에 점수를 매긴다고 알려주었다. 아들이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인정했다.

아들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초기 성적이 명문대학 점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노력을 거쳐 성적이 빨리 올라가 마지막 몇 번 연합고사에서 반 1등을 했다. 이에 그도 자신감이 넘쳐 이번 수능에서 명문 고등학교에 붙듯이 전례 없는 성적으로 순조롭게 이상적인 대학에 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부부도 자신감이 넘쳤다. 아들은 점점 철이 들었다. 본인이 어떻게 평소에 자기 덕행에 주의했는지를 말하고 반에 일부 불량한 언행에 물들지 않고 자기 학습 시간을 희생하면서 다른 학생들을 위해 봉사했던 일을 말했다. 우리도 아들이 제고된 것을 느꼈고 기뻤으며 모든 것이 매우 순조롭게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에 발생한 일은 우리 예측대로 되지 않았다. 수능시험이 있기 며칠 전 우리 세 사람은 앉아서 아들의 최근 표현과 수능시험을 토론하면서 모두 자신감을 가지고 아들이 잘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 마디 보탰다. “수능 시험 보는 날 사부님께 향을 올리고 사부님과 정신(正神)에게 정념을 가지해달라고 빌어라. 당황하면 정상적으로 발휘할 수 없으니깐.” 남편은 발언하지 않았고 아들이 나에게 반문했다. “이것이 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구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나는 그래도 고집부리며 말했다. “그게 어째서 구하는 거냐? 우리는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념을 가지해달라고 비는 것인데!” (후에 이 말이 얼마나 가소로운지를 깨달았음.) 남편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아들도 엉겁결에 대답했다. 수능시험 날 아침 아들이 일어나자마자 목아 뻣뻣하고 매우 아파했다. 나는 놀라면서 속으로 왜 이런 거지 라고 생각했다. 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아들에게 향을 올리라고 귀띔하고 나도 향을 올렸다. 그러나 남편은 전혀 적극적이지 않았고 향도 올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목소리도 높여 아들에게 빨리 가자고 재촉했다. 나는 속으로 달갑지 않았다. 남편이 전혀 경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향도 올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향을 올리는 데도 조용히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후에 아들이 문을 나섰다. 나는 속으로 줄곧 아들의 정황과 남편의 표현을 생각하면서 내가 어딘가 또 빗나가지 않았는지를 생각했다. 곰곰이 안으로 찾아보니 내가 아들이 말한 것처럼 구하고 있었다. 정념을 가지해달라고 한 최종 목적은 여전히 아들이 시험을 잘 보게 하려는 인간 세상의 이익을 구하는 것이었다. 법을 초보적으로 배운 아들마저 첫 반응이 이것은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법 공부를 20년 한 나는 정말 부끄러웠다! 이전에 한 수련생이 아이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칠 때 아이가 교란을 받지 않고 시험을 잘 보게 하려고 집에 앉아 종일 정념을 내보낸 일을 토론한 적이 있다. 사실 자신을 위한 개인 이익을 도모하는 표현이다. 지금 내 차례가 되었는데 여전히 같은 잘못을 범했다. 거기에 법에서 구실을 찾아 육친정을 덮어 감추고 이익에 대한 집착을 감추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내가 또 잘못한 것을 깨닫고 얼른 향을 피우고 사부님께 잘못을 인정했다.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옳지 않다고 말하면 당신은 승인하지 않을 것이요. 본인이 납득이 되어야 잘못을 아는 것이요!”

수능 시험을 마치고 아들은 잘 발휘하지 못했다고 좀 실망했다. 우리는 속으로 다 배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점수가 나왔는데 확실히 잘 치지 못했다. 평소보다 몇 십 점 적었다. 이전에 순번이 아들 뒤에 있던 동급생들이 단번에 아들을 몇 십 점 초과하여 아들은 매우 괴로워했다. 나도 괴로워 속으로 왜 이런지를 생각했다. 걸어오면서 우리는 어떤 때 잘하지 못한 적이 있지만 제때에 바로잡은 것 같았고 그것은 수련의 한 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까? 남편이 사부님께서는 “수련 중에서 당신들이 겪는 것은 모두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나를 위로했다.

나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 줄곧 속으로 왜 이런 결과냐고 물었다. 원인을 찾지 못해 매우 답답했고 은근히 원망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우리가 그렇게 노력했는데 왜 이런 결과인가? 이 생각이 나오자 나의 머리에는 즉시 사부님의 시가 반응되어 나왔다. “난 속에 미혹되어 푸른 하늘만 탓하누나.” 나는 즉시 경계하고 그 원망하는 마음을 얼른 배척했다. 반드시 나에게 내려놓지 않은 집착이 있기에 이 결과가 나왔을 것이고 안으로 잘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바꾸니 즉시 밖으로 원망하던 마음을 멈추고 안으로 자신의 문제를 찾았다. 내가 왜 이렇게 괴로워할까? 구하려는 것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 여기에 구하려는 마음이 아주 강했다. 돌이켜 보니 우리 세 사람은 모두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즉 사부님의 말씀대로 잘하면 꼭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그 구하려는 마음이 숨어있었다. 그러나 수련은 구함이 없어야 스스로 얻는 것이다. 구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모두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또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고 심지어 원망하는 마음이 올라온 것은 ‘나’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다른 집 아이가 이런 정황이 있으면 나는 이런 정서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육친에 대한 집착이 여전히 매우 심한 것이다. 이전에 끊임없는 제고에서 아들에 대한 정이 담담해졌다고 여겼는데 이 일에서 나는 담담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심하다는 것을 보았다. 심해서 심지어 원망하는 마음이 올라왔으니 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원망하여 불상마저 부숴버린 사람이 바로 거울이 아닌가! 이런 문제를 인식하니 마음이 단번에 밝고 맑아졌다. 나는 왜 이 결과가 나왔는지를 알았다. 아들의 수능시험 좌절을 통해 나의 이렇게 크고 엄중한 집착을 폭로한 것이니 좋은 일이 아닌가?

아들은 여전히 괴로운 상태였고 심지어 울었다.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아들과 교류했다. “사실 우리는 이전에 숨어 있는 구하려는 마음을 품고 법을 배웠다. 향을 피워 사부님께 가지해달라고 한 것도 구하는 것이다. 너도 구하려는 마음을 품고 법을 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잖니?” 아들은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큰일을 가지고 장난쳐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아들의 말을 듣고 나는 사실 아들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결과에 원망하는 정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의 수련은 제1위’[4]라고 말씀하셨다. 때문에 우리 집착을 폭로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수능시험은 인생 중의 한 개 과정일 뿐이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정황에 부딪히면 우리는 안으로 찾고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나는 계속 아들과 분석했다. “너의 특징은 평소에 시간을 다그쳐 공부하지 않고 느슨히 하다가 마지막 단계에 가 벼락치기를 하려고만 생각했잖니? 중학교 1학년, 2학년은 학업을 등한시 하다가 3학년에 가 열심히 공부하여 전례 없는 성적으로 명문학교에 입학한 거잖아. 이것이 너의 마음에 깊이 남은 거지. 이후에도 이렇게 하면 된다고 여겼기에 고등학교 1, 2학년 때 여전히 옛 길을 걸은 거야. 3학년 때 열심히 공부하면 대학에 붙을 것이라고 여긴 거지. 게다가 수능 전 몇 번 시험에서 모두 1등을 했으니 이런 관념이 더 깊어진 거야. 너도 본인이 중학교 3학년처럼 평소보다 더 잘 발휘하여 예상 밖의 성적을 거둘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잖니. 이번 수능에도 정말 너의 예상대로 되면 이런 평소에 향을 피우지 않다가 임시로 부처님의 발을 잡는 투기행위는 너의 이후 인생 관념으로 되어 고치기 어려워질 것이다. 수련이든 공부든 아니면 직장일이든 모두 착실하게 한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이후 인생길에서 착실하게 매 걸음을 잘 걷고 평온하게 걸으라고 너를 일깨워준 거야.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기 뒤에 있던 동급생이 이번에 시험을 잘 보았다고 더 괴로워하는 것은 승부욕과 질투심이 있어 그런 거잖아?”

아들은 나의 분석을 듣더니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남편은 우리 두 사람이 인식한 것을 보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셨잖아!”

후에 우리는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고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열심히 원서를 썼다. 원서는 많은 등급이 있었다. 명문대학에도 원서를 내고 일반대학에도 원서를 썼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있었다. 아들의 점수가 일반대학에 가기에는 문제없었지만 명문대학은 희망이 없었다. 어떤 결과든 우리는 모두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들은 심지어 최종 어느 대학에 붙을 건지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아들은 최종적으로 명문대학 합격통지를 받았다. 아들의 이상(理想)중의 대학과 같은 급의 다른 한 명문대학이었다. 결과를 보는 순간 나의 마음에는 사부님에 대한 무한한 감격이 올라왔다. 아들이 뜻밖에 명문대학에 합격되어서가 아니라 이 과정에서 사부님의 절묘한 배치로 우리 몇 사람이 이 과정에서 자신의 집착을 인식하고 제고하여 올라왔고 최종적으로 제자가 집착을 내려놓자 사부님께서는 또 모든 것을 주셨다!

그 순간 모든 말을 몇 글자로 모아 말하고 싶었다.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이 시각 여기까지 쓰고 나는 눈물범벅이 되었고 마음으로부터 사부님의 절묘한 모든 배치에 감사드렸다!

아들은 이 결과를 보고 매우 뜻밖으로 여겼다.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하늘은 반드시 덕행에 점수를 매기는 거야. 이제 믿겠지?” 아들은 연속 머리를 끄덕였다. 남편은 계속 아들에게 물었다. “이 결과에 만족하니?” 아들은 웃으며 말했다. “아주 만족합니다!”

그 후 며칠 아들이 평온하여 나는 호기심에 그에게 물었다. “이렇게 좋은 대학에 입학했는데 너 왜 기뻐하지 않니?” 아들은 말했다. “너무 기뻐하면 안 됩니다. 너무 기뻐하는 것도 집착입니다. 집착하면 또 변고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우리는 모두 크게 웃었다. 아들도 점차 어떻게 심성을 지켜야 할지를 알았다.

아들이 외지에 공부하러 갔다. 아이에 대한 교육은 이것으로 일단락을 지었다. 18년 동안 아이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나는 사실 우리 자신의 수련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교육하는 중에 끊임없이 자신의 집착을 인식하고 집착을 닦아버려 제고하여 올라온 것이다.

이 과정 중의 일부 깨달음은 개인의 체험이므로 바르지 않은 점이 있으면 수련생께서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즈 사부님의 저작: ‘미국동부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시: ‘홍음-누가 과감히 속인마음을 버릴 수 있으랴’
[4] 리훙즈 사부님의 경문: ‘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8년 10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0/25/37618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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