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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은 하사이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도마는 성경 속에 기재된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이다. 도마는 청년시기 근면 성실히 일해 부모를 모셨고 사람됨이 광명정대하고 도량이 넓고 사리가 밝았다. 예수의 제자가 된 후 스스로를 자제하고 덕을 쌓았으며 정진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도마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다. 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현현(顯現)해 보였지만 그날 공교롭게도 도마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기쁨에 겨워 그에게 예수가 부활한 소식을 알려 주자 그는 오히려 말했다. “내가 그의 손에 못 박힌 흔적을 보고, 손가락으로 못 구멍을 확인하고, 내 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8일 후 제자들이 한데 모였는데 갑자기 예수가 오더니 그들 가운데 서서 말했다. “너희들이 평안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도마에게 말했다. “너의 손가락을 여기로 내밀고 나의 손을 보거라. 너의 손을 내밀어 나의 옆구리를 확인하거라.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신덕(信德, 믿음의 덕)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도마가 대답했다. “나의 주님! 나의 천주님!” 예수가 말했다. “너는 나를 보아야 믿는가? 안 보고도 믿는 사람이야말로 복이 있는 것이다.”

도마가 주의 부활에 대해 “안 보이면 안 믿는” 태도를 취했기에 사람들은 자주 그를 “의심 많은 도마”라고 불렀다.

사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은 도마뿐이 아니다. 대법을 수련하는 자신도 자주 반신반의하지 않는가?

갈등이 없을 때는 확고하게 믿고 손해를 봤을 때는 노기 충천한다. 사부님께서 명시(明示)하셨다. “선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어,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1] 천백번을 읽었지만 이익이 눈앞에 보이자 믿음이 흔들렸다. 만약 우리가 손해를 보고 고생을 할 때 일거사득(壹舉四得)을 진짜로 본다면 여전히 원망하겠는가? 자신이 손해를 봤다고 의심하겠는가? 믿음이 있다면 원망은 없다.

건강할 때는 조금도 느슨하지 않고 건강이 나쁠 때는 의심이 가득하다. 업력(業力)의 전화(轉化)를 줄줄 외우다가 몸에 통증이 오니 반신반의한다. 만약 우리가 진짜로 사부님의 법력(法力)이 끝없고 전능하시고, 의사보다 신통력이 대단하시고 법이 약보다 엄청난 위력이 있는 것을 본다면 여전히 높은 것을 놔두고 낮은 것을 구하고 우선을 놔두고 차선을 구하겠는가? 여전히 마음이 혼란스럽겠는가? 믿음이 있다면 몸은 고생스럽지 않다.

박해하지 않을 때는 확고부동하고, 박해가 왔을 때는 무서워서 벌벌 떤다. 법을 스승으로 삼는다고 말은 이치에 맞게 잘한다. 철창신세가 되자 의구심이 가득하다. 만약 우리가 사부님께서 바로 우리 옆에 지키고 계신 것을 진짜로 본다면 여전히 사악을 무서워하고 사악을 향해 전향하겠는가? 여전히 의지할 데가 없다고 생각하겠는가? 믿음이 있다면 마음이 편안하다.

말끝마다 외치는 믿음은 말로만 믿는 것이고 뿌리가 없는 믿음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은 본 것처럼 믿는 것은 영혼의 믿음이고 뿌리 깊은 믿음이다. 굳은 맹세의 고백은 사람에게 들려주는 것이고 보이지 않아도 보는 것처럼 믿는 마음이야말로 시방세계를 진동시킬 수 있다.

속인이 의심이 많은 것은 매우 정상적이며 크게 나무랄 바가 안 된다. 만약 사람이 이런 의심을 수련 중에 가지고 와서 사부님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한다면 바로 한 손으로 사람을 붙잡고 한 손으로 부처를 붙잡고, 두 척의 배를 딛고 있는 것으로써 매우 위험하다. 신과 사람 사이는 하나는 하늘이고 하나는 땅이다. 믿음은 바로 수련인과 신을 연결해 주는 유대로써 믿음이 없다면 유대는 끊어지고 신도 수련인에 대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믿음이 강대할수록 유대관계도 견고하다. 의심하지 않고 확고히 믿는다면 사람과 신 사이의 유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사부님의 인도에 따라 믿음의 힘에 의지하여야만 사람은 세간에서 천국에 도착할 수 있다.

의심하는 마음은 변이되고 패괴된 바르지 않은 사람 마음의 관념이다. 오직 끊임없이 의심과 시기, 질의의 망념을 배척해야만 반석처럼 확고한 정념(正念)을 수련해낼 수 있다. 수련 중의 반신반의는 바로 사람과 신 사이에서 배회하고 방황하고 주저하는 것이다. 우리가 확고하게 믿을 때는 바로 사부님과 마음의 손을 연결하는 것이고 사부님께서는 곧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 우리가 의심할 때는 사부님과 잡은 두 손을 놓는 것으로써 사부님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시다. 속인도 말한다. 의심스러우면 쓰지 말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마라. 반신반의하면 아무 일도 성사하지 못한다. 확고하게 믿어 의심치 않아야 크게 성공할 수 있다.

속인으로 말하자면 먼저 보고 후에 믿어도 된다. 수련인으로서 말하자면 반드시 먼저 믿고 후에 보아야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이면 믿고 보이지 않으면 곧 믿지 않는 이것은 하사(下士)의 견해이다. 사람은 미혹 중에서 업을 너무 많이 빚어, 본성이 미혹되었으니 어찌 볼 수 있겠는가. 깨달음(悟)이 먼저이고 보는 것은 나중이라, 마음을 닦고 업을 제거하여 본성이 나와야만 비로소 볼 수 있다.”[2]

우리가 반신반의하고 흔들릴 때는 곧 도마와 같다. 도마는 광명정대하고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괴로움과 고생을 참고 견디고 스스로를 자제하고 덕을 쌓았지만 수련 중에서는 하사(下士)이다. 왜냐면 믿음은 가장 중요한 것이고 근본적인 것이며 관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은 바로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것이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지축이 흔들리고 반신반의하면 대업을 이루기 어렵다.

보이지 않을 때 믿지 않는 것은 하사의 견해이고 오성(悟性)이 차(差)한 것이며 씬씽(心性)이 제고되지 못한 것이고 관념을 개변하지 못하고 사람 마음을 고집하는 체현이다. 만약 믿음에서 확고하지 못하다면 시험 앞에서 동요하게 되고 경지도 돌파하기 어려우며 공덕도 쌓기 힘들다.

우리 모두 도마를 경계로 삼고 수련중의 하사가 되지 말자.

한 얕은 견해로, 자비로 시정해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경지(境界)”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왜 볼 수 없는가(爲何不得見)”

 

원문발표: 2018년 10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0/27/3762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