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법 공부를 잘하고 착실히 수련하자

일부 지역의 수련생이 납치된 사건에 대해 자신의 체험을 교류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몇 년간 법 공부와 협력을 중시하여 법 공부를 하고 마음을 수련하는 것에서 비교적 크게 돌파했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에 대한 감회가 깊다. 매 한 걸음 사부님의 질서 있는 배치와 보호를 깊이 체험했다.

수련생과 협력할 때 무엇을 보았든 무엇을 들었든 자신을 찾았다. 사건의 표면을 보지 않는 것도 배웠다. 겉모양을 통해 사건이 나타난 배후의 원인과 근본 목적을 보았다. 다수는 나와 수련생들의 성숙과 제고를 위한 배치이다. 내 마음을 수련생과 연결했을 때 수련생은 나를 위해 책임지고 문제와 부족한 점을 제때 지적해 냈다. 수련생이 모순과 교란에 부딪혔을 때 나 또한 안타까워했고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태도로 인내심 있게 교류했다. 모두가 전체의 일원이고 전체적으로 제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랴오닝(遼寧)의 수련생 40여 명이 납치되고 창춘(長春)에서 하루에 17명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에 매우 괴로웠다. 개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은 다르겠지만, 내가 알게 된 일부 공통적인 상황은 같았다. 예를 들면 바빠서 법 공부를 잘하지 못했거나 협력 중에 간격이 있었거나 안전문제를 소홀히 했다는 것 등이다. 세 가지 일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잘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고 긴박한 일이다. 그리하여 마음을 내려놓고, 최근 체험으로 얻은 것을 정리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련생들을 일깨워주는 작용을 하기 바라며, 함께 이후의 길을 잘 걸어 손실을 줄이기 바란다.

1.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자신을 잘 수련하다

우리 모두 법 공부가 아주 중요하고 매일 법 공부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법을 배웠으면 진정으로 법을 얻었는가? 확고하게 사부님을 믿고 대법의 법리를 믿고 대법으로 자신의 수련을 지도했는가? 법 공부는 자신의 경지를 제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법으로 자신을 지도하여 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해야 한다. 법을 배우는 것은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어떤 수련생은 매일 ‘전법륜(轉法輪)을 읽으니 너무 익숙해서 무슨 내포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나도 전에 이 상태가 나타난 적이 있다. 구하려는 마음으로 깊은 내포를 깨달으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법을 배워도 법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형식적으로 법 공부하여 법을 얻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이때도 법 공부를 견지해야 한다). 나는 장기간 한 층차 속에 빠져 있었기에 이제는 제고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후에 커다란 난을 한 번 겪었다. 당시 생사를 내려놓는 마음으로 지나왔다. 장기간의 태만으로 인해 고비(關)와 난(難)이 쌓였다가 갑자기 폭발해 나왔다. 한 고비를 다 넘지 못했는데도 다음 고비가 닥쳐왔는바 정말로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줄곧 법 공부를 중시하고 장기간 법을 외웠기에 일에 부닥치면 안으로 찾을 줄 알았다. 비록 나중에는 법을 매우 적게 외우긴 했지만, 수련기초를 견고하게 다져 놓았기에 마침내 신사신법 속에서 지나왔다. 나는 완전히 닫혀서 수련하지만, 그때 사부님께서 내 옆에서 줄곧 보호해주시고 격려해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비를 넘은 후 수련상태가 비약했다.

수련은 능동적으로 법에 동화해야 법을 잘 실증하고 중생을 잘 구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늘 전기곤봉에 충격을 받고 피동적으로 정신을 차릴 수는 없다. 법속의 한 입자로서 오로지 법을 많이 배우고 잘 배워야 자신의 마음이 법 속에 있을 것이고, 법의 위력을 갖출 수 있으며, 무엇을 해도 위덕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마음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매일 많은 시간을 들여 법을 외우고 사부님의 각 지역 설법을 배워 나를 법속에 용해되게 했다. 한동안이 지난 후 나는 온전히 법으로 충만해져 진정으로 내가 누군지 알게 되었으며, 내 책임과 사명을 알게 되었다. 정념이 하늘을 찔러 그 기세를 막아낼 수 없었다. 또한, 지혜와 오성, 능력이 크게 늘어 다시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니 그 힘이 강했다. 나는 대법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매일 법을 외울 때마다 대법은 완전히 새로운 느낌이었다. 매일 만나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게 어떤 집착심이 있는지, 사부님께서는 모두 법속에서 끊임없이 일깨워주셨고 수련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지도해주셨다. ‘똑같은 한 부의 법인데 전에는 왜 보지 못했을까?’ 바로 법을 배우는 태도와 소중히 여기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법을 읽을 때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법 공부 상태를 돌파한 후에는 단체 법 공부를 할 때, 법을 읽을 때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에 집중하여 사부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체험했다. 매번 사부님께서 내 집착을 일깨워주심에 사부님의 무량한 자비를 느끼고 감동하여 흐느꼈다.

적지 않은 수련생이 매일 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로 바빠 잠도 매우 적게 자면서 한 건 한 건의 일에 휩쓸려가고 떠밀려가면서 매우 고생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더욱 안정시키고 법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더욱 크고 많은 일을 하려면 더욱 높은 씬씽(心性) 표준과 튼튼한 수련기초가 있어야 하고 대법의 위력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 공부를 할 수 없다면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만약 사상이 법을 떠났다면 구세력에 교란당해 과시심, 환희심, 일하려는 마음, 조급한 마음, 질책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심해지고, 심지어 스스로 팽창하여 첩첩한 모순에 처하거나 수련생에게 떠받들려 들뜨게 되어 사부님께서 배치해주신 길에서 점점 빗나가게 될 것이다. 만약 제때 법 공부하지 못하고 안을 향해 찾지 못하여 여러 가지 집착심에 통제되면 교란과 번거로움이 많다 하더라도 사악에 박해받을 수 있다. 한 수련생이 박해를 받으면 또 얼마나 많은 수련생이 많은 힘을 들여 구출해야 하겠는가? 어떤 때는 구출에 참여한 수련생이 또 박해를 받는 악순환이 나타난다. 우리는 박해를 인정하지 않지만, 사상이 법을 떠나고 수련이 따라오지 못하면 구세력에 교란당하고 박해를 받을 수 있으며,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일하는 데 급급하면 정말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게 된다.

수련생이 바빠서 법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심지어 며칠 동안 법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수련생이여, 우리는 법을 실증해야 하는데 법을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법을 잘 실증할 수 있겠는가? 이는 너무 자만한 것이 아닌가?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는 자신을 실증하는 것이 아닌가? 비록 사람을 구하는 데 다급한 마음은 좋은 것이지만, 법을 잘 배워야 법의 위력이 있지 않겠는가? 오직 법속에 있어야 안전하고, 대법이 부여한 무량한 지혜와 자비가 있으며, 더욱 효율적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마음을 다잡고 제때 법 공부하고 자신의 상태를 조정해야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고, 더욱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세 가지 일을 잘할 수 있다.

나는 깨달음이 한 가지 있다. 일의 진전에 매우 조급할 때 꼭 정체되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으로 법 공부하고 안을 향해 찾아 자신의 집착심을 닦아 버릴 때 일은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나타나거나 또는 아주 잘 해결된다. 그리고 사부님께서 사건 배후의 의의를 아주 많이 연장하고 확대해주신다. 사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개시해주셨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1] 우리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매 한 걸음 모두 사부님과 바른 신(正神)께서 우리가 제고한 것을 보시고 한 고비(關) 또는 구세력이 배치한 장해를 제거해버리시고, 우리에게 더욱 큰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앞으로 밀어주신 것이 아닌가? 법을 실증하는 전반 과정은 모두 법 공부하고 마음을 수련하고 집착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너무 바쁜 수련생은 취함과 버림을 배워야 한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마음 쓰고 어떤 일도 다 거절하지 못한다면, 마음은 선한 것일지라도 일속에 빠져 헤어 나오기 어려울 수 있다. 만약 잘 처리하지 못해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일이 많아진다면 자신의 수련과 중생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의 수련상태도 보장하지 못하고 사악에 박해받을 위기에 처해 있는데 어떻게 사람을 잘 구하겠는가? 한 사람이 동시에 모든 일을 맡는다면 다른 사람의 참여를 제한하여 다른 사람이 법을 실증하는 길을 잘 걷는 것을 제한할 수도 있다. 수련생들에게 많이 참여할 것을 격려하고 전체적으로 협력하여 공동으로 제고하는 것이 가장 좋다.

2. 자아를 내려놓고 간격을 없애다

수련생과 협력하여 일하는 중에서 사람들은, 일하는 과정은 자신을 수련하고 끊임없이 자아를 내려놓아 간격을 없애 누락 없는 정체(整體)를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크게 체험했다.

나는 수련생과 협력하기 시작했을 때 수련생들 마음속에 서로에 대해 간격이 좀 있는 것을 보았다. 겉으로는 괜찮았지만, 마음속에 매듭이 있었다. 이후에 함께 교류했다. 협력하여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우선 간격을 없애 마음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 곳으로 힘을 쓰고 누락 없는 정체(整體)를 형성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협력을 잘해야 법의 힘이 더욱 크고 또한 사악과 구세력에 가장 큰 타격이 되기도 한다. 간격은 마음속에 있다. 우리가 속으로 수련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보고 원망하며, 상대하기 싫어하고 협력하기 싫어하며, 오해하고 믿지 못하고 서로 경계한다면[안전문제에 관련되면 수구(修口)와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는 수련생에 대해 책임지는 것으로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정체(整體)는 누락과 간격이 있게 된다.

우리는 표면의 단결을 구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마음으로 수련생의 부족함을 포용하고, 항상 선의로 이해하고 믿고 격려하며, 수련생의 장점을 보아야 한다. 대법제자는 겉으로 어떻게 표현하든지 다른 공간에서는 모두 금빛 번쩍이는 미래의 각자(覺著)이며 무척 대단하다. 그러니 어떻게 마음에 간격을 둘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사악을 기쁘게 하고 구세력의 편에 서서 수련생을 배척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문제를 보았다면 우선 자신의 마음을 찾고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 또한, 책임지는 각도에서 선의로 지적하여 서로 교류하고 함께 제고해야 한다. 만약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아직 깨닫지 못해서일 것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묵묵히 원용하고 보충하면 된다. 수련생들의 선의의 이해와 원용과 보충은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이 수련생에게는 이 특징이 있는데 저 수련생은 왜 그렇지?’ 심지어 자신의 표준으로 수련생을 가늠하고 항목을 가늠하여 자신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어느 날 법 공부할 때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자신의 표준을 고집하고 사부님의 요구에 무조건 원용하지 않는 것이 옳단 말인가? 내가 무슨 근거로 표준을 정한단 말인가? 그것이 법의 표준이란 말인가? 이는 구세력과 같은 것이 아닌가? 수련생마다 서로 다른 특징이 있고 다른 법리를 깨달을 것이며, 항목의 결과도 여러 가지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데 어떻게 내 관념과 표준에 제한될 수 있단 말인가? 큰 것에 착안하여 항목의 전반적인 목표와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런 다음 함께 노력하여 각자의 능력과 작용을 발휘하여 정화(精華)적인 것과 자비로운 힘을 충실히 넣어야 더욱 좋은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

수련생과 협력하여 일하는 과정에서 사부님께서도 수련생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나를 점화해주셨다. 수련생은 내게는 틀이 있는데 마음을 열어야 더욱 큰 지혜가 생기고 일도 더욱 넓게 개척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단순히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에 있다. 어떤 때는 수련생의 말이 꽤 첨예할 때가 있다. 매번 뼈를 깎고 심장을 에는 심성 수련을 겪었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부정적인 생각, 예를 들면 ‘이 수련생은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다음부터는 그와 협력하기 싫어지는 건 아닐까? 나도 법을 배운지 몇 년이나 됐는데 누가 수련할 줄 모른단 말인가? 당신은 내 층차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내 씬씽(心性) 경지를 체험하지 못하는 거야! 당신은 수련할 줄 아는가? 당신은 그 속에 있지 않기에 모르는 거야…….’와 같은 번득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라도 나를 교란하거나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했다.

수련인에게는 어떠한 우연한 일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두 내 제고를 위한 것이다. 자신을 수련하지 않고 궤변을 늘어놓고 밖으로 찾는 것은 내가 아니다. 집착과 닦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무조건 자신을 보고 자신을 찾는 것을 견지했다. 수련생이 어떻게 표현하든지 수련생은 가장 좋으며, 그의 명백한 일면은 진심으로 나를 책임지는 것으로, 이 또한 사부님께서 내 제고를 위해 배치하신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도 확실히 이러했다. 매번 자신의 자만심, 과시심, 환희심, 질투심, 일하려는 마음, 자아를 견지하려는 마음 등의 집착을 찾아내고는 무척 감동했다. 수련생도 그 후 자신을 보고 자신을 찾았기에 간격이 형성되지 않고 함께 제고했다.

시련을 한 번 겪고 나면 자신이 좀 더 성숙해진 것을 느꼈으며, 하고자 하는 일에도 예상하지 못한 진전이 있었다. 내 지혜와 능력도 비교적 크게 제고되었다. 그리고 수련생의 씬씽(心性)과 능력도 비약적으로 제고되었는바 놀랍고 감탄스러웠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을 향해 찾는 것은 법보(法寶)라고 거듭 말씀하셨는바 이 법보는 정말 쓰기에 무척 편리했다!

사람과 신은 일념의 차이이다. “물질과 정신은 일성(壹性)이다.”[1] 모든 일에서 우리는 어느 길을 갈 것인지 선택한다. 신의 생각을 움직이면 신의 길로 갈 것이고 사람의 생각을 움직이면 사람의 길을 걸을 것이다. 늘 사람의 생각을 움직이면 신의 길에서 점점 멀어진다. 내가 이해한 것은, 어떠한 일과 난(難)에 직면해도 천백 년 동안 사람의 뼛속에 형성된 사람의 이치를 버리고 자신을 진정한 대법의 한 입자(粒子)로 간주하며, 대법의 바른 법리로 가늠하고 판단해야 끊임없이 신의 길을 걸을 수 있고 신과 점점 가까워질 수 있다. 씬씽(心性)을 연마하는 과정은 바로 제고하는 과정이다.

모순 앞에서, 교란과 박해 앞에서 모두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법을 잘 배우고 자신을 잘 수련하여 주역을 잘하고 장기적으로 안정되게 세 가지 일을 잘하면 대법의 위대함을 실증할 수 있고 중생을 더욱 잘 구도할 수 있다.

3. 일할 때 명석하고 이지적이며 안전문제를 중시하다

나는 수련생이 “사부님께서 계시고 법이 있는데 뭐가 두려워? 정념을 사용하면 누가 너를 건드릴 수 있겠어?!”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안전문제에 대해 처음에는 수련생과 감히 교류하지 못했다. 내게 두려운 마음이 있고 정념이 없다고 할까 봐서이다. 나는 깊이 생각해 보았다. 내게 두려운 마음이 있는가? 지금까지 나는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었고 세상의 모든 이익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떤 때는 두려운 마음이 있어도 해야 할 일을 했고 일할 때는 모든 것을 정념으로 대했다. 하지만 일하기 전에 안전문제를 중시하여 수련생들에게 주의하라고 일깨워주었다. 항목과 수련생을 위해 책임지는 것이기에 자신이 상처받을까 봐 안전문제를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도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고, 안전을 중시하는 것도 한 층의 법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리고 번거로운 것도 아니다. 평소에 수구(修口)에 주의하고, 정당한 일을 하거나 수련생이 교류할 때 앞당겨 휴대전화 건전지를 분리하고 컴퓨터와 메모리카드의 안전과 기타 일부 안전원칙을 중시하면 된다.

우리는 자신과 기타 수련생의 안전을 위해 평소에 수구(修口)와 휴대전화 안전문제를 중시해야 한다. 국가안보 특무의 직업은 바로 미행과 도청 그리고 감시이다. 안전문제는 홀시할 수 없다. 구세력이 속인을 이용하여 수련생을 박해하려면 세상의 이치에 부합해야 한다. 일부는 바로 이지적이지 못한 데서 조성된 안전상의 빈틈이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점화와 보호로, 우리의 성숙과 이성 속에서 아마도 많은 박해가 해체되었을 것이다. 안전상의 위험을 해체하고 안전 습관을 양성하면 표면 공간에서는 효과를 볼 수 없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정사대전(正邪大戰)일 수도 있기에 의의가 크다. 우리는 늘 박해받고 나서야 피동적으로 구출에 나선다. 박해 속에서 박해를 반대할 수는 없다. 핑계를 대고 회피하지 말고 안전방면에 잠복해 있는 위험이 가져올 박해와 교란을 적극적으로 깨끗이 제거해야 한다.

그 외에 대법 밖에 서서 내 이것은 법을 위해 한 것이고 저것도 법을 위해 한 것이며 얼마를 했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알려 인정받으려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법 속에 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진정하게는 누구를 위해 한 것인가? 자신을 위해 한 것이다. 자신이 바로 대법 속의 한 입자이고 자신이 바로 법속에 있는데 무엇을 한들 모두 자신을 위해 한 것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누구의 인정을 받으려고 한단 말인가? 사부님께서 아시면 된다. 자신을 대법 속에 놓으면 시시각각 대법에 대한 영향도 고려하게 된다. 진상을 알리거나 일할 때 극단적으로 나가지 말고 이지적이고 지혜롭게 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세인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지 고려해야 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잘하지 못하면 대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세인이 구도 받는 데 영향을 끼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매우 엄중하다.

사부님께서 다음과 같이 알려주셨다. “어떠한 일이든 모두 극단으로 나가지 마라. 이지적이고 청성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대법제자의 위덕이다. 누구든 속인 사회 이런 형식 중에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하게 이 수련형식으로 가장 잘한 것이다.”[2]

개인의 체험이라 층차의 제한으로 잘못된 곳이 있을 것이다. 수련생들이 자비로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7-미국수도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8년 10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0/19/375987.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