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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에 소양이 있음’을 옅게 깨닫다

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는, 사람마다 모두 진수제자(眞修弟子)가 되고 싶어 하는바, 모두 견정한 사람으로, 신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 수련에 소양이 있는 대법제자로 되고 싶어 한다.” “대법제자 중 수련에 소양이 있는 사람으로서 정념이 매우 강하고, 자기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아는, 수련에 소양이 있는 사람은 그건 문제가 없다.”[1]

나는 가장 처음에사부님의 이 한 단락 법을 읽었을 때 ‘수련에 소양이 있음’을 ‘훈련에 소양이 있음’으로 잘못 읽었는데 후에 자세히 보고서야 “수련에 소양이 있음”이었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후에 이 네 글자에 인상이 무척 깊었고 ‘수련에 소양이 있음’의 내포가 아주 크다는 것을 느꼈다. 현 단계 나 개인의 옅은 층차의 이해로는 이러하다.끊임없이 계속 수련을 견지하고, 정법수련에서 각종수련의 실천을 겪으며 각종 관과 난을 넘음으로써 풍부한 경험이 생겨정법수련의 길을 어떻게 하면 잘 걸을 수 있는지를 알고,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알고 외부환경에서 각종 변화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법의 표준과 요구에 따라 대응하고 해결하며,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근본상에서 진정으로 단호한 신념이 있어 수련이 성숙되었다는 등등이다.

아래에 나는 자신의 ‘수련에 소양이 있음’의 각 방면의 이해를 수련생들과 공유하고자 하니 부족한 곳은 자비롭게 시정해주기 바란다. 내가 이해한 대법제자의 ‘수련에 소양이 있음’은 아래 몇 가지 방면에서 체현된다.

1. 법공부를 중시하고 법을 잘 배울 수 있다

나는 이 여러 해 동안 각종 마난과 환경 속에서 견정하게 순조롭게 걸어올 수 있는 대법제자들은 모두 법공부를 중시하고 법을 잘 배운 이들임을 보았다.

이러한 대법제자들의 법공부는 외래의 어떠한 강박적인 요소가 없다. 왜냐하면 추구함이 없는 법공부는 이미 생명 존재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며 한 사람이 마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정상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법제자를 놓고 말하면 법공부를 하지 않고 장기간 법공부를 하지 않음은 상상할 수 없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실천이 증명하듯이 어떠한 정황하에서 아무리 바빠도 그들은 법공부(법 외우기)를 견지한다.

그들은 이미 장기간 수련 실천 중에서, 다시 말해 착실한 수련 중에서 내심에서 대법의 위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신심이 충만되었고, 그들은 끊임없는 법공부에서 사부님의 가지를 얻어 강대한 에너지를 보충한다. 그들은 오로지 대법만이 자신 생명 본질에서 개변시킬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오로지 마음속에 법이 있어야 비로소 이 가장 복잡하고 타락한 말겁 난세의 유혹과 교란을 막을 수 있고, 법 속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비로소 선악(善恶)과 진가(真假)를 똑똑히 구별하고 각종 마난에서 걸어 나올 수 있음을 안다. 그래야 충족한 정념이 있어 사람을 구도할 수 있다. 그들은 법을 진정으로 배워 들어가면 본신(本身)과 대응된 우주 대궁의 무량한 중생들이대법에 의해 구도 됨을 알고 있다.

그들도 알고 있는데 법공부할 때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반드시 법을 배워서 알아야 하고, 법을 배워서 법이 들어가야 비로소 법을 얻을 수 있고, 착실한 수련 중에서 법에 동화될 수 있음을 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대법이 있다는 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그 대법을 배워 들어가야만, 비로소 진짜로 있음이다. 진정으로 수련해 들어가야 하고 진정으로 한 진수제자가 되어야만, 그제야 대법이 있어 아무것도 두렵지 않음이다.”[1]

나는 많은 수련생이 법공부를 잘하고 더욱 좋은 법공부를 위해 법 외우기를 계속 견지하거나 이미 시작한 것을 안다. 그들은 두려운 마음을 극복하고 기억이 좋지 못하다거나 나이가 많다는 가상에 가로막히지 않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법을 외우는 중에 각종 사상과 신체 속의 사악과 업력을 제거했고, 자신이 자비롭고 상화로운 심태를 수시로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관과 어려움에 부딪힐 때 마음속에 충실한 법이 있어 정념이 충족했으며 일에 부딪혀도 냉정하고 의지가 단호하여 사람 마음과 집착, 관념, 사상업의 교란에 좌우되지 않았다. 아주 빨리 구세력의 배치와 마난에서 벗어났다.

사실 이런 대법제자를 놓고 말하면 그들은 수시로 법공부가 마음에 들어갈 때 대법에 용해되는 행복감, 미묘함과 비할 바 없는 수승함을 느낀다. 법공부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대법제자는 일체 곤란과 일체 교란을 타파하고 법공부를 잘한다. 사실 우리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올바른 믿음과 견정함은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강대한 정념이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수련에 소양이 있는’ 대법제자가 되려면 끊임없이 법을 배워 들어가야 하고 법을 배워야 한다.

2. 안을 향해 찾다

이렇게 여래 해 동안의 정법수련 실천을 거쳐서 진정으로 성숙하고 견정한 대법제자는 이미 기본상 수시로 안을 향해 찾고 모순, 번거로움, 각종 마난에 부딪치면 모두 즉시 안을 향해 찾는다. 물론 일부는 그 당시 심성을 지키고 안을 향해 찾고, 또 일부는 그 당시 지키지 못해도 지나가서 청성해진 후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있고 이로써 진정으로 제고해 올라온다.

7.20 이전에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억난다. “문제가 있으면 안을 향해 찾는 이것은 대법제자와 속인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2] 나는 안을 향해 찾는 것은 사부님의 우리에 대한 요구이고 우리에게 배치하신 착실한 수련의 길이다. 대법제자가 수시로 조건 없이 안을 향해 찾을 때가 바로 심성을 제고하고 착실한 수련을 하는 것이다. 바로 진정으로 수련하는 사람의 진실한 표현이고 사부님께서 관여하고 계시는 것으로서 구세력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며 구세력의 안배 속에서 안을 향해 찾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구세력은 우리에게 안을 향해 찾지 못하게 하는데 우리가 안을 향해 찾을 때 숨어있는 사람 마음과 집착 배후의 각종 사악이 폭로되어 법에 의해 제거되기 때문이다. 더뒷면에는 구세력과 그것들의 배치가 제거되고 부정된다. 사람 이 면에서는 우리가 안을 향해 찾는 것은 단지 간단한 한 개의 사상표현이고 행위이지만, 극도로 복잡한 우주 공간 속에서는 우리가 안을 향해 찾을 때 아주 가능하게 바로 우리가 법에 동화하고 수련된 일면이 정법하고 일체 시공을 초월하여 신속하게 사악을 찾아서 제거하고 해체하는 것이다. 이때 위대하신 사부님께서도 우리를 가지 하시고 도와주신다. 사람 이 일면의 간단한 일념은 무한한 우주 궁체 속에서 바로 비할 바 없이 장관적인 하늘땅이 뒤집어지는 거대한 변화이다.

아울러 내가 깨닫기로는 장래에 신우주 중에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는 이미 법에 동화되었고 부동한 층차 우주의 주재자이다. 그가 관할하는 우주 범위 내에서 기나긴 세월 속에 일단 일부 국면에 나쁜 표현이 나타나면 자동으로 신속하게 표면 배후의 실질적인 원인을 찾아내고 아울러 법으로 변이와 타락을 바로 잡아 뚫린 누락을 원용하고 미봉하여 우주가 영원히 불멸하게 한다.

안을 향해 찾다의 내포는 아주 깊고 의미가 중대한데 우리가 표면에서 보는 것처럼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 때문에 구세력은 오로지 천방백계로 우리가 안을 향해 찾는 것을 가로막거나 혹은 당신이 안을 향해찾을 때 중대한 것은 피하고 가벼운 것만 찾게 하거나 가상으로 진정한 실질을 덮어 감추어 당신이 찾지 못하게 하거나 찾아도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착오적인 인식이 일어나게 한다. 내 생각에, 우리의 사상 속에서 반영되거나 안을 향해 찾을 때 구세력의 박해를 승인한다 등등의 이런 염두 자체가 바로 구세력이 던져 준 것일 수 있다. 이런 착오적인 염두가 우리의 착실한 수련과 승화를 가로막고 있으며 우리가 안을 향해 찾고 싶지 않게 하거나 찾지 못하게 한다.

사부님께서는 ‘2018년 워싱턴DC 설법’에서 이미 우리에게 아주 똑똑히 말씀해주셨다.

이번 설법에서 한 제자가 여쭈었다. “제자: 대법제자가 마난을 겪을 때, 어떤 대법제자는 먼저 자기를 찾아서는 안 되고 마땅히 먼저 발정념을 해야 하며, 만약 자기를 찾으면 구세력을 따라 걷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사부: 참, (사부님 웃으심) 나는 통상, 늘 말하기를, 문제에 부딪히면 우선 자기를 찾으라고 했으며, (사부님 웃으심)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보고, 자기에게 문제가 있으면 즉시 고치라고 했다. 발정념은, 어떤 일에 대해 마(魔)가 있거나 진짜로 마가 교란하는 것임을 당신이 진짜로 알았을 때, 당신이 그것이 진짜 그것임을 알았을 때, 당신은 발정념을 하라. 또한, 이 발정념은 아무거나 다 겨냥해서 발정념하지 말라. 원래 당신 자신이 잘못을 했음에도 발정념을 한다면, 당신의 정념이 이때 정말 작용을 일으킨다면 곧 당신을 다스릴 것이다. (사부님 웃으심)”[1]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구세력의 배치가 어떻게 악독하고 어떻게 복잡하든지 간에 그것은 오로지 사람 마음과 집착을 통해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구세력의 일체 교란과 파괴모두 수련인의 사람 마음과 집착이 덜미로 잡힌 것이다. 법에서 안을 향해 찾는 것은 사람 마음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고 아울러 그것들 배후에 연결되고 관련된 실질적인 사악 생명과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아주 많은 시기에 우리가 진심으로 안을 향해 찾기만 하면 모순은 바로 해결되고 마난은 바로 제거되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실 우리는 계속 사부님께서 관여하는 것이고 사부님께서는 법력이 끝없어 못하시는 것이 없는데 우리가 진심으로 안을 향해 찾는가를 보고 곧바로 그 착오를 바로잡아 주신다.

실천 속에서 우리는 무수히 보게 되었는데 한 수련생이 마난 속에서 진심으로 원인이 어디 있음을 찾고 그 속에서 자신이 표현한 문제와 착오를 감히 마주하고 내심에서 승화하여 올라올 때 사부님께서는 점화해주시고 진정한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마난은 아주 빨리 해소된다. 그 효과는 진짜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나는 또 이런 인식이 있는데 안을 향해 찾는 것은 우리가 수시로 모두 마땅히 해야 할 것이지, 박해가 발생하거나 큰 병업상태가 있어야 비로소 그것을 마난으로 여기고 안을 향해 찾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사실 우리가 평소에 소박하게 생활하고 일하는 중에서도 각종 심성상의 부딪침은모두 마난이다. 예를 들어 누가 듣기 싫은 말을 했고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반감이 생기고 하고 화나게 하고 갑자기 누가 당신에게 어떻게 상처를 준것이 생각나는 등등이다. 이는 모두 마난이고 단지 표현됨이 크고 작을 따름이다. 그것들 배후에는 모두 대응된 사람 마음이 있고 모두 우리가 안을 향해 찾고 사람 마음을 제거하고 제고해서 올라와야 동시에 업력이 제거된다. 이렇게 하면 업력 누적이 너무 커서 넘기 어려운 큰 난을 형성하지 않는다.

3. 끊임없이 자신의 수련의 길에서의 경험과 교훈을 총결하고 밍후이왕의 교류를 중시하다

수련의 길에서 순조롭고 성공적일 때가 있고 또 간고하고 좌절할 때가 있다. 매개인은 수련 속에서 모두 경험과 교훈이 있고 걸어온 각종 상태와 표현 모두 장래의 참조이다. 아울러 이 과정 중에서 끊임없이 법에서 자신의 수련 실천에 한 개의 총결을 하고 한 개의 이성적 승화가 있으면 이러한 승화가 바로 착실한 것이고 제고도 무척 빠른 것이다. 정법을 놓고 말하면, 장래의 신우주를 놓고 말할 때 이런 총결 모두 한획 한획 보귀한 재부이다.

자신의 수련과정을 수시로 회고하고 총결하고명명백백하게 수련할 수 있고 자신이 어느 한 시기의 법실증 중에서 수련 중에서 왜 성공하고 왜 실패했는지를 알면 자신의 수련을 더욱 이성적이고 성숙되게 할 수 있다. 동시에 또 기타 수련생에게 참조를 제공해줄 수 있고 자신으로 하여금 더는 똑같은 착오를 저지르지 않게 하고 또 남들이 굽은 길을 적게 걷게 하여 정체가 승화되도록 촉진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수련이 갈수록 소양이 있게 된다.

따라서 조건이 있는 수련생들은 마땅히 느낌을 더 많이 움직여서 부동한 시기의 자신 수련 과정 중의 경험과 교훈을 써내어 밍후이왕에 투고하는 동시에 발표될지 여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고를 쓰는 시기가 바로 수련 과정이고 바로 이득을 얻으며 정념이 강화되고 사악을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이 진심으로 안을 향해 자신을 닦을 때, 평화롭고 선의로 남을 일깨워줄 때, 이런 상태에서 써낸 교류원고가 모두 발표되었음을 발견했다. 일단 목적이 불순하고 자신을 실증하려고 하거나 자신을 찾지 않고 남의 문제를 볼 때 언어가 격렬하고 단어사용이 예리하고 질책으로 남을 개변시키려는 강렬한 마음을 지녔을 때의 원고는 모두 발표되지 않았다. 그리고 발표하고 싶은 강력한 마음이 있을 때 발표되지 않았다.

수련에는 우연한 일이 없고 사부님 법신과 뭇 신들이 보호하고 있는 밍후이왕은 더욱이 우연한 일이 없다. 발표하거나 발표하지 않거나 모두 마땅히 자신을 찾아야 하고 이때 무슨 마음을 표현해 냈는지를 보고 그것을 제거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승화할 좋은 기회이다. 그 외 우리가 적극적으로 밍후이왕에 투고하는 자체가 바로 밍후이왕을 지지하고 원용하는 것이다. 만약 밍후이왕을 휘황하고 장관적인 궁전에 비유한다면 우리의 한편 한편 투고는 이 궁전을 건설하는 기와, 벽돌, 나무가 아닌가? 발표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투고는 밍후이왕 편집부에 선택 하나가 더 추가되게 했고 그것 역시 우리의 영광이다. 사실 우리 매 한편의 마음으로 쓴 원고는 모두 우주 중에 기재되어 있다…… 그것은 대법제자의 영광과 행운이고 영원한 위덕이며 우리 장래에 반드시 볼 수 있는 것이다.

밍후이왕은 사부님께서 항상 긍정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해주신 더 없는 정체 교류와 제고의 플랫폼인바 대체될 수 없고 부족한 점을 미봉해주는 진귀한 것이다. 밍후이왕전 세계 대법제자의 교류를 중시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수련에 지대한 촉진이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수련 실천 중에서 나는 이런 체험이 있다. 즉 밍후이왕을 중시하고 존중하면 우리로 하여금 사부님과 대법의 위대함을 견증할 수 있고 자아와 잘난 척을 내려놓고 협애함과 편견을 제거하여 시야와 흉금을 확대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겸손하게 대법제자의 정체 속으로 녹아 들어갈 수 있고, 사상 속에서 수련의 개념을 더욱 잘 유지할 수 있어 외부의 변화에 이끌리지 않고 교란받지 않는다. 대법제자의 책임과 사명을 잊지 않고 해이하지 않으며 사부님을 따라 정법노정을 따라갈 수 있다.

4. 법에서 주견이 있되 또 어떠한 의견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수련에 소양이 있는’ 대법제자로 불린다는 것은 주견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주견은 끊임없이 법에 동화되어 온 것이고 법에 깊은 인식과 이해가 있기 때문에 일에 부딪혀도 모두 법으로 옳고 그름을 가늠할 수 있고 시비를 가르고 사람을 따라 달리지 않으며 사람 따라서 같은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정에 좌우되지 않거나 외부 환경 변화에 이끌리지 않는 등등이다.

그러나 주견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고집이 세고 자신이 옳다거나 자아를 고압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자아를 고압적으로 내세울 때는 마침 좋지 못한 생명 혹은 요소에 좌우되고 있고 진아(真我) 본성을 매몰했으며 주의식이 아주 약한 표현이다. 이때는 주의식이 신체를 통제하지 못하고 신체와 사상이 마성에 통제당했다. 그러나 그런 진정한 주견은 법에서 온 것이고 진선인 특성에 부합된 것이기 때문에 법에서 주견이 있는 대법제자는 항상 심태가 평온하고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며 겸손하고 어떠한 의견도 들을 수 있다.

어떠한 의견도 들을 수 있음은 한 생명의 지혜이고 역시 우리가 수시로 안을 향해 찾을 수 있는 양호한 수련상태이다. 사부님께서 남들 사이의 모순을 보고 제3자로서 우리더러 모두 자신을 찾으라고 하셨는데 하물며 남들이 직접 우리를 겨냥하여 제출한 의견이다. 물론 이런 의견은 듣기좋은 것과 무척 선의적이어서 의견을 제기한 사람이 우리와 가깝고 좋아하는 사람이며 탄복하고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이는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듣기 싫은 것, 심지어 무척 자극적이고 의견을 제기한 사람이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이고 반감적이고 배척하고 무시하는 이들일 때는 듣기가 아주 어렵다.

그러나 수련에는 우연한 일이 없고 아주 가능하게 남들이 와서 우리에게 듣기 싫은 의견을 제기하는 것이 바로 사부님의 배치일 수 있고, 이때 의견을 들을 수 있는지에서 우리가 시시각각 수련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무척 쉽지 않은데 “사람의 심령(心靈)을 자극하지 않으면 소용없고 쓸모없으며 제고하지 못한다.”[3] 그러나 비록 그 당시 자극되어 지키지 못하여 화를 냈어도 지나간 후에 냉정해지면 남들이 말한 내용을 회억하고 자신이 진짜로 이런 문제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항상 이렇게 생각할 때 반드시 자신의 문제를 찾아낼 수 있는데 보증코 이러하다. 나는 매번 내가 이렇게 했을 때 남들에 대한 원망이 없어지고 남에게 상처를 주었던 미안함과 진심 어린 감격으로 바뀌는 것을 발견했다.

정법수련은 역행하는 나룻배처럼 수련의 길도 아주 좁다. 이런 간고한 길에서 사악은 또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다른 사람, 특히 수련생이 일깨워주면 그것은 우리의 복이고 행운이다.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무척이나 감사하고 소중한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제고하려는 대법제자는 반드시 어떠한 의견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집착과 부족한 점을 제거하고 착오를 바로 잡아야 우리는 비로소 승화하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시기에 우리 스스로 그러한 부족점을 찾고 싶어도 찾아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일부 집착은 일찍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우리 스스로 전혀 의식할 수 없는데, 남들이 우리에게 지적해주면 그것은 너무나 좋은 것이 아닌가? 진짜로 이렇게 인식하면 그것은 ‘듣자마자 기뻐하다’가 아닌가? 그것은 바로 수련인이 ‘수련에 소양이 있고’ 성숙한 표현이다.

5. 수련에서 끊임없이 견지해야 한다

고대에서 지금까지의 수련에서 두 글자가 가장 어렵다. 바로 ‘견지’이다. 먼 정법 수련의 길에서 진짜로 어디가 끝인지를 알 수 없는데, 특히 천목이 닫혀서 수련하면 기본상 아무 감각도 없어 더욱 어렵다. 그러나 이 길은 또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고 가시밭이 곳곳이라 마난이 겹겹이다. 얼마나 많은 갈림길과 또 얼마나 많은 함정이 있는가…… 이 때문에 혼란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옛 수련생’들이 지금까지돌아오지 못하고 있는가. 압력 공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걸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가…… 견지하고 단호하게 계속 이 길을 걷는 대법제자들은 쉽지 않고 대단하다.

다른 것을먼저 말하지 않더라도 한 대법제자가 몇 해 동안 하루 같이 매일 법공부와 연공을 견지하는 자체가 바로 일종의 대단함이다. 이 과정 중에 각종 교란, 내재적 외재적인 것이 있지만 견지해내는 자체가 바로 갖은 곤란과 장애를 극복한 것이고 이 기초에서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할 수 있다면 더욱 간단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나는 적지 않은 수련생들에게 아주 많은 문제가 나타나거나 혹은 각종 마난에 처한 것을 보면, 매일 반드시 해야 할 ‘학과’에서 문제가 생긴 것을 보았다. 혹은 2일 3일에 겨우 한번 하거나 장기간 법공부하지 않고 연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기본적인 ‘학과’를 견지해서 잘하는 것이야말로 ‘수련에 소양이 있는’ 전제이다.

사람은 항상 순조로울 때 쉽게 견지하지만 정법수련은 쉽지 않고 수련도 순풍에 돛단배가 아니다. 거기에 구세력의 참여와 교란을 가하면 험난함과 좌절이 있고 각종 크고 작은 착오를 범할 수 있다. 좌절과 실패 속에서 가장 쉽게 사람이 계속 전진할 용기와 신심을 잃게 하는데 이때 가장 빨리 기어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견지해야 한다. 사부님과 대법을 단호히 믿고 소침하지 말고 자포자기하지 말고 마난에 무너지지 말고 자아에 집착하지 말고 중생의 안위를 마음속에 넣고 견지하는 이때가 바로 가장 고귀한 것이며 역시 가장 대단한 것이다. 사실 일시적으로 더 잘못하고 마난이 더 크더라도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견지해서 잘하면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것이고 중생은 곧 희망이 있다. 대법제자는 마땅히 금강과도 같은 의지를 가져야 하고 대법에 대해 반석같이 견정한 올바른 믿음은 이 견지 속에서 단련되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모진 비바람 속에서 오늘날까지 걸어온 대법제자 마다 진짜로 모두 쉽지 않다. 비록 이 속에서 너무나 많은 미혹, 고달픔, 좌절과 험난함이 있었다…… 그러나 사부님이 계시고 대법이 있고 사부님의 대법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고 사부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고 계시며 우리를 한번 또 한 번의 어둠 속에서, 막다른 길에서, 갈림길에서 꺼내주셨고 우리를 광명으로 끌어주시고 오늘날까지 걸어왔는데 우리는 가장 행운스러운 생명이다.

아주 많은 시기에 우리는 자신이 사부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를 몰랐는데 대법을 얻었으니 얼마나 행운인가. 역사상 한 사람이 수련하려고 하면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진정으로 그를 구도하는 사부를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한 사람이 수련의 소원이 더 있고 근기가 더 좋더라도 막연하다. 아울러 이런 수련은 모두 푸왠선(副元神) 수련이고, 아주 많이는 일세 일세의 명을 갚아가면서 겨우 수련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아주 많이는 수련 속에서 일념의 착오적인 생각으로 영원히 수련의 기연을 잃게 되었고, 아주 많이는 수련 원만해도 삼계를 벗어나지 못했다.진정한 부처님이 그를 제도하는 것이 아니라 가짜 부처를 모셔 고달프게 수련해도 위에는 그를 요구하는 천국이 없다.

어디에 가서 이런 사부님을 찾을 수 있는가. 진정으로 그를 제도하고 그를 보호하고 그에게 진정으로 수련하여 돌아갈 수 있고 고층차로 제고할 수 있는 대법을 가르쳐주고 그에게 소업해주고 그에게 생생세세 각 층차의 일체를 평형시켜 주시고 그를 위해 일체 심원한 원한을 선해해 주시고 그가 일세에 수련성취되게 한다. 그가 무수한 착오적인 염두를 움직이고 각종 잘못을 하고 사문(师门)을 배반해도 여전히 그를 위해 감당하시고 그에게 수련의 기연과 기회를 주셨다…… 생각해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이 일체를 해주셨는데 누구신가? 우리의 자비롭고 위대하신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이 아니신가? 우리는 진짜로 너무나 행운스럽고 너무나 행운스럽다. 이런 행운은 만고에도 만나기 어렵고 천지개벽 이래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유독 대궁이 다시 조합되고 우주가 정법하면서 있을 수 있는 겨우 이 한 번이며 장래에는 영원히 영원히 더는 없다. 우리가 소중히 해야 할 가치가 너무나 있고 또 구우주 역사상 모든 생명이 마땅히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이 계시는데 만약 우리가 모두 구도되지 못한다면 그럼 또 누가 우리를 구도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반드시 소중히 여겨야 하고 비록 예전에 흐리멍덩했더라도 지금 명백해지면 다음 일초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소중히 여기기 시작해야 하고 반드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견정한 사람으로, 신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 수련에 소양이 있는 대법제자”[1]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견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끊임없이 법공부를 견지하고 연공을 견지하고 안을 향해 찾고 착실히 수련함을 견지하고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견지하는 것이다. 계속 견지하여 사부님을 따라 원만하여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날까지 견지하여 각자 세계 속 중생들이 한없이 경앙(景仰)하는 이가 되어야 한다. 가장 간고하고 가장 복잡하고 가장 타락한 말겁난세에서 걸어 나온 천번 백번의 단련을 거쳐 조사정법의 위덕이 있는 주와 왕이 되어야 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2018년 워싱턴DC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정진요지’ ‘대법(大法) 산동 보도소에’
[3] 리훙쯔 사부님 저작:‘전법륜’

 

원문발표: 2018년 10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10/6/3754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