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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생이 납치된 후 자신을 찾아보다

글/ 헤이룽장(黑龍江)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8년 설날 전 밍후이에서 경사스러운 복자(福字)를 내놓아 수련생들은 정체 협조를 하면서 섣달 27, 28일부터 시작하여 연속 며칠 동안 각 아파트 단지 입구 문과 대문에 복자를 붙여주며 사람들에게 복을 전했습니다. 전통적인 대법의 복음이 넘치는 상서로운 복자가 도시와 농촌 도처의 대문에 널리 퍼진 모습을 보면서 정말 불광이 널리 비추어 바른 기운이 되돌아오고 기쁨이 넘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정월 초이튿날 갑자기 잘 아는 한 수련생이 설을 쇠려고 차를 타고 외지로 나가려다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금방 느슨해지려던 마음을 바로 다잡게 되었습니다. 수련생은 가족들과 재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현지의 얼음같이 차가운 구치소에 불법적으로 붙잡혀 엄격하게 관리되는 수감실에 갇혔습니다. 수련생은 화장실에 가는 것을 제한 받았으며, 잠을 잘 때 사람마다 몸을 모로 누워 곧게 막대기와 같은 자세를 취하게 한 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박해를 받았고, 몇 시간에 일괄적으로 한 번씩만 몸을 뒤집는 것을 허용하는 소위 마다오위(碼刀魚)를 당했으며, 죄수를 상징하는 죄수복을 강제로 입게 되었고, 차별대우를 당했으며, 밀쳐지며 욕설을 수없이 당했으며 강제로 감시를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원망하고 증오하는 마음들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라왔습니다.

게다가 수련생이 열악한 환경에서 기만 당하여 ‘삼서(三書)’를 쓰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 또 억눌린 감정들이 터져 나와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나쁜 것은 며칠 후 주위의 한 수련생 언니가 기차를 타고 친척을 만나러 가다 또 납치되었으며, 이틀 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녀의 집에서 매우 많은 대법 자료가 강탈되어 대법 자원의 손실이 매우 컸습니다. 걱정과 후회 그리고 두려움이 한데 뒤엉키면서 30분, 단지 30분이면 저는 그녀 집의 물건들을 옮길 수 있다는 상상이 들었고, 제때 소식을 듣지 못해 손실을 줄이지 못했습니다.

수련생 언니는 비록 일흔이 다 되어가지만 매일 세 가지 일을 매우 다그쳐 했으며, 박해가 심각했던 시기부터 수련생들을 위해 사람을 구하는 자료를 항상 제공해주었습니다. 저는 이처럼 정진하는 언니가 왜 납치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두 집은 매우 가까이에 있었고, 늘 함께 있었기 때문에 저는 두려운 마음이 갈수록 커져 집에 있고 싶지 않을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작은 방에 머무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경찰관이 작은 방의 불빛이 밝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집의 작은 방에 머물고 싶지 않았으며, 무의식적으로 큰 방에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그 날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은 저의 얼굴에 마치 한 겹의 먼지가 덮여진 것과 같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수련생이 납치되었는데 자신이 왜 이끌려서 자제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며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는지 깊이 뿌리를 파헤쳐 안으로 찾아보니 확실히 문제가 심각하다고 느꼈고, 수련하면서 수많은 근원적인 문제들을 자세하게 정리한 적이 없었으며 더욱이 닦아 없애지 못했습니다.

1. 수련인인가 아닌가 하는 큰 문제가 폭로되다

납치된 두 명의 수련생은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가정이 매우 안정적이고, 하는 일이 뜻대로 되었으며, 가정환경도 매우 좋았습니다. 장쩌민(江澤民) 고소 이전에도 모두 노출된 적이 없었고, 표면의 사람의 공간은 박해를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협박과 위협 그리고 유혹하여 기만하는 것에 직면하여 정념이 부족했고, 매우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명절 기간 동안 갑작스럽게 구치소의 열악한 환경을 생각해 보면 수갑, 철창 및 이런 나쁜 사람을 징벌하는 기구 등등을 겪으면서 한꺼번에 몸에 강제로 가해진 것들은 그녀들의 마음속 고초를 저는 직접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모두 이 육신의 아픈 곳이 건드려진 느낌입니다. 왜 저는 이런 고통에 대한 느낌이 그렇게 강할까요? 단지 수련생과의 정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 근원을 파헤쳐 보니 사실은 근원적으로는 왜 수련에 걸어 들어오게 되었는가 하는 큰 문제였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여전히 인간 세상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미련이 있었고, 심지어 잠재의식 속에는 대법을 이용하여 보호를 받으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온 가족이 평안하고 몸이 건강하며, 가정이 행복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 보다 강한 등등의 사람의 마음과 같은, 대법을 이용하여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려는 마음과 인간 세상의 생활을 더욱 아름답고 훌륭하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체의 아름다움과 훌륭함이 깨져버리게 되었기에 곧 하지 않으려고 했고, 심지어 대법을 배반(본의 아니게 타협하여 나가서 다시 새롭게 수련하려고 함)하고도 나가려고 했으며, 고통을 받지 않으려는 사악한 염두가 생겨났습니다.

정말 놀라서 온몸에 식은땀이 났습니다! 오로지 대법 속에서 좋은 점만 얻으려고 했고, 고생을 두려워하여 고생을 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고생을 원하지 않았는데 이 어찌 수련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얻고자 하는 사심은 아마도 생명이 아래로 떨어지게 된 원인일 수도 있고, 생명이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부님께서 일찍이 명시하셨습니다. “매 연공인은 큰 고생을 겪을 준비가 있어야 하고, 큰 곤란을 맞이할 결심과 의지력이 있어야 한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진정한 공을 얻을 수 없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고생도 겪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공을 얻으려고 생각하는데, 그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 心性(씬씽)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고, 개인의 그 어떤 집착심을 가지고서는 대각자(大覺者)로 수련할 수 없다.”[1]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수련하고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아직 진정하게 입문하지 못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 손으로는 사람을 잡고 내려놓지 않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불(佛)을 잡고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일을 했지만 내심으로는 아직 법이 요구하는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착실하게 수련하지 못했고, 출발점은 여전히 사람 이쪽에 있어 아무것도 말할 나위가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 괜찮다고 느꼈습니다.

만약 이 일이 안으로 찾는 계기가 되지 않았다면 누군가 저를 수련인이 아니라고 말하면 저는 백번 승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진실하게 자신과 수련생의 차이와 법이 요구하는 것과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저는 반드시 진실하게 수련하고 착실하게 수련해야 합니다.

2. 매일 ‘세 가지 일’ 속에 있어도 매일 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 세 가지 일을 모두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어 ‘세 가지 일’은 생활 속의 절대적인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자신이 매우 정진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법과 대조해보니 매일 ‘세 가지 일’ 속에 있는 것이 매일 법 속에 있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세히 찾아보니 법 공부를 함에 있어 읽는 것이 너무 익숙해서 마음에 두지 않았고, 한 강의, 두 강의를 공부하고 나면 곧 법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4차례의 정각 발정념은 기본적으로 지체한 적은 없었지만 관례대로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으며, 특히 한밤중의 정념은 늘 흐리멍덩하였습니다. 진상 알리기는 (수련생과 짝을 이루므로) 시간이 되면 바로 갔지만 예를 들면, 탈퇴를 많이 하면 기뻐하고 수련생들 중에서 말하고(과시심) 탈퇴하는 사람이 적으면(체면을 위하는 마음, 남과 비교하는 마음) 조금 실의에 빠졌으며, 개인의 이해득실을 따지기에 여념이 없었고, 게다가 ‘세 가지 일’을 완성했으므로 낙오되지 않을 것이며, 자신에게 위덕을 수립했다는 사심이 섞여 있는 등 마음속으로 그처럼 순정함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순정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 있었고 그것들을 중시하고 포착하여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매일 ‘세 가지 일’ 속에 있으면서 ‘세 가지 일’을 생활의 주요내용으로 삼았으니 속인과 생활 내용이 다른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매우 쉽게 사악에 의해 틈을 타게 됩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속인이면 그가 아무리 나쁘든 간에 사악은 그를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수련하려고 하므로 사악이 곧 당신을 수련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또 잘 수련하지 못한다면 바로 사악이 박해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2]

3. 신사신법하여 다그쳐 착실하게 수련하다

안으로 찾아보니 저는 수련하면서 늘 어디든지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대답은 바로 도대체 사부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대법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믿으면 수련의 경지는 곧 어느 정도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부님을 만능이라고 믿으면 무슨 병업가상, 무슨 사악한 교란, 무슨 열악한 환경, 무슨 계략과 유혹은 바람이 스쳐지나가듯 아무런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게 됩니다. “머리가 떨어져도 몸은 여전히 가부좌하고 있을 것이다.”[3]는 믿음의 경지의 체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사신법을 에누리 없이 해낼 수 있을까요?

제자가 사부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노수련생의 대법에 대한 가장 깊은 체험은 바로 법에 대한 견정함과 사부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저는 여쭙고 싶은데, 견정함과 믿음은 도대체 무엇에서 기원된 것입니까? 이 문제는 저의 남편을 아주 오랫동안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비로소 이런 법에 대한 비할 바 없이 견정한 마음을 닦아낼 수 있습니까?”[4]

사부: “믿음과 믿지 않음은 사람의 이념(理念)이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준 것이 아니고 또 당신이 어떤 수법을 통해 어떤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대법제자는 모두 대법에 대하여 견정한 신념이 있는데, 이는 대법제자를 놓고 말하면 하나의 모습이다. 그들의 대법에 대한 견정한 믿음(堅信)은 이성에서 인식함으로써 견정하게 믿게 된 것이지 어떤 요소가 사람에게 작용을 일으켜 조성된 것이 아니다.”[4] “그리고 대법제자의 올바른 믿음(正信) 그것은 신의 상태이고 그것은 진리에 대한 이성적인 깨달음(理悟)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잘 닦은 일면의 신의 상태이지 절대 무슨 외재적 요소가 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견정하게 믿기 위해 견정하게 믿는 것이 아니고, 견정하기 위해 견정하면 해낼 수 없는 것이다.”[4] “수련생 모두 법리의 인식에서 승화되어 올라옴으로써 더욱 정진하게 변했고, 비로소 법에 대하여 그렇게 견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외재적 요소가 아니고 또한 어떤 방법을 생각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4]

‘법리의 인식에서 승화되어 올라옴으로써’ 다시 법 공부와 법에 동화하는 것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사실,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법 공부를 하고, 법 공부를 하며, 법 공부를 하라고 한 차례 또 한 차례 노파심에서 거듭 충고하며 가르쳐주십니다. 어떻게 하면 잘 수련할 수 있는지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명시하셨습니다. “진정으로 대법을 수련하나니 오로지 이것만이 큰일이로세 대법에 동화하나니 언젠가는 기필코 성취하리라”[5]

대법이 홍전하는 이 만고의 기연을 소중히 여기고 시시각각 자신이 진수 제자인지 물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 하는 가운데 마음을 수련하여 법에 동화하겠습니다.

현재 단계에서의 깨달음으로 법에 있지 않는 곳은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파룬궁-제3장 心性(씬씽)수련’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4년 뉴욕국제법회 설법’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대폭로(大曝光)’
[4]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지역설법 3-대뉴욕지역법회 설법’
[5]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법을 얻다(得法)’

 

원문발표: 2018년 9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9/20/37409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