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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업관에 관한 약간의 인식

글/ 장쑤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몇 년간, 주변에 병업관을 넘는 수련생이 많은 편입니다. 그 중에는 99년 ‘7·20’ 이전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도 있었습니다. 일부 수련생은 병업 상태가 심각했으며, 심지어 어떤 수련생은 육신을 빼앗겨 결국 구세력이 배치한 길로 갔습니다. 도대체 무슨 원인 때문에 수련인이 병업가상에 빠져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일까요? 현 층차에서 간단한 인식을 써내어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하니, 적절치 않은 곳은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신사신법(信師信法) 문제

어떤 수련생은 병업관을 넘길 때 입으로는 신사신법(信師信法) 한다면서 “떠나든 남든 사부의 배치에 따르는 것이다.”[1]고 하지만 흔히 반대로 행동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수련생은 병업관을 넘기는 시간이 좀 길어지면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약을 먹지 않고 병원에 가지 않은 채 견지하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시시각각 각종 질병의 이름을 떠올려 무슨 심장병, 혈압 등을 생각하고, 또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느낌과 각종 증세를 대조해보기도 합니다. 입으로는 병이 아니라고 하면서 연공 횟수를 증가시키거나 자신을 도와 발정념을 해달라고 수련생을 찾는데, 목적은 바로 병업을 없애려는 것으로, 병업에 이끌려 ‘수련’을 합니다.

도와주러 온 수련생들은 모두 수련생에게, “신사신법 해야 하고, 안으로 찾아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만 개변시키려고 하며 자신의 마음은 개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련생은 거울이고, 수련 중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우연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도와주러 온 수련생들도 역시 자신을 수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련생의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정체로 제고하고 승화해야 합니다. 신사신법하는 것 역시 간단하게 약을 먹고 안 먹고, 병원에 가고 안 가는 문제가 아니며, 또 두리뭉실하게 안으로 찾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자신을 내려놓고, 병업 과정 중에 어떤 느낌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병업의 고비를 넘기는 수련생과 도와주러 온 수련생 모두가 진정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수련 중에 부딪힌 모든 일은 좋은 일이며, 수련을 제고하는 단계라고 생각하면서 생사를 내려놓는다면 모든 가상은 구름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매 사람의 수련요소가 법 중에서 대단히 복잡해 수련 중에는 누구도 진실한 병업의 배후와 그 원인을 똑똑히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사신법을 견지하면서 진정으로 자신을 연공인으로 생각하기만 한다면 병업의 생사관에서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안으로 찾는 문제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이 일생은 이미 수련인의 일생이고 어떠한 일도 우연한 것이 아니며, 또 우연한 일이 나타나지 않는데, 인생길의 일체는 모두 당신의 제고와 수련에 직접적 관계가 있다.”[1]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병업 중에 있는 어떤 수련생은 표면적으로 볼 때 무슨 큰 잘못이 없는 것 같은데도 구세력에게 잔혹하게 박해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찾아보면 그건 단지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고, 장기적으로 없애지 못한 집착심이 숨어 있어서 병업 돌파가 어려운 것입니다. 병업이 오래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더욱 모르게 되어 무기력해져서 깊은 병업의 가상 중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를 말해보겠습니다. 왼쪽 어깨의 통증이 1년간이나 지속되어 연공할 때마다 몹시 아팠습니다. 물론 줄곧 안으로 집착심을 찾아 없애기도 했지만 별로 변화가 없었습니다. 어깨통증은 표면적으로 볼 때 고생을 두려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초래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가정부가 부모님과 맞지 않아 일을 그만 두는 바람에, 집안일을 저 혼자 도맡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청소를 하면서 ‘부모님이 저의 수련을 방해했다.’고 원망했습니다. 부모님 방에 들어갔을 때 테이블에 무슨 보물 같은 물건이 놓여있어 살펴보니, 두 개의 뱀 대가리가 둥근 구슬을 받들고 있는 형상이었는데 아주 무서웠습니다. 원망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와서, ‘집을 구입해 분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후 왼쪽 어깨가 아프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힘든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쉬면 나아질 것이다.’고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그 나쁜 물건이 내 연공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연공을 방해하는 모든 사악한 생명과 그 요소를 제거한다.’는 정념을 내보냄과 동시에 모든 좋지 않은 사람마음과 집착심을 찾아 없앴습니다. 그런 다음 차례로 고생을 두려워하는 마음, 안일한 마음과 부모가 수련을 방해한다고 원망하는 마음, 나쁜 물건에게 방해받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자아에 집착하는 이기심, 그리고 시간을 절약한다는 생각으로 청소를 하면서 법을 들은 경사경법(敬師敬法)하지 못한 마음을 찾았으며, 동시에 항상 사부님 법신이 곁에서 보호해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완전히 잊은 채 그 나쁜 물건을 너무 크게 봤으므로, 신사신법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비를 넘기는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어렴풋이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밤에 선명한 꿈을 꿨습니다. 한 고객에게 업무를 처리해주고 있었는데, 그녀의 남편이 목을 길게 빼고 내 테이블 위에 있는 카드 2장의 번호를 보려고 해서, 제가 얼른 종이로 카드를 덮었습니다. 꿈을 깨고 나서, ‘내가 무엇을 덮어 감추려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했습니다. 아침에 정공할 때 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2002년에 납치됐을 때 한 가지 일을 잘못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순간 몹시 놀랐습니다. 그 일은 지금까지 줄곧 꽤 잘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조용히 하고,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되짚어봤습니다. 비로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C수련생에게 연루되어 불법적으로 세뇌반에 수감되었고, 수감된 후 그들이 요구하는 어떤 것도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잡히지 않은 C수련생이 스스로 오기만 하면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나와 함께 세뇌반에 며칠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2개월이 넘어도 C수련생을 찾지 못한다면 문제가 커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재 이미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려 공항, 기차역, 부두 등이 엄격하게 통제됐습니다. 만약 C수련생이 바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현 지역 수련생들도 모두 연루될 것이라고 위협의 말을 했습니다.

C수련생은 자주 외지에서 현지 수련생에게 전화로 수련생의 상황을 물어보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과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경찰은 C수련생이 집을 떠난 후 그녀의 집에서 다른 수련생들의 전화번호가 적힌 전화번호부를 압수했는데, 한동안 지난 후 그들은 나에게 수련생 누구누구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저 역시 C 수련생이 집을 떠나기 전 저에게 전화를 걸어돈을 좀 빌려달라고 하는 통화를 했는데, 도청한 경찰에게 납치된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정체의 손실을 감소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른 수련생을 더는 괴롭히지 말라고 한 후, “한 속인만 C수련생의 소재를 알 수 있을지 모르니,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주면서 “이 편지를 그 속인에게 가져가 C수련생에게 전해주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편지에서 “수련생은 확고하게 수련해야 하고, 정정당당하게 대면해야 하며, 착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연루시키지 말라.”고 C수련생에게 당부했습니다. 저는 그 속인의 정확한 이름과 구체적인 주소를 몰랐으므로, 그들은 오후 늦게 저를 앞세워 그 속인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그들이 그 속인에게는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C수련생도 더는 다른 수련생에게 연루되지 않게 해서 정체의 손실을 감소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인을 찾기는 했지만, 아직 C수련생을 본격적으로 추적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C수련생이 아이를 보려고 현지에 왔는데 기차역에서 한 수련생과 통화하다가 경찰에 납치됐습니다.

C수련생이 납치된 후 사건의 일부 것들이 뒤바뀌었지만, 저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C수련생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으므로 처지가 저보다 어려운 상태였고, 또 기왕 이렇게 된 바에야 마음이나 편히 갖자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됐건 쉽게 풀려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C수련생이 어떻게 진술했던지 간에 모두 제 스스로 떠안고 그녀의 죄명을 벗겨주려고 했습니다. 세뇌반에서 풀려나 돌아왔을 때는 생각이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이 소침해지고 자꾸 그 속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속인도 저 때문에 며칠 동안 수감됐기 때문입니다. 그 후 “세뇌반에서 했던 법에 부합되지 않은 모든 언행을 폐지한다.”는 엄정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수련 중에 어떤 집착심은 아주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만약 수련인이 명석한 인식이 없다면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어떤 환경이든지 사악의 요구, 명령과 지시에 협조하지 말라.”[2]고 하셨습니다. 당시는 수련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상태라 법리에 대한 인식이 똑똑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정체를 위해 손실을 감소시켰고, 수련생을 보호했다고 생각했으며, 어떤 방면에서 사악에게 협조한 것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세뇌반에서 ‘뭘 쓴 것도 없고, 자신을 위해 뭘 한 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꽤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착심이 늘 숨겨져 있었지만, 그것을 제때에 찾아내 없애지 못했던 것입니다.

관념을 개변하는 문제

일부 수련생은 층차의 한계로 언제나 수련초기의 감성적인 인식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고생을 겪으며 착실하게 수련하는 과정에서 법의 신성함과 위대함을 모르므로 이성적으로 법에서 승화해 올라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수련생은 시련이 올 때마다 어찌해야할지를 알지 못해 완전히 정념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을 속인의 위치에 놓아둡니다.

수련초기 사부님께서 개시해주셨습니다. “세상 고생 겪을 대로 겪나니 세간 벗어나면 부처로다.”[3] 그러나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정으로 법의 내포를 깨닫고, 고생을 낙으로 생각하고 해낼 수 있겠습니까? 어떤 수련생은 병업관을 넘길 때, 법리상으로는 ‘고생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입으로도 “병업가상”이라고 하면서 고비를 넘기는 중에 사람의 관념을 꽉 잡고 놓지 않은 채 본능적으로 고생에 대항을 합니다. 가상을 너무 진실하게 보는 것이 바로 한 가지 두드러진 표현이고, 무의식적으로 병업을 속인의 질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끔씩 ‘병업이 좀 나아졌는지?’를 느껴보려고 합니다. 또 수련생들은 만나게 되면 서로 관심을 보이면서 ‘느낌이 어때요? 좀 나아졌어요?’하는 인사말을 건네는데, 이것은 여전히 기점을 ‘병’에 놔둔 것일 뿐, 사람의 관념에서 뛰쳐나오지 못한 것이며, 자신을 수련인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수련인입니까? 즉 문제를 보는 기점이 속인과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왜 아프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아픔은 자신의 우주천체가 갱신되는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연공하려면 고생해야 하고, 연공하면 육신을 개변하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이 대표하는 전반 우주 체계 내의 중생이 법에 가지되어 정화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고생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일념의 차이가 바로 사람과 신의 구별점인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당신이 대법을 배웠으니, 당신이 부딪힌 좋은 정황이든 나쁜 정황이든 모두 좋은 일이다.(박수) 왜냐하면, 당신이 대법을 배웠기에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수련생은 대법을 배운 후 많은 마난(魔難)에 부딪혔는데 만약 당신이 수련하지 않는다면 그런 마난들은 당신을 훼멸을 향해 가도록 할 수 있다. 바로 대법을 수련했기 때문에 이런 마난들이 앞당겨 왔는데, 비록 받은 압력이 매우 크고 씬씽(心性)에 대한 고험도 넘기기가 매우 어려우며 때로는 넘어야 할 관이 매우 클 수도 있지만, 결국은 이런 마난들을 모두 넘어가야 하고 결산해야 하며 계산해야 한다.(뭇사람 웃음)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당신이 부딪힌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당신이 오직 대법을 수련하기만 하면 모두 좋은 일인데, 틀림없다.”[4]

병업 문제에서 또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즉 안으로 찾으면 병업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늘 안으로 찾는 것을 병업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수련생은 비록 집착심을 가득 찾아냈는데도 병업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오래 지속되면 믿음이 흔들리고 심지어 대법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병업의 표현도 따라 심해지게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로서, 즉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안으로 찾는 것과 병업을 없애는 것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안으로 찾았다고 병업을 반드시 없앨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에게 고만한 난(難)을 겪게 하며, 고통을 좀 받게 하는데, 당신이 조금도 감당하지 않는 이것은 안 된다.”[5]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으로 감당해야 할 것도 있는 것입니다. 안으로 찾는 것은 법의 기제입니다. 수련인은 안으로 찾는 것을 통해 사람의 각종 집착심, 사람마음을 없애 본질적으로 자신을 개변하고 진정으로 제고해 올라오는 것입니다. 사람에서 걸어 나와 신을 향해 걸어가야만 진정한 수련인 것입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로스앤젤레스시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대법제자의 정념(正念)은 위력이 있다’
[3] 리훙쯔 사부님의 시: ‘홍음-마음고생’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원문발표: 2018년 9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9/7/3734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