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고질병에 걸린 엘리트들이 구사일생한 이야기

[밍후이왕] 지금은 과학기술, 의술이 고도로 발달하고 복지도 좋고 운동 방법도 다양하지만 많은 질병 앞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어찌할 방법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병마의 고통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 특히 빈곤 때문에 치료하지 못해 죽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여전히 매우 많다.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는 각자의 운명이 있고 현실사회에서 속인도 백세까지 살거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일이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명산대천에서 수련하는 사람도 수백 살, 심지어 수천 살까지 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확실히 사실이지만 손꼽아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적다.

파룬따파(法輪大法 파룬궁이라고도 함)는 질병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일반 기공이 아니다. 파룬따파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5가지 연공동작이 있다. 수련자는 건강해지고 도덕성이 향상되며 지혜가 열리고 인생과 우주의 오묘한 비밀을 통찰할 수 있는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1992년부터 1999년까지 파룬따파는 신주(神州) 대지에 널리 전해졌다. ‘진·선·인’(真、善、忍) 법리는 1억 명의 수련자를 심신의 정화, 도덕성이 향상되게 했다. 1995년 3월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은 초청을 받고 프랑스에 가셔서 공을 전하고 설법하셔서 파룬따파는 해외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지금 파룬따파는 이미 세계 백여 개 나라와 지역에 널리 전해졌다.

파룬궁은 질병을 제거하고 몸이 건강해지는 방면에서 보편적으로 신기한 효과가 있다. 일찍이 1998년 중국대륙 의학계는 이 때문에 5차례 의학조사를 했다. 그 후 북미 및 대만의학 종사자도 관련된 건강 조사를 했다. 결국 파룬궁수련자의 질병을 제거하고 몸이 건강해진 총 유효율이 98%에 달했다.

밍후이왕 등 매체 보도의 무수한 사례도 이 점을 실증했다. 파룬따파는 질병을 제거하고 건강해지는 특효가 있을 뿐만 아니라 속인이 볼 때 불가사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국내외 1억의 수련자 단체에 수두룩하다. 그 중에는 고질병이나 난치병에 걸렸던 수많은 각계 엘리트들이 각종 인연으로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심신의 건강을 얻은 사실이 있다. 지면관계로 여기에서 이 부류 전형적인 이야기를 일부 선택해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증명하겠다.

농구계 노장 왕진쥐가 구사일생한 이야기

왕진쥐(王金菊)는 농구계 노장이다. 중국 81농구대, 총병참부 농구대 선수 및 코치였다.

1948년 가을 왕진쥐는 산둥성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여덟 형제 중 그녀는 일곱째였다. 울안의 서릿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국화를 보고 서예를 애호하는 그녀 아버지는 그녀에게 진쥐(金菊)라는 이름을 지어주어 그녀가 빈곤에서도 고결하고 강인한 품성을 유지하길 바랐다.

진쥐는 어린 시절 전국의 대기근을 만났다. 대기근은 진쥐 고향에도 영향이 미쳤다. 마을에는 매일 굶어 죽는 사람이 10여 명이나 됐다. 생존하기 위해 언니는 살던 곳을 버리고 진쥐를 데리고 동북으로 갔다. 그녀는 공장에서 제일 어린 소녀공이 됐다.

19살 되던 해 체육에 특기가 있었던 진쥐는 부대 스포츠 팀에 선발돼 81농구대, 군사팀과 총병참부 농구대에 들어갔다.

진쥐는 농구장에서 땀을 흘리며 10여 년 분전했다. 농구선수에서 코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상을 받고 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강렬한 운동 후 남은 외상은 진쥐에게 깊은 병이 생겨 그녀의 인생에 큰 고통을 주었다.

80년대 진쥐는 베이징의 한 영화 회사의 부총재로 임명됐다. 매일 업종 특집 프로그램을 찍고 광고, 영화와 드라마를 찍고 TV방송국 매체 대리를 하느라 바빴다. 사업은 매우 잘됐다. 회사가 잘 되어감에 따라 진쥐의 개인 경제 상황에도 거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큰 집, 좋은 차가 있고 전직 기사도 두었으며 어머니와 고향 친척들도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됐다. 진쥐는 그녀 인생길에서 또 하나의 돛을 올렸다고 생각했다.

진쥐가 득의양양해 하고 사업에서 분전하고 있을 때 액운이 끼었다. 1995년의 어느 날 진쥐는 갑자기 반신불수가 됐다! 친구와 친척이 그녀를 들고 곳곳에 다니며 치료하고 명의를 다 찾았지만 낫지 않았다. 진쥐는 고독하게 침대에 누워있었고 연로한 언니가 그녀를 돌봐주었다. 인생을 돌이켜 보며 진쥐는 정말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40여년이 지나 빈곤에서 부유해지고 인생의 뜻을 이루었지만 이때 그녀는 사람은 건강을 잃으면 정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깊이 체험했다.

1996년 진쥐의 친구가 그녀에게 ‘전법륜’ 한 권을 가져다주며 그녀에게 알려줬다. 주위에 중병, 난치병에 걸렸던 많은 사람이 파룬궁을 수련한 후 모두 건강해졌다고 말했다. 이 소식은 진쥐에게 희망을 주었다. 진쥐는 단번에 ‘전법륜’을 다 읽었다. 그녀는 책에서 말씀하신 한 마디, 한 마디가 진리라는 것을 느꼈고 그녀 인생의 모든 의혹을 다 풀어주었다. 그녀는 파룬궁을 수련하기로 결심했다.

한 달 후 기적이 나타났다. 진쥐는 일어설 수 있었고 몸이 매우 가벼웠다. 환골탈태의 변화였다!

진쥐 친척들은 파룬궁을 수련해 심신의 혜택을 보아 신기한 변화가 발생한 진쥐를 직접 보고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둘러앉아 함께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설법 동영상을 보았다. 친척들이 건강해지고 가정도 더 화목해졌다.

그때 매일 새벽 고향의 공원, 큰길 옆에는 모두 한 무리 사람들이 파룬궁을 연마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연공음악에 따라 연공하는 동작을 많은 사람들이 구경했다. 진쥐는 말했다. “이전에는 돈을 많이 벌어 육친에게 주고 그들을 도와 빈곤에서 벗어나 부유해지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금산을 주어도 파룬따파 복음을 주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진쥐는 일부러 부대에 가서 전우와 지도자에게 파룬따파를 널리 알렸다.

진쥐는 파룬따파를 얻어 구사일생했다. 그녀는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직접 체험했다. 사람들은 크고 민첩한 진쥐의 자세를 보고 그녀가 이미 환갑이 넘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렵다고 한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그해 반신불수가 되어 침대에 누워 있었던 사실이다. 그녀는 매우 감개무량하며 말했다. “파룬따파는 저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었고 인생의 참뜻을 알려줬습니다. 삶이 이렇게 안정되고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진쥐는 그녀의 이름처럼 중국공산당의 잔혹한 폭행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릿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고결함을 굳게 지켰다.

진쥐는 ‘진선인’ 신앙을 견지해 중국공산당에게 수차례 붙잡혀 박해를 받았다. 2004년 진쥐는 자유로운 캐나다에 와 몸과 마음을 다해 중국공산당의 파룬궁 박해를 폭로하는 데 투입했다. 직접 겪은 일을 세인에게 알려주면서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많은 관광객은 조용히 그녀가 말한 진상을 들었다. 캐나다의 겨울은 무척 춥다. 진쥐와 다른 파룬궁 수련생들은 매일 관광지에 가서 중국관광객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려 소중한 중국인이 중국공산당의 거짓에 속지 말길 바랐다.

수석 엔지니어 왕중밍 ‘B형 간염’에서 다시 살아나다

왕중밍은 교수급 수석 엔지니어이다. 충칭 중예싸이디(中冶賽迪) 공정기술주식유한회사는 그를 ‘중청년 전문가’로 초빙했다.

1965년 8월 왕중밍은 허촨의 한 교육자의 가정에서막내로태어났다.두 형은 모두 그보다 열 몇 살이나 많았다. 왕중밍이 태어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문화대혁명이 폭발했다. 부모는 모두 외양간에 수감됐고 형들은 잇따라 배움의 기회를 잃었다. 돌볼 사람이 없어 포대기에 있는 그는 어쩔 수 없이 지식청년으로 시골에 내려가는 큰형을 따라 현지의 한 농민 집에 맡겨 양육됐다. 어린 시절 그는 외양간에 수감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주말이 되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따라 20여리 길을 걸었다. 그가 10살 때 아버지는 우울증이 생겨 돌아가셨다. 그러다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후에야 그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했다.

간고한 환경과 순박한 가풍이 왕중밍의 선량하고 소박한 성격을 만들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성적이 우수했다. 이후에 충칭대학에 입학했고 성적이 우수해 학교에서 추천해 연구생 공부를 했다. 1989년 연구생을 졸업한 후 그는 과학연구와 공정기술을 위주로 한 충칭강철설계연구원(중예싸이디의 전신)에 가서 일했다.

의기양양한 인생의 작은 배에 돛을 올려 출항하려 할 때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고작 한 달 일한 그는 B형 간염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학에서는 아직 B형 간염을 치료할 수 있는 특효약을 찾지 못했다. 이 충격으로 이 젊은이는 인생의 목표, 원대한 포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밀어버리거나 던져버릴 수 없는 이상한 병인 B형 간염이 그때부터 그에게 들러붙었다.

간이 좋지 않고 비장과 위도 좋지 않아 음식을 먹을 수 없어 신체는 수척해졌다. 어지럽고 메스꺼워했으며 황달과 잇몸 출혈이 생겼다. 신체가 너무 허약해 닭도 먹을 수 없었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매일 저녁 8시면 잠을 잤다. 가장 큰 문제는 몇 년에 한 번씩 입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7년 동안 그는 3차례 병원에 입원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양의, 중의, 민간요법, 기공 무엇이든 다 시험해봤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특히 슬픈 것은 이 병 때문에 결혼한 지 몇 년이 되어도 감히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이런 희망이 없는 나날을 8년간 지속하던 왕중밍은 1996년 초 상하이에 출장 갔다가 인연이 닿아 파룬궁을 배우게 됐다.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신체는 매우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B형 간염 증상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졌고 원기도 점점 왕성해졌다. 몇 달 후 충칭에 돌아온 후 가족은 그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을 발견했다. 환골탈태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파룬궁은 너무 신기합니다!” “파룬궁 사부님께서는 너무 위대하십니다!” 친척, 친구들의 외침과 축하 소리 속에서 온 가족은 마침내 그 고달픈 나날을 마쳤다.

병이 낫자 왕중밍의 생활은 그때부터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열었다. 1997년에 총명하고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다. 왕중밍은 업무 성과가 매우 좋고 심성과 심태가 아주 좋아 직상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그는 연속 4년 원급(院級) 선진 개인, 2중 문명 개인 등으로 선정됐다. 그때 그의 선진 사적을 소개한 큰 사진 포스터가 원(院) 큰문 앞 게시판에 붙었었다.

파룬궁은 사람이 건강해질 뿐만 아니라 도덕성이 향상되고 사상을 승화할 수 있다. 왕중밍은 중예싸이디의 ‘중청년 전문가’이며 부서의 핵심 기술자다. 업무에서 그는 뭇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바오강, 잔장강철, 베트남 허징, 브라질, 말레이시아 쿠안탄 등 일련의 국내외 중대한 공정 항목에서 중요한 작용을 발휘했지만 공로가 있다고 자처하지 않았다. 어떤 때 거래처에서 상품 판로를 확장하기 위해 그를 찾아와 사례금이나 선물을 주려했지만 그는 모두 진·선·인의 심성 표준으로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하면서 받지 않거나 되돌려주었다.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을 다른 눈으로 본 것이 아닐까 근심했다. 왕중밍은 상대에게 알려주었다. “저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기에 진선인에 부합되지 않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1998년 10월 아내도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섰다. 부부는 함께 ‘진·선·인’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면서 모순에 부딪히면 먼저 본인이 잘못했는지 찾아 부부는 화목했고 고부 관계가 조화로웠다. 온가족은 화기애애했다.

팔순인 노교수가 60여 세로 보이다

시안 석유대학 교수 셰쿤은 학교 교무처 처장, 도서관 관장이었다.

그는 신장병에 걸려 여러 번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었다. 또 고열 39도로 강당에서 쓰러진 적도 있었다. 1985년 관상동맥성 심장질환으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고 늘 심장 박동이 너무 빨랐으며 저혈압이 있었다. 심각한 위장병, 담낭염, 간낭종, 신경쇠약, 치질 등 여러 가지 질병이 있어 2000여 명의 교직원 중에서 신체가 쇠약하기로 앞에서 열 몇 번째였다. 퇴직 전 매년 두 번 입원해 링거를 맞고 매일 7-8가지의 약을 반드시 제때에 먹어야 했다. 1997년 7월 아침운동을 할 때 운 좋게 파룬궁 단체를 만났다. 당일 저녁, 연공장에 가 사부님의 지난설법 동영상을 보고 이 공법은 사람에게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 것임을 느꼈다. 어떻게 더 좋은 사람이 되며 다른 사람을 선량하게 대해야 한다. 일할 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각 방면에서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해야 한다. 모순이 있으면 안으로 찾고 도덕성이 고상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그는 더 선량해지고 너그러워졌으며 더 성실해졌다. 수련하기 전,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다른 사람은 모두 그를 성격이 거칠고 급하며 승부욕이 강하고 다른 사람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가족과 동료, 친구와 어울려 지냈고 일에 부딪히면 다른 사람을 생각했으며 명리 앞에서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했고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다. 물건을 살 때 더 거슬러 준 돈을 돌려주었고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힘들고 더러운 일을 앞장서서 했다.

심성이 제고된 이외에 셰쿤의 건강 상황도 큰 변화가 발생했다. 먼저 그의 위장병이 나았다. 1986년에 전정위염이 검출되어 찬 음식을 먹지 못했고 늘 위가 아프고 신물이 올라왔으며 속이 쓰렸다. 지금 이런 것이 다 없어지고 정상이 됐다. 예전에는 늘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수련한 후 그의 불면증이 사라져 정력이 넘치고 힘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면 누가 밀어주는 것 같았고 14층을 단숨에 올라가도 힘든 줄 몰랐으며 온몸에 병이 없이 가벼웠다. 1998년 직장에서 신체검사를 할 때 그의 건강 지표는 다 정상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약 한 알 먹지 않아 국가에 의료비를 절약해주었다.

지금 이미 팔순에 가깝지만 얼굴은 불그레하고 활력이 넘쳐 다른 사람이 보고 다들 60대같다고 말한다. 2010년 셰쿤은 스스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 땅콩, 고구마, 콩, 옥수수와 여러 가지 야채를 심어 풍작을 거뒀다. 집에서 다 먹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도 나누어주었다.

파룬궁 수련을 통해 셰쿤은 심신의 혜택을 보았고 간암 말기에 걸린 그의 누나도 파룬궁 수련을 통해 암이 다 나았다.

대만 시인의 생명에서 가장 행복한 일

왕리화는 대만 징이대학 중문학과 교수다. 그녀는 문학 창작을 사랑했고 장편시를 쓴 유명한 시인이다. 왕리화는 불치병에 걸렸었는데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나았다.

1990년에 병이 난 후 그녀는 늘 까무러쳤고 혈압이 190, 200까지 올라갔다. 많은 의사에게 보였는데 어떤 의사는 고혈압이라고 했고 어떤 진단 결과는 중풍, 간헐적 뇌허혈, 알레르기, 천식이라고 했으며, 또 많은 의사는 그녀가 도대체 무슨 병에 걸렸는지 몰랐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각종 심장병 방면의 약을 전부 먹었다. 왕리화는 말했다. “저는 너무 많은 약을 먹어 내출혈이 생겼습니다. 조금만 건드리면 온몸 곳곳에 멍이 들어 병세를 개선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한 의사가 자신 있게 그녀에게 최신 약으로 바꿔줄 것이니 병세가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 약 먹은 지 2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점점 온몸에 힘이 없어졌고 숨을 쉴 수 없어 즉시 응급실로 실려 갔다.

왕리화는 고학력자이고 대학에서 교직을 맡고 있어 남들이 부러운 생활을 해야 할 사람인데 오래 치료해도 낫지 않은 병 때문에 그녀는 우울하고 애달파 무기력하게 하늘에게 물었다. 장기간 영문 모를 고질병의 시달림을 받았다. 병세는 점점 심각해져 심지어 젓가락을 들 수 없었고 음식물을 삼킬 수 없었으며 글을 쓸 수 없었다. 어떤 때 아침에 일어나면 척추에 힘이 없어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어 전화로 학생을 불러 그녀를 침대에서 안아 일으키게 했다. 마지막에 그녀는 우울증에 걸려 미래에 아무 희망도 품지 않았다. 왕리화는 말했다. “당시 저는 유서까지 다 써놓았습니다.”

2004년 왕리화는 우연히 심장과 명의를 만났다. 상세한 검사를 거쳐 이 의사는 그녀의 병은 심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며 다른 한 신경과 전문가를 찾아가보라고 건의했다. 이렇게 그녀는 몇 차례 종합 검사를 받고 마지막에 희귀병인 ‘다발성 경화증’에 걸렸다는 확진이 나왔다. 이 병은 지금 치료할 약이 없어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까 봐 처음에 그녀에게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다가 한 달 후에야 의사는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본인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불길한 소식을 듣고 왕리화는 하늘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달갑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많은 창작 계획을 완성하지 못했기에 속으로 원망했다. “왜 일찍 말해주지 않았지? 일찍 말해주면 나도 좀 홀가분해질 것이고 고생스럽게 치료하러 오지 않아도 되고 의료 자원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다행히 이전에 왕리화는 파룬궁을 수련한지 오래된 타이다 경제학 교수 장칭시를 알았다. 그는 가끔 그녀에게 파룬궁 정보를 보내줬는데 왕리화는 관심만 가졌을 뿐 접촉하지 않았다. 왕리화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의 조카가 파룬궁을 연마해 보라고 알려줬다. 조카의 연구소 교수가 바로 이 장칭시였던 것이다.

인간 세상에는 일치하고 기묘한 각종 인연이 있지 않는가? 조카는 장 교수가 많은 중증 환자가 파룬궁을 배운 후 병이 나았다는 사례를 늘 말했다고 했다. 조카의 격려로 왕리화는 장 교수에게 파룬궁을 배우겠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즉시 그녀에게 파룬궁 책 ‘전법륜’과 연공에 관련된 서적 자료를 부쳐줬다.

왕리화는 말했다. “내가 ‘전법륜’을 든 그 순간 제 온몸에서 열이 났고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꿰뚫었습니다. 말 못할 편안함이었습니다.”

3일 후 왕리화는 병원에 재진하러 갔다. 일주일 후 보고가 나왔는데 의사는 이해할 수 없다며 그녀에게 병세가 호전됐다고 전했다. 그녀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당시 그녀는 법공부를 막 시작했는데 이런 효과가 있으니 연공하면 효과가 더 뚜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날 연공하고 왕리화는 뒷걸음질 칠 뻔했다. 병이 이미 고황에 든 그녀는 앉아 있기도 힘들었고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두 다리는 힘이 빠졌고 팔은 아파서 들 수 없었다. 집에 돌아간 후 그녀는 지쳐서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어 속으로 그냥 포기할까 생각했다. “저는 당시 매우 실망해 장교수에게 전화했는데 장교수는 저에게 ‘축하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후에 그는 경험자로서 본인의 경험을 교류했습니다. 그것은 사부님께서 저의 신체의 나쁜 것을 제거해주신 것이라며 제게 꼭 견지하라고 격려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견디기 어려운 한 달이었고 늘 꾸준하게 하지 못했다. 교수는 그녀가 뭘 생각하는지 알기라도 한 듯이 바로 전화해 그녀를 격려했다. 왕리화는 파룬궁을 배운 초기에 몇 차례 중대한 고비를 겪었다. 예를 들면 독감 증세가 오래 지속됐고 기침하면 피가 나왔으며 온몸에 힘이 빠져 녹초가 됐지만 그녀는 이것은 시험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매일 아무리 힘들어도 연공을 꼭 했다. 5분, 10분, 20분을 견지하면서 가부좌만 했지만 계속 정진했다. 이렇게 1달 지난 후 그녀의 몸은 점차 회복되어 체력도 좋아졌다. 그녀는 다시 돌아와 ‘전법륜’을 보고서야 무엇이 수련인지 문득 깨달았다.

이런 끈기로 그녀는 마침내 달콤한 피드백을 받았다. 어느 날 그녀가 파룬궁을 수련한지 3개월 17일이 됐을 때 마침내 결가부좌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 시각만 기억납니다. 온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신체의 모든 모공이 다 열린 것 같았고 온몸에서 땀이 났습니다. 정수리의 무언가가 열린 것 같았습니다. 잠시 희비가 엇갈렸어요! 앉아 있을수록 편안했습니다.……” 다음날 약을 먹지 않고도 감기 증상이 나았다. 그 후부터 왕리화는 줄곧 지금까지 수련해왔다.

왕리화는 질병 때문에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편 시를 쓰는 문학 창작에 종사할 수 없게 됐다. 뇌신경이 연결 기능을 잃은 것처럼 늘 문구, 어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온 머리는 많은 매듭이 있는 것 같았고 적절한 단어를 찾아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연공하면서 사고력이 점차 회복되어 왕리화는 글쓰기를 순조롭게 다시 회복할 수 있었고 장편 시 창작에 종사할 수 있었다. 시인인 그녀는 새 생명을 얻은 것처럼 기뻤고 그것은 생명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미국 박사 랴오페이루의 새 삶

랴오페이루(廖佩茹)는 대만 타오위안 사람이다. 2004년 새해가 금방 지난 후 그녀는 손가락과 손목이 아프기 시작했고 손가락이 벗겨졌다. 그때 그녀는 25살밖에 되지 않았고 미국 퍼듀 대학에서 박사 공부를 했다. 이어서 두 달 사이에 통증이 팔꿈치, 어깨, 등과 무릎까지 확산됐다. 매일 저녁 2, 3시에 그녀는 아파서 깨어났다. 보건 교사는 속수무책이어서 그녀를 큰 병원에 보냈다. 그곳에서 의사는 혈액 검사를 했지만 무슨 병이라고 확정할 수 없어 그녀에게 증상이 3개월 이상 지속되면 류머티스 관절염일 것이라고 말했다.

랴오페이루의 병은 줄곧 확진되지 않았고 병세는 점점 나빠졌다. 그녀는 미친 듯이 인터넷에서 유사한 증상 자료를 찾아보아 모든 관절염 증상을 분명하게 알았다. 그녀의 모든 증상은 류머티스 관절염 증상이었다. 그 때 젓가락도 제대로 잡지 못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대만 각 큰 병원 류머티스 면역과에 이메일을 보내 그들에게 물어보았다. 의사들의 대답도 거의 “류머티스 관절염에 걸린 것 같은데 대만에 와야 진단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랴오페이루는 상당히 낙심했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두 발은 점차 걸을 수 없어 그는 점점 두려웠다. 인터넷에서 류머티스 관절염에 관한 항목을 얼마나 클릭했는지 모른다. 그녀는 류머티스 관절염은 먼저 관절을 침습해 각 관절이 심각하게 변형된 후 이어서 심장 및 기타 내장을 공격하여 몇 십 년 후 마지막에 고통스럽게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랴오페이루를 더 고통스럽게 한 것은 부모가 모두 이미 60에 가까운데 동생들이 아직 어려서 부모의 적은 연금으로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외에 그녀의 높은 의료비까지 부담해야 했다. 본인 혼자 고통스러운 것은 괜찮은데 가족까지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이 마음 아팠다.

랴오페이루는 죽으려 했다. 그녀는 대만에 돌아가 자살하면 더 어려워질 것 같아 그랜드캐니언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사고 뛰어내려 죽으려고 작심했다.

그녀는 유서를 쓰고 아울러 인터넷에서 그랜드캐니언으로 가는 티켓을 예매했다. 그때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름다운 인생이 시작되는 25살에 그녀는 궁지에 빠졌다.

유서를 다 쓰고 랴오페이루는 마지막으로 다시 인터넷에서 그녀를 죽고 싶을 정도로 슬프게 한 류머티스 관절염에 관한 자료를 훑어보고 그랜드캐니언으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웹페이지 제일 아래쪽의 글 한 줄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류머티스 관절염이 기적처럼 다 나았다.’ 클릭하고 보았더니 파룬궁을 연마해 나았다고 했다. 검색하면서 그녀는 많은 난치병이 모두 파룬궁을 연마하여 완쾌된 것을 발견했다. 이때 그녀에게 한 가닥 희망이 생겼다. 이 파룬궁이 이렇게 신기한데 얼른 사람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

랴오페이루는 검색창에 파룬궁 세 글자를 입력한 후 홍콩 사이트에서 세계 온라인이라는 글자를 보았다. 계속 검색하면서 미국 각 대학에 모두 무료로 파룬궁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퍼듀 대학의 담당자는 미국인이었다! 그녀는 즉시 그에게 전화했는데 그는 이미 졸업해 연락이 닿지 않았다.

랴오페이루는 좀 실망했지만 계속 인터넷에서 찾았다. 홍콩 사이트 비디오 자료에서 그녀는 파룬궁의 5가지 공법을 가르치는 동영상을 보고 얼른 다운로드해 보았다. 그녀는 또 밍후이왕에 게재한 ‘전법륜’을 다운받아 인쇄를 했다.

랴오페이루는 ‘전법륜’을 한 번 통독하고 이 책은 사람에게 선량하게 살라고 가르친 것만이 아니라 그녀의 많은 의문을 해답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의문은 다른 종교에서는 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랴오페이루는 말했다. “동영상을 볼 때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이 미소와 선량하게 살라고 심혈을 기울인 가르침이 인상이 깊었습니다.” 그녀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연공하기 시작한 후 이튿날 저녁에 그녀는 온몸에 열이 나 이불마저 차버렸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심한 구취가 사라졌음을 알았다. 잠을 잘 수 있었고 식욕도 있어 죽을 생각을 버렸다. 본인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대만에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대만에 많은 파룬궁 수련생이 있어 그녀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2004년 4월 13일 저녁, 랴오페이루는 휠체어에 앉아 대만으로 돌아갔다. 그때 그녀는 걸을 수 없어 비행기를 타고 내릴 때 다른 사람이 안아줘야 했다.

4월 14일 아침, 부모가 그녀를 데리고 대만 창겅병원으로 치료 하러 갔다. 초음파 검사와 이전에 검사한 혈액검사 보고에 근거해 두 의학교수는 그녀의 병은 관절이완증이라고 진단했다. 이 병은 소위 공주병인데 평생 아플 것이고 평생 무거운 물건을 들면 안 되고 힘든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진통제를 계속 먹어야 한다. 평생 손목보호대, 무릎보호대, 허리보호대를 하고 지속적으로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진료실에서 나와 랴오페이루는 부모에게 말했다. “저는 파룬궁을 배우겠습니다!” 당일 아버지는 그녀를 도와 ‘전법륜’ 한 권을 사왔다. 그날부터 그녀는 열심히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창겅병원에서 받은 약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4월 17일 새벽, 그녀는 4시 반에 일어나 먼저 인터넷에서 밍후이왕의 ‘병을 제거하고 건강을 찾은 웹페이지’에 실린 파룬궁수련생들의 난치병이 나은 진실하고 신기한 사례를 보고 그녀는 작은 보폭으로 한 걸음씩 혼자 집 근처 연공장에 걸어갔다. 4월 28일에 이르러서는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랴오페이루는 정상인처럼 큰 보폭으로 걸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아주 빨리 중의사, 양의사를 찾던 약골 생활을 작별하고 대만 쑤린 고등학교 영어 교사가 되어 결혼해 현모양처가 됐다. 그녀의 많은 친척, 친구들도 이 기적을 보고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죽지 않은 암’을 앓던 환자의 인생이 변하다

라이언 레이먼드는 미국인이다. 두 개 학위가 있는 그는 석유 거두회사에서 23년간 일했다. 회사에서 수석회계사 조수이고 업무 금융시스템 운영 책임자다. 그해 사업이 나날이 향상하던 그는 늘 아픈 왼쪽 대퇴골 때문에 수심에 잠겼다.

11살 때 라이언은 운동을 하다가 넘어져 좌골이 골절됐다. 의사는 그의 양측 좌골에 금속환 고관절 성형술을 하고 좌골을 지탱할 강철못을 넣었다. 그때부터 라이언은 앉아서 정상으로 두 다리를 겹쳐놓을 수 없었고 길을 걸을 때 매우 불편했다. 장기간의 대퇴골 마찰로 닳아서 대퇴골이 점점 참기 어렵게 아팠다. 운동할 때는 더 심했다. 2001년 12월 오른쪽 대퇴골이 괴사되고 신경이 겉에 드러나 그는 오른쪽 대퇴골을 교체하는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왼쪽 대퇴골도 몇 달 사이에 바꾸어야 된다고 말했다. 라이언은 늘 병고에 시달렸다. 사업이 순조롭고 가정이 화목해도 라이언은 즐겁지 않았고 인생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아내 줄리는 기공을 애호해 여러 가지 기공을 연마했다. 2002년 1월 휴스턴에서 운 좋게 파룬궁을 만났다. 줄리의 내심은 즐거움과 평온함으로 넘쳤다. 그녀는 라이언도 파룬따파 수련을 해보길 바랐다.

다른 신앙이 있는 라이언은 처음엔 좀 주저하다가 나중에 해보기로 결정했다. 처음에 라이언은 파룬궁 연공을 하지 않고 마음을 조용히 하고 파룬궁의 주요 저서 ‘전법륜’을 읽었다. 한 번 한 번씩 6주 읽은 후 라이언은 파룬따파 수련의 ‘진·선·인’ 이념에 기초적인 인식이 있게 됐다. 파룬따파는 수련자에게 어떤 사회 환경에서든지 좋은 사람이 되고 덕을 중히 여기며 마음을 닦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 내심 본질에서 자신을 개변하고 자신을 승화하며 항상 다른 사람을 생각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라이언은 내심이 매우 충실해진 것 같았다. 그때부터 그는 직장에서 ‘진·선·인’의 요구대로 했고 무슨 일에서든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 매일 ‘전법륜’을 읽고 연공했더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라이언의 전체 둔부 뼈와 근육이 점차 보강되어 편안하게 간단한 가부좌를 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한 쪽 대퇴골을 바꾸는 수술을 기다려야 하는 어두운 그림자에서 철저하게 해탈됐다. 라이언을 5년간 괴롭히던 고혈압도 약을 먹지 않고 나았다. 그는 파룬따파의 초상적인 힘은 허위가 아니라 진실하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라이언은 더 많은 사람에게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알려 혜택을 보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은 라이언이 몇몇 파룬궁 수련생과 멕시코 변경 도시에 현지 시민에게 파룬궁을 소개하러 갔다. 라이언은 말했다. “공원과 시내 광장에서 우리는 불볕더위 속에서 걸으면서 연공하고 전단지를 배포했습니다. 노트북과 각종 자료가 들어있는 무거운 가방까지 멨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파룬궁에 매우 흥미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해가 서산에 질 때까지 10시간 동안 앉아 쉴 틈도 없이 바쁘게 보냈습니다.” “불가사의한 것은 하루 동안 서있었는데 둔부가 아무 일 없었고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이튿날 새벽 일어났을 때 매우 좋았습니다.”

수련하기 전과 비기면 천지 차이였다. 그때는 문을 나서 차를 탔고 짧은 길을 걸어도 매우 피곤했었다. 정말 너무 신기했다. 실천 중에서 라이언은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더 깊이 느꼈다. 그가 ‘진·선·인’의 요구에 따라 하고 타인을 생각했을 때 그의 신체도 따라서 좋아졌다. 더 많은 사람에게 파룬따파를 수련시키려는 생각만 하고 연속 10시간을 수고한 그는 어떤 피곤한 상태도 나타나지 않았고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되어 매우 편안하고 미묘함을 느꼈다.

라이언은 파룬따파 수련에서 인생의 병고, 고난의 진정한 원인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의의는 끊임없이 자신을 승화하고 반본귀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덕을 중히 여기고 마음을 닦는 것이 근본이다. 그는 말했다. “파룬따파를 수련할 수 있어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에 대한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호주회사 여성 매니저의 신기한 변화

크리스틴은 영국에서 태어나 2003년에 호주로 시집간 후 한 회사의 매니저를 맡았다.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전에 크리스틴은 성격이 내성적이고 자신감이 부족하고 압박감이 있었으며 늘 우울한 여성이었다. 거기에 병고에 시달려 늘 알코올의 힘을 빌려 자신감을 찾으려 했고 내심의 진실한 고통을 숨기려 했다.

크리스틴은 생활의 각종 문제에 적응할 수 없어 늘 문을 잠그고 혼자 방에 있거나 회사 화장실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멀리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미워 끊임없이 자신의 뺨을 치기도 하고 항우울제를 먹어야 했으며 심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후에 그녀에게 강박증(OCD)이 있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머리에 배제할 수 없는 조급함으로 늘 극한 정신적 압력을 받았다.

그밖에 크리스틴은 희귀한 다낭성난소증후군(PCOS)이 있어 몇 달에 한번 생리를 했다. 가장 길었던 때는 1년에 한번 생리를 할 때도 있었다. 호르몬 불균형으로 매일 약물로 생리를 조절해야 했다. 의사는 크리스틴에게 자연 임신 방식으로 아이를 가질 기회가 요원하다고 알려줬다.

은연중의 안배였을 것이다. 모험하기를 좋아하지 않던 크리스틴은 갑자기 혼자 호주를 관광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햇빛이 찬란한 자연 대지에 마음이 이끌렸다. 이곳에서 그녀는 파룬궁 수련생 스티브를 알게 되어 파룬궁을 조금씩 알게 됐고 얼마 되지 않아 수련 행렬에 들어섰다.

2003년 11월 크리스틴은 스티브와 부부가 됐다. 2004년 초 약 복용을 중지한 상황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오지 않던 생리가 갑자기 나타났고 그해 2월에 임신했다. 이 뜻밖의 기쁨과 기적에 그들 부부는 감격했다. 크리스틴은 회고하며 말했다. “제 생리가 줄곧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저는 임신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배가 하루하루 불러오자 저는 좀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의사가 임신했다고 알려주었을 때 정말 매우 기뻤습니다.”

수련을 통해 크리스틴은 삶에 고난이 왜 존재하는지 알았고 그녀의 인생관도 180도 큰 변화가 발생했다. 그녀의 조급증, 강박증, 자신감이 없는 것도 우주 대법의 혜택을 받아 점점 사라졌다. 그녀는 말했다. “파룬따파는 저에게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사고할 줄 알게 했고 고난 앞에서 지금은 ‘이것은 하늘이 저에게 주는 관심이고 제 심성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련하기 전에 저는 극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어서 늘 끊임없이 근심하고 원망했습니다. 지금은 한발 물러나서 보면 세상이 넓어 보인다는 이치를 알게 됐습니다.”

 

원문발표: 2018년 8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8/18/3725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