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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와 견정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한 대법제자로서 만약 사부님과 법에 대해 확고하지 않다면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이 도리를 나는 표면적으로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존께서는 여러 설법에서 모두 이 문제를 지적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 공부가 깊지 않고 착실한 수련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과거에 수련하면서 늘 ‘동요’ 하면서도 스스로 ‘아주 확고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태는 도리어 자신이 법을 배우고 착실히 수련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어느 날, 중국에서 사존의 전법반(傳法班)에 참가했던 노년 수련생 A는 “나는 최근 몸을 움직이기가 너무 힘이 들어요. 몸이 무거워 허리도 펼 수 없어 매일 집중적으로 발정념을 했지만 여전히 졸려서 눈을 뜨지 못하겠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A에게 물었다. 사부님께서 설법에서 느낌에 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세요?

A는 사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사람의 감각은 아무것도 아니다.”[1]

나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 ‘감각’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에 따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A는 말했다. “모두 가상이며 그것을 승인하지 않아야죠. 하지만 정말 몸이 너무 무거워서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아요!”

나는 말했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마땅히 사부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잖아요.

A는 말했다. 당연히 사부님 말씀을 듣지요. 이것은 모두 가상이고 그것을 승인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몸이 정말 무거워서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아요.

A는 1초 전과 후가 마치 두 사람이 한 입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수차례 반복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갑자기 화가 치밀었는데 화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손으로 A를 밀치며 말을 끊었다. 목소리도 높아져서 “말로는 사부님 말씀을 듣는다고 했지만, 감각에 의지하고 있는데, 정말 수련하는 건가요? 정말 사부님을 믿고 대법을 믿는 건가요?”라고 말했다.

A는 말했다. 당연히 사부님을 믿죠! 1시간 전에 큰비를 맞으며 B수련생에게 주간을 받으러 갔다 왔어요. B는 “이렇게 큰비가 오는데도 왔냐”고 했지만 저는 “대법의 일은 눈비로 가로막을 수 없다”고 했어요.

나는 A가 흥분한 모습을 보고 노인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되고 이것은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좋은 사람이 되는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임을 인식해, 재빨리 사과했다. 하지만 안으로 찾지 않았고 불평하는 마음을 지니고 A의 집에서 나왔다. 저녁에 발정념하면서 자신을 청리하는데 이 일이 생각났다. 문득 아래 몇 가지 문제를 깨달았는데, 간단히 분석하고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한다.

첫 번째 문제: 나는 낮의 그 일을 왜 만나게 됐을까?

사부님의 경문 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상대방이 어떠어떠하다고 그들이 본 것으로 반대로 자신을 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2] 나는 낮에 발생했던 그 장면에 관해, 반대로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내가 정말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확고하지 않은 게 아닐까?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로지 당신이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환경, 어떤 상황하에서든지 부닥칠 수 있는 그 어떤 시끄러움과 좋지 않은 일, 나아가 당신들이 대법(大法) 일을 위해 더없이 좋고 더없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일까지도, 나는 모두 당신들의 집착심을 제거해 버리고 당신들의 마성을 폭로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데 이용할 것이다.”[3]

자신을 찾아야만 집착을 발견해 없앨 수 있고 제고할 수 있다. 내가 진지하게 자신을 찾지 않은 것은 이 문제에서 사부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고 이 문제에서 확고하지 않았고 동요한 것이다. 수련생이 표현한 ‘시비’의 가상에 이끌렸고 무조건으로 안으로 찾는 정념이 흔들렸다.

계속 찾아보니……

사부님께서는 우주의 구조를 말씀하실 때 “나무의 가지”[4]를 말씀하셨다. 생각해봤다. 어느 가지의 각도에서 봐야 전 우주가 모두 인정하는 바른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말씀해주셨다.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건 나이니”[5]. 내가 낮에 자신 있게 수련생의 ‘잘못’을 시정하고 있었을 때, 나는 이미 동요의 위험에 처했던 것인데,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다. 수련생의 문제를 발견하고 일깨워주지 말라는 것이 아니며, 마땅히 정념으로 자신을 닦고 사람 마음을 지니지 말고 선의로 일깨워주어야 한다. 정념을 유지한 상태에서 수련생을 일깨워주면 효과가 더욱 좋을 것이다.

두 번째 문제: 나는 왜 A가 제고하기를 다급히 바랐을까?

최근 접촉하는 수련생들에게서 각종 일로 어쩔 수 없어하며 한탄하는 소리를 듣는다. 일부 수련생은 최근 몇 년간 줄곧 해이해졌는데, 그들이 무기력해진 것은 거의 예상했던 것 같다. 하지만 A는 줄곧 세 가지 일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깊이 파봤더니, 나는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수련생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고 있었다. 누가 정념이 강하면 그와 상의하고, 누가 사람 마음이 많으면 의지하지 않고, 어느 수련생을 돕는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면 조심했다. 입으로는 여전히 사부님의 법 “대법제자는 정체(整體)이거니”[6]를 외우고 있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간세상의 협애한 처세 경험으로 수련생의 예전 모습을 가늠했다. 이것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확고히 믿지 않는 표현이 아닌가? 이것도 일종의 동요(법에 용해되지 못함)가 아닌가?

또 깊이 파보니 기세등등하게 일하는 마음, 명성을 구하는 마음, 의지하는 마음, 번거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 순조로움을 즐기는 마음이 숨어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세 번째 문제: 나는 어떤 방식으로 A의 제고에 ‘도움’을 준 것인가?

나는 수련생의 감당능력을 망각했다. 수련생이 빨리 제고하기 바랐다. 사실 자신도 똑같이 어서 제고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제고 여부를 측정하는 표준으로 삼은 것은 도리어 세간의 겉모양이었다. 연공을 마치니 온몸이 가벼운지? 기색은 어떤지? 심태는? 말투는? 때로는 심지어 진상을 알릴 때 상대의 눈빛에도 나는 마음이 움직였다. 때로는 세 가지 일의 효과가 인간세상에서 즉시 나타나길 집착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 “하여도 구하지 않으니 늘 도(道) 중에 있도다”[7]에 위배됐다. 이 역시 사부님께서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1]라고 하신 법에 대해, 내게 일정 정도 견정하지 못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사실, 내 느낌 내 인식에 대한 집착은 수련 중의 큰 금기이다. 사부님께서는 한 사람이 눈이 가려진 채로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은 이야기를 말씀하신 바 있다. 나는 이제야 이런 이해가 생겼다. 인간세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은, 수련인에 대해서는 그 이야기 속의 눈이 가려진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눈은 원래 좋은데 단지 가려졌을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제자에게 지혜를 열어준다고 하셨는데 마치 끊임없이 제자의 눈을 밝게 닦아주시는 것 같다. 수련하는 하나의 생명으로서 그것들이 내 눈을 가리고 마음대로 하게 할 것인가, 사부님의 가호로 점점 “지혜를 밝혀 미혹되지 않음”[8]을 할 것인가?

어떤 수련생은 수련 중에서 점점 신심을 잃어가고 있다. 아마 그것은 표면 현상에서 초래된 느낌을 너무 중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인데, 자신의 눈을 가리는 데 동의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우리는 진정한 연공인(煉功人)으로서 마땅히 아주 높은 층차에서 문제를 보아야 하며 속인의 관점으로 문제를 보아서는 안 된다”[1] “왜냐하면 공의 연화(演化) 과정은 극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각은 아무것도 아니며, 감각에 의거해 수련해서는 안 된다.”[1]

그러므로, 막다른 지경에 이르건 유암화명(柳暗花明)이건, 우리 이 육신이 현재 무엇을 체험하고 느끼건, 우리가 인간세상에서 무엇에 직면하건, 그것은 단지 수련 길에서의 풍경일 뿐이다. 우리의 발아래서 하늘로 통하는 큰길은 사부님께서 일찍이 깔아놓으셨기 때문에, 눈을 가로막는 가상에 속아서는 안 되고 노정을 지체해서도 안 되며, 또는 신심을 잃어서도 안 된다.

개인의 층차에 한계가 있으므로 편파적인 인식을 면하기 어렵다. 좋은 의견을 듣기 위해 미숙하나마 먼저 의견을 냈다. 수련생들과 함께 노력하고자 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시간과의 대화(和時間的對話)’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재인식(再認識)’
[4]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15년 뉴욕법회설법’
[5]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3-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6]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3-조사(助師)’
[7]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도(道) 중에서’
[8]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견정(堅定)’

 

원문발표: 2018년 7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7/23/37143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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