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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얻은 소년이 장성(長成)하다

글/ 산둥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올해 32살인 청년 대법제자입니다. 14살에 법을 얻고 17살에 납치를 당했으며 이후 6년간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23살에 12년의 억울한 판결을 받고 8년간 불법 감금을 당한 후 2017년에야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행히 대법을 만나 대법의 신기함을 보다

저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았습니다. 1998년 초에 병에 걸려 매일 진(鎮)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었지만, 점점 더 심해져 마지막에는 약을 먹으면 토했습니다. 주사를 맞으면 약냄새가 올라와 괴로웠고 무슨 병인지 알아내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의사는 여기서 치료할 수 없으니 현(縣) 병원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병원에서 집으로 온 날 저녁에 큰 눈이 내렸습니다. 저는 밤새 괴로웠고 이튿날에는 기운이 없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삼륜차에 들어서 태우고 현 병원으로 갔습니다. 현 병원은 외가와 몇 백 미터 떨어져 있는 곳이라, 우리는 외가로 먼저 가서 외삼촌에게 아는 사람을 찾아 달라고 한 다음 다시 병원에 가려고 했습니다. 외가에 가니 큰 외삼촌은 둘째 외삼촌 집에 하우스의 눈을 치워주러 가고 없었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저를 침대에 들어 올리고 누워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 후 외할머니는 파룬궁 이야기를 했습니다. 계속 들으면서 저는 머리가 명석해지고 온몸에 힘이 생겨, 침대에서 내려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놀라서 어디 가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사촌 형들을 찾아가 같이 놀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을 놓지 못해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점심에 큰 외삼촌이 돌아오자마자 저를 데리고 현 병원으로 가서 검사하니 아무 병도 없다고 나왔습니다. 사실 외삼촌이 오기 전에 저는 이미 온몸이 가벼워져, 어른들에게 다 나았으니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어른들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검사하러 온 것입니다.

그 후 저는 외가에 며칠 머물며 법공부와 연공을 따라한 후 ‘전법륜’을 갖고 집에 가서 법공부하고 수련했습니다.

교란을 돌파하고 법공부를 견지

저는 법을 얻을 당시 중학교 2학년이라 학업이 바빴습니다. 새벽 5시에 학교를 가서 저녁 8~9시에 하교를 해 낮에는 내내 학교에 있었습니다. 법공부를 할 시간이 없어 하교 후 법공부를 몇 개 소제목만 했습니다. 배운 것이 많지 않고, 나이가 어려 법에 대해 이해가 깊지 않았습니다. 법공부를 하라고 독촉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저는 그래도 매일 법공부를 견지했습니다.

법을 얻은 1년 후 겨울방학 때, 우리 지역에서는 어린이 대법지도반을 열어 설을 지나 함께 집중적으로 법공부와 연공을 했습니다. 그때 7살부터 12살까지 수십 명이 참가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학습반은 처음 참가했습니다. 설 전에, 시에 어린이 지도반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수련하지 않고, 어머니는 막 법을 얻어 제가 참가하는 것을 반대해 가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현지에서 연 이번 학습 기회가 매우 소중했습니다.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개학했습니다. 개학 후 일요일만 되면 같이 모여서 법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한동안 배우고 나니 참석하는 학생이 없어 결국 해산했습니다. 저는 마지막 해산 전까지 견지한 학생이었습니다.

당시 중학교 3학년 2학기라 몇 달만 있으면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있었지만 저는 그래도 매일 저녁에 집에 가면 법공부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수련을 하지 않아 제게 시간과 에너지를 법공부에 쓰지 말고 시험에만 몰두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창문을 가리고 아버지가 제 방에 불빛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한 다음, 계속 법공부를 했습니다. 박해가 시작된 후에도 저는 이렇게 견지했습니다.

저녁에 법공부할 때 곤마의 교란을 받아 너무 졸리면 일어나서 하고, 용감하게 곤마의 교란을 돌파해야 한다고 자신을 격려하며, 의식적으로 자신의 수련 의지를 연마시켰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법공부에 직면한 고험은 작지 않았습니다. 겨울방학, 여름방학 기간에 법공부를 하려 하면 골목에서 또래들이 찾아와 같이 놀자고 했습니다. 친구들과 카드놀이를 하지 않으면 우리 집 앞에서 했습니다. 제가 집에서 법공부하면 친구들은 우리 집 앞에서 큰소리로 카드놀이를 했는데, 저는 놀고 싶은 유혹에 못 이겨 책을 내려놓고 나가서 구경하고, 구경하다가 같이 놀곤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시간에는 유혹을 참고 법공부하며 나가 놀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법공부 해 다져놓은 기초가 있어 이후 조사정법의 길에서 침착하고 확고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소년제자가 대법에서 착실히 수련

법을 얻은 반년 후 하루는 학교 점심시간에 잠을 자는데 꿈에서 난간이 없는 5층 계단에서 떨어졌는데 안정적으로 땅에 착지했습니다. 두렵지 않았지만 단번에 꿈에서 깼습니다.

법을 얻은 후 문제에 부딪히면 저는 대법으로 대조합니다. 맞게 깨달으면 사부님께서는 저를 도와주십니다. 한번은 제가 아버지와 외지에 물건을 실으러 갔는데, 부근의 물가에서 물고기 몇 마리를 잡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차가 급정차를 해 물과 고기가 다 쏟아져 나왔고 고기도 죽었습니다. 잠시 후 저는 갑자기 배가 아팠습니다. 살생을 해 업을 지은 겁니다. 깨달으니 잠시 후 아프지 않았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사부님은 각종 기회를 이용해 저의 심성을 연마시켰습니다. 한번은 학교 점심 휴식시간에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수업을 받으러 갔습니다. 생물수업이었는데 선생님이 질문을 하시며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제대로 듣지 못해 바보같이 계속 서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반 학생들 앞에서 온갖 수모를 다 주었습니다. 저는 ‘내가 뭘 하지도 않았는데, 문제를 대답하지 못한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수모를 줄 것 있나.’라고 마음속으로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이라 속인과 같으면 안 되므로 참아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대법이 박해당할 때 고등학교 입시 1년 전이라 학업량이 많아 압력이 컸습니다. 다른 공간의 사악이 눌려 들어와 우리 공간에 가득 찼습니다. 그때 위성으로 찍은 지구 사진이 있었는데, 전체 지구가 마치 사탄의 얼굴 같았습니다. 저는 다른 공간의 사악을 보지 못하지만 압력을 느낄 수 있었는데 자주 머리가 흐리멍덩했습니다. 저녁에 집에 가서 법공부를 견지하며 가끔 어머니를 따라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본래 성적이 평범했던 저는 고등학교에 순조롭게 들어갔습니다.

고등학교는 집과 멀리 떨어져 있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공부가 힘들어 시간이 없어 장시간 법공부를 하지 못했지만, 항상 법공부 할 수 있기를 갈망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저는 필사한 ‘홍음’을 학교에 가져가서 읽고 외웠습니다. 여름 방학이 되어 저는 어머니의 대법서적 박스를 찾아, 사부님의 모든 설법을 다 읽었습니다. 특히 99년 7·20이후에 발표한 ‘도항’ 등 대법서적은 저를 깨어나게 했고,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대열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저는 학교를 다니며 차를 타는 기회에 자료를 배포하고, 학교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교실마다 자료를 배포하며, 학우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시간을 내어 연공하며 ‘설법’을 지니고 다니며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학업량이 너무 많아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수업하고 공부하는 시간으로 꽉 차 있어 자습시간을 이용하거나 시간을 짜내야했습니다.

저는 이과에 다녔습니다. 매주 문과수업이 있는데 마지막 시험에 합격만 하면 되어 학생들이 중시하지 않아, 문과 수업이 있는 날에는 학생들은 다른 책을 보거나 다른 것을 했습니다. 한번은 정치과 수업 때 제가 대법책을 보다가 너무 몰두해 선생님이 앞에 온 것도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무슨 책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얼른 책을 서랍에 넣고 잠갔습니다. 선생님이 꺼내라고 했는데 제가 꺼내지 않아 결국 선생님에게 교실 밖으로 쫓겨나 수업이 끝날 때까지 서있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다음날 교무실로 한번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이튿날에 제가 가니 선생님이 계시지 않아 저는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더는 선생님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이나 혹은 저를 봐도 아무 일 없는 듯이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저를 보호해주어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한 번은 자습시간에 법공부를 하다가 담임선생님이 앞에 오신 것도 모르고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대법책을 보는 것을 보고 “왜 이런 책을 보느냐?”라고 말씀하시고 책을 가져갔습니다. 당시 가장 엄중한 박해시기라 대법책을 본 많은 학생이 퇴학당해 저는 압력이 컸습니다. 저는 평소 학생이 없는 4층에 가서 발정념을 했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밥도 먹지 않고 식사시간을 이용해 발정념하고 선생님 배후의 사악난귀를 제거했습니다. 며칠간 법공부, 발정념하고 자신의 상태를 조절한 후 저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드릴 말씀이 있으니 시간을 내어달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당직 서는 날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이 당직 서는 날이 되자 저를 교실 밖 복도로 불러내 먼저 말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관지염, 천식을 고치려고 사방으로 다녀보고 치료해도 낫지 않았지만, 파룬궁을 수련한 후 치료도 받지 않고 나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수련 전후의 심신변화와 기타 파룬궁 진상을 알렸습니다. 선생님은 마침내 파룬궁을 인정하며 학교에 보고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사부님께서 자비롭게 보호해주시어, 위험한 상태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유랑생활 중 중생구도를 잊지 않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인 17살 때 저는 조퇴를 하고 수련생의 집을 지나가다가 들렀습니다. 그녀의 집에는 사복 경찰이 감시하고 있었는데 저를 잡아 파출소에 가두었습니다. 한 경찰이 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창문 등 나갈 수 있는 곳이 있는지 살폈습니다. 없었습니다. 나가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배가 아팠습니다. 저를 지키는 경찰에게 배가 아파 화장실을 가겠다고 하니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창문이 우리학교 복도에 있는 창문이랑 똑같았습니다. 보기에는 단단하지만 기술만 있으면 바로 열기가 쉬운 구조였습니다. 그때 배가 아프지 않아, 저는 사부님이 이런 가상을 연화해 저를 가게 한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창문을 만지니 소리가 나서 경찰이 들어와 봤지만 제가 있으니 나갔습니다. 저는 천천히 창문을 열고 사람 몸이 나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기어 올라가서 창문으로 뛰어내렸습니다. 뛰어내리고 보니 오른쪽 멀지 않은 곳에 파출소 정문이 있었고 왼쪽에는 2미터 넘는 높은 담이 있었습니다. 담을 넘어 가야겠다고 생각하니 2미터 넘는 담을 단번에 올라갔습니다. 담에는 유리조각이 박혀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올라간 후 손과 다른 곳이 찔렸는데도 아프지 않고 손이 조금 벗겨졌는데 피도 나지 않았습니다. 담을 넘어 나간 후 저의 유랑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막 18살이 된 제게 부딪힌 가장 큰 관은 고독과 적막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단체 생활을 하던 습관이 있어 갑자기 이런 고독한 생활에 빠지니 뼛속까지 괴로웠습니다. 한동안 법공부를 통해 조정을 거쳐서야 이런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집을 떠난 후 저는 각 자료점의 컴퓨터 설치, 프린터 수리 등 기술 일을 책임졌습니다. 이 항목은 나이가 있는 수련생은 감히 들어서지 못하는 영역이지만, 저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대법이 있고 사부님이 계시고 게다가 제가 젊어 아주 빨리 잘할 수 있어 대형 자료점의 기술 일을 책임질 수 있었습니다. 2년 동안 저는 다른 현 자료점에 가서 도와주고, 다른 현에서 오랜 시간 머물기도 했습니다. 6년간 저는 이 과정에서 많은 심성연마와 제고가 있었습니다. 6년간의 유랑생활이 고달프기는 했지만 전 우주의 생명이 모두 부러워하는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되어, 이 특수한 시기에 조사정법, 중생구도와 사전 서약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8년의 억울한 옥살이에 뜻을 굽히지 않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명분을 빌어 다시 한 번 미친 듯한 박해가 시작돼 많은 대법제자가 잡히고 감옥에 감금당했습니다. 구치소에 감금되기 전에는 ‘전법륜’과 각지 설법을 보기만 하고 외우지 않아, 불법 감금된 후 법공부를 하지 못하는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각종 고문까지 더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여러 번 나타났고, 마지막에는 서 있을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 결국 버텨냈습니다. 저는 기술이 있기에 중범으로 다뤄져 억울하게 12년을 판결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힌 후 법을 갈망하는 심정이 갈수록 강해졌습니다. 사부님이 아셨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설법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법을 얻은 그 순간의 심정은 정말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단숨에 외웠는데 이것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설법을 외운 후 9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외울 수 있습니다. 다른 수련생들도 이런 특수한 환경에서는 저와 같은 법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을 텐데, 다른 수련생들이 사부님의 설법을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사부님은 저를 다른 수감자들이 돈을 쓰고도 들어가기 어려운 곳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 자리는 감옥에 갇힌 모든 수련생을 접촉할 수 있는 자리여서, 수련생들에게 신경문을 전달하기가 아주 편리했습니다. 저는 사부님이 저를 이곳으로 배치해 주신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저는 수련생들과 협조해 사부님의 신경문을 다른 수련생들이 모두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감옥 안은 형세가 위험할 때도 있고 경문 전달도 어려울 때가 있지만, 제가 하려고 하니 사부님께서는 아주 잘 배치해 주셨습니다. 경문을 전달할 때 사람 마음의 집착이 있고 두려운 마음과 압력이 있었지만, 할 때마다 시시각각 사부님의 자비와 보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유를 잃은 나날에 수련생이 사부님의 신경문을 갈망하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석방된 후 저는 여전히 각종 수단을 통해 감옥 안으로 사부님의 최신설법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매일 법 암송을 견지하고 기회만 있으면 연공하고 진상을 알리며 3퇴를 권했습니다. 특별히 고밀도 발정념을 중시했습니다. 첫째는 사부님께서 감옥은 사악이 집결한 검은 소굴이라 말씀하신 적이 있어, 우리가 기왕에 왔다면 마음을 집중해 발정념해서 사악을 청리하고자 했습니다. 둘째는 감옥 밖에 있는 수련생을 협조해 악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옥 안에 갇혀있는 수련생들의 박해를 감소시키기 위해 밖에 있는 수련생들은 늘 감옥 안의 수련생들을 위해 발정념을 합니다. 어떤 수련생은 수백 리 길을 달려와 감옥 부근에 가서 근거리 발정념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몇 년간 저는 감옥에서 매일 법 암송, 고밀도 발정념을 중시해, 생활이 아주 충실했고, 시간이 모자란다고 느꼈으며 자신이 집착심이 있을 때만 고생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정법의 물결로 들어서다

감옥에서 나온 후 마음이 느슨해져 첫 며칠은 연공하기 위해 일어나기도 싫고 법공부도 느슨해졌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제게 일어나라고 점화해주시어 연공시간이 되면 깨어서, 누워 있으면 괴로웠고 일어나 연공하면 괴롭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매일 연공을 견지했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가족이 급하게 일자리를 찾지 말고 마음을 우선 안정시키라며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시간을 이용해 대량으로 단체법공부에 참가하며 상태를 조절했습니다. 운전연습에는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기점을 바로 잡은 후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항목마다 순조롭게 통과했습니다. “물론 수련이라, 당신이 오로지 수련인이라면 당신이 한 모든 일은 모두 수련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데, 실은 역시 바로 당신 수련의 길이다. 당신이 한 모든 일은 모두 당신 수련의 이 한 갈래 길에 녹아 있다. 당신이 사회의 일 중에 있든 아니면 대법의 항목 중에 있든 또는 평상시의 생활 중이든 모두 당신의 수련에 관통되어 있는데, 반드시 이러하다.”[1]

감옥에서 나온 후 가장 큰 제고는 단체법공부에 참가한 것입니다. 처음 단체법공부에 참가하니 좋지 않은 사상이 끊임없이 밖으로 나와 단체법공부에 참가하러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방금 갔을 때는 법을 유창하게 읽지 못했고 읽을 때 사상교란도 컸으며 졸려서 눈을 뜨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의식이 반드시 강해야 한다고 자신에게 요구해 아주 빨리 법공부하면 졸리는 관을 돌파했습니다. 매번 법공부가 끝나고 갈 때면 머리가 명석하고 몸도 가벼웠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조절을 거쳐 다시 단체 법공부에 가니 이런 사상교란이 없어졌습니다. 법공부가 끝나고 수련생들의 교류에서도 크게 제고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정법노정을 따라가지 못해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단체법공부 교류환경은 사부님께서 남겨주신 수련형식이라, 확실히 우리의 수련 제고에 큰 도움이 있습니다.

맺음말

마음을 조용히 하고 그동안 걸어온 수련의 길을 생각해보니 많은 때에 수련을 엄숙하게 대하지 못하고 느슨히 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그러나 당신 생명의 매분, 매초가 모두 수련 중에 있는데, 당신은 자신을 낭비하고 있고, 당신 수련의 이 한 갈래 길에서 한정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며 자신의 길을 잘 걷지 못하였다.”[1] “사실 수련에서 정진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데, 자신이 느슨하기만 하면 속인의 마음에 이끌리게 되고, 굽은 길을 걷게 되며,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리는 중에서 서로 협력이 부족하게 된다.”[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법의 최후 시각에 일사, 일념도 아주 중요합니다. 저는 지난날을 소중히 여기고 이후의 수련 길을 잘 걸어 사부님의 자비로운 구도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사부님께 큰 절을 올립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5년 뉴욕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09년 대뉴욕국제법회설법’

 

원문발표: 2018년 6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8/6/21/3700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