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1994년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가 교사가 되었습니다. 집은 현 정부 소재지에 있었고, 직위가 낮고 월급이 적어 이 일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늘 사회에 나가 도전해보고 싶었기에 1년 넘게 출근하지 않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속고 속이고 빼앗고, 후흑학(厚黑學, 뻔뻔하고 마음이 음흉함) 같은 모습 등을 보면서 놀라 다시 교편을 잡았습니다.
1998년 말, 동료는 저에게 기공잡지 한 권을 주면서 안에 파룬궁 수련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기공이라면 모두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것인데 왜 연마를 못하게 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내 회사에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전법륜’ 한 권을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현대 관념의 영향을 받아 첫날에는 간단히 한번 훑어보았고 이튿날 저녁에야 자세히 읽어보았습니다. 보면서 눈물을 흘렸고 제가 기다리던 것이 바로 이 대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섰습니다.
직장에서 저는 진∙선∙인(眞∙善∙忍) 표준에 따라 자신을 엄격히 요구했습니다. 장쩌민 건달집단이 대법을 박해한 후인 2001년에 저는 반년 넘게 불법적으로 감금당했습니다. 이후 줄곧 학교에서 주방업무만 시켰습니다. 저는 근면성실하게 일하고, 욕심내거나 탐하지 않았기에 상사와 동료들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식당을 관리하는 동료가 1년 넘게 병으로 휴가를 내자 상사는 저에게 식당을 대신 관리하라고 했습니다. 후에 주방주임도 다른 곳에 전근을 가자 혼자 주방을 책임졌고 일이 있으면 직접 교장을 찾아갔습니다.
우리 학교는 교사와 학생이 총 340~350명 정도가 됩니다. 제가 식당을 관리하게 된 첫 학기에 장부에 2만여 위안(한화 334만원)이 있었고 방금 일을 시작했기에 어떻게 할 지 몰랐습니다. 학기말에 방학이 되자 책임자는 저를 불러 장부에 남은 돈으로 각 식당과 매점을 다니며 결산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2만여 위안이 없어졌습니다.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자 한 동료는 “학생들이 식비를 많이 내는데 왜 먹는 건 이렇게 형편없죠? 돈은 다 어디로 갔나요?”라고 따졌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이건 상사가 제 손을 통해 형식을 바꾸어 학생들의 돈을 가져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학생들 입에서 돈을 빼앗아내는 이런 일을 연공인인 제가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조리사와 의논해 어떻게 이번 학기에 학생들을 배불리 잘 먹이고, 건성으로 대하지 않으며, 학부형들이 뒤에서 험담하지 않게 할지를 의논했습니다. 우리는 식단을 정하고 날마다 반찬 두 가지를 만들었습니다. 더는 배추 감자 찜이 아니었고, 날마다 고기도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300여 명이 한 끼에 고기를 3.5kg~4kg 먹었지만 지금은 한 끼에 가장 많이는 30kg까지 먹일 수 있었습니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에 닭고기를 삶지 않으면 훙사우러우(紅燒肉)를 삶았습니다. 또한 가끔 제가 직접 주방에 내려가 훙사우러우를 삶기도 했습니다. 수련을 한 후 머리가 총명해져 뭐든지 한 번만 보면 해낼 수 있었습니다. 식당에는 주방장 1명과 보조 4명이 있었는데 다들 파룬따파 진상을 명백히 알고 있었고 저와 함께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제철 채소가 나오면 저는 직접 가서 구매했습니다. 점심 때 동료들은 더는 밖의 식당에서 주문하거나 나가 먹지 않았습니다. 가끔 교육청에 회의하러 가거나 다른 학교에 연구하러 갔을 때 그쪽에서 점심을 주었지만 모두 먹지 않고 일부러 돌아와 학교 식당에서 먹었습니다. 학생들은 더욱더 잘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학급마다 몇 명 소수민족 학생들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는 외에 모두 식당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몇 명 체격이 좋은 학생들은 더욱더 잘 먹었는데 남은 야챗국으로 밥까지 말아 먹을 정도였습니다. 주방장과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촌민은 한 학부모를 찾아와 “당신들 학교에서는 날마다 무슨 음식을 그렇게 맛있게 하나요? 애들이 집에서 아침, 저녁을 먹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만든 반찬과 국이 집에서 한 것보다 더 맛있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동료들은 저에게 “당신이 이렇게 잘하면 예산이 부족하지 않나요? 그럼 나중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럼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기에 반드시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예산은 모자라지 않았지만 별로 남지도 않아 다음 학기 초 장부에 1천여 위안(한화 16만원)이 남은 것을 보고 상사도 더 이상 어디 가서 결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병 때문에 휴가를 낸 동료가 돌아왔고 학교 상사도 바뀌어 저도 더 이상 식당을 관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은 저를 보면 예전에 제가 식당을 관리하던 때가 그립다고 얘기합니다. 그럼 저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세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진상을 명백히 안 가족이 복을 받다
여동생과 매부는 결혼 한지 3년이 넘었을 때 우리 집에 왔습니다. 매부는 집이 지린에 있었는데 직장이 없어 이곳에서 자그마한 장사를 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4년 동안 있었고 저는 그들을 아주 잘 대해주었습니다. 각 방면에서 도와주고 늘 그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렸으며, 밍후이 간행물을 보라고 주었습니다. 그들은 파룬궁이 모함을 당했으며, TV에서 선전하는 것들이 모두 거짓이며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습니다. 여동생은 결혼한 지 7년이 됐지만 여전히 아이가 없었습니다. 선양의 크고 작은 병원을 다니며 치료했지만 치료하지 못해 늘 약을 달고 살았습니다. 이미 34~35살이 돼서 시부모님은 조급해 병까지 날 정도였고, 2~3개월에 한 번씩 그들에게 약을 사서 부쳐주었습니다. 어느 날 매부는 저에게 “형님, 제가 어제 버스를 탈 때 누군가 파룬궁에 대해 나쁜 말을 했습니다. 당시 제가 그에게 파룬궁을 수련하냐고 묻자 그는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계속해 그에게 가족 친척이나 친구가 수련하냐고 물었는데 그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파룬궁에 대해 잘 모르면 함부로 얘기하지 말고, 잘 알아본 후 말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잘 했다고 자신을 칭찬해 주며 제가 그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한 달 좀 넘는 사이에 여동생은 임신했고, 시어머니는 기쁜 나머지 병도 나아 여동생 부부를 고향으로 데려갔습니다. 우리 여기에서 산 아파트를 팔면서 5~6만 위안(한화 1,000만원)을 이익 봤고, 매부 또한 아주 좋은 직장을 찾기도 했습니다. 후에 여동생은 건강하고 튼튼한 남자아이를 낳았고 포동포동 살찐 것이 아주 복되게 생겼습니다. 정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인이 그에 부합할 수 있으면 진정 좋은 사람이며 동시에 선보(善報)와 수복[福壽]이 따를 것이다.”[1]라는 말씀이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 가족은 진상을 명백히 알아 복을 받은 것입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논어’
원문발표: 2018년 6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6/24/3701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