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5년에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처음 접했지만 진정하게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 2016년 나의 생명이 절망에 빠졌을 때 대법은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나는 온갖 곡절을 다 겪고 마침내 확고하게 반본귀진(返本歸真) 수련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1. 대법과 인연을 맺다
1994년 12월, 내가 28살 때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바로 지금의 아내다.
그녀와 몇번 데이트를 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산재로 인한 추간판 탈출증으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치료 방법이 없었는데 파룬따파(法輪大法) 사부님의 설법을 한 번 듣자 곧 바로 좋아졌다고 했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경추질환으로 왼쪽 팔이 위축되었는데 한 달 동안 연공을 하고 마찬가지로 회복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도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다며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나에게 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책을 읽어 보니 모두 수불수도(修佛修道)의 이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너무 좋아서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산에 올라가 수도(修道)하려는 소망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잊혀져갔다는 것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속 기억을 불러 일으켰고 이로 인해 나는 대법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여자 친구는 법 공부와 홍법 그리고 교류, 만 명 정도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공 및 서화(書畫) 전시회에 참가했다. 나도 같이 다니면서 대법을 수련하여 기사회생(起死回生)한 수많은 사람들과 일들을 알게 되었고 대법의 아름다움과 훌륭함은 내 마음 속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96년에 우리는 결혼했고 1998년에 사랑스러운 딸을 갖게 되었으며 비록 부유하지 않고 단촐한 살림 이었지만 화기애애했다.
2. 시련을 겪다
1999년 ‘7.20’ 장쩌민(江澤民)이 질투와 원한을 풀기 위해 천지를 뒤덮는 광적인 파룬궁 탄압을 했다. 7월 25일 장인과 장모는 핍박에 못 이겨 박해를 피하기 위해 집을 나와 다른 곳으로 갔다. 큰 동생 집은 한 차례 조사를 받았고 작은 동생은 몇몇 경찰이 집에서 못나가게 해 일을 하지 못했다. 처갓집 마룻바닥은 전부 뜯기고 뒤집혀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친척들 집도 모두 발칵 뒤집혔다. 공안국과 국내안정 보위국에서 우리 세 식구도 불법으로 붙잡아갔다. 아이는 먹을 젖이 없었고 나도 침대에 수갑이 채워진 채로 하룻밤을 지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장인장모 두 어르신의 행방을 말하라고 협박했다.
10일 후, 장인과 장모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을 알고 스스로 공안 분국으로 찾아갔다.
그 당시 처갓집은 1층에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전부 대법과 사부님에 대해 헛소문을 날조하여 비방하는 프로그램만 방영했고 대형 스피커를 처갓집 입구를 향해 자주 틀어놓았다. 아내는 늘 아이를 안고 울고 있었는데 나는 가슴이 답답하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내는 줄곧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고 싶어 했는데 나는 단번에 승낙했다. 10월에 기차표를 샀다가 일이 생겨 가지 못하고 티켓을 환불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또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불을 젖히고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은 베이징으로 청원하러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거야.” 1999년 12월 24일 작고 여윈 아내는 백팩을 메고 집 문을 나섰다. 이 일은 길흉을 예측할 수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솜옷을 입혀주는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복만 입은 딸을 품에 안고 논보라 속으로 달려가 집에 남아 있는 몇 백 위안의 돈을 아내에게 쥐어 주었다.
2000년 설날에 나는 처갓집에 누워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내가 이처럼 집과 가족을 잃은 것은 파룬궁 때문이 아닐까?” 장인이 말씀하셨습니다. “파룬궁(法輪功)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게 하고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주는데 공산당이 좋은 사람을 박해하는 거라네.” 당시에 나는 가슴이 억눌려 답답하고 막막했다.
아내는 베이징에서 불법 수감되어 돌아온 후 구치소에 구금되었다. 나는 아내가 부실한 식사에 시달리는 것이 걱정되어 구치소에 가서 아내 앞으로 200위안(약 3만3천원)을 맡겨두었다. 15일 후 파출소 경찰은 나에게 아내를 데려가라고 통지했다. 경찰차에서 경찰관은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내가 계속 돌아다니는지 한 번 보자며 나더러 아내의 다리를 부러뜨리라고 했다. 아내는 오는 도중 줄곧 경찰차에서 그녀가 예전에 어떻게 좋지 않았는지를 이야기 했다. 사부님께서는 연공인들로 하여금 안을 향해 자신을 찾도록 하였고 밖을 향해 타인을 보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아내는 내가 담배를 피우고 마작을 놀아서 늘 싸웠으며 연공인의 표준으로 나를 가늠했는데 이것은 사부님의 대법에 부합하지 않으며 이후부터 다시는 나와 싸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는 아내가 무사히 되돌아 온 것을 보고 마음속 돌덩이 하나를 내려놓은 듯이 큰 근심이 사라졌다. 게다가 아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자 나는 곧 아내의 말을 이어 받아 말했다. “좋아요, 당신은 정말로 제고되었어요. 우리 다음에도 가요!” 아내는 경찰관에게 또 장인과 장모가 병이 있었을 때의 고통과 집안의 어려운 처지와 더불어 대법을 수련하여 신체가 기적적으로 건강하게 회복된 경과를 이야기했다. 이처럼 좋은 대법과 사부님께서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셨는데 제가 수수방관할 수 있는가요?!
차 안에 있던 경찰서장과 관할 구역 인민경찰관들은 모두 감동 받아 아내가 파출소로 가서 각서를 쓰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였고 직접 아내를 우리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장모님께 전화를 걸어 아내가 집으로 돌아 왔다고 말씀드렸다. 장모님은 수화기를 딸에게 넘겨주었다. 그쪽에서 “아빠”하고 앳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의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리 두 사람은 잠시 후 장모님 댁에 맡겨 기르던 딸을 데리러 갔다.
2003년 새해가 될 무렵, 장인과 장모님은 기차를 타고 대법과 사부님을 위해 청원하러 갔다가 불법적으로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두 분께서는 단식 항의를 했고 정월 초나흗날 파출소에서 두 분을 데려가라고 전화가 와 나와 아내는 파출소에 갔다. 한 여자 경찰관이 말했다. “저 두 분이 각서를 쓰지 않으면 풀어 줄 수 없어요. 나는 안 믿어요. 당신 집 사람들을 저기에 한 줄로 무릎 꿇게 만들어도 저분들이 안 쓰겠어요?” 아내가 말했다. “저도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에요. 저도 베이징으로 가서 청원을 해본 적이 있어요.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해요. 대법이 없었다면 우리 어머니가 어떻게 됐을지도 아무도 몰라요! 이 각서를 저는 못 씁니다. 우리는 부모님을 데려가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런 부모님이 계셔서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는 가겠습니다!” 아내는 말하면서 나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입구에 이르렀을 때 경찰관이 소리쳤다. “당신들은 가지 말아요.” 또 위층을 향해 크게 외쳤다. “얼른 그들을 풀어서 내려 보내요.” 우리가 고개를 들어 계단 쪽을 바라보니 두 노인이 조금도 쇠약해진 모습 없이 큰 걸음으로 빠르게 계단을 걸어내려 오고 있었다. 우리는 순조롭게 두 노인을 집으로 모셔왔다.
2000년 베이징에서 두 차례의 회의가 열렸고 아내는 딸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가서 청원 편지를 제출하고 싶어 했다. 나는 당신을 가로막지 않겠으니 가고 싶으면 가라고 했다. 나는 3월 3일 4시 근무였는데 가슴이 억눌려 미치도록 답답하여 휴가를 신청한 다음 몸을 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곧 침대 위에 누워 반복해서 말했다. “모두 가버리네. 모두 나를 원하지 않아.”
아내는 호박처럼 옷을 입힌 딸을 안고 집 문을 나섰다. 나는 비틀거리며 밖에까지 쫓아나가 배웅하며 모녀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5일 날 공안 분국에서 가서 딸을 데려가라는 통지를 받았다. 나는 아내에게 줄 짐을 내려놓고 두 살이 채 안되어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안았는데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이었다. 공안 분국을 나오려는데 경찰관은 700위안(약 11만 7천원)의 벌금을 내라고 말했다. 아내는 자신이 법을 어기지 않았으며 청원을 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이기 때문에 갔다올 수도 있는데 그들이 불법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므로 재물을 강요하는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아내가 결단성 있고 단호히 말하는 모습을 보고 딸을 안고 공안 분국을 나왔다.
3월 20일, 경찰관은 직접 경찰차로 나와 아내 그리고 아내의 직장 주임을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2000년 4월, 6월, 경찰관은 아내를 파출소에 불법적으로 체포해갔다. 그녀에게 ‘연공을 하지 않고, 베이징으로 가지 않는다(不煉功、不進京)’는 각서를 쓰도록 강요했는데 아내가 쓰지 않자 경찰관은 바로 아내를 구치소에 보내겠다고 협박했다. 당시에 나는 근무 중이었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어쩔 수 없이 파출소에 가서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다. 아내는 번갈아가며 그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이야기해주었고, 장인과 장모가 어떻게 수련으로 걸어 들오게 되었는지에 관한 신기한 경력을 알려주었으며 하루 뒤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세인들에게 진상을 명백히 알리기 위해 때론 아이를 처갓집에 맡기고 밖에 나가 진상자료를 붙였다. 겨울밤은 춥고 어두웠기에 나는 아내의 안전이 걱정되어 그녀와 함께 나갔다. 조금 높은 곳에 붙이게 되면 아내에게 “당신은 풀을 발라 내가 할께” 라고 했다. 나는 먼저 벽을 깨끗이 닦은 다음 두 손으로 진상자료를 적합하게 잘 맞춰서 반듯하게 벽에 붙이고 다시 손으로 평평해지도록 눌렀다. 우리는 이렇게 걸으면서 붙였고 붙일수록 더욱 가뿐하고 경쾌했다.
2000년 말 곧 새해가 될 무렵, 경찰관이 집으로 찾아와 무례하게 소란을 피워댔다. 아내가 집에 없자 경찰관은 일이 있으니 아내를 파출소에 보내라고 통지했다. 어디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가게 되면 곧 바로 세뇌반(洗腦班)으로 보내져 박해하겠지요. 우리는 경찰관의 빈번한 교란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집을 이사했고 오늘 날까지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2001년 3월 16일, 장인은 납치되어 구치소에서 한 달 동안 박해를 당한 후 강제적으로 세뇌반으로 보내졌다. 8월, 장인은 박해를 당해 마지막 남은 숨을 고르고 있었고 나는 장인이 걱정되어 자주 면회를 다녔다. 그들은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1천2백 위안(약 20만원)을 협박하여 갈취하고서야 장인을 풀어주었다. 나는 여위어 뼈만 앙상하게 남아 숨결이 미약해진 장인의 모습을 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후 장인은 책을 보면서 법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나흘 만에 곧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대법은 정말로 너무나도 신기하다! 나는 직접 대법의 비범함을 목격했다!
2002년 3월, 대법제자가 텔레비전 방송의 형식으로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린 것 때문에 시 전체에서 5천여 명의 대법제자를 붙잡아갔다. 아내의 직장과 파출소 및 지역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내가 일하는 회사에 찾아와 나를 교란했다. 회사 보위과 부서 사람이 나를 보자 말했다. “당신 아내는 아직도 파룬궁을 하고 있나요? 당신은 그녀가 연공하지 못하도록 해요!” 그리고 또 몇 마디 대법을 비방하는 말도 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파룬궁을 하는 사람이 당신 집 아이를 안고 우물에 뛰어들기라도 했나요? 당신한테 해가 되는 무슨 일이라도 했나요?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당신일이나 잘하세요!” 부서의 사람들도 나를 도와 맞장구를 치면서 가세했다. 그는 일이 신통치 않은 것을 보자 고개를 돌려 가버렸다.
어느 날 지역사회의 몇몇 사람이 회사에 나를 찾아와 말했다. “당신은 아내 회사에 한 번 찾아가 보세요. 당신 아내가 자살하지 않도록 파룬궁을 연마하지 말라고 하세요.”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파룬궁 수련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지만 자살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의 장모님은 파룬궁을 안했더라면 일찍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이때 동료들도 모두 다가와 말했다. “그의 아내가 파룬궁을 연마하는 것이 그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는 일을 잘 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이렇게 늘 찾아와서 무슨 짓인가요? 돌아가서 당신들 일이나 하세요!” 그들은 이 상황과 분위기에 풀이 죽어 고개를 돌려 곧 가버렸다.
한 번은 아내의 회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아내를 찾아 회사에 한번 들르라고 했다. 나는 아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그러면 당신이 그녀를 도와서 ‘연공을 하지 않겠다는 보증서(不煉功的保證書)’에 서명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는 곧 그녀를 해고할거에요.”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이것은 제가 사인할 수 없습니다. 해고의 여부는 당신들의 일입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그들이 나 때문에 늘 이렇게 당신을 찾아 가는 것을 이제 그만 하게 해야겠어요. 당신이 일을 할 수 없잖아요. 그들이 당신을 찾아가지 않도록 우리 이혼해요. 나중에 안정되면 그때 다시 재결합해요.” 나는 말했다. “난 이혼 안 해, 이혼하고 정말로 헤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그들은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할 거야.” 2002년, 회사에서 정말로 아내를 공직에서 해고했다.
3. 진정하게 대법수련으로 걸어 들어오다
2005년 ‘9평 공산당(九評共產黨)’ 발표 이후, 아내는 나에게 삼퇴(三退)를 권했다. 나는 그녀에게 화를 내며 “연공하면 연공하는 것이지 대법 청원을 위해 내가 당신을 가로막지도 않았는데 당신이 이처럼 나더러 공산주의 청년단과 소년선봉대를 탈퇴하라니 이것은 당을 반대하는 거 아냐?” 게다가 그녀가 온종일 쓸데없는 것만 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대법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수련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를 시작한 것 아냐?
나중에 나는 점차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은 사기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9평 공산당(九評共產黨)’ 중의 많은 진실 된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갈수록 많은 중국인들이 사악한 공산당에 의해 잔인하게 해를 입었다고 느꼈다. 그들은 거짓말을 만들어냈고 사람들로 하여금 파룬 불법을 적대시하게 했는데 그 사람들은 사악한 공산당에 의해 불구덩이에 밀어 넣어진 셈 아닌가! 마음속으로 중국인들을 대신해서 정말로 답답함을 느꼈다. 어느 날, 나는 작은 온돌 위에 누워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공산주의 청년단과 소년선봉대에서 탈퇴시켜줘요!” 나는 아내가 나의 가족과 좋은 친구들 그리고 학우와 동료들에게 삼퇴를 해줄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나의 친한 친구의 아내는 줄곧 탈퇴하지 않았는데 아내는 그녀에게 2년 동안이나 진상을 이야기하여 결국에는 그녀가 삼퇴에 동의했다.
2008년 5월 9일 나는 5시에 일어나 오토바이를 타고 동료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가하러 갔다. 가는 도중 길에서 승합차 한 대에 부딪혔는데 새로 산 오토바이는 범퍼가 시멘트 바닥에 깊이 박혀 구멍이 생겼고, 헬멧은 부서졌으며 왼쪽 다리가 바닥에 부딪혔다. 당시 뇌리를 스친 것은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니 아무 일 없다.”였다. 운전기사가 내려와 나를 끌고 병원에 가자고 했는데 나는 말했다. “나는 괜찮아요. 오토바이 연료 탱크에서 연료가 밖으로 흐르고 있으니 나와 같이 먼저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워 주세요.” 나는 천천히 기어 일어나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 당신은 가보세요.”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회사로 갔고 동료들은 모두 나에게 병원에 가보라고 했지만 나는 아무 일 없다고 말했다.
아무 일 없다고 말했지만 집에 돌아와 방안으로 들어오니 왼쪽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내가 말했다. “우리 함께 ‘전법륜(轉法輪)’을 읽어요. 사부님께서 당신을 도와주실 거예요.” 나는 곧 아내와 함께 ‘전법륜(轉法輪)’을 공부했다. 밤에 침대 위에 눕자 왼쪽 다리는 이미 펼 수조차 없어 아내가 다리 아래에 베개 하나를 받쳐주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일어나서 아내와 함께 연공을 했다. 한 세트의 동작을 연공하고는 앉아서 잠시 쉬었다. 힘든 것과 함께 통증이 몰려와 땀이 얼굴에서 흘러내렸으나 나는 여전히 견지해내어 연공을 마쳤다.
이렇게 삼일 째가 되자 땅에 내려와 걷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며 바닥까지 한 번 닦았다. 나는 다리가 좋아진 것을 보자 기쁜 마음에 오토바이를 타고 롄화산(蓮花山)에 올라갔다. 길모퉁이를 돌 때 나는 습관적으로 왼쪽 다리로 착지했는데 다리를 다쳐서 힘을 쓰지 못해 오토바이와 함께 넘어져 왼쪽 다리가 또 한 번 심하게 으스러졌다.
산에는 사람이 매우 적었고 간신히 길을 지나가는 남자를 만나 다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그 남자가 말했다. “미안해요, 형제, 나는 지금 추간판 탈출증으로 힘을 쓸 수 없게 되었어요.” 나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천천히 다리를 빼내어 통증을 참아가면서 어렵게 오토바이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내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았고 아내와 함께 법 공부를 하고 연공을 했다.
5월 6일,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 15주년 기념일에 우리 세 식구를 식사에 초대했다. 나는 말했다. “나는 오늘 술을 안 마시고 음료수를 마실게.” 우리가 모이게 되면 일반적으로 모두 흥이 다하도록 마셔야 하는데 그들은 허락하지 않으며 나보고 반드시 술을 마셔야 한다며 어떠한 이유도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오른 손을 들고 맹세하듯 정중하게 선포했다. “나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해서 술을 안 마셔.” 그들은 말했다. “너 정말로 술을 안 마시려면 그 큰 병에 든 스프라이트를 다 마셔봐.” 그들은 이렇게 하면 내가 따를 줄 알았는데 나는 개의치 않았고 정말로 큰 병에 든 스프라이트 한 병을 다 마셨다.
11일째 되던 날 나의 다리는 다 나았고 정상적으로 출근 할 수 있게 되었다.
2007년은 장인의 칠순 생신이었고 처갓집은 대가족이어서 우리는 큰 호텔을 예약하여 정성을 들여 회의장을 꾸몄다. 무대 위에 2.5미터 높이에 폭 4미터의 배경 그림을 걸어 놓았다. 한 쪽 면은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오염되지 않는 연꽃 그림이었고, 뒷면에는 눈보라 속에서도 고고하게 피어나는 매화꽃 그림이었다. 두 배경은 두 가지의 춤을 위한 배경으로 조명을 비추니 회의장은 특별히 성대하고 장중해보였다. 춤을 추는 사람은 내 딸과 아내의 조카딸이었다. 두 선녀는 회의장을 색다르게 부각시켰다.
생신을 축하해주러 온 친척과 친구들 70, 80명 앞에서 나는 연단에 올라 우선 장인어른께 “하늘보다도 높이 장수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인사를 올린 후 내심으로부터 네 마디의 말을 올렸다. “만고의 기연은 오늘을 위해서이고, 진상을 볼 수 있음은 복덕이 높기 때문이라네, 그대에게 진·선·인(真·善·忍)을 깊이 새길 것을 권유하며, 속세를 한 번 다녀오는 것은 헛되지 않다네.” 이 말을 듣고 장모의 큰언니는 두려워서 두 달 동안이나 장모에게 전화를 하지 못하게 했다. 1999년 장인과 장모를 찾기 위해 경찰은 모든 친척들의 집을 몇 번이나 뒤집었다. 그녀는 연세가 많아 여러 차례의 역대 운동을 겪어왔고 운동의 잔혹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놀란 나머지 감히 우리들과 연락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후에 큰 언니는 농담 삼아 말했다. “당신이 진·선·인(真·善·忍)마저도 말했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전화를 걸 수 있었겠어!”
2009년 우리는 건물 7층 하나를 임대했다. 큰 거실은 30평방미터에 가까웠는데 이 큰 거실을 보자 나는 엉겁결에 “여기서 법 공부를 한다면 20, 3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겠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바로 이처럼 하나의 바른 생각으로 법 공부 팀이 정말로 만들어졌으며 나도 법 공부 팀이 우리 집에 있게 된 덕을 입었다. 온 가족이 모두 법 공부를 했고 나도 곧 사람들을 따라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매번 ‘5.13’과 새해가 올 때마다 수련생들은 모두 여기에서 법회를 열었고 회의장을 배치했으며 나는 모든 일에 주력 인원이었다. 매번 법회는 장엄하고 매우 성스러웠으며 수련생들은 심성 상의 제고와 대법 수련 속에서의 기적을 교류하였는데 정말로 천지를 감동시켰다. 나의 마음과 영혼은 한 차례씩 대법의 위대하신 사부님의 자비에 의해 감동 받았고 깨끗이 씻겨 졌으며 마음속으로부터 은혜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떠올랐다!
2007년부터 진상 CD를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아내를 도와 종이와 CD디스크를 배달해주었으며 때로는 기계 수리도 도왔다. 아내가 탁상용 달력을 만들 때쯤이면 나는 더욱 바빠졌다. 나는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작업 도구를 준비해주는 것을 도왔고 7층으로 탁상용 달력과 아트지를 운반해 날랐으며 완제품을 완성 한 후 메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대부분 아내가 차를 운전하여 수련생 집으로 가져다주며 나도 몇 번 운반을 도왔다.
한 번은 밖에 큰 눈이 내렸고 길이 미끄러웠다. 나는 아내가 운전하는 것이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직접 데려다 주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불편하다고 느껴 아래층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온풍기를 틀고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아내는 늘 말했다. “이 생에 가장 운이 좋은 것은 대법을 수련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다음은 좋은 남편을 만난 거예요.” 그녀는 늘 다정하게 나를 그녀의 ‘호법신(護法神)’이라고 불렀다.
2012년 4월 8일 나의 아버지는 폐암에 걸린 것이 발견되었고 이미 말기라는 통지를 받고 종양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4월 30일 마지막 한 차례의 화학약물 치료를 마친 후 머리와 목은 많이 굵어졌고 온몸이 모두 부었으며 두 손은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 의사는 퇴원했다가 15일 후에 다시 와서 방사선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를 나의 집으로 모셔왔고 아내는 아버지에게 밍후이 라디오를 들려드렸다. 거기에서 파룬따파를 수련하여 건강을 회복한 신기한 이야기가 있었으며 아내도 아버지에게 자신이 직접 목격한 대법의 기적을 이야기해드렸다. 아버지는 고통스럽고 희망이 없는 가운데서 삶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우리 세 식구는 매일 밤마다 아버지와 함께 ‘전법륜(轉法輪)’을 공부하였고 법 공부 팀에서 단체 법 공부를 했으며 아버지도 함께 따라 배웠다.
연공을 배운 후 아버지는 매일 아내와 함께 아침마다 1시간 동안의 동공(動功)과 1시간 동안의 정공(靜功)을 했다. 낮에는 돋보기를 쓰고 ‘전법륜(轉法輪)’을 받쳐 들고 열심히 공부했다. 아무 일 없을 때면 곧 성심껏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외웠다.
5월 13일 세계 파룬따파의 날, 우리 집에서 한 차례의 법회를 열었다. 아버지는 대법이 만들어낸 그처럼 많은 기사회생의 기적을 듣고 몹시 감동되어 위대하신 사부님께 진심으로 감복했다. 당일 날 우리는 ‘전법륜(轉法輪)’의 제6강을 공부했고 아버지는 여전히 손이 끊임없이 떨려 책을 보는 것마저 매우 힘들었지만 끝까지 견지해내셨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아내는 줄곧 아버지에게 성심껏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眞善忍好)’를 외우게 했다. 아버지는 잠들고 나서야 멈췄다. 이튿날 아버지는 온몸의 부기가 모두 사라졌으며 손도 떨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는 몹시 기뻐했고 마룻바닥을 걷다가 양 팔을 감싼 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기도 했다. 남동생 가족이 아버지를 보러 왔고 기적적으로 회복하신 모습을 보고 가족들은 사부님께 머리 조아려 사부님께서 생명을 구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렸다.
6월 2일, 우리 집안 친척 20여 명은 징웨탄(淨月潭)으로 소풍을 갔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들과 함께 산을 올랐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스스로 7층까지 올라갔다. 이튿날에는 마치 다 나은 사람 같았다. 주변의 친척들은 사부님의 위대하심과 대법의 신기함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더불어 수련생들이 더욱 정진하도록 격려해주었다.
2015년 5월 1일, 정부에서 ‘유안필립, 유소필리’ (有案必立,有訴必理, 안건이 있으면 반드시 입건하고, 소송이 있으면 반드시 심리한다) 법령을 공포하였다. 아내는 5월 중순부터 장쩌민(江澤民)을 고소하는 고소장을 쓰기 시작했다. 다 쓰고 나면 나에게 들려주었고 내가 안건을 제안하면 그녀는 곧 수정했다. 다 쓴 다음 다시 나에게 들려주면 나는 의문점이 생기는 곳들을 모두 짚어주었고 그녀는 곧 다시 수정했다. 6월 30일이 되어서야 원고를 다 완성했다. 나와 딸도 고소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고 지장을 찍어 17일에 발송했으며 배달 증명 메시지를 받았다.
2016년 1월 회사에서 단체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나는 B형 간염과 간경화라는 판정을 받았다. 우리 집안은 유전적 영향으로 형제들이 모두 간이 좋지 않다. 1990년 나는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간경화로 발전된 것이다. 나는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져 기분이 매우 가라앉았다. 의사에 지시에 따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한 달 반 사이에 두 차례나 병원에 입원했고 신체가 극도로 쇠약해졌다. 기침을 할 때 피가 섞여 나왔고 위층에서 화분 하나 가져오는 것도 힘들어서 식은땀을 흘렸다. 의사가 말했다. “간경화는 회복될 수 없어요. 돌이킬 수 없는 고질병이에요. 평생 항바이러스 약을 먹을 수밖에 없어요. 일정한 기간마다 반드시 입원치료를 받으셔야 해요. 항바이러스 약은 수입약과 좋은 국산 약 그리고 일반적인 약이 있어요.”
약의 치료효과에 대해 의사는 예를 들어 설명했다. “만약에 당신이 선양(瀋陽)에 가는데 수입 약을 드시면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과 같고, 좋은 국산 약을 드시면 차를 타고 가는 것과 같아요. 일반적인 약을 드시면 고속철을 타고 가는 것과 같지요.” 나는 죽는 것은 틀림없이 죽는데 단지 시간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항바이러스 약은 일단 먹기 시작하면 평생 끊을 수 없으며 가장 저렴한 것도 1개월에 800, 900위안(약 13, 15만원)이 들며 게다가 입원비용은 별도로 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은 적지 않은 지출이었다. 나는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명예퇴직해서 집에 머물면서 한 달에 고작 1천 위안(약 16만원)을 받는데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돈이 필요했다. 나는 절망으로 체념에 빠져 현대 의학의 치료를 포기하고 집에서 수련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솔직히 말해 처음에 나는 병을 제거하기 위해 대법 책을 손에 들었다. 기적이 내 몸에서도 나타나기를 바랐으나 변화가 크지 않았다. 나는 대법의 변두리에서 20여 년간 배회했고 대법의 책은 거의 다 읽어보았지만 줄곧 많은 나쁜 버릇을 제거해 없애지 않았다. 나는 천성이 거칠고 급하며 늘 화를 내기 좋아했다. 입으로 상대하기 힘든 사람으로 양보하는 법이 없었으며 내 앞에서는 아무도 바른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직장 책임자든 동료든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한 번은 같은 부서 동료가 고열이 나서 나에게 그를 대신해서 반나절 동안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내가 그를 대신해 갔는데 그는 오히려 출근을 했다. 알고 보니 그는 감히 자기 대신에 나를 시킬 용기가 없었으며 나중에 내가 그의 꼬투리를 잡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고 도박을 하는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때로는 놀다가 흥이 일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돌보지 않았다. 한동안 좋아졌다가 한동안 나빠지고 늘 고치고 싶었지만 늘 좋은 상태가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이 마음이 있는 것을 보시고 2016년 8월 교묘(巧妙)하게 나를 은행에서 보안 일을 하도록 배치해주셨으며 근무 시간은 공무원들의 작업 및 휴식시간과 같았다. 은행에서는 고객들에게 화를 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웃는 얼굴로 맞이해야 하고 웃는 얼굴로 배웅해야 했다. 이전의 동료들과 거의 연락이 두절되었고 매일 밤마다 아내와 법 공부를 하고 스스로 시간을 내어 연공했다. 9월부터 나는 취미삼아 몇 개의 화분을 기르게 되었고 일이 없을 때면 꽃을 가꾸며 한 편으로 수련 이야기를 들었고 잠을 잘 때가 되어서야 라디오를 껐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나는 마음속으로 나의 ‘병’을 내려놓지 못했다. 자주 휴대폰을 들고 인터넷으로 나의 간 질환에 상응하는 증상과 무엇을 먹으면 좋고 무엇을 먹으면 안 되며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검색해보았다. 인터넷에 별 다른 민간요법이 없거나 일이 없을 때면 연예 프로그램을 보기도 했다.
나는 점차 꽃들이 모두 매우 울창하고 무성해져 생기발랄해지는 모습을 발견했다. 친구 집에서 정성을 들여 가꾼 꽃은 엽록소를 공급해주어도 내가 키운 꽃처럼 윤이 나고 밝아 보이지 않았다. 이 꽃들마저 혜택을 받았으나 나의 간 부위는 여전히 자주 결리고 아팠다. 가끔씩 한밤중에 일어나 여러 번 기침을 했고 마음은 아주 불안했다. 한 번은 아내에게 화를 내고 그녀를 원망하며 말했다. “섬유질이 풍부한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데 여러 해 동안 만들지도 않던 음식을 하필이면 이런 때 샐러드와 죽순 요리를 만들 건 뭐야. 나를 괴롭히는 거야?” 게다가 아내에게 일부 불길한 말을 하며 마음속으로 자주 중얼거렸다. ‘꽃마저 저렇게 무성해졌는데 나는 이 법도 배웠고 공도 연마했으며 라디오도 들었는데 어째서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까?’
작년 3월 20일, 아내의 고모부가 병원에 입원했고 나는 야전 침대를 가져주러 갔다가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 비친 누렇게 뜨고 잿빛이 돌며 홀쭉해진 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입술은 조금 자줏빛을 띄었는데 나마저도 나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고모부의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신장을 가장 상하게 하는 약마저 사용했는데 1개월 후 고모부는 돌아가셨다.
6월 16일 남동생은 입맛이 없고 몸이 여위어 기력도 없게 되자 병원에 가보았더니 배 속에 무언가 자라고 있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병원에서는 조영술 검사를 하게 했고 20일 조영술을 마친 후 신장이 심하게 파손되어 소변을 볼 수 없었고 투석이 필요했다. 설령 투석을 해도 병원에서는 배 안에 자라고 있는 것에 대해 속수무책이었으며 10일 만에 남동생은 세상을 떠났다.
눈앞의 변고는 나의 현대 과학에 대한 일말의 환상을 완전히 깼다. 관념이 바뀌자 마음도 좋아져 법리가 끊임없이 펼쳐져 나왔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본 정황은 이렇다: 왜 사람은 병이 있는가? 그에게 병이 있음과 모든 불행을 조성하는 근본원인은 업력으로서, 그 흑색물질의 업력장(業力場)이다. 그것은 음성(陰性)인 것에 속하고, 좋지 않은 것에 속한다. 그런 좋지 않은 영체 역시 음성인 것으로서, 모두 검은 것에 속하므로 그것은 올라올 수 있는데, 이 환경이 그것에게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람의 병을 초래하는 근본원인이며, 이것이 가장 주요한 병의 내원(來源)이다.”[1] 나는 항상 휴대폰으로 간 질환의 정보를 찾아보았는데 곧 마음이 바르지 않은 것으로 병을 얻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병이 곧 올라온 것이다. 이 병은 업력장이 불러온 영체가 조성한 것으로 영체는 매우 깊은 공간에 있는데 어떻게 분자 층의 약으로 그것을 상하게 할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병을 낫게 하고 난(難)을 제거하며 소업(消業)하려면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수련하고, 반본귀진(返本歸眞)해야 하는데, 이것을 각종 수련 중에서는 모두 이렇게 본다. 사람이 반본귀진하려는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된 진정한 목적이다.”[1] 나는 꿈에서 막 깨어난 듯 병 치료에 집착하는 이 마음을 철저히 내려놓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책을 보면 법리가 끊임없이 펼쳐져 나타났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법에 따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증상을 인터넷에서 어떻게 이야기 하고 어떤 방법으로 나의 신체를 다소 호전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 다시는 찾아보지 않았다. 아내가 말했다. “당신의 이번 진보는 꽤 적지 않네요!” 나는 무심코 말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어. “법(法) 얻으면 신(神)이로다”[2] 나는 물론 평범하지 않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내가 나에게 준비해준 MP3를 들었으며 들을수록 마음속이 더욱 밝아져 공간장은 상서로움과 화목함 그리고 아름다움과 훌륭함으로 가득 찼다. 매일 나는 자발적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眞善忍好)!’를 외운다.
사부님께서는 너무나도 자비로우시며 장계취계하여 나로 하여금 병 치료의 생각을 철저히 내려놓게 하였으며 정말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았다. “당신의 心性(씬씽)이 제고되어 올라오면 당신의 신체에 곧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당신의 心性(씬씽)이 제고되어 올라오면 당신의 신체상 물질에 보증코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1] 나는 대법이 무한한 법력이 있음을 깊이 체득할 수 있었으며 당신이 겁난(劫難)을 지날 때 자신이 연공인임을 깨달을 수 있는지 없는지와 부동한 층차의 법이 당신에 대한 요구에 도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며 심성이 제고되어 올라오기만 하면 즉시 효과가 나타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당신들이 사람마다 모두 내심에서 법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위력이 끝없는 법의 체현 ― 인간 세상에서 강대한 불법(佛法)의 재현(再現)이다!”[3]
나는 지금 몸이 가뿐하고 기분이 상쾌하며 식음에 주의하는 생각도 사라졌다. 스스로 집에서 샐러리 속을 넣은 만두를 빚기도 한다! 이는 나와 아내가 결혼한 이래에 세 번째로 빚는 만두다. 아내는 퇴근 후 이 광경을 보고 몹시 기뻐했다. 며칠 전, 한 수련생이 우리 집에 왔었는데 아내에게 은행 입구에서 남편을 보았는데 얼굴에 홍조가 있고 윤이 났으며 몸은 살도 찌고 입술도 발그스름해졌으며 얼굴도 편안해 보여 딴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내가 퇴근하자 아내는 이 일을 이야기 했다. 나는 아내에게 이제는 무엇을 보더라도 모두 마음에 들며 예전처럼 그렇게 고집이 세서 비뚤어지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은행 청소를 하는 미화원은 나의 야박한 말투 때문에 그녀의 남편에게 불만을 말했다고 한다. “은행에 보안관이 있는데 참으로 참견을 많이 해요. 견디지 못할 지경이에요. 이 일을 그만 두고 싶어요.” 나중에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당신과 오랫동안 지내보니 매우 상냥하고 참으로 좋은 사람이시네요. 당신을 잘못 알고 원망했어요.” 내가 대법 수련을 잘 해서 좋아지게 된 것을 그녀가 어찌 알겠는가.
지금 우리 집은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법광(法光)으로 뒤덮여있고 상서롭고 화목함으로 가득하여 나는 더없이 행복하고 즐거우며 생명에 생기와 희망이 가득하다! 짧은 수십일 동안 사부님께서는 이처럼 완고하고 좋지 않은 나를 정정당당하게 만들어주셨다. 사부님의 자비로우시고 고생스러우신 구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마침내 반본귀진(返本歸真)의 수련의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중생을 널리 제도하다(廣度衆生)’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경고하는 말(警言)’
원문발표: 2018년 6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신수련생마당>병을 제거하고 신체를 건강하게 한 이야기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6/24/3639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