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영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영국인인데, 일 때문에 1995년에 홍콩으로 왔고, 이후 10년 동안 늘 중국으로 건너가 일을 했다. 나는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1997년부터 2018년까지 21년 가운데 17년을 홍콩에서 지냈다. 아시아 금융 위기로 인해 나의 경영 컨설팅 회사에 적자가 났고, 2003년에 또다시 사스가 발생해 나는 회사를 닫고 태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당시 건물주가 갑자기 우리에게 건물을 지극히 낮은 가격에 내놓는 바람에 우리는 현재의 건물을 구입하고 계속 홍콩에 머물게 되었다. 건물은 광장 인근에 있어 대단히 편리하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 우리는 운명의 전환점에 서 있었다.
나는 2010년부터 파룬궁을 수련했는데, 중국인인 집사람은 나보다 2년 먼저 수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부님께서 일찍부터 우리를 보살펴 주셨음을 알고 있다. 나는 파룬궁 수련을 시작할 때 코소보에서 유럽연합 프로젝트 하나를 수행하고 있었다. 2011년 홍콩으로 돌아오니 홍콩에는 영문판 따지웬(大紀元) 신문이 있었고, 그래서 나는 영문 따지웬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진상거점
2012년 6월부터 홍콩청년관애협회(香港青年關愛協會, 약칭 청관회)라는 중공의 조직이 홍콩의 파룬궁 진상거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내가 홍함에 있는 진상거점에 도착하니 청관회가 스피커 출력을 최대로 높여놓고 있었다. 내가 경찰에 신고하자 한 경찰이 먼저 나의 신분증을 등록했다. 2주 후 우리 집 주소로 청관회가 보낸 협박 편지가 도착했다. 수취인의 이름은 내가 거의 쓰지 않는 신분증 상의 풀네임이었다. 나는 홍콩에 이미 검은 세력이 침투해 있음을 느꼈다. 대다수 홍콩인은 우산운동이 발생하고 나서야 홍콩 사회 각 층에 적색 정권이 심각하게 침투해 있음을 발견했다.
청관회가 파룬궁 진상거점을 가장 미친 듯이 공격할 때 나는 코즈웨이베이 소호의 진상거점에 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 청관회는 또다시 그들의 현수막으로 우리 현수막을 가로막았고, 나는 몇몇 동수와 함께 옆에서 연공을 했다. 한 청관회 두목이 갑자기 내 앞으로 오더니 나를 때리려는 몸짓을 했고, 나는 즉시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이는 나에게 쟁투심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조금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 두목은 경찰에게 내가 자신을 때렸다고 거짓말을 했고, 경찰은 즉시 나를 경찰차에 태웠다. 경찰서로 가는 길에 나는 계속해서 경찰에게 진상을 알렸다.
경찰서에서 진술을 기록하는 몇 시간 동안 나는 작은 방 안에 꼼짝없이 갖혀 있었다. 경찰이 문을 한 번 열었을 때 나는 한 청관회 두목이 경찰의 업무 공간을 제 집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자정이 되어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달마다 경찰서에 출두를 해야 했다. 한번은 나를 아주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해 나는 경찰 면전에 있는 신고 민원인 대기장소에서 한 시간 동안 동공을 연마했다. 나는 사건이 종결되기까지 3번을 출두했고, 그 때마다 안면 있는 경찰에게 진상을 알렸다. 마지막으로 출두했을 때 그 경관은 나의 말을 듣고 변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일도 나에게 교훈을 주었고, 현재 나의 쟁투심은 이미 아주 많이 닦여 없어졌다.
청관회는 2014년부터 진상거점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줄이고 우리 주변에서 소란을 피웠다. 우리가 반박해 집회와 행진을 펼칠 때마다 그들은 옆에서 파룬궁을 비방하는 선전 방송을 크게 틀었는데, 신고를 해도 시끄러운 소리로 사람들을 귀찮게 했고, 경찰은 여전히 수수방관했다. 청관회는 매번 버스로 광둥과 신제의 이민자 지역에서 사람들을 실어 왔고 중공의 여러 기관도 특무를 파견해 촬영을 했다. 우리는 어차피 그들이 우리를 모두 알 것이므로 촬영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중국을 좋아하지만, 2008년 이후 다시는 중국에 가지 않았다.
홍콩에서 우리는 매년 열 차례 이상의 반박해 집회와 행진을 가졌고 나는 최대한 참여했다. 나는 대만과 다른 나라의 동수들이 먼 길을 달려와 홍콩에서 법을 실증하고 많은 고생을 하는 것을 알지만, 의리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행진을 할 때 나는 특히 호기심을 가진 서양인의 눈에 띄게 되는데, 나는 그들에게 차례로 영문 진상 전단을 나눠 주고, 기회가 되면 몇 마디를 주고 받는다. 나는 또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일부 경찰은 중국의 정치 형세에 큰 관심을 보인다.
매체 일을 하다
2011년 나는 체육대회에서 사진 촬영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한 체육단체로부터 대회 촬영기사로 초청을 받았다. 나는 따지웬 기자 신분으로 그들을 위해 일하면서 그들이 지불한 돈으로 따지웬을 직접 지원할 수 있었다.
1년 전 중문 따지웬의 경제 쪽 뉴스를 책임진 편집자가 일부 기자회견 취재를 나에게 요청했는데, 일부 중국 자본 회사가 따지웬의 중국인 기자 취재를 막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회의를 적지 않게 취재했다. 현재 우리는 많은 홍콩, 심지어 중국 회사의 취재 요청을 받고 있다. 나는 가끔 오락 뉴스도 맡는다. 그래서 다른 매체 사람들과 동행할 기회가 아주 많다. 촬영을 하는 동안 나는 다른 촬영자를 배려하는데, 될수록 공간을 비워서 그들이 촬영을 하거나 삼각대를 놓게 한다. 그들 중 일부는 영어를 할 수 있어 나는 그들과 명함을 교환하고 따지웬을 소개하며 시간이 되면 일부 진상을 알린다. 몇몇 사람은 나에게 따지웬 신문을 아주 좋아 한다고 알려 주었다.
어느 날, 나는 뉴스 브리핑을 기다리기 위해 애드미럴티의 퍼시픽 플레이스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셨는데, 당시 사람이 너무 많아 한 홍콩 상인이 내 옆에 앉았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화제가 파룬궁에 이르렀다. 그는 커다란 관심을 보이면서 왜 자신이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지 신기하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유를 말해 주고, 이어서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중공의 선전에 세뇌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그들의 선전에 세뇌됐어요. 하지만 오늘 진상을 알았어요.”
작년에 나는 홍콩 외국기자회에 가입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내가 매주 목요일 아침에 발송한 영문 따지웬 신문이 신문꽂이에 꽂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내 데스크에 물으니 관리위원회가 매체 기자 명단에서 따지웬을 제외시켰다고 했다. 나는 즉시 관리위원회 회장에게 연락을 하고 안내 데스크 담당자에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저희 신문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외국기자회가 뉴스 검열을 한다면 이건 잘못된 겁니다.” 몇 주 후 영문 따지웬 신문은 다시 신문꽂이에 놓여졌다.
전화위복
나는 가부좌를 할 때 늘 양쪽 다리를 모두 올리지 못했다. 수련 전에 나는 오른 쪽 고관절에 인공관절을 삽입했고, 수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만약 큰 힘으로 다리를 압박하면 관절이 탈구될 수 있다며 줄곧 걱정하고 있었다. 1년 전, 나는 이 걱정을 극복해 가부좌에 약간의 진전을 봤지만, 오른 쪽 고관절은 일정한 각도에 이르면 거의 굳어져서 더 이상은 조금도 구부려지지 않았다.
몇 주 전, 나는 첵추에 가서 영문 신문을 발송한 후 서둘러 촬영을 하러 가야 했는데, 버스 정류장과 50미터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때 정류장에 도착하는 버스가 보였다. 나는 나는 듯이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내가 버스 정류장의 한 쪽 담 모퉁이에 도착했을 때 버스를 기다리던 한 사람이 때마침 담 모퉁이로 다가가 나의 길을 막게 되었다. (그는 몸을 담에 기대어 휴식을 하려 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멈출 수 없었고, 그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는 담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먼저 팔을 담에 부딪히고 오른 쪽 엉덩이를 바닥에 부딪힌 다음 인도 위를 굴렀다. 내가 맨 먼저 한 생각은 “나는 괜찮다. 파룬따파 하오”였다. 내가 일어났을 때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나중에 나는 가부좌를 할 때 오른쪽 고관절의 굳어졌던 부분이 풀린 것을 느꼈다. 나는 현재 반가부좌를 할 수 있다. 나는 이틀 후에야 집사람에게 뜻밖의 이 사고를 이야기했다. 그녀는 내가 그 때 차라리 자신이 다칠지언정 다른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법에 부합했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뜻밖의 사고를 좋은 일로 바꿔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원문발표:2018년 6월 10일
문장분류: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수련경험>진상을 알려 세인 구도
원문위치: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8/6/10/3686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