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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궁이 사회에 복을 주다-교사편(2)

글/ 정신(正信)

[밍후이왕] 교육은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며 한 나라와 민족의 장래와 방향을 결정한다. 교사는 교육을 실천하는 기본 선구자로서 그들의 도덕적 수양은 직접 다음 세대 사람들의 소질을 결정한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금전’의 이익과 유혹 하에 교육계의 추문이 계속 들려오고 있다. 많은 교사들은 기본적인 도덕적 지조를 잃었으며 지식인이 있어야 할 절개도 잃어버려 바람에 따라 돛을 다는 사람으로 전락됐다.

그러나 이 복잡한 난세에 이런 교사들이 있다. 그들은 가난하든 부유하든, 평탄하든 역경에 빠지든, 심지어 고문을 받고 생사존망에도 여전히 사람의 고귀한 절개를 지켰다. 그들의 행위는 사회와 주위 사람에게 선량함과 정기의 비장함을 전달했다.

쓰촨 여성교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양친윈은 쓰촨 루저우시의 퇴직한 칠순 되는 여성 교사다.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학생이 그녀를 들어서 파룬궁 연공장에 데리고 갔다. 그때부터 심신이 건강해 의료비 한 푼 쓰지 않았다.

(1) 사경에 이르러 탈출구가 없게 되다

의사는 벌써 양친윈에게 치료할 약이 없다고 확진했다. “선생님의 이런 병은 전 세계에도 치료한 전례가 없습니다.” 그때 그녀는 먹지 못하고 걷지 못했으며 말을 못하고 보지 못했다. 두통, 치통, 안구 통증, 복통, 다리 통증 등 온몸에 병이었다. 온몸이 나른했고 사지가 풀려 소파에 앉아도 쓰려졌고 손수건마저 잡지 못했다. 엄지손톱이 없었고 어디에 닿든 다 아팠다. 극심한 안구 통증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이 뻑뻑했고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눈 안에 유리 조각이 가득 있는 것처럼 조금만 눈을 깜박여도 참을 수 없이 아팠다. 게다가 온 머리와 전신 신경까지 다 아팠으며 무엇을 보든 무수한 층층의 모호한 겹친 영상이 보였다.

대량의 약을 먹어 위장이 손상되어 먹는 것을 많이 가렸다. 날 것, 찬 것, 딱딱한 것, 생강, 파, 마늘, 고추 등을 전부 먹지 못했다. 기름에 튀긴 것, 열을 내리는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배가 아팠으며 설사를 했는데 그마저 열흘 보름이고 변을 보지 못해 괴로웠다. 손은 찬 물건에 닿지 못했고 찬물은 더욱 만질 수 없었다. 찬물을 만지면 배가 아팠고 설사나 심한 감기에 걸렸으며 가래가 코 입 사이에 막혀 나오지 않아 호흡 곤란이 일어나 괴로워 죽을 것 같았다. 더워도 안 되고 추워도 안 되며 빛을 보아도 안 됐다. 더우면 눈이 아프고 이가 아팠으며 치아는 차든 덥든 다 아팠다. 길을 걷지 못해 매일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았지만 잠시 아픔을 완화할 뿐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링거를 맞으면 더 보이지 않았고 더 허약해졌다. 심장은 매분 130~160회 뛰었고 기운이 없어 말을 하지 못했다.

이전에 ‘골거대세포종’에 걸렸는데 수술 후 왼쪽 다리가 불구가 되어 골수 내에 2자 길이의 L자 모양 철심을 넣었는데 골수 안에서 끊어져 골수 감염을 일으켰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았고 10여 년 지팡이를 짚었다. 이후에 지팡이를 짚고도 걸을 수 없었다. 끊어진 철심과 고정된 다리뼈 위에는 나사와 철사가 조여 다리를 땅에 밟을 수 없었다. 여러 차례 깁스를 했고 심각한 류머티즘에 걸려 허리와 다리가 아팠으며 다리는 저리고 나른해 늘 쥐가 올라와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날씨가 흐리면 더 괴로웠고 항상 암이 또 재발하지 않았을까 근심이 됐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죽을 지경에 이른 양친윈이 여전히 봉급, 직함, 주택, 자녀 일자리 등을 위해 밤낮 근심하고 잘 먹지 못하고 자지 못했으며 늘 불평했다. 그녀가 직함 때문에 병원에 가 그녀에게 수술해준 의사를 찾아가 증명서를 발급 받으러 갔을 때 의사는 말했다. “우리는 선생님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나중에 선생님과 같은 병이 있는 몇몇 환자를 접수했는데 수술 후 모두 사망했습니다. 그들 신체 소질은 다 선생님보다 좋았습니다. 이런 병은 전 세계에서도 나은 전례가 없습니다. 선생님은 어찌 걸어 다닐 수 있습니까? 여기저기 다니지 마세요. 넘어지면 구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에 양친윈은 살 길이 없다고 여겨 학생 앞에서 목 놓아 울었다.

양친윈의 생활은 줄곧 남편이 돌봐주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과로로 인하여 뇌출혈이 생겨 반신불수가 됐다. 갑자기 두 불구자가 침대에 누워 살래야 살 수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어 그녀는 어쩔 수 없어 자녀를 불러 사후 일을 당부했다. 그녀는 자녀에게 말했다. “엄마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구나. 온몸 어디나 다 아파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하다. 너의 아버지도 이렇게 되어 정말 너희들을 연루시키고 싶지 않다.” 말하고 나서 목 놓아 울자 온 가족이 다 같이 울었다.

친척, 친구, 동창, 학생, 직장 상사, 동료 등은 그녀가 안 될 것 같다는 말을 듣고 모두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온 가족이 고통스러운 상황을 보고 다 동정하고 한탄했다. 상사는 그녀를 위안하면서 그녀에게 죽음을 정시하라고 말했다. “아무튼 한 번은 죽어야 합니다. 한 번 죽는 일인데 즐겁게 죽으세요! 아무리 조급해도 죽어야 하는데 더 빨리 죽을 수 있습니다.” 친구들은 “난 죽어서 안 돼. 자녀가 어린데 죽어서는 안 되지” 라고 말했고 동창과 동료들은 “방법을 생각해 봐, 방법이 있을 거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녀를 도와 약을 찾았고 그녀의 항체를 증가시켜주려고 돈을 모아 글로불린을 사준 사람도 있었으며 이상한 돌팔이 의사를 연락해 준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민간요법을 소개해주면서 각종 방법을 내놓았다. 각종 방법을 다 써도 소용없었고 돈도 다 쓰고 괴로움도 받을 대로 받아 조그마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생활이 원래 어려웠는데 설상가상이었다.

(2) 구불구불하던 인생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어느 날 그녀가 가르쳤던 한 학생이 그녀를 보러 와 그녀에게 연공을 하러 가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다 쓰러져 있으면 안 되지요. 한 사람은 일어나야지요!”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난 라디오 체조도 못하고 길도 걸을 수 없는데 무슨 공을 연마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 의사도 치료할 수 없다는데 연공한다고 나을까? 안 가겠다.’ 속으로 ‘이 학생이 어린 나이에 이런 걸 믿을까?’ 라고 생각했다. 이때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말했다. “그래도 널 위해 한말인데 가서 해봐. 아무튼 돈을 받지 않으니깐 낫지 않으면 돌아오면 되잖아? 내가 함께 갈게. 그런 약을 다 먹어도 낫지 않았는데 최선을 다 해보자.” 그녀는 그래도 가려하지 않았다. 여러 번 괴로움을 당해 모든 방법에 자신감을 잃었고 철저히 절망했던 것이다.

뜻밖에 며칠 후 이 학생이 또 왔다.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왔는데 어떤 사람은 안면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몰랐다. 그들은 일부러 양친윈을 데리러 온 사람이었다. 친구가 또 거듭 격려했다. 다른 사람의 체면을 봐서 양친윈은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따라 법공부 장소로 갔다. 얼마를 갔는지 어디로 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당시 많은 사람이 그녀를 둘러싸고 힘이 센 사람이 그녀를 안고 다른 몇 사람이 손을 들고 다리를 들고 조심스럽게 유리를 내려놓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땅에 내려놓은 것만 기억났다.

양친윈은 이렇게 사람들 가운데 앉아 연공도 하지 않고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며 주위 가부좌하는 모호한 사람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속으로 ‘이건 뭘 하는 거지? 미신을 믿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몇 십 년의 교육을 받은 그녀는 가부좌하는 것이면 미신이라고 생각했다. 반시간 좌우 앉아 있더니 끝났다. 사람들은 또 그녀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신기한 것은 그녀 스스로 지팡이를 짚고 길을 걸으면서 그들과 얘기를 나눴다. 집에 돌아온 후 청진기로 들으니 심장 박동이 매분 82회였다. 양친윈은 의사에게 몇 번 뛰면 정상인지 여러 번 물었는데 의사는 70-100회라고 말했다. 아, 내가 정상이구나! 그러기에 조금도 힘들지 않게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었구나!

또 며칠 지나 학생이 그녀를 또 데리러 왔다. 그곳에 가서 한참 앉아 있다가 집에 돌아와 청진기로 들으면 또 82회였다. 이렇게 거듭 여러 번 시험해 본 후 양친윈은 진정으로 연공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심장이 확실히 정상으로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제야 그녀는 스스로 원해서 갔다.

양친윈이 정식으로 연공한 것은 97년 3월이었다. 연공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10여 년 짚었던 지팡이를 버리고 몇 십 년 꼈던 안경도 벗고 책을 볼 수 있었으며 걸음이 가벼워졌고 차고 덥고 시고 단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었다. 몇 십 년 감히 먹지 못하던 아이스크림, 기름에 튀긴 누룽지 같은 것을 많이 살 수 있었고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더는 찬 것, 더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겨울에 얼음물을 먹어도 문제가 없었고 먹고 싶으면 뭘 먹었다. 그런 상쾌함은 정말 형용하기 어려웠다.

20년을 수련한 이래 양친윈은 약 한 알 먹지 않았고 의료비 한 푼 쓰지 않았다. 국립의료사무실에서 해마다 내보내는 결제 자료를 보면 그녀의 의료비 지출은 모두 영이었다.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은 누적 금액이 1만여 위안(한화 168만원)에 달해 모두 놀라워하고 부러워한다. 사람들은 모두 의료비가 부족하다고 외쳤기 때문이다. 질병으로 미리 퇴직한 양친윈은 과거 직장에서 의료비가 모두 앞 첫 자리와 두 번째 자리를 차지했었다.

연공하기 전에 양친윈은 온종일 수심에 차 있었고 온통 불평과 원망을 했다. 늘 작은 이익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했으며 쟁투, 질투, 의심, 보복을 했고 많은 좋지 않은 사람마음이 있었다. 샹린사오(祥林嫂: 루쉰의 소설 속 불쌍한 삶을 산 여인의 이름)처럼 늘 본인의 불행과 고통을 늘어놓았고 어디에 가든 다른 사람에게 답답함과 불편함을 주었다. 친구들은 그녀를 근심하며 거듭 위안했다. “몇 년 더 지나 퇴직하면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모두들 ‘그녀 상태를 보면 퇴직할 때가지 견딜라나!’라고 생각했다.

연공한 후 ‘진∙선∙인(眞∙善∙忍)’의 법리에 따라 그녀의 심신에 거대한 변화가 발생했고 아주 빨리 많은 좋지 않은 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더는 조급해하고 쉽게 화를 내지 않았으며 욕하지 않고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일마다 다른 사람을 생각했고 개인 득실을 따지지 않았으며 영예와 치욕을 따지지 않았다. 사람이 낙관적이고 명량하게 변했으며 어디 가든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평온함을 주었다. 아는 사람이든 친구든 아니면 낯선 사람이든 그녀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친절한 느낌이었다.

파룬따파는 양친윈의 심신과 운명을 개변했고 그녀를 질병의 고통과 명리정의 도가니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녀는 내심으로부터 곤경에서 구해주신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주급(州級) ‘우수 담임 교사’의 온가족 수련 이야기

자오융차이는 간쑤성 간난 티베트자치주 저우취현의 교사다. 현급 ‘교육 원예사’, 주급 ‘우수 담임교사’이다.

(1) 선량한 일가의 불행

자오융차이 일가는 모두 현지의 선량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는 예전에 마을 간부였다. 무신론이 판을 치고 있는 중국공산당 체재 내에서 그는 반평생 신을 숭배하고 존경했다. 그는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주위 사람을 다 잘 대했다. 평소 길을 걷다가도 길에 돌이 있으면 옮겼고 ‘예의·예절은 지나쳐도 사람들이 허물로 여기지 않는다.’, ‘예의와 신용은 천하에 통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가 신을 믿게 된 것은 청년 시기 한 단락의 특수한 경험을 하여 믿게 된 것이다. ‘파사구(破四舊: 네 가지 옛 것을 타파하자는 공산당 운동)’ 시기에 그와 다른 사람이 함께 이웃 마을의 파파절(婆婆廟)을 부수러 갔는데 당시 그는 방관자였지만 그 후 몇 년 사이 그는 팔이 두 번 골절됐고 마지막에 한 민간 의사가 만져주어 나았다. 그는 그에게 골절은 절을 부숴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이 일로 그의 세계관은 철저하게 개변됐다.

자오융차이 어머니 뤄류슈와 큰형 자오융위도 좋은 사람이다. 자오융차이는 어릴 때 집이 가난해 입을 옷이 없었고 먹을 것이 적었지만 밥을 빌러 사람이 오면(어릴 때부터 그들은 거지라고 부르지 않았음.) 그의 어머니는 오는 사람에게 면을 한두 그릇 주었다. 자오융위는 현지에서 꽤 이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의업에 종사했는데 늘 무상으로 사람들에게 약 처방을 써주고 주사를 놓아주면서도 다른 사람의 밥 한 술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선량한 온 가족 사람들은 건강이 다 좋지 않았다. 자오융차이 아버지는 뇌동맥 경색, 고혈압, 뇌혈전 징조 1급 등이 있었고 반평생 질병에 시달렸고, 어머니는 그가 세상 물정을 알기 시작해서부터 병이 있었다. 날씨 변화가 있으면 두통이 있었고 온몸이 괴로웠는데 날씨예보보다 더 정확했다. 그때 생산대대 대장은 매일 자오융차이의 어머니에게 오늘 날씨가 어떤지 묻고 어머니 두통 상황에 근거하여 날씨를 판단하고 생산 임무를 배치했다. 자오융차이의 큰형은 이전에 삼림 농장의 계약 노동자였는데 벌목할 때 나무에 머리를 맞아 뇌 외상 후유증이 남아 날씨가 흐리기만 하면 어지러워했다.

(2) 선량한 사람이 다시 건강을 되찾다

1994년 9월 자오융차이는 간쑤성 교육원에 공부하러 갔다. 그때 기공 붐이 일던 때어서 전국에 각종 기공이 전해졌다. 그는 부모가 건강해지는 공법 한 가지를 배우려 했다. 자녀로서 특히 부모가 병이 많은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소원은 부모에게 건강한 신체가 있는 것이다. 한 동안의 실천을 통해 자오융차이는 파룬궁이 이 아름다운 소원을 실천하는 좋은 공법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의 몸과 사상에 큰 변화가 발생했다. 그때 그는 등이 약간 굽었는데 어느 날 가부좌 할 때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등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 기운에 따라 허리를 쭉 폈다. 그 후부터 그의 몸은 줄곧 꼿꼿했다.

직접 혜택을 본 자오융차이는 란저우에서 집에 돌아간 후 파룬따파를 그의 부모 및 큰형에게 소개했다. 그의 아버지는 불가 공법이라는 말을 듣고 매우 좋아했다. 한 동안 연공한 후 두통, 감기가 다 없어졌고 그의 어머니는 며칠 연마한 후 매우 신기한 일을 겪었다. 칠흑 같은 밤에 갑자기 방이 대낮처럼 밝았는데 한참 후에야 서서히 없어졌다. 또 어느 날 저녁 친척 집에서 잠을 잘 때 꿈에 한 사람이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너의 병을 치료해줄게.” 그리고 손바닥으로 그녀 배를 한 바퀴 만지고 말했다. “됐다.” 그 후부터 그녀는 온몸에 병이 없이 가벼웠다. 그의 큰형은 책을 보자마자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아 모든 병이 사라져 6월에 얼음물 마신 것처럼 정말 기뻤다.

(3) 좋은 사람이 되다

수련한 후 자오융차이는 대법 사부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일상생활에서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으로 좋은 사람이 됐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타인을 잘 대했다. 자오융차이는 이전에 학교에서 실험실의 자재를 관리했었다. 그때 그는 실험실의 집게 같은 것을 집에 가져갔었는데 수련한 후 전부 실험실에 도로 가져갔다. 일부 잃어버린 것은 새것을 사 실험실에 가져갔다.

이전에 그는 성격이 좋지 않아 말을 듣지 않는 학생은 주먹이나 막대기로 ‘교육’하고도 이런 방법이 효과가 좋다고 여겼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그는 이전의 교육 방법이 학생들에게 해를 줄 뿐 유익한 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부터 그는 교육 방법을 개변했다. 학생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했으며 문제가 있으면 이치를 말해주고 사리를 밝혀가며 설득했다. 학생들은 좋게 변했고 공부하기도 좋아했다. 그때 그는 시골 학교에서 글을 가르쳤는데 조건이 낙후했지만 학생들 성적은 전 현에서 괜찮은 편이었다.

선생님으로서 그는 학생들에게서 함부로 돈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늘 자비로 학생들을 도와주었다. 학생들에게 자료를 주문시킬 때 비용을 내기 어려운 학생에게 본인이 돈을 대주었다. 그는 예전에 온 가족 3명의 학생에게 학비를 내준 적이 있었다. 그가 맡은 반 학생들은 경제 상황이 어려웠어도 퇴학한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저녁에 반에 누군가 전등을 가져가 사라질 때가 있었는데 학생들은 매우 화를 냈지만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전등을 살 수 없는 학생이 이런 일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등을 좀 많이 사서 교실에 두었다. 그 후부터 아무도 반의 전등을 가져가지 않았다. 자오융차이는 시골에서 10여년 근무하면서 줄곧 담임을 맡았는데 비용을 거의 거두지 않았다. 그는 본인에게 건강한 신체가 있고 사부님 말씀대로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으며 사치를 부리며 돈을 낭비하는 것도 아니기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근무 성적이 성실하고 학생을 관리하는 데 방법이 좋아 1999년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전 자오융차이는 잇따라 현급의 ‘교육 원예사’, 주급 ‘우수 담임교사’로 선정됐다.

자오융차이의 아내 양펀팡은 저우취현 핑딩향 핑딩촌 사람이다. 결혼하기 전 심장병이 있었다. 결혼한 후 남편이 매일 연공하는 것을 보고 이후에 남편이 개학해 출근하자 집에서 외로워 파룬따파 연공 음악을 들었다. 며칠 듣고 음악에 따라 연공하기 시작했고 이후에 그녀는 ‘전법륜’도 보고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섰다. 그 후부터 남편과 함께 사부님의 요구대로 ‘진∙선∙인(眞∙善∙忍)’을 수련하는 좋은 사람이 됐다. 양펀팡은 그때 저우취현 궁쯔스 신용 조합에서 일했다. 많은 사람이 외지에 일하러 나가려고 신용 조합에 와서 대출을 받았다. 농촌 사람은 소박하여 수속하러 올 때면 지역 특산품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녀는 절대 받지 않았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것은 남겨두고 상대방에게 일부 물건을 사주었다. 또 한 학생은 대학에 가야하는데 아버지가 수년간 외출해 돌아오지 않아 그녀는 늘 그에게 돈을 주고 그를 후원해주었다.

파룬따파를 수련해 자오융차이의 부부는 건강해졌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기 좋아하고 잘 대하는 우수한 풍격을 가지게 됐다.

후기

하지만 1999년 중국공산당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 파룬따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양친윈은 잇따라 수차례 루저우시와 장양구 국내안전보위국 ‘610’의 불법적인 취조를 받았고 신분증을 빼앗겼으며 강제로 세뇌반에 보내졌고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며 감시받고 야밤중에 그녀는 전화를 받거나 경찰이 그녀 집에 와 소란을 피웠고 친척 방문하려고 해도 출국하지도 못하게 했다.

현급 ‘교육 원예사’, 주급 ‘우수 담임교사’ 자오융차이는 강제로 전향반에 잡혀갔고 납치됐으며 장기간 강제로 수감,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소에 보내졌다. 간쑤성 핑안타이 노동교화소에 불법적으로 고문방에 들어갔을 때 열흘 밤낮 각종 고문을 받아 죽을 뻔했다. 손목의 흰 뼈가 보일 정도였다. 그의 아내는 밤낮 남편을 근심하다 33살 나이에 우울증에 걸려 사망했고 그의 부모도 아들이 여러 차례 박해 받은 사실로 정신적 압력을 이기지 못해 각기 66세,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19년 동안 무수한 파룬궁 제자가 중국 공산당의 파룬궁 박해 중에도 그들의 선량함, 정의와 진리를 지키면서 인류의 찬란한 역사를 만들고 있다!

 

원문발표: 2018년 4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4/7/3638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