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창춘 대법제자 춘롄(春蓮)
[밍후이왕] 나는 올해 79세이고 조선족이며 중국어를 잘하지 못한다. 사부님께서 나같이 전에 집착에 빠진 사람을 빼놓지 않아 1993년에 연분으로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修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부님을 따라 멀고 험한 노정을 거치며 한 번 또 한 번 법을 들을 수 있었음은 정말로 너무나 행운이었다. 그 시간은 나의 일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그해 나는 60세가 안 됐고 남편은 병으로 사망했다. 생각해보니 나이가 많아지고 병이 나면 아들이 돌봐야 했다.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나는 신체단련을 해야 했다. 그 시기는 기공 열조가 한창인 때였다. 기억에 매우 뚜렷하다. 93년 7월 22일 아침 5시경 나는 아동 공원에 갔다. 한 무리 사람들이 기공을 연습하는데 뜀질하고 뛰어다니다가 울기도 하고 난리였다. 이건 연습해서는 안 되었다. 다시 앞으로 걸어가니 한 무리 사람들이 눈을 감고 조용히 서서 두 손을 머리 앞으로 들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 중간에 나무가 있었는데 나뭇가지에 깃발이 걸려있었고 깃발 중앙에 원형 도형이 있었다. 나는 이건 괜찮다고 여겨 눈을 감고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이때 눈앞에 깃발의 그 도형이 나타나면서 돌기 시작해 나도 모르게 따라서 돌았다.
이때 누군가 오른쪽 어깨를 두드리며 “왜 돌고 있어요? 안 됩니다!”라고 해서 “내가 돌려는 게 아니고 그 바퀴가 돌고 있어서 따라서 돌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알았는데 이는 파룬궁(法輪功)이고 그 도형은 파룬이었으며 파룬이 회전하는 것이었다. 나는 ‘파룬궁’ 책을 사서 공부를 시작했다.
책을 보고 공을 연마해서야 파룬궁이 좋음을 알았다! 사부님께서 창춘에서 공을 전하고 설법하신 지 벌써 6회였는데 나는 전혀 몰랐다. 연분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숭랴오 위원회 강당에서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 보도원에게 설법을 하신다고 해서 나도 갔다. 도착하니 문은 닫혀있었고 사부님은 이미 설법을 시작하셨다. 문밖에 몇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걸상을 밟고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앞으로 끼어들어 책상 위에 올라서서 다른 사람의 머리 위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느 때쯤인지 문 입구에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고 나만 남았다. 나는 몸을 앞으로 들이밀었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고 문을 지키던 수련생이 ‘들어오세요.’ 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사부님의 설법은 이미 끝났고 사람들이 사부님을 에워싸고 사부님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사부님을 뵈었는데 높은 키에 매우 건장하셨으며 늘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사부님께 사인을 받는 책은 정갈했으나 나에게는 매우 작은 노트가 있었는데 손바닥보다 작았다.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생각날 때마다 적곤 하였다. 게다가 페이지마저 흩어졌다. 나도 사부님께 드렸는데 내색하지 않고 받아서 ‘李洪志’ 세 글자를 사인해주셨다.
며칠 후 사부님께서 베이징에서 설법하셔서 나는 베이징으로 갔다. 법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 각 지역에 다 있었다. 베이징 총보도소의 사람이 며칠 후 안후이에서 설법반이 열린다고 알려줬다.
우리 11명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은 푸젠 사람이었는데 80여 세였고 가장 어린 사람은 11살이었다. 나이로 나는 세 번째여서 사람들은 셋째 언니라고 불렀다. 우리 일행 11명은 기차로 안후이 허페이(合肥)에 도착했다.
사부님 설법반이 열리기까지 7일이 남았다. 우리는 거기에서 기다렸다. 그때 매우 고생스러웠는데 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우리는 사람마다 전기, 물, 컵이 있어서 건면을 사서 끓인 후 소금을 뿌려 끼니를 때웠다. 법을 얻기 위함이어서 고생스러워도 아무렇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기차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바로 그날은 큰비가 내렸고 우리는 우산이 없었다. 어찌할 것인가? 비닐을 얻어서 몸에 걸치고 끈을 찾아 허리에 묶었으며 또 비닐봉지를 찾아 머리에 썼다. 그 모습은 정말 볼품없었다. 우리는 플랫폼에 갔으나 어느 객실에서 사부님이 내릴지 몰라 논의를 거쳐 사람마다 하나의 객실을 책임지고 사부님을 만나면 외치기로 약속했다.
열차가 들어섰고 문이 열리면서 사부님께서 내가 기다리고 있던 객실 위치에서 내리셨다. 나는 사부님을 한번 뵈었으나 사부님이신지 잠시 주춤했다. 큰 키에 늘 미소를 짓고 있어서 바로 사부님이심이 확인됐다. 나는 앞으로 다가가 “리라오스!(이 선생님)” 라고 불렀고 사부님은 나의 손을 잡아주셨다. “저는 창춘의 수련생입니다.” 사부님께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음? 사부님께서 아신다고? 나는 다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창춘에서 온 아줌마입니다.” 사부님께서 또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기에 나는 여전히 사부님께서 잘못 들으셨을 것 같아, 왜냐하면 나의 중국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창춘에서 선생님의 설법을 들으러 왔습니다.” 사부님께서 또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셨다. 기쁜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 외쳐주는 것을 잊고 있다가 그제야 생각나서 머리에 비닐 주머니를 벗고 힘껏 여러 사람에게 외쳤다.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여깁니다!” 모두들 달려왔고 사부님은 일일이 손잡아 주셨다. 오직 나이가 가장 많으신 푸젠의 수련생만 사부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이때 베이징 보도소의 사람도 도착했고 우리는 사부님을 강당이 있는 안으로 모셨다. 그때 사부님께서 안후이 허페이에서 설법하시며 공을 전한 것은 1993년 11월 21일부터 12월 1일이었다.
설법 중에서 사존께서는 또 수련생의 신체를 청리해주셨다. 한 남자 수련생은 단상에 올라갈 때 몸이 90도로 되었는데 내려올 때는 펴졌다. 단상에서 사부님이 그의 곱사등을 펴주었다. 참가한 수련생들은 모두 보았다. 박수를 치는 사람, 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 잠깐사이에 어떻게 하셨을까? 사부님께서 단상에 계셨으나 우리는 똑똑히 보지 못했고 정말로 불가사의했다.
어느 한번 사부님은 수련생들에게 두 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위로 하게 한 후 파룬을 내려 체험하게 했다. 그때 어떤 사람은 손에 파룬이 있는 것을 보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이 뜨거웠으며 어떤 사람은 손바닥이 차가웠다. 차가움은 신체에 병이 있는 것이다. 또 한 수련생은 전수반에 참가하기 전에 몸에 부체가 있어서 그는 ‘탕탕탕’거리며 단상으로 가서 자신에게 부체가 있으니 사부님께서 제거해주시길 바랐다. 그것도 제거해주셨다. 사부님은 손으로 잡아서 그의 부체를 제거했다. 사부님은 또 수련생에게 자신의 몸에 있는 병을 생각하게 하고 한쪽 발을 내리구르라고 했는데 병이 사라졌다. 사부님은 각종 방법으로 우리의 신체를 조절해주셨다. 이 모든 것을 나는 직접 보았다. 우리의 사부님께서는 정말로 무량한 자비를 베푸셨고 못 하는 일이 없으셨다.
하지만 나는 전에 그때까지 기공에 접촉한 적이 없어서 반응이 느렸고 오직 사부님께서 하신 설법이 좋고 대법이 좋음을 알았다.
1994년 4월 나는 설법반을 따라 랴오닝 진저우(錦州)로 갔다. 그곳은 바다에 인접한 도시여서 시장 곳곳에서 살아있는 새우를 팔았다. 나는 처음 보았기에두려워 만지지 못했다. 파는 사람이 맛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요리를 하는지 등을 알려줬다. 듣고 나서 배포가 커져 2.5kg을 산 후 가게 주인이 그 자리에서 새우를 삶아주었다. 숙소로 돌아와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었는데 확실히 맛있었다.
나는 그 당시 살생문제에 대해 중시하지 않았는데 이생에 좋은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므로 살생으로 업을 짓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내가 깨닫지 못하자 꿈으로 깨우침을 주셨다. 꿈에 하늘에서 새우가 빼곡히 줄을 서서 나를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 가운데는 3마리의 수탉이 머리를 기우뚱하고 목을 내밀고 분노하며 나를 노려봤다. 그때에야 알 수 있었는데 줄은 선 것은 바로 내가 구매한 후 삶은 2.5kg의 새우였고, 그 큰 수탉은 작은아들이 결혼할 때 죽인 것이다. 남편이 사망해서 혼례의 예로 수련을 하는 내가 수탉을 죽였다. 그것들은 나의 길을 가로막고 가지 못하게 했다.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알았다. 살생으로 조성된 업력이 나의 수련의 길을 가로막은 것으로 살생의 문제가 이렇게 엄중한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업이 더 커졌다! 갚아야 하는 것으로 신체 여기저기가 아팠다.
이어서 4월 29일 창춘 제7회 파룬궁 전수반이 시작됐다. 고향에 돌아와 나는 ‘타 지역 수련생 접대 팀’에 들어가 창춘 기차역에서 팻말을 들고 윤번으로 당직을 섰다. 그때 봄바람으로 몸에 먼지투성이고 얼굴 역시 먼지로 시커메 사람들이 눈만 깜빡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으나 누구도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수련생들을 맞이해 안내했다. 이때 우리의 사부님이 오셔서 친절하게 “수고하십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무슨 어려움이 없나요?”, “날씨가 좋지 않으니 건강에 주의하세요!”라며 관심을 베풀어주셨다. 우리의 마음은 난로같이 뜨거워졌고 날씨가 춥고 바람이 차가워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제7회 반은 전국 각 지역에서 온 수련생이 너무나 많았다. 신장에서부터 흑룡강 가장 북부에 이르기까지, 해안지역에서 비행기로 온 사람도 있었고 또 멜대로 짐을 지고 온 사람도 있었다. 대법을 찾아 만 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 팀은 기차역에서 맞이했고 다른 팀이 이어서 전문차량으로 이송해 숙소에 배치했다. 길림 대학교 밍팡궁(鳴放宮) 강당은 자리가 부족해 밤낮으로 나누어 진행했고 모두 3천여 명이었다. 그 사이 발생한 신기한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설법반에 참가한 많은 수련생이 이미 그때 기억을 되살려 서술했다.
6월 하순 사부님은 제남 제2기 설법반을 열었는데 그중 몇 가지 일이 기억에 새롭다.
그때는 여름이 한창이라 몇천 명 수련생이 황팅(皇亭) 체육관 위아래 층에 가득 앉아 너무나 더웠다. 사람들은 사부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끊임없이 부채질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손에 부채를 내려놓으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은 시원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옴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장내의 사람들은 즉시 부채를 내려놓았다. 사부님께서 질문했다. “당신들은 느끼셨나요?” 수련생들이 함께 대답했다. “느꼈습니다!” 흥분의 박수 소리가 귀를 진동했다!
설법이 끝난 그 날 사부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반복해서 여러분에게 귀띔했다. “내일 또 대련으로 설법을 들으러 가는 수련생은 절대 주의하세요, 비행기를 타지 마십시오. 기억하세요! 기차나 배는 다 됩니다. 오늘 밤 열차와 버스 티켓을 구매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사님이 도와 역으로 태워주세요.” 그리고 사부님은 계속 문 입구에 서서 기사에게 분부해 그날 밤차로 대련으로 가는 수련생을 역으로 이송했다. 그날 큰비가 내려 무릎을 넘어섰다. 우리 7명의 수련생은 즉시 30일 날 비행기티켓을 취소하고 기차나 배 티켓을 구매해 안전하게 대련으로 도착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날 밤 비행기는 폭우를 만났고 사부님께서 우리를 사악이 배치한 마난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우리의 안전을 보호해주셨다. 매번 그 기뻤던 나날을 회억하면 나의 마음은 어찌해도 도무지 안정되지 않았고 눈물이 또 줄줄 흘러내린다.
7월 1일 대련 제2회 설법반이 시작됐다. 그 번 회차에서 대련 보도소장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주었다. 바로 사부님과 그들의 기념촬영 사진이었다. 사람들 뒷면의 하늘에는 두 마리 용이 가지런히 나타났고 머리, 코, 눈 윤곽이 매우 선명했다. 그리고 두 자루의 보검이 있었다.
사부님은 무소불능이셨으나 수련인에 대해 우리에게 “공능은 본디 작은 재간이요 대법만이 근본이로다”[1]라고 당부하셨다. 이는 사부님께서 대련 바닷가 백사장에서 쓰신 시구이며 나중에 ‘홍음’에 실렸다. 7월 7일 대련 설법반이 끝나기 전 사부님께서 격려의 글귀를 주셨다. “진정으로 대법을 수련하나니 오로지 이것만이 큰 일이로세 대법에 동화하나니 언젠가는 기필코 성취하리라”[2] 나중에 시구를 사부님께서 ‘홍음’에 발표하셨다.
한 달이 지나서 8월 5일부터 12일까지 사부님 하얼빈 설법반에 나는 또 참가했다. 이번은 여러 면에서 교란이 너무나 컸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실 때 기침을 하셨다. 그때 나는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심에 너무나 고생이 많으시구나! 라고 생각했다. 날마다 이렇게 설법하시니 목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이 아파 눈물이 났다. 그러나 돌려 생각해보니 맞지 않았다. 우리 사부님은 신이다, 신에게 무슨 병이 있겠는가?! 그때 나는 사람의 염을 시정했다. 바로 우리의 업력을 사부님께서 감당하신 것으로 나의 깨달음이 너무 차했고 그 생각이 들자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법공부를 잘해 자신의 흑색물질을 백색물질로 전화해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감당하시는 것을 줄이자고.
대법은 너무나 빨리 전해졌다. 연변지역의 많은 사람이 법을 얻었고 수련생들이 조직해 사부님을 요청해 설법반을 열려고 했다. 나 역시 노력해 신경을 썼다. 전 직장에서 이렇게 좋은 대법이고 이렇게 좋은 기회이니 너무나 소중하다며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1994년 8월 20일부터 27일 사부님께서는 연길시에서 파룬궁 전수반을 여셨다. 연변은 소수민족 지역으로 조선족 인구가 절반 이상이다. 조선족 수련생들은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날을 민족의 명절로 간주하고 민족 복장을 입었다. 알록달록해 꽃이 핀 듯 정말로 보기 좋았다! 그들은 가장 장중한 예절로 사존의 설법을 영접했다. 사부님은 매우 기뻐하셨고 수련생들은 더욱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으며 모두 민족 복장을 입고 사부님과 기념촬영을 했다. 이는 사부님께서 중국 대륙에서 유일하게 한번 소수민족 지역에서 설법하신 것이다. 나중에 또 유일하게 조선족 문자로 된 ‘전법륜’을 출간했는데 조선족 수련생들은 정말로 너무나 행복해했다!
나 역시 조선족으로 연길은 내가 다년간 생활한 곳이며 다년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사부님의 설법을 듣게 되니 느낌이 남달랐다! 사부님과 너무나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마치 사부님께서 우리 집으로 오신 것 같았다.
사부님 설법이 끝나기 전에 짧은 의식이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연길에서 설법반을 꾸리며 받은 7천 위안(약 119만 원)의 입장료 전액을 연길 적십자회에 기부했다. 연길시를 떠날 때 몇 명의 보도소장이 택시로 사부님을 기차역으로 모셨다. 나는 마음속으로 정말 그들이 자신의 차로 사부님을 기차역으로 모실 수는 없었는가? 라는 원망이 들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택시비용은 제가 지불합니다. 저는 수련생에게서 한 푼도 받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부님께서 택시비용을 지불했다.
이 소식이 전해진 후 연변 수련생들은 매우 감동받았다. 모두들 “사존께서 이렇게 하시니 제자들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 한 가지 일은 사람 마음을 격동시켰다! 이는 연변 수련생의 영원한 회억으로 됐다.
1993년 말 안후이 허페이 사부님 설법반으로부터 시작해 모진 고난을 마다하고 따른 것은 사부님이고 찾은 것은 대법이었다. 매번 법을 들을 때 새로운 깨우침이 있었고 매번 사부님과 함께 할 때 형용할 수 없는 행복과 아름다움이었다.
95년에 ‘전법륜(轉法輪)’이 정식으로 출간됐고 사부님께서는 국외로 설법하러 떠나셨다.
95년 겨울 사부님께서 귀국하셨다. 나는 타 지역의 수련생 2명과 함께 사부님 집을 방문했다. 그곳은 건설광장 인근의 낡은 주택이었다. 사부님 집은 크지 않은 작은 주택으로 극히 간단했으며 매우 깨끗했다. 벽에는 사부님께서 친히 그린 불상이 걸려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도, 여자 부처, 손오공이 있었으며 매우 섬세하게 신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황금색의 귤을 우리 3명에게 하나씩 주셨다. 2명의 수련생은 어느새 귤을 다 먹었다. 나는 귤을 외투 호주머니에 넣었고 집에 돌아온 후 귤을 사진 찍고 불단에 공양해 영원한 기념으로 남겼다. 사부님의 자비, 제자에 대한 격려는 금색 귤에서 뿜어 나오는 부드러운 빛 속에 있었다.
기억나는데 그날은 너무나 기뻤다. 사부님 집에서 나오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방금 눈이 내려 땅이 매우 깨끗했다. 우리 셋은 서로 밀고 당기며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는 사부님 집 아래 눈 속에서 뒹굴었다. 뒹굴며 웃고 서로 밀며 너무나 기뻤다. 그때 우리는 모두 50~60세 되는 사람들이었으나 그 기쁨을 표현할 수 없어 마치 어린이와 같은 행동을 했다. 사부님과 사모님이 창문으로 우리를 보고 계심은 전혀 몰랐다!
그 뒤로 몇년 간 사부님을 뵐 수 없었고 너무나 사부님이 그리웠다!
1998년 7월 26일 사부님께서 창춘으로 돌아오셨고 샹그리라 호텔에서 보도원에게 설법하셨다. 나는 소식을 들은 후 그 당시의 소장을 찾아가 법회에 참가하게 해달라고요청했다. 소장의 동의를 거친 후 나는 보도원들을 따라서 강당에 들어갔고 변두리 자리로 앉았다. 사부님께서 오셨다. 사람들은 힘껏 박수를 쳤다! 생각밖에 사부님께서 내가 앉은 좌석의 길로 걸어오셨다. 나는 두 손으로 합장하고 “사존님,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를 올렸다. 사부님께서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와 악수하고 왼손으로 나의 어깨를 다독였다. 사부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나에게 말했다. “오셨군요.” 나는 너무나 기뻤고 너무나 격동됐으며 너무나 행복했다! 그때 머리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고 꿈만 같았다. 만약 꿈이라면 정말로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사부님께서는 5시간 설법을 하셨는데 박해가 시작되기 전 마지막으로 대륙 수련생들에게 하신 설법이었다.
사부님은 설법하고 이튿날 한 음식점에서 식사하셨고 함께 자리한 십여 명의 수련생은 사부님의 오른쪽에 앉았다.
사부님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고기를 안 드세요?” 말씀하시며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주셨다. 나는 먹었고 사부님도 웃으셨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최대한도로 속인사회에 부합해 수련하라 하셨고 고기를 먹지 않는 마음도 버려야 함을 깨우쳐주셨다.
사부님께서는 우주 대법을 우리에게 전해주셨고 사부님의 기풍도 우리에게 남겨주셨다. 사부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 사부님의 일부 생활에 대해 알게 됐다. 사부님이 식사하시고 나면 접시는 언제나 깨끗이 비었고 음식을 남기지 않으셨다. 정말로 매우 감동받았고 사부님을 따라 배워 이후 식사할 때 음식을 남기지 않았다. 나는 다시 사부님의 기풍을 자녀들에게 전해주어 절대 낭비하지 않았고 만약 먹지 못하면 남은 음식을 집에 돌아가 먹었다.
그날 식사하면서 사부님께서 싱가포르에서 설법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선족 할머니로 언어가 그다지 통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사부님의 설법을 들으면 매우 잘 깨우치나 나는 매번 조금만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여러 차례 설법반을 따라다녔으나 여전히 오성(悟性)이 차했다. 나는 싱가포르에 갔다. 그건 1998년 8월 22일, 23일로 이틀간 설법을 들었다.
그 후로 더는 사부님을 만나 뵙지 못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16~17년이 지났다. 80여 살의 노인이라 많은 일을 잊어버렸으나 설법반을 따라다니던 일들에 대해 나는 소중하고도 소중하게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했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았다. “내 생각에, 내가 공을 전하고 설법하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장래에 당신은 알게 될 텐데, 당신은 이 시간이 매우 보람찼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연분(緣份)을 중시하는데,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도 연분이다.”[3]
다년간의 박해 속에서 어려울 때마다 나는 사부님과 함께 했던 나날들을 떠올리고 빨리 ‘진선인(真善忍)’에 동화하도록 격려했다. 그래야지 조금이나마 사존의 노고를 덜어드릴 수 있고 우리 천우(天宇)중의 생명에게 좀 더 많은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사부님의 법상 앞에서 사부님께 말씀 올린다. “사부님, 저는 기억했습니다. 어떠한 환경 중에서도 시시각각 안으로 찾겠습니다.” 안으로 찾으니 정말로 사부님께서 ‘싱가포르 법회 설법’에서 하신 말씀 “자기가 받은 고통과 당한 불행을 자신에게서 찾고, 자신의 어느 곳이 잘못되었는지를 찾는다는 것은 정말로 하기가 매우 어렵다. 만약 누가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길에서, 수련하는 이 길에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서, 당신을 가로막을 어떠한 것도 없다고 말한다.”[4]와 같았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홍음 <정법문을 구하다>’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홍음 <법을 얻다>’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싱가포르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5년 10월 31일
문장분류: 온고명금(溫故明今)>사부님의 은혜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0/31/3181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