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밍후이왕] 2007년 섣달그믐, 나는 중국공산당의 소굴에서 박해받다 집에 돌아왔다.
설날 나는 우선 친정에 갔다. 문을 여니 85세 된 아버지가 눈물을 머금고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하는 줄 알았다”라고 하셨다. 나도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럴리가요, 이렇게 보시지 않았어요? 저는 아주 잘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에요.”라고 아버지를 위로했다. 거실 가득 친지들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우리집은 대가족이라 오빠 넷, 언니, 조카들 20여 명이 모여있었다.
둘째 오빠는 나를 보자마자 “이제 다시는 수련하지 마라. 악당이 너를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야. 잊어선 안 돼. 문화대혁명 때 아버지가 스파이로 몰리시는 바람에 어머니가 화병이 나서 돌아가셨잖아”라고 했다. 내가 “오빠, 저는 포기하지 않아요. 그 마의 소굴에서 감시카메라가 있어도 법공부를 했던 걸요”라고 하니 둘째 오빠는 “그럼 더 뭐라 하지 않을게. 그렇지만 꼭 조심해야 해”라고 당부했다.
식사 후 담소를 나누는데 둘째 조카가 갑자기 “막내 고모, 고모부가 이혼하자고 하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내가 “고모부가 이혼하고 하지 않고를 정하는 게 아니야. 나는 고모부를 포기하지 않았어. 고모부가 대법에 죄를 짓게 해서는 안 되니까”라고 말하니 모두 “아, 그런 것이구나”라고 했다.
음력 1월 7일, 남편은 담담하게 “방직 공장에서 이미 해고했길래 관련 서류를 받아왔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해고하려면 해. 나를 찾아올 필요도 없겠군”이라고 했는데, 당시 나는 자신의 두려운 마음 때문에 직업을 잃고 구세력이 빈틈을 탔다는 것을 몰랐다. 이 말은 박해당할 때도 한 적이 있는데 줄곧 바로잡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번거로움을 초래하고 중생이 이끌려 죄를 짓게 했다.
이튿날 조카가 집에서는 일자리를 찾기 힘들 테니 베이징으로 오라면서, 연공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듣자마자 쟁투심, 질투심이 치밀어 올라 말투마저 변했다.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이미 선하지 않았다. 나는 조카에게 마음은 고맙지만, 베이징에는 가지 않을 것이라며 “내가 동냥을 하더라도 네게 가서는 동냥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독설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설이 지나 오빠가 나를 데리고 공장장을 찾아갔다. 공장장은 숨어서 나를 만나주지 않았고, 나도 더는 찾아가지 않았다.
음력 1월 19일, 며칠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남편이 보위과 사람들이 내가 밖에서 일하는 게 공장에서 일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기능도 있고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인데다 새로 습득할 필요도 없다. 그때 나는 심성이 승화되지 않고 단지 사람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입을 열자마자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남편은 그래도 더 생각해보라며, 공장에서 이삼십 년을 일했고 공장 사람들도 나를 잘 대해주지 않느냐고 했다.
그렇다. 남편의 말이 나를 일깨웠다. 나는 늘 감정적으로 문제를 본다.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봐야 했다. 남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연일까. 분명 사부님께서 그의 입을 통해 내게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렇다. 1999년 7월부터 공장주임, 현장주임, 작업반장 등 각 계층에서 다들 나를 보호했다. 2001년 초 장쩌민이 톈안먼에서 분신자살 조작극을 연출했을 때도, 현장에 온 공장 보위과 과장이 내가 수련포기각서를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후에 구치소로 보내려 한다는 것을 알려줬기 때문에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탈출할 수 있었다.
2002, 2003, 2004년에도 그랬다. 특히 2004년 공안국과 ‘610’(파룬궁 탄압을 전문으로 장쩌민이 결성한 불법 조직)이 공장에 나를 납치하러 왔는데 통지하는 사람이 현장에서 근무 중이던 내게 사람 한 명이 찾아왔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현장 총감독이 조용히 와서는 나더러 빨리 가라며 4명이 왔는데 밖에도 있다고 했다. 듣고 겁이 좀 났지만 즉시 바로잡고 사부님께 제자에게 정념을 가지해 주시어 그들이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해주십사 청했다. 그 후 현장 주임, 보위과 부 과장, 총감독 그리고 내가 지나다니는 곳에 있는 현장 동료들마저 사악한 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내가 어디로 갔는지 물으니 다들 모른다고 했고, 그들이 가고 나서도 현장 주임은 걱정하며 내가 잡혔는지 물어보았다. 주임은 현장에서 큰 소리로 내가 잡히지 않았다고 알리고, 내가 범죄자가 아니니 그들이 더욱 잡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나라가 얼마나 부도덕한지, 이렇게 좋은 노동자도 박해받고 있다고 말했다.
2005년 출근길에 납치되기 전까지 회사 사람들은 모두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알고 나를 지지했다. 반대로, 나는 내가 그들을 위해 무얼 했는지 자신에게 물었다. 3퇴(중국공산당의 3대 조직을 탈퇴하는 성명)는 우리 팀에서만 했을 뿐 다른 팀과 현장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예 권하지 않았다. 문득 사부님의 설법이 떠올랐다. “그가 출생한 후, 이 집에 그가 있고, 학교에 그가 있으며, 또는 성장하여 직장에 그가 있어, 그의 일을 통해 사회와 다방면으로 연계를 맺게 된다. 다시 말해서 전반 사회의 구성은 모두 이렇게 배치가 잘 된 것이다.”[1] 마음이 움찔했다. 우리 시는 인구 100만이 넘는다. 내가 있는 공장은 중기업이라 직원이 3천여 명인데 대법제자는 한두 명밖에 없다. 나의 일시적인 사람 마음 때문에 대법에 얼마나 큰 손실을 초래하고 얼마나 많은 중생이 구도될 기회를 잃었는가. 나는 남편에게 다시 출근하겠다고 하면서 원래의 현장으로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남편은 지금은 원래 있던 현장밖에는 갈 수 없다며 새 현장은 일손이 부족하지 않다고 했다. 자세히 찾아보니 이건 체면이고 명을 구하는 마음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그것을 가질 수 있는가, 어디 수련생다운가, 분명 사부님께서는 나를 앞으로 끌고 가시는데 나는 뒤로 끌어당기고 있다.
직장에 돌아가 진상을 밝히고 사람을 구하다
이튿날 출근해서 현장에 들어갈 때 사부님께서 나를 가지해 주시고 계신다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아주 거대하게 느껴졌고 현장 동료들은 나를 열렬히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총감독 샤오징은 자기가 보고 싶지 않았냐고 물어보면서 나의 공구함에 있던 대법서적과 CD를 잘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2년간 공구함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나에게 주려고 잘 보관해 두었다고 했다. 나는 즉시 샤오징에게 진상을 알리고 3퇴를 시켰다. 그녀는 무조건 나를 믿는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나를 격려해주시고 내가 다시 자신을 찾을 수 있게 해주셨으며 시시각각 시간을 소중히 아낄 수 있게 하셨다. 우리 현장과 다른 현장 사람들이 모두 나를 보러 왔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통해 진상을 알리고 3퇴를 권했다. 시간이 오래되니 현장 상사도 알게 되었다. 새로 온 현장 주임은 대법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 이때 현장에 새로운 직원들이 들어왔다. 우리 팀에는 청년 7명이 새로 투입됐다. 이제 기존 직원 중에 7명이 이들을 가르쳐야 했다.
옌즈라는 여직원이 내게 현장 주임이 신입 교육은 절대 내가 해선 안 된다며, 이유는 파룬궁으로 인도하면 큰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웃어 보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이는 그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다. 20세에 공장에 들어와 22세 때부터 신입을 교육했는데,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마음이 평형을 이루지 못했다. 질투심, 명을 구하는 마음, 체면이 다 올라왔다. 이런 마음을 잡아서 버리고 구세력의 배치를 전반적으로 부정했다. 그들은 진상을 들으러 온 중생이다, 누구라도 그들이 진상 듣는 것을 막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있는 현장은 기계 9대에 4교대이고 직원이 수백 명이다. 매일 그들과 접촉하면서 나에 대한 현장 주임의 태도도 알고 모두 내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알면서 즐겁게 출근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매일 똑같은 시간에 기계를 켜고 똑같은 생산량의 일을 하는데 나는 다른 사람보다 기계를 1시간 빨리 끈다. 그러면 새 직원들은 다 나에게 와서 이야기를 나누며 이것저것 물어본다. 나는 인내심 있게 대답해주며 급하게 진상을 알리지 않았다. 그들과 익숙해지고 실습기간이 끝나도 혼자 하지 못할 때 작업반장이 나에게 한명씩 데리고 와서 며칠 가르치라고 했다. 그래서 그들 7명은 내게서 새로 한 번씩 다 배우고 진상을 듣고 3퇴도 했다. 그리고 스스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시간대에 동료도 기회를 봐서 그들과 접촉해 사부님의 가지 하에 모두 3퇴시켰다. 3퇴를 하지 않고 전근한 사람도 있다. 사부님께서 그에게 한동안 나를 알게 될 시간을 주실 것 같았는데 이렇게 전근하게 되니 3퇴를 권할 기회를 잃었다. 하지만 1년 후 다시 돌아와 나와 같은 시간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돌아오자마자 내게 와서 이야기를 하길래 나는 그때 당신이 가서 진상을 알리지 못한 것에 대해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가 무슨 진상이냐고 물어 나는 그에게 3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바로 탈퇴했다.
시골에서 사람을 구해 중생이 진상을 알다
2008년 6월 말 우리 지역의 한 수련생이 납치되었다. 공안국은 올림픽을 이유로 대법제자를 박해했다. 그 날 퇴근하고 나는 다른 수련생의 집으로 갔다. 수련생이 납치당할 때 내가 가장 먼저 알게 되어 새벽 5시에 수련생에게 통지하기 시작해 알릴 수 있는 수련생에게는 모두 알렸다. 퇴근하려는데 우연한 일처럼 집 열쇠를 공구함에 넣고는 퇴근해서 수련생 집으로 갔다. 가보니 전화 문제로 두 수련생이 또 납치되어 모두 발정념하고 있었다. 이 집 수련생 쿤 여사는 밥을 한 솥 지어 반찬과 함께 준비해서는 다른 수련생 집에 발정념하러 가려고 했다. 한 수련생이 나에게 열쇠를 공구함에 넣고 잠가서 집에 못 가면 어디로 갈 생각이냐며, 식사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나는 배고프지 않다며 그곳에 가서 다시 보자고 했다. 그런데 쿤 여사는 나더러 여기 있으라며 문을 잠그고 갔다.
방에 혼자 있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정적인 생각,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 마음이 올라왔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구세력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구세력은 들어라. 수련생이 나를 못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나를 못 하게 하는 것이다.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부님의 ‘호주수련생에 대한 설법’이 생각났다. 나는 수련하지 않는 오빠 댁에 가서 잤다. 아침 6시경 나는 수련생 루이 여사의 집에 갔다. 그는 내 상황을 듣더니 내일부터 남편이 타지에 근무하러 가서 일요일에만 온다며 자기 집에서 자라며, 오늘만 수련생 왕 여사의 집에 묵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음날, 출근 전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부탁드렸다. ‘사부님, 이 1년간 수백 명이 진상을 알고 3퇴를 했습니다.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알고 연공인은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제자가 출근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출근을 했다.
현장에 가니 작업반장이 공안국 ‘610’이 또 나를 찾아왔다며, 우리가 베이징에 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요언을 날조하는군요. 그들이 대법제자를 납치하려고 거짓말을 꾸민 것입니다. 제가 베이징에 가서 무얼 하겠어요? 악당은 이치도 따지지 않고 우리에게 말할 권리조차 없게 하는데 뭐하러 베이징에 가나요?”라고 했다. 그러자 반장은 알겠다며 지금부터는 정해진 시간에 일하려 할 것 없이 출근 시간과 무관히 생산량만 맞춰달라고 했다. 나는 또 정정당당하게 출근할 수 있게 됐다. 사부님께서 재차 내게 편리한 조건을 제공해주셨다.
다른 작업타임 동료들도 조용히 나를 도와주며 괴롭히는 경우가 없었다. 특히 이전의 노 반장은 내가 그 팀에 가서 일할 때면 나더러 내가 그 팀에서 일해야 하는데 현장에서 동의하지 않는다며, 신입 직원들은 역량이 많이 모자란다고 했다. 나는 웃으며 “2003년에 반장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제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겠다고. 이제 누가 저를 찾아오면 오늘 출근하지 않았다고 하면 된다고 하셨죠. 지금 그들도 다들 그렇게 하고 있어요.”
현장 노주임 몇 명도 내가 일을 마친 후 진상을 알리는 것을 안다. 그들은 아주 호의적이었고 현재 모두 복을 받아서 공장장까지 올라간 이도 있다. 나는 기회가 되면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대법제자를 선하게 대하면 정말로 복을 받는다.
올림픽 전후 한 달가량에 공안국 ‘610’은 우리 집에 3번이나 와서 남편에게 내 행방을 물었다고 한다. 남편은 모른다고 했고 나는 올림픽 종료 후 귀가했다. 그 기간 나는 쿤 여사와 함께 시골에 내려가서 진상을 알렸다. 좋은 일, 나쁜 일, 위험한 일 등 온갖 일을 만날 수 있었다. 한번은 어느 집에 갔는데 안주인이 있었다. 진상을 알렸지만 3퇴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우릴 배웅하는데 마음이 우울했다. 그녀는 우리더러 멀리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다고 했고, 나는 그런데 그보다는 안주인께서 3퇴를 하지 않은 것이 더 아쉽다고 했다. 그녀는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그럼 탈퇴하겠다고 했다. 나는 좋아서 눈물이 다 나올 뻔했다. 그녀는 우리가 진심으로 자기를 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며 고맙다면서, 다음에 오면 꼭 다시 들러달라고 했고 우리는 그러겠다고 했다.
또 한 번은 쿤 여사와 어느 집에 갔는데 온 가족 세 명이 다 있었다. 대법 진상을 알려주니 가족이 모두 3퇴를 했다. 가면서 이 가족이 오성(悟性)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몇 가구를 지나갔는데 그들 가족이 모두 나와서는 우릴 불렀다. 가방을 두고 갔던 것이다.
또 한 집에서는 주인이 옥수수를 찌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 진상을 알리니 인정하며 3퇴를 했다. 갈 때 옥수수를 맛보고 가라고 하기에 우리는 고맙지만, 그냥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주인은 자기 집에 와서 옥수수를 맛보지 않으면 자신을 모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옥수수를 하나씩 들고 나왔다.
간혹 진상을 인정하는 데 장애가 있는 사람도 만났다. 어느 집에 갔더니 이웃이 놀러와 있었다. 우리가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라고 하니 그들은 연마하지 말라며, 앞 동네 의사 부인이 파룬궁을 하는데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책만 본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며 오해를 풀어줬다. 나는 아이를 대학에 보냈고 지금도 출근하고 있고 여가시간에 생계를 위해 판매 일도 한다고 했다. 그들은 이해하고 모두 3퇴를 했으며 떠날 때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이런 소박한 중생이 우리를 격려하는 것이 적잖은 힘이 된다. 우린 시골을 돌면서 줄곧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고 올림픽이 끝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골에 내려가 진상을 알리는 일은 계속했다.
한번은 겨울에 기온이 영하 27도까지 떨어졌는데, 어떤 수련생이 나더러 뭐하러 시골까지 내려 가냐고 했다. 나는 듣는 데 마음이 불편했다. 시내에 있는 게 좋은 줄 누가 모르나. 농촌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면 몰라도 좋지 않은 경우를 만나면 고발까지 당하는데. 그러나 쿤 여사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건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면 우리는 가서 하자고 했다. 그 말을 듣고도 나는 타인이 뭐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을 찾아내지 못했다.
농촌에서 우리는 각양각색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한번은 어느 집에 갔는데 청년이 휴대폰을 들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앞에서 걷고 있었는데 나는 순간 그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졌다. 청년은 우리더러 좀 전에 앞에서 CD를 배포하던 사람들이 아니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 그 청년은 CD가 너무 좋아서 우리를 찾던 중이었다고 했다. 방에 들어가니 그의 부인도 있었는데, 대법을 인정하면서 CD를 좀 달라고 했고 3퇴도 했다. 그 집을 나서면서 나는 함께 간 수련생에게 내가 의심, 두려움,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정작 다른 수련생은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또 한 번은 2015년 8월에 있었던 일인데, 장쩌민을 고소했다는 이유로 아침 일찍부터 악인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현관문을 두드렸다. 당시 우리 집에 다른 수련생도 와있었다. 그들은 물류 쪽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하며 문을 열라고 했다. 나는 그쪽과 전혀 관계가 없다며 문을 열지 않았다. 아파트 건물 아래로 내려다보니 경찰차 한 대가 있었다. 문 여사도 우리 집으로 오던 중이라는 게 생각나 나는 재빨리 전화해 밑에 경찰차가 있다며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랬더니 문 여사는 이미 왔다며 올라가지 않으면 뭐하냐고 했다. 그가 들어온 뒤 내가 경찰차를 봤냐고 물었더니 그는 크고 작은 차량이 한 대씩 있더라고 했다. 문 여사의 정념(正念)에 힘입어 나도 정념이 일어났다. 이때 다른 수련생이 나더러 집에 있지 않은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집에 있지 않으면 뭐하냐고 했다. 문 여사가 오늘 무얼 하러 갈 것인지 묻기에 나는 해야 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하겠다고 했다. 당시 우리는 주로 시골에 내려가 고소장을 작성하지 않은 수련생이 고소장을 쓰는 것을 도와줬다. 사부님께서 가지(加持)해주시고 수련생들의 사심 없는 모습에 힘입어 나는 한 단락 한 단락 어려운 길을 지나갈 수 있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8년 3월 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8/3/4/36248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