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사소한 일에서 자신을 닦을 줄 알게 되다

글/ 후난 대법제자 샹쯔(香子)

[밍후이왕] “그러나 당신은 그런 작은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 사악이 틈을 탈 것인데, 많은 수련생은 작은 일 때문에 심지어 가버렸다. 정말로 아주 작은 일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수련은 엄숙한 것이고, 누락이 없는 것인데, 당신이 그런 일을 장기간 닦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작지만, 당신이 장기간 중시하지 않았기에 곧 문제가 되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때문에 갔다.”[1] 이는 사부님께서 ‘2015년 미국서부법회 설법’에서 하신 설법이다. 나는 여러 번 배우고 베껴 썼지만 중시하지 못했고 생활 속 사소한 일에서 심성을 닦은 적이 없었다.

최근 밍후이왕 수련생의 제목 ‘사상 교란을 제거하고 안으로 찾는 것을 배우다’ 문장에서 깊은 계발을 받았다. 염두가 나오면 그것을 붙잡고 법으로 가늠하고 나쁜 것은 없애버린다. 일사일념을 모두 이렇게 하는데 그중 사소한 일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하면서 비로소 사부님의 이 한 단락 법이 생각났고 중시하게 됐다. 효과가 좋아 서서히 배웠다. 사소한 일 배후에 아주 큰 집착심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래는 내가 최근 수련 중에서 발생한 일이다.

이런 사소한 일은 생활이나 가정에서 자주 발생하고 때로 화가 나면 서로 대치한다. 이후에도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았고심지어 미안하다고해야 함을 의식했지만 말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생활 속 사소한 일이나 작은 일은 자주 발생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중시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남편은 혼자 깨끗하고 조용한 생활을 즐기고 싶다고 자주 털어놓는다. 아이가 집에서 밥을 잘 먹지 않으면 나는 구실을 찾아 외출해 남편에게그런 어려운 상황을 겪어보게 했다. 한번은 남편도 그렇게 나에게 보복한 후 만족하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나는 예전에 그렇게 한 것이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수련인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나의 거울이다. 이후에 나는 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는 배후의 마음을 찾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작은 의자를 찾다

2017년 여름에 우리 이곳이 아주 무더웠다. 집에 앉아 있어도 선풍기를 떠나면 온몸에 땀이 났다.

오전에 나는 진상을 알리고 장을 보고 돌아왔다. 온몸에 땀이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점심준비를 해야 했다. 작은 의자를 찾았는데 식탁 밑에서 찾지 못했다. 위층에 직접 올라가 남편 서재에서 찾았다. 속으로 생각했다. ‘의자가 서재 책상 밑에 있을 거야. 왜냐하면 남편은 내가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물건을 고정 장소에 정리해 놓기 때문이지.하루에 내가 몇 번 쓰던 상관하지 않고, 불편한 것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만 해.’

나는 마음속으로 화가 나서 가볍게 의자를 끌어 일부러 소리를 냈다. 남편은 즉시 불만을 표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미안했지만 입으로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의자를 갖고 주방으로 일하러 갔다.

일하며 생각했다. 왜 일부러 소리를 나게 했을까? 남편을 괴롭히려 한 것이다. 왜 ‘미안해요’라는 말에 두꺼운 한 층의 껍질이 감싸고 있었을까? 왜 매번 말하지 못할까? 무슨 마음이 있을까? 이번에 절대 그것을 도망치게 하면 안 된다. 찾은 후 그것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방에서 일하며 생각했다. 이번에 양파 껍질 벗기듯 한 층, 한 층 끝까지 벗기겠다. 평소 남편의 뜻에 따라 해도 그는 말로 나에게 억압을 주었다. 이것에 대해 나는 마음속으로 불만이었고 ‘일부러’ 기회를 찾아 그렇게 한번 털어놓았던 것이다. 평소 털어놓는 기회가 적어 원망심이 쌓이고 쌓여 소리를 낸 것이며 그것으로 원망심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는 ‘일부러’ 불만과 원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원망심이 있어 보복하려는 것이었고 ‘일부러’ 소리는 낸 것은 보복심이다.

다시 생각하면 나는 의자를 아래층에 놓고 남편은 위층에 놓으려 했다. ‘누가 더 독한지보자.’ 그러므로 이 ‘일부러’ 소리를 낸 것은 이기려는 마음과 쟁투심이다.

이런 것을 찾았지만 아직 다 찾지 못한 기분이었고 속으로 불만이 있었다. ‘왜모두당신이 결정하죠? 당신은 내 앞에서 당신은 모두 이치를 따지고 작은 일도 양보하지 못하는데 흉금이 왜 그렇게 좁아요?’ 이것이 불만이었다.

더 안으로 찾으니 이것은 가정 투쟁, 보복심, 불평등임을 의식했다. 이것은 질투심의 표현이 아닌가? 사람마다 평등해야 하니 부부 사이에도 투쟁하는데 이것은 사당(邪黨)이 사람의 사상을 왜곡해 놓은 것이 아닌가?

평소 ‘전법륜’ 제7강을 읽을 때 나는 질투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 나는 내 공간장에 질투심이 많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빠뜨리면 안 되고 계속 찾아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속으로 남편이 속이 좁고 극단적이며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남편은 자신의 거울이다. 그렇다면 내가 너그럽지 않고 극단적이며 남편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늘 남편의 장점을 보지 못하고 남편의 단점만 보고 심지어 확대경으로 찾았다. 처음에 잘 알지 못했지만 수련 교류문장에서 이것은 질투심인지 알았다. 당시 알고 있지만 가정의 작은 일이라 중시하지 않았다.

원망심이 제거됐지만 한동안 지난 후 또 나타났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증오함 역시 정이요.”[2] “누가 좋고 누가 나쁘게 보이며”[2] “일체가 다 정이라”[2] 질투심은 정에서 나온 일종 물질이고 이것이 바로 숨어있는 질투심이다.

수련생이 내 몸에 어떤 당(黨)문화 요소가 있다고 말해 찾아보니 정말로 있었다. 마음속으로 수련생에게 감사했다. 수련생은 또 어떤 것이 있다고 말했다. 찾아보니 없는 것 같아서 속으로 불복했는데 이것도 질투심의 표현이다. 지금 정리하며 깨닫게 됐다. 몸에 당문화의 그림자는 없는 곳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유는 모두 그것이 주입한 왜곡된 사설(邪說)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느끼지 못할 뿐이다. 깨달았으니 생각을 바꾸고 그것을 제거해야 했다.

그리하여 나는 두려움, 체면을 중시하는 마음, 과시심, 자신을 내세우는 마음 등을 찾았다. 모두 질투심에서 나온 것이고 수련생이 깨달은 것처럼 질투심은 모순의 복합체이며 그것은 ‘이기적(私)’인 것이다.

‘이기적’인 것에 대해 나는 한번 정리하려 한다. ‘이기적’인 것은 구우주의 특성이다. 우리는 구우주의 법리에서 형성된 이런 후천적 관념, 형성된 자아(이는 자아가 아니고 거짓 자아)가 있는데 이는 구세력이 우리에게 강요한 것이다. 우리는 가지면 안 된다. 우리는 사부님의 배치에 따라 가야 한다. 구세력의 모든 배치를 부정하고 제거해야 한다. 구세력 그 자체도 우리 사부님께서 승인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도 그것을 승인하면 안 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과거의 기점은 이기적이지만 대법이 육성한 일체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3] 그러므로 우리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를 수련 성취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것이고 사부님의 요구에 부합되는 것이며 ‘진선인(眞善忍)’에 동화되고 새 우주 표준에 도달한 것이다. 자신의 서약을 지키고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적, 거짓 자아’를 타파해야 한다. 모든 집착심은 ‘이기적, 거짓 자아’에서 생성된 것이다.

마치 양파를 쪼개는 것처럼 한 층, 한 층 서서히 쪼개야 하고 양파를 모두 쪼개면 마음도 보이게 되고, 어디에도 숨지 못해 뿌리도 겉으로 나와 죽게 되고 자멸하게 된다.

점심 식사 시간이 되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나는 또 생각했다. 왜 ‘미안해요’란 말에 한 층의 두꺼운 껍질이 싸여 매번 말하지 못할까? 분명히 남편이 소리를 듣고 괴로워하는지 알면서도 일부러 소리를 내다니? 타인을 위해 생각하는 한 치의 생각도 없고 단지 자아밖에 몰랐는데 그것은 좋지 않은 마음이다. 나는 오늘 꼭 이 마음을 찾아야 한다.

나는 용기를 내 남편 앞에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려 준비했는데 말이 입가에 오자 또 하지 못하고 남편 방에서 나왔다. 아침을 먹고 나는 생각했다. 오늘 반드시 이 관을 넘겨야 하고 꼭 입을 열어야 하며 이 거짓 자아를 타파해야 한다. 사부님께 가지(加持)를 간청했다. 나는 위층에 뛰어올라가 보니 남편은 열심히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나는 친절하게 남편을 불렀다. 남편은 놀라 뒤돌아 나를 보았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의자를 끄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했어요. 당신 괴로웠지요.” 내가 말을 다 하기 전에 남편은 딱딱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 좀 정상적으로 행동하면 안 돼?” 나는 말했다. “전 정상이에요.” 남편은 나를 상대하지 않고 계속 글을 썼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사당(邪黨)이 주입한 삿된 이치로 몇 십 년간 생활했다. 정상적인 생활 상태가 어떤 것인지 그는 잘 알지 못한다. 부부가 서로 다투고 사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는 내가 갑자기 친절하게 말하는 태도에 적응되지 않았지만 만사는 시작이 있어야 한다. 내가 바르면 견지해야 하고 나는 수련인 같아야 한다. 남편은 서서히 적응될 것이다. 수련인의 에너지장은 상서롭고 자비로운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첫걸음을 내딛고 ‘거짓 자아’를 타파한 것이다. 마침내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미안해요’를 말했다. 진정으로 해내면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몇 초 간 미묘한 부분이 있었다. 내가 친절하게 남편을 부르자 음성은 그렇게 순정했다. 그때 자신도 깜짝 놀랐다. 내 목소리는 본래 이렇게 부드럽고 순정하구나. 남편의 딱딱한 말을 듣고 갑자기 울고 싶었다. 나는 그것은 내가 아니고 구우주가 형성된 ‘거짓 자아’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몸부림을 치며 나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염이 발라 곧 제거했다. 순정한 음성, 지금 깨달은 것은 그것이 진정한 자아였다. 몇 초 사이에 다른 공간에 많은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이고 또 느끼지 못한 것도 있다! 사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修在自己) 공은 사부에게 달렸다(功在師父).”[2] 층층마다 모두 사부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지 아래 오늘 ‘거짓 자아’를 찾았다. 정말로 이 관을 넘겼다. 집안일을 정리하고 곧 진상을 알리러 나갔다.

셋째 날 아침에 법공부를 할 때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직접 관계가 있으며, 이 좋지 못한 것을 제거해 버리려면 우선 당신의 이 마음부터 바로잡아야 한다.”[2] 갑자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 마음’을 알게 됐다. 나의 이해로는 수련하지 않는 사람은 속인의 마음이고 수련인은 수련인의 마음이다. 수련하면 속인의 마음을 수련인의 마음으로 바꿔야 한다. 무엇이 수련인의 마음인가? 바로 시시각각 법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고 처리하는 것이다. 그 후 나는 말하는 어투에 주의하고 평온한 심태로 사물을 대하며 그들이 대법의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했다. 되도록 모순을 격화시키지 않고 대법의 아름다움을 펼쳐야 한다. 특히 가정에서 남편이 대법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 가정 분위기는 정상이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파를 두 번 받다

우리집은 평소 파를 사용하지 않아 파를 사지 않는다. 그날 감자를 살 때 3.28위안인데 그는 말했다. “3.5위안에 파를 더 드릴게요.” 나는 좋다고 했다. 그가 파 3개를 가져올 때 마음속으로 좀 불만이었다. ‘내가 0.20위안을 더 주고 고작 작은 파 3개를 더 받아야 하다니.’ 당시 마음이 불편했지만 인연 있는 사람을 만나 진상을 알리러 갔고 이 일을 잊었다.

또 며칠이 지나 나는 더욱 큰 시장에 갔다. 시장에 사람이 붐벼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나는 진상을 알리며 장을 보았다. 채소를 파는 가게에서 젊은 여자를보았는데 낯선 얼굴이었다. 나는 2위안 어치 채소를 구매하고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전혀 다가갈 수 없었다. 그녀는 채소를 저울에 달고 3위안이라고 했다. 그리고나에게 파 2개를 주겠다고 했다. 나는 좋다고 했다. 그녀는 파를 봉투 아래에 넣어주겠다고 했다. 내가 그녀를 보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는 또 봉투를 뒤집어 내게 보여주었다. “당신처럼 성실하게 장사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기억하세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네.” 비록 그녀를 도와 삼퇴해 줄 기회가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예전 나에게 파를 줄 때 불편한 느낌이 생각났다. 동시에 ‘탐욕’이란 말이 눈앞에 떠올랐다. 순간 그런 불편한 마음은 ‘탐욕’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동시에 ‘버리자’를 깨달았다. 0.20위안도 버리지 못하는가? 파 2개를 주어도 탐욕을 내는가? 그것은 무엇인가? 이익지심이다. 이익지심은 제거해야 하기에 없애버리자.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형식을 중시하지 않는다. 나는 각종 형식을 이용하여 아주 깊이 은폐된 당신들의 마음을 폭로하게 하여 그것을 제거해 버린다.”[4] 그런 형식은 당신의 생활 속의 작은 동작, 혹은 순간 불편한 일념 중에 있기에 그런 마음을 없애야 한다. 그런 형식은 마음의 준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세가 높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사람 마음을 닦아버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일상의 사소한 생활에서 한 무더기 집착심을 캐냈다. 정말로 기쁘다! 당신이 집착심만 있으면 사부님께서 각종 방식으로 당신을 도와주신다. 신경을 써야 한다.

사소한 일을 통해 안으로 찾았고 나는 놀랍게도 발견했다. 스스로 자신을 닦을 줄 알게 됐다.

법에 있지 않는 점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시정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 ‘2015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지 설법4-2003년 애틀랜타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뿌리를 캐다’

 

원문발표: 2018년 3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8/3/14/362835.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