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둥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8년에 법을 얻어 지금까지 대법 수련에 대한 인식이 점차 제고됨에 따라 자신이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되는 것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게다가 법을 얻기 전부터 업을 갚으면서 자신을 갈고 닦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의 천식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임파결핵으로 공부도 몇 년 못했기에 열등감이 매우 심했다. 남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사람을 배려할 줄을 몰랐다. 혼인 신고하던 날 나에게 혼자 그의 형수네 집에 가서 밥을 먹으라고 했다. 다 큰 처자가 남의 집에 가서 밥 먹기도 뭣해서 ‘먹었다’ 하고는 빈속에 다른 사람이 밥 먹는걸 봐야 했다.
결혼 후 시어머니께서는 나를 못마땅해 하신데다 손윗동서의 부추김으로 매일같이 트집을 잡았다. 나는 화가 나서 매일 눈물을 흘렸지만 한 번도 집안 허물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고 손윗동서의 험담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 아무리 증오해도 문을 나서면 웃고 떠들면서 남들에게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여 마을에서 두 가지 좋은 명성을 얻었다. 하는 위생이 좋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 넓은 것이다.
어떻게 수련하는지 몰라 가정 시련에 빠지다
천식 때문에 나는 각종 기공을 연마했다. 1998년 6월 6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보서(寶書) ‘전법륜’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마을사람 5명과 함께 파룬궁을 연마했다. 1999년 7.20, 사악한 중국공산당 장쩌민 집단은 대법을 모함하고 대법제자를 박해했다. 다른 4명은 모두 포기하고 나 혼자만 수련을 견지했다.
수련환경이 장쩌민 집단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에 5, 6년 동안 법리가 똑똑하지 않고 심성이 제고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가정 문제에 걸려 늘 남편과 싸웠다. 남편이 말했다. “나는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온 마을에 딱 하나 있는 파룬궁 수련자를 내가 만났어.” 남편에 대한 증오는 혼인 신고하던 그 날부터 쌓여 이혼할 생각이 굴뚝같았다. 남편은 두 차례나 팔을 들고 외쳤다. “파룬궁을 연마한다는데, 아직 멀었군!” 남편이 이렇게 외치자 나는 눈물이 났다. 내가 잘하지 못했다는 걸 안다. 대법제자에게 먹칠을 했다. 나는 대법에 먹칠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일념을 안고 조금씩 참았다.
한 번은 남편이 또 이렇게 팔을 들고 외쳤다. 나는 부뚜막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지만 설거지를 할 마음이 없어졌다. 사발을 잡고 닦으면서 울었다. 남편은 “억울해 죽겠지! 가서 죽어!”하면서 손가락으로 내 이마에 삿대질을 했다. 찬바람을 휙휙 일으키면서 내 마음을 자극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번엔 머리가 땅에 고꾸라져도 이 분노를 참아야지.’ 당시 나는 정말로 해냈다.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해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 이후 가정환경은 좀 바뀌었다.
2007년 나는 유치장에 납치됐다가 나온 후 수련생에게 말했다. “가정 고비는 넘기 쉬워요.” 뜻인즉 가족은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한편이기에 나쁜 경찰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4살 된 손자를 안고 밥을 먹는데 갑자기 남편이 밥상을 엎어버리더니 왼손으로 한 번, 오른손으로 한 번 뺨을 때리면서 말했다. “이 따귀는 당신 아버지를 대신해 당신을 훈계하는 것이고, 이 따귀는 당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훈계하는 거야!” 그리고는 가버렸다. 딱 봐도 본인이 아니라 마에게 통제된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유치장에서 나올 때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 갑자기 무슨 일이지? 결혼 후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감히 나를 때리지 못했는데 오늘은 손찌검을 하다니! 이런 천대를 받다니!’ 나는 화를 참을 수 없어 손자를 데리고 아들 집에 가 있으려고 했다.
며느리는 문을 열고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아이고, 어떻게 다 오셨네요!” 집에 들어가 보니 안사돈도 와 계셨다. 손자가 막 아빠에게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때렸다고 말하려 할 때 나는 몰래 손자를 쿡 찔렀다. 그들이 이 일을 알게 할 수 없었다. 아들 집에서 이틀 묵었는데 대법 책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아니지, 집에 가서 직면해야지. 법공부를 해야 해. 이 이치는 그래도 안다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법공부하고 발정념을 했다. 금방 입장(立掌)하자 남편이 밖에서 몽둥이를 들고 ‘탕’소리가 나게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놀랐지만 입장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손자를 보니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신 것이다. 나는 계속 발정념을 했다. 어느 날 예전에 내가 했던 ‘가정의 고비는 넘기 쉬워요’ 이 말을 내 머릿속에 알려주셨다. 유치장에서 나온 후 이 생각을 했었다. 사람의 마음과 정을 포함한 이 일념에 구세력이 빈틈을 탄 것이다.
실제 행동으로 수련환경을 바꾸다
2005년 줄곧 나를 못마땅해 하시던 시어머니는 연세가 드셔서 우리 5형제가 교대로 모셨다. 나는 이전의 울분을 버리고 정성을 다해 보살펴드렸다. 시어머니도 나에게 잘 대해주셨다. 시어머니께서는 내가 지은 식사를 잘 드셨다. 위장이 안 좋으셨는데 많이 드시고 나면 화장실 가면서 옷에 실례했다. 그래도 나는 화내지 않고 수습해드렸다. 시어머니는 젊었을 때 영악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겨 매우 큰 업을 쌓았다. 그리하여 연세가 들자 많은 고통을 겪었다.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온 몸의 뼈마디가 아팠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안쓰러워 밥을 떠먹이면서 울었다. 시어머니 몸에 물집이 생겼는데 터지면 여린 살이 보이고 살이 없는 곳은 뼈가 보였다. 마음이 아팠다. 산속의 띠풀 솜털을 태워 참기름에 개어 환부에 바르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손윗동서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동서가 안 간다고 해서 나는 혼자 자전거를 타고 산에 갔다. 한 겨울이라 띠풀 솜털은 바람에 날려 가버리고 없었다. 겨우 한 무더기의 고구마 넝쿨 밑에서 띠풀 솜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처방대로 발랐더니 과연 효과가 좋았다. 이후에 시누이가 약을 사 와서 솜털을 뜯으러 가지 않아도 되었다.
시어머니는 세상을 뜨기 1년여 전에 치매에 걸리셔서 나와 막내딸 외에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셨다. 자주 나에게 말씀하신다. “자네 살 빠진 거 봐, 집안일을 혼자 다 했네! 이젠 하지마, (남편에게) 시켜!” 이웃들은 나를 보면 말한다. “자네 형님의 화제가 바뀌었다네.” 이전에 손윗동서는 늘 시어머니 앞에서 시비를 조장했고 시어머니는 툭하면 구정물을 내 집 문 앞에 뿌렸다. 시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전후 며칠은 손아랫동서가 시중을 들어야 할 차례였다. 자연히 발인하고 봉분제를 지내는 등은 모두 손아랫동서가 담당해야 했지만 갑자기 이상하게 얼굴도 안 내밀었다. 외지에서 서둘러 돌아온 형제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잠잘 곳을 마련해야 했다. 나는 지식은 없지만 손끝은 여물어 갑자기 6, 7명 식구가 불었지만 각자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었다. 시어머니가 세상 뜨기 전과 똑같았다.
형제들은 매우 감동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아버님께서 세상 뜨셨을 때 나는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기에 성묘하러 갔어요. 오늘 어머님께서 세상 뜨셨는데 성묘하러 안 가겠습니다. 거리에도 안 나가겠습니다(어른이 세상을 뜨면 꿇어 앉아 울면서 보내드림).” 큰 아주버님이 말했다. “그래요, 제수씨네 규정대로 해요.” 나는 이어서 말했다. “큰 형님(남편의 누나)이 들고 있는 검은 테(건대)도 안 하겠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동의했다. 시댁 식구들은 모두 ‘뾰족한 사람’들로 사회적 지위와 지식수준은 내가 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처신이 조심스럽고 엄숙하다. 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대법의 위력이다.
3년 후 어느 날 남편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가장 좋은 점은 마음이 착한 거야.” 나는 시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전후 7일간 손아랫동서가 왜 갑자기 손을 놓았는지 알게 됐다. 전반 공간장에서 표현되는 것은 대법제자를 시험하는 큰 연공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아침 연공을 견지했다. 농번기에는 새벽 4시면 일을 나가야 했기에 2시에 일어나 연공했다. 겨울에는 남편에게 지장을 줄까 봐 서쪽 방에 가서 연공했다. 남편이 자고 있는 방에 불도 넣었다. 시누이(교사)는 연속 사흘 지켜보더니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올케, 올케는 매일 이 시간에 일어나?” “네.” “매일 연공 해?” “네, 매일 해요.” 시누이는 매우 감격했다. “올케, 나는 올케가 이런 사람인줄 몰랐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한 사람의 의지가 확고하면 반드시 성공할거야!” 나는 시누이가 아직도 대법에 의문스러워 하는 점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지금 이미 대법제자의 견지에 감동했다.
지금 남편 형제네 가족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삼퇴’했다. 큰 아주버님은 어려서부터 집안 성분이 안 좋아 훌륭한 인물임에도 사당(邪黨)의 제한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해 사당을 극도로 미워했다. 그런데 40여 세에 입당했고 탈퇴를 권하자 뭐라고 해도 거부했다. 연속 세 번 권해서야 탈퇴시켰다. 우리집에서 가장 어렵게 탈퇴시킨 사람이다. 또 한 사람은 이 시누이의 남편이다. 처음 탈퇴를 권할 때 그는 말했다. “말은 잘하는데 해낼 수 있어요?” 이후에 또 권하자 흔쾌히 탈퇴했다.
그가 변한 건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여러 해 수련하면서 나는 혼자 나가서 현수막을 걸고 스티커를 붙였다. 남편은 종래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나가려는데 남편이 말했다. “오늘은 나가지 마.” 그리고 문을 잠그고 키를 주지 않았다. 키를 달라고 하자 남편이 말했다. “나갈 수 있으면 나가고 나가지 못하면 가지 마!” 나는 시련이 온 걸 알았다. 그해 나는 59세였는데 설마하니 담을 넘어야 하는가? 나는 남편을 잘 안다. 이번에 못 나가면 후에는 더욱 어렵다.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지. 자료를 담은 외투를 담장 밖으로 던지고 담장에 올라탔다. 남편은 불을 끈 집안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왔다 갔다 했다. 나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나는 담장에서 뛰어내렸다. 벽돌 한 장이 내 팔에 떨어졌다.
그날 저녁, 갖고 간 자료를 모두 배포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어느 황무지에서 길을 잃었다. 한 길 넘는 잡초 속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생각했다. ‘나는 대법제자이고 사부님이 계신다.’ 단번에 작은 틈을 찾아내 빠져 나왔다.
집에 돌아오니 몇 시 인지도 몰랐고 문은 아직 잠겨 있었다. 나는 담장 밖 벽돌을 딛고 담장 위에 올라왔다. 그러다 생각했다. ‘대법제자가 담을 넘어 집에 들어온다? 정념이 없구나.’ 내려갔다. 사람의 이치로 담을 넘으면 안 되지. 정념으로 문을 열게 해야 해. 자료를 배포하느라 강을 건너느라 옷이 푹 젖었고 저녁이라 좀 추웠다. 나는 외투로 몸을 감쌌다. 신발에는 온통 진흙이었다. 조금 지나자 남편이 문을 열었다.
나중에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저녁에 나가는 건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서예요. 당신에게 미안한 일을 하지 않았어요. 나를 간섭하지 말아요. 간섭해도 안 들을 거니까!” 남편이 말했다. “상관하고 싶지도 않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를까 봐!” 그 후 내 가정환경은 철저히 바로잡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함께 내가 길을 잃었던 황무지를 지나게 됐다. 나는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남편은 부동산에서 개발하려는 곳이라며 왜 묻냐고 했다. 나는 그날 밤 여기에서 길을 잃었었다고 말했다. 남편이 말했다. “아줌마가 온 밤을 밖에서 다니고 말이야. 측천무후(여황제)보다 능력이 좋구만!”
그 후부터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면 남편은 더는 간섭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야 했는데 내 연공에 지장주지 않으려고 자신이 밥을 해서 먹었다. 어떤 때는 나에게도 해주려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했다.
나는 남편이 이르든 늦든 대법수련에 들어올 것이란 걸 안다. 어떤 때는 밥을 먹다가 갑자기 말한다. “이상하네. 머릿속에 갑자기 네 구절이 생각나. 7글자가 한 구절이야.” “사부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알려주시는 건 아닌가요?” 연속 3번 메모를 했지만 건사를 못해 잃어버렸다. 대략적인 뜻은 인간 세상은 모두 실없는 것인데 아직도 빨리 수련하지 않느냐는 뜻이다. 남편도 연공을 하려고 맘먹었었지만 행동에 옮기진 못했다. 지금 남편은 말한다. “나는 복이 있어. 주변 10여 리에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인데 내가 만났어.”
지금 남편은 대법 책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지식이 없어 수련할 줄 모르지만 남편이 내 거울이라는 건 안다. 그가 변한 건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내가 변하지 않았으면 남편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온 마을에 10명만 ‘삼퇴’하지 않았다
2005년 대법제자가 세인에게 ‘삼퇴’를 권하기 시작할 때 나는 우리 마을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권했다. 세 집, 다섯 집 다니고 낙담했다. 이후에 생각했다. 내가 진상을 알렸는데 그가 탈퇴하지 않은 건 내 책임이 아니지. 내가 알리지 않고 그가 도태되면 그건 내 책임이야. 이 일념으로 다시 힘을 내서 집집마다 다녔다.
우리 마을에 170여 호가 있는데 모두 두 번씩 다녀왔다. 지금까지 10명만 ‘삼퇴’하지 않았다.
처음 ‘삼퇴’를 권할 때 그 어려움이란! 모든 사람이 사당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우리 앞집 이웃에게 탈퇴를 권했는데 거부하자 나는 집에 돌아와 사흘을 울었다.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울고 난 후 벽에 기대어 묵묵히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는 집에 있을 수 없어요. 빨래를 하러 갈 건데 사부님께서 인연 있는 사람을 저에게 보내주세요.”
금방 우물가에 도착하자 한 사람이 옷가지를 들고 빨래를 하러 왔다. 내가 권하자 그녀는 곧 탈퇴하고 떠났다. 또 한 사람이 왔는데 이전에 그녀에게 권했지만 탈퇴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권하자마자 탈퇴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도와주셨다는 걸 안다.
한번은 마을 서기가 촌 위원회 주변에 스티커를 붙이지 못하게 했다. 그가 말했다. “자네가 붙이면 나는 푸른 페인트로 칠해야 하네.” 나는 붙이지 않았다. 위에서 검사하러 와서 말했다. ‘앞마을에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있어 곳곳에 스티커를 붙였던데 이 마을에는 없네.’ 내가 들으니 잘못됐다. 서기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이 지역 중생이 이로 인해 누락되면 안 된다. 나는 촌 위원회 주변에도 붙이고 나서 서기네 집에 가서 말했다. “내가 스티커를 붙였는데 서기가 지우면 그건 서기의 인식이지만 내가 중생을 구도하지 못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이웃이 나에게 말했다. “서기가 사람들 앞에서 보증했어요. 아주머니가 어떤 요구를 제기해도 다 들어준답니다. 아주머니가 온 마을의 선한 일면을 이끌어냈다고요. 특히 위생은 어디나 깨끗하답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알아요.” 만약 사부님과 대법이 없다면 나처럼 지식도 없고 스스로 열등하게 생각하고 가정 모순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시골 여성이 어떻게 세인에게 찬양을 받겠는가!
나에게는 닦아버리지 못한 사람 마음이 아직도 매우 많다. 예를 들면 법을 얻기 전에 남편과 감정이 좋지 않아 아들에게 의존했는데 아들에 대한 정이 매우 깊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후천적으로 형성한 관념으로 앞으로 나의 수련과정에서 제거해 버려야 할 속인의 마음이다. 사부님께서 계시고 법이 있기에 이러한 것은 내가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구하는 사명을 완성하는 걸 막을 수 없다.
줄곧 자신의 수련과정을 써내려 했지만 쓸 줄 몰랐다. 오늘 내가 구술하고 수련생이 필기해 여러분과 교류한다.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원문발표: 2017년 12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2/26/3579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