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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병’의 가상을 담론하다

글/ 장쑤 대법제자

[밍후이왕] 정법 노정이 법정인간 시기로 넘어감에 따라 세인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이 갈수록 다급한데, ‘병’의 가상도 수련생들이 진상을 알리는 데 내외적으로 교란한다. 우리 지역 어떤 수련생은 ‘병’의 가상에 장기간 교란당해 나오지 못한다. 일부 수련생은 ‘병업’ 난관에 있는 수련생을 도울 때 습관적으로 그의 사람 마음을 지적하고 안으로 찾게 도와준다고 한다. 개인 인식으로는 ‘병업’ 난관에 있는 수련생에게 이런 ‘도움’은 구세력의 배치를 승인하게 해 구세력을 부정하는 데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최근 나는 ‘병업’에 시달리는 수련생과 여러 차례 교류할 기회가 있었다. 교류 중에 나는 그 수련생의 느낌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일부 법리에 대한 나의 인식을 이야기했다. 그 수련생은 부담이 줄었다고 말했으며 건강이 좋아졌다. 이런 교류를 통해 나는 안으로 찾고 몇 가지 체험을 총괄해냈다. 수련생 여러분과 공동 정진하고 구세력의 교란을 부정하기 위해서다. 적절하지 못한 곳은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 바란다.

1. 수련생과 교류하는 목적은 정념을 강화하고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다. 오직 법만이 할 수 있다. 자신이 정념이 족할 때 수련생과의 교류 상태가 좋을 수 있다. 교류 과정에 그 수련생의 인식을 잘 듣고 동시에 자신을 보고 닦으며 정념을 확고히 해 법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 마음을 지닌 ‘도움과 이해’는 수련생을 난관 속으로 더욱 깊게 빠뜨릴 수 있다.

나와 교류한 한 수련생은 장기간 난 중에 처해 있었다. 현지 많은 수련생이 같이 교류하고 법공부하며 그녀의 사람 마음과 관념을 지적했다. 그 수련생은 여러 번 돌파하려 했는데 모두 위중한 ‘병업’ 상태가 나타나 병원에 가서 응급치료를 받고 약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움’을 줬던 수련생 중 질책과 불평하는 사람이 있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어 더는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여러 번 반복되는 고통으로 그 수련생도 더는 ‘병업’ 난관을 돌파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안으로 찾고 수년 전에 가족 수련생을 도와 병업에서 벗어난 일이 생각났다. 나도 그런 빨리 나았으면 하는 집착이 있어 가족 수련생을 ‘도와’ 사람 마음을 지적해주고 함께 법공부하며 신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갈수록 심해지고 자신의 정서도 점점 나빠졌다. 매번 가족 수련생에게 사람의 정, 혈당이 높다는 관념이 있었다. ‘생사를 내려놓아야 한다’ 등을 지적하면 가족 수련생도 내 말을 받아들여 자신이 무슨 사람 마음, 정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런 소위 사람 마음과 정은 모두 교란이고 그들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법리가 명백하지 않아 무의식중에 구세력이 배치한 난을 승인했다. 나의 ‘도움’도 구세력의 배치 중 일부였다. 나는 이런 사람 마음과 ‘병업’ 중에 있는 가족 수련생을 분리하지 못했고, 이런 사람 마음도 구세력이 강화시켰다는 것을 보아내지 못해 가족 수련생이 일단 박해를 승인한 후 반박해 하도록 해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하는 난도를 높여 놓았다.

2. 난 중에 있는 수련생은 민감할 수 있으니 교류할 때 방법과 어투를 조심해야 한다. 어떤 수련생은 도와서 교류한다면서 “그 수련생은 무슨 병업이든 다 넘어갔다. 너는 병이 아닌 줄 알면서도 왜 그것을 승인하는가?”라고 한다. 이런 질책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류 중에서 ‘병업’에 교란당하는 수련생은 자신이 장기간 난 속에 처해 있어 이미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수련생의 고초를 생각하고 질책을 삼가야 한다.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며 동시에 이 난은 구세력이 조성한 가상이고 ‘넘지 못한다’는 이 일념은 구세력이 강제로 그에게 가해 준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럼 여러분 생각해 보라. 인류 사회,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이 일체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인가? 현재 매 대법제자의 일거일동, 일언일행, 심지어 당신이 사색하는 문제마저 모두 간단한 것이 아니다. 장래에 당신들은 모두 매우 세밀하게 배치된 것임을 볼 것인데, 내가 배치한 것이 아니며, 이는 이런 구세력(舊勢力)이 배치한 것이다.”[1]

“당신이 정법의 이 길을 잘 걷고, 수련 속에서 당신이 당신의 속박을 벗어나 당신의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고, 정념 속에서 중생을 구도할 수 있으며, 정념으로 당신이 마주한 일체를 대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위덕이다.”[2]

사부님의 법을 외워서 들려줌으로써 정면으로 인도해, 그 수련생이 자아를 돌파하도록 법으로 정념을 가지해 주고 다시 ‘병업’ 교란 중에서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을 인정해, 구세력의 ‘병업’ 배치를 법에서 부정한다. 이렇게 법에서 교류한 후 법의 위력이 그 수련생의 몸에서 나타났다. 그가 당일 나가서 진상을 알릴 때 힘없어 끌고 다니던 한쪽 다리가 정상으로 회복됐다. 사실은 본래 가상이었던 것이다.

3. 병업 중 수련생을 인도해 사람 마음은 자신이 아니라고 분별해준다. 우리는 정법 중의 한 입자이다. 대법이 만든 생명은 무사무아하고 금강부동하다. 우리는 조사정법, 중생구도 하러 왔다. 아무도 고험하러 올 자격이 없다. 누가 움직이면 누구의 죄이다. 예를 들어 교류 중에서 그는 안으로 찾는다며 가족에 대한 정, 두려운 마음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것은 정의 교란, 두려운 요소가 교란하는 것이지 그것들이 당신은 아니라고 했다. 이런 것은 구세력이 강화시켜 당신에게 관을 넘으라는 건데, 당신이 정이 당신이라고, 두려움이 당신이라고 승인하게 해 구세력은 이 틈을 타 난을 배치하고 당신을 고험하지만, 진정한 당신은 원래 이런 사람 마음이 없다고 알려준다.

“법에서 수련하지 않고, 박해를 감당하는 자체로는 더욱 높게 수련할 방법이 없으며, 대법제자의 표준엔 더욱 도달하지 못한다. 구세력(舊勢力), 그것이 제공한 이런 이른바 환경을 승인하지 않는 것은, 정법 중에서 내가 일체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대법에 동화되게 할 것이며, 이러한 사악 중에서 대법제자를 단련시키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법은 반드시 성공하고, 대법제자는 반드시 성취된다. 그것들이 이렇게 하여도 나의 제자는 성취될 수 있고, 그것들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나의 제자는 역시 성취될 수 있는바, 단지 사악이 기어코 이렇게 하려고 했을 뿐이다. 이렇게 되면 정법에 대하여 교란을 하게 될 것이며, 그것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는 중에서 죄를 범하게 할 것이고, 그것들 자신을 포함하여 수많은 생명과 세인으로 하여금 도태되게 할 것이다.”[3]

이런 사람 마음은 자신이 아니라 구세력이 강제로 가한 것이라는 것을 구별하면, 구세력의 배치를 해체하는데 유력하다. 구세력의 배치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은 개인 수련뿐만이 아니라 조사정법 중생구도하기 위해서다. 만약 구세력의 배치와 난관을 승인하면 ‘감당해 지나갔다’고 해도 구세력의 배치에 따라간 것이라, 많은 생명과 세인이 대법에 죄를 지어 도태되게 하고 사부님의 정법에 장애를 조성한다. 이것이 두려운 요소의 교란을 해체하고 안전에도 주의해야 하는 원인이다. 우리가 사부님의 배치에 따라 바르게 하고 법에서 제고해야만 구세력의 배치를 철저히 부정할 수 있다.

4. 교류 중에서 상대 수련생의 집착에 집착하지 않고, 그 수련생 신체의 부정확한 상태를 해결하는 데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전체에서 개인 법리에 대한 인식을 말하며 어떠어떠하게 하라고 급하게 구체적으로 알려주려 하지 않는다. 그 수련생이 스스로 깨달아서 자신이 자신에게 요구해야만 잘해낼 수 있다. 만약 확실히 우리의 의견이 필요하다면 개인이 신체에 부정확한 상태가 나타났을 때 어떻게 제거했는지 체험을 말해주면 된다.

예: 한번은 출근 중 갑자기 허리가 아파 손으로 만져보니 돌덩이 하나가 허리에 있는 것 같았다. 이따위로 나를 고험하겠다고? 나는 웃긴다는 생각까지 들었고 휴식시간에 발정념을 했다. 돌덩이는 허리에서 왔다 갔다 했다. 속인 동료가 무슨 병이라며 꽤 중하다고 했으나 나는 마음에 두지 않아 무슨 병명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집에 가서 안으로 찾아보니 그때 일이 바빠 법공부와 연공을 아주 적게 했다. 바로 잡은 후 이튿날 돌덩이가 허리 한쪽 옆으로 밀려나 부드러워 졌으며 3일째는 느낌이 없었고 신경 쓰지 않아 잊어버렸다.

구세력이 교란하고 박해할 수 있던 것은 우리가 법리에서 명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동에서 바르게 하지 못해 구세력이 틈을 탄 것이다. 우리가 교란당하는 수련생의 병업이 가상이라고 여긴다면 함께 병업 가상의 교란을 승인하지 말아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가상에 각종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가? 이 각종 사람 마음은 구세력이 우리에게 강제로 가한 마음의 병이 아닌가? 다른 수련생에게 어떠한 부정확한 병업 상태가 나타나도 우리는 이런 병업 가상에 이끌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구세력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수련생에게 조성한 고난의 표현도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강제로 가한 마음의 병을 핑계로 이용해 수련생의 신체적 난을 더 엄중하게 하는 것도 승인하지 않는다.

5. 구세력을 해체하고 ‘박해’ 개념을 내려놓아 수련생과 함께 내외의 사악한 요소의 교란을 제거해, 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장애를 제거해버린다.

“이 구세력은 역사상 아주 많은 일을 배치했는데, 극히 주도면밀하게 했다. 그것들은 자신이 배치한 일에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해 지난번 지구에서 이미 한 번 연습을 했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그것들이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들이 하고자 하는 것에서 손을 놓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만약 정념(正念)이 매우 충족하고 또 우주의 이치에 부합되면, 구우주(舊宇宙)든 신우주(新宇宙)든 모두 이런 이치가 있는바, 한 생명의 선택은 그 자신에 의해 결정되며, 역사상에서 그가 어떤 소원을 빌었든 결정적인 순간에는 여전히 그 자신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기에는 정반(正反) 두 개 방면을 포함하며 모두 이러하다.”[4] 우리는 대법의 요구대로 잘하고, 법에서 승화하며,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해야만 진정으로 구세력을 철저히 해체할 수 있다.

교류 중에서 어떤 수련생은 ‘정법이 이미 법정인간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아직도 이렇게 사악한가’라고 여긴다. 사악이 갈수록 적어지기는 하지만 악당이 아직 존재하고 사악이 존재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보고 자신을 수련하며 자신이 어떤 요소에 교란되어 내려놓지 못하는지 찾아야 한다. 만약 법에서 인식한다면 아직도 생사의 개념이 있겠는가? 고생의 개념이 있겠는가? ‘박해’의 개념이 있겠는가? “오로지 당신이 배우기만 하면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고, 오로지 당신이 수련만 하면, 오로지 당신이 법에서 법을 인식할 수만 있으면, 그러면 못 해낼 것이 없다.”[1]

우리가 법에서 정념을 확고히 하고 전체적으로 승화한다면 ‘병업’ 가상 수련생과 함께 정념으로 사악 요소의 교란을 제거해, 정법의 최후시각에 진정으로 조사정법하여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2-미국 플로리다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4-2003년 애틀랜타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5-2004년 미국 서부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2-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7년 12월 2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2/21/3564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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