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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생각과 정념에 대해 재인식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련의 길에서 한동안 ‘무엇이 사람의 생각이고 무엇이 정념인가’에 대해서 늘 표면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었다. 수련중 하나 또 하나의 사람 마음에 대해 늘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오늘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발견했는가, 어떤 마음을 제거했는가를 세었다. 자신에게 나타난 위사위아(爲私爲我)한 생각과 상태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라 무기력했다. 수련을 잘하지 못했다고 자책했는데 이는 자신을 극도로 소침하고 정진하지 못하게 했다. 이 ‘사(私)’를 전혀 건드리지 못하고 ‘자아’를 개변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하지만 법에서 목적 없이, 보답을 바라지 않고 한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할 때, 또는 무조건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줄 때 자신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사람속의 일체를 볼 때 더는 소극적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사람을 초월한 정념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과 이기적인 나를 파헤치는 법리가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1]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안으로 찾는 중에서 발견했다. 자신이 항상 반복해서 닦아버리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기적인 마음이고, 가장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 바로 자아였다. ‘사(私)’는 사람 마음의 배후의 조종자이고 사람의 마음은 ‘사(私)’를 위하는 것이다. ‘사’의 자아보호 상태는 바로 애써 감추는 것으로 폭로를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이 말하지 못하게 하며 건드리는 건 더욱 못하게 한다. 수련 중에서 자신이 속인 중에서 명리정이 손실을 입고 자아가 상처를 받았다는 걸 발견하기만 하면 자신의 사람 마음은 아파서 견디기 힘들어 한다. 후회하는 마음, 자책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불평하는 마음이 전부 올라오는데 어떤 때는 정서가 통제를 잃고 마성(魔性)이 폭발한다. 그리고 장소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분통을 터뜨리는데 직성이 풀려야 조용해진다. 왜 이러냐고 여러 차례 고통스럽게 자신에게 물었다. 대량으로 법공부하고 안으로 뿌리를 판 후 드디어 알게 됐다. 자신의 매 한 가지 마음은 모두 ‘사’와 이어졌는데 ‘사’는 구우주의 이기적인 속성과 구세력의 배치에서 근원한 것이었다. 사람의 몸에 이기적인 일체는 모두 그것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와 대응관계가 있다. 때문에 수련 중에서 사람의 마음은 제거하기 어렵고 철저히 근절하기 어렵다. ‘사’는 구세력에 의해 사람의 자아 중에 배치되어 사람의 선천적인 선한 본성을 포위하고 속박해 자비로운 불성(佛性)과 홍대한 서약도 ‘사’에 의해 격리되게 하였다. ‘사’의 존재로 사람은 가장 근본적인 이익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가장 근본적인 집착을 내려놓지 못하며 최종적으로 사람의 신앙은 더 이상 신성하지 않고 수련하는 사람이 누락 없이 진정으로 원만하지 못하게 한다. ‘위사위아’야말로 우리 수련의 길에 근본적인 집착이다! 구세력은 그것을 이용해 우리가 사람의 껍질에서 걸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명석하고 순수하게 조사정법을 하여 서약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며, 그것을 이용해 정법을 교란하고 제지하며 정법의 적이 되고, 그것을 이용해 박해 방식으로 광적으로 정법시기 대법제자를 고험했다.

동시에 다양한 사람의 마음과 집착을 이용해 자아를 강화하고 사람 속의 자아를 더욱 두드러지게 함으로써 대법 법리로 안으로 찾지 못하게 한다. 수련 중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 일반인과 똑같음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말하지 않으면 누가 몰라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강렬한 배척심과 질투심이 있어 수련생과 교류할 때 자주 에둘러 말한다. 나도 모르게 자신이 어떻게 대단하다는 걸 실증한다. 자신은 정념이 어떻게 강하고 어떻게 인식을 잘했으며, 교류 중 자신은 거의 다 옳고 남들은 다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의 선의적인 비평과 권고를 듣지 않았다. 사실은 자아가 강화되어 안으로 찾는 것을 거절하고 폭로되는 걸 두려워하며 법으로 바로 잡힐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나는 그 속에서 깨달았다. 매 하나의 마음은 곧 하나의 고정된 프로그램으로서 구체적으로 사람을 지휘해 그 프로그램 속의 구체적인 일을 하게 한다. 예를 들면 두려운 마음, 그것이 내보내는 것은 바로 공포감과 두려움, 떨거나 무서운 정보다. 그것은 사람에게 커다란 의심이 생겨 신심과 용기를 잃게 한다. 압력 하에 주동적으로 자아와 타협해 ‘사’에 투항하고 심지어 신앙과 진리를 포기하게 한다. 예를 들면 두려운 마음에 보증서, 전향서 등을 쓰는 것이다.

수련 중에서 나는 또 발견했다: 내가 내려놓기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자아 육신의 정과 욕이다. ‘수심단욕(修心斷欲)’ 방면에서 늘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이치로 사고하고 부부생활을 하고 안 하고로 자신이 수련했는지 안 했는지, 수련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구분했다. 단욕하고 자신을 잘 수련하기 위해 사람의 방법을 매우 많이 사용했다. 아내와 각방을 쓰고 아내를 피하고 냉담하게 대하며 심지어 이혼함으로써 철저히 끊으려 했다. 결국 부부 사이가 매우 긴장하게 됐다. 그러다가 위타(爲他) 이 층의 법리를 알고 난 후에야 근본적인 개변이 있게 됐다.

그것은 바로 우선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려는 이기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할 줄 모르고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자아를 내려놓아야 했다. 나는 갑자기 정욕 자체보다 더욱 커다란, 자신의 공간장 중에 은폐되어 바로잡히지 못하는 ‘사(私)’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러한 변이된 부분을 찾아낸 후 욕망을 통제하고 자신의 공간장을 깨끗이 청리하기 시작했다. 더는 정욕을 하늘이 자신에게 준 천경지의(天經地義)의 하사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을 마(魔)로 대하고 발정념을 했다. 그것이 자신의 신체에 어떠한 교란 작용도 일으키지 못하게 했다. 동시에 아내를 구도해야 할 생명으로 대하고 그녀를 위해 발정념을 했다. 이리하여 나만 무욕무구(無欲無求)하여 부부생활을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내도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를 위하는’ 생각이 강할수록 자신의 공간장은 평온하고 모든 것이 조화롭고 자연스러웠다.

정념과 사람의 생각, 진아(眞我)와 이기적인 나는 수시로 교전하고 있다. 절대로 서로 섞을 수 없는 것이다. 수련 중에서 일부 수련생이 습관적으로 자신의 성격과 개성, 심지어 마성도 꺼내어 자신의 정념으로 간주하고 극단적으로 자신의 담력을 과시하면서 타인과 자신의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다. 어떤 수련생은 자신도 모르게 사당의 몽둥이로 때리고 모자를 씌우며 사람을 골탕 먹이는 한 세트 사업 방법을 수련 속으로 가져와 진실한 말을 하지 않는데 능동적으로 안으로 자신을 찾는 것은 더욱 없다. 그리고 비뚤게 깨달은 수련생도 있는데 자신이 걸어나와 진상을 알리지 않으면서 다른 수련생이 진상 알리기를 저지하고 작은 집단을 만들어 무슨 ‘고심(高深)한 인식’을 전한다. 완고하게 자아가 어떻게 높다는 것을 추구하는데 모두 자아에 마취된 것으로 자아를 실증하는 것이지 법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다. 구세력이 배치한 ‘사(私)’에 사로잡혀 속인이 되었는데도 각성하지 않는다. 수련생들이여, 얼른 위사위아 속에서 걸어 나오라, 무사무아하게 순수하게 조사정법하고 세인을 구도하자.

이상은 개인이 최근에 수련한 심득 체험으로 부적절한 점은 수련생이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허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佛性無漏)’

원문발표: 2017년 11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1/27/3571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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