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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대법 수련을 지지하다가 나도 수련에 들어오다

글/ 쓰촨 신수련생 판청(凡誠)

[밍후이왕] 나는 2015년 5월에 진정으로 대법수련에 들어선 신수련생이다. 올해 83세이고 퇴직간부다. 아내는 1995년에 대법 수련을 시작했고 전후 7년 감옥살이를 하고 수십 개 고문에 시달렸다. 체중이 예전 60여 킬로그램에서 박해 받아 현재 39킬로그램 밖에 되지 않지만 여전히 자신의 신앙을 견지하고 있다. 한 번도 사악에게 타협하지 않았고 여전히 신앙을 견지하면서 대법 수련의 길을 확고히 걷고 있어 이에 대해 나는 아주 탄복한다.

수련 전, 아내는 건강이 형편없었다. 10여 종의 만성 질병이 있고 성격이 괴팍했으며 재물에 집착했다. 그때 나에 대한 경제권을 꽉 틀어쥐고 있었고 나에게는 주도권이 없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화를 냈지만 그래도 나는 곳곳에서 그녀를 관심하고 보살펴 주었다. 밥을 그녀 사무실에 갖다 주고 겨울에 추워할까 봐 아침밥을 침대 곁에 놓았지만 아내는 여전히 나에게 화를 자주 냈다. 파룬궁을 수련한 후 열 몇 가지 병이 1년 사이에 모두 사라져 신체가 건강해지고 사람이 온화해졌으며 나의 자금 지출에 대해서도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내가 파룬따파를 수련한 과정을 보면서 나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다)’를 직접 목격했다. 비록 수련에 들어서지는 않았지만 대법을 아주 인정했고 기꺼이 아내를 도와 일부 대법 일을 했다.

1. 아내가 감시에서 벗어나 베이징에 호법(護法)하러 가도록 도왔다

1999년 9월, 아내는 대법을 위해 바른 말을 하려고 베이징에 갔다가 납치돼 현지에 15일 구류됐다. 집에 돌아온 후 직장에서는 그녀를 엄밀히 감시하고 미행했다. 아내가 다시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겠다고 하자 나는 그녀가 붙잡힐까 봐 두려워 이미 한 번 갔으니 가지 않은 사람들을 가게 하라고, 교대로 가라고 했다.

당시 상황에서 그녀는 혼자 회사 문을 나가지 못했고 앞뒤 대문에 모두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호해 먼저 옷 등을 다른 수련생 집에 갖다놓은 후 산책하는 형식으로 아내와 함께 문을 나섰다. 아내가 떠난 지 2~3일 될 때 관련 부서는 나에게 그녀 행방을 추궁했다. 아내가 붙잡힐까 봐 감히 베이징에 갔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녀가 두 살 되는 손자를 데리고 시골 고향집에 놀러 갔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즉시 딸에게 통지해 손자를 숨기라고 했다. 그들이 딸집에 찾아가면 탄로 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시골 고향집까지 쫓아갔고 친척 집을 다 찾아다녔다. 그래서 손자를 안사돈에게 보냈고 아무리 울고 보채도 한 주 내내 밖에 나가 놀지 못하게 했다.

2. 아내를 도와 사람을 구하는 여러 항목을 협조

2001년 11월, 불법 노동교양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아내는 감히 집에 있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둘은 딸집에 가 있었고 그 사이 나는 운 좋게 모든 대법경서를 읽었다. 하지만 2002년 5월 그녀는 또 납치됐다. 이로서 나는 연공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대법 수련에 들어서지도 못했다. 그전에 그녀는 ‘대법과 사부님은 결백하다’는 현수막을 인쇄하려 했지만 혼자서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도와 모양을 새기고 칫솔에 인쇄 풀을 묻혀 한 글자 한 글자씩 발랐다. 가끔 한밤까지 하기도 했는데 낮에는 하기 불편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 혼자 호신부 실을 꿰매고 션윈 포장지를 자르고 붙이고 접었다. 또한 진상지폐를 씻고 정리했으며 소책자를 제본하고 진상지폐를 사용하기도 했다.

2015년 수련에 들어선 후 사부님께서는 나의 지혜를 열어주셨다. 진상CD를 굽는 것을 배웠고 가끔 CD표지 인쇄하는 것을 옆에서 지키기도 했다. 2017년 달력은 아내가 책임지고 인쇄했는데 후속 작업을 금방 배운 후 나는 혼자서 구멍을 내고 고리를 뚫으며 종이를 절단하고 스티커를 잘랐다. 이는 사부님의 가지가 없으면 여든 몇 살인 내가 해낼 수 없는 일들이다.

3. 사악의 박해에 동조하지 않고 대법제자를 보호

2002년 아내는 밖에서 연공하다 국가보안대대에 하루 납치됐고 연공 라디오를 몰수당했다. 며칠 뒤 아내와 함께 국가보안대대 대장을 찾아가 석방하라고 하자 대장은 나보고 아내를 잘 지키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아내 건강이 좋아졌는데 내가 뭘 상관하겠어요?”

2002년 아내는 4년 불법 징역형을 선고 받고 집에서 200여 리(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감옥에 갇혔다. 나와 딸은 보러 갈 때 돈과 물건을 갖다 주었다. 아내가 박해 받았을 때 나는 일흔에 가까웠고 옆에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그녀를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동료들은 내게 말했다. “아내가 이렇게 오래 갇혀 있는데 당신은 나이도 있고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이혼하고 새롭게 가정을 이루세요.” 하지만 나는 줄곧 떠나지 않았고 명확하게 친척, 친구에게 말했다. “내가 있으면 아내도 있습니다.” 2006년 아내가 돌아온 후 나는 당일에 바로 연공 테이프를 건네주면서 연공하라고 했다. 당시 아내는 내 행동에 놀라기도, 감동받기도 했다.

2002년 5월, 아내가 납치되고 집을 수색당한 후 나도 현지 국가보안대대에 끌려가 새벽까지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아내가 누구와 만나는지, 누굴 아는지, 집에 누가 오는지 등을 물었는데 나는 모두 비밀을 지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쨌든 대법제자를 보호하려 했다.

2007년 아내는 또 성(省) 세뇌반에 납치돼 6개월 박해를 받았다. 그 기간에 나는 적극적으로 수련생과 협조해 몇 백리 떨어진 세뇌반에 가 있으면서 석방을 요구할 예정이었다. 마침 떠나려 할 때 아내는 현지 세뇌반에 다시 갇혔다. 나는 또 현지 610(파룬궁 박해 전문조직)을 찾아가 석방을 요구했다.

2012년, 아내는 또 납치돼 현지 세뇌반에 갇혔다. 나는 610을 찾아가 사람을 내놓으라면서 말했다. “나 이 나이에 집에 혼자 있고 돌봐줄 사람도 없어요. 당신들이 사람을 내놓지 않으면 나는 당신들 세뇌반에서 살 것이고 옷도 다 준비했습니다. 아내가 나를 돌봐줘야 합니다.” 며칠 뒤 그들은 아내를 풀어주었다.

몇 년 동안 나는 아내를 도와 현지, 외지 수련생을 받아들였고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었다. 아무런 원망도 없이 자발적으로 에어컨이 있는 내 방을 외지 수련생에게 내주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아내가 집에 있을 때 법공부 환경을 위해 우리 집, 두 아들과 딸집을 교대로 제공해주었고 수련생을 위해 슬리퍼를 준비해놓았다. 한동안 우리집을 법공부 환경으로 제공하지 못하게 됐는데 마침 아들이 해마다 밖에서 몇 달 장사를 하기에 집을 세주려 했다. 그래서 나는 “세 주지 말거라. 손자의 학비 6천 위안을 내가 부담할 테니 너희 집 세 값으로 쳐. 그들에게 법공부 장소를 마련해주자”라고 말했다.

현지 610, 국가보안대대, 주민센터, 지역사회 사람들이 집에 와 소란을 피울 때 나는 아내가 연공한 후의 신체적 변화, 겨울에 구치소에서 찬물로 샤워하고 5일 단식한 후 집에 돌아와 밥을 먹은 얘기를 하면서 그들에게 누가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온 사람들은 급급히 말했다. “이런 말들은 절대 밖에 나가서 하지 마세요.”

2007년 여름, 아내는 다른 사람의 배신을 당했고 주민센터, 국가보안대대 요원 7~8명이 아내를 납치하려 했다. 당시 그녀가 집에 없었기에 나는 전화로 친척에게 집에 오지 말라는 말을 그녀에게 전달해달라고 했다. 악인들은 정원에서 잠복하고 감시했다. 나는 많은 민중 앞에서 큰 소리로 그들에게 질문했다. “당신들은 가지 않고 뭘 하려는 거예요?!” 이렇게 악한 자들을 내쫓고 박해를 피했다.

4. 엄숙히 대법 수련을 대하다

원래 나는 혈압이 높았는데 혈압이 90/180이었다. 2015년 5월 수련에 들어선 후 단 한 달 내에 혈압이 정상이 됐다. 그래서 700여 위안 어치 약을 다 버렸고 건강은 예전보다 좋아졌다.

하지만 나는 책을 적게 보고 오직 녹음만 들었으며 발정념을 전혀 하지 않았다. 또 늘 농촌 체험학습을 다니면서 놀고 마작도 했으며 저녁에는 속인TV를 보았다. 엄숙하게 수련을 대하지 않았기에 2016년 10월 식도에 음식 삼키기 힘든 증상이 나타났다.

법공부가 따라가지 못하고 법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기에 속으로 병이라 여겼다. 자식들이 병원에 데려갈까 봐 그들에게 얘기하지 않았고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올해 3월, 구토가 나자 병원에 가서 검사 받고 원인을 알고 싶었다. 검사결과는 식도암 가상이었다. 당시 자신을 연공인으로 여기지 않았고 신사신법하지 못했다. 생각대로 했고 아이들이 치료하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갔다. 치료받을 때는 혈압이 높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다시 정상이 됐는데 이렇게 한 주간 지속됐다. 이상하게 느껴졌고 병원에 가 입원 치료를 받지 말라는 사부님의 점화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의사와 아들딸이 고집하자 또 그들을 따라갔다. 며칠 치료하고 가지 않겠다고 하자 그들은 한 개 치료 과정은 끝마치자고 했다. 열 몇 번 치료하니 오히려 병원에 가기 전보다 더 심해졌고 음식을 먹을 때 아픈 느낌이 들었다. 4월 6일 돌아온 후 구토 때문에 아주 힘들었고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사부님 설법을 들었는데 한 시간 뒤 밥 한 공기를 먹을 수 있게 됐다. 퇴원하겠다고 하자 병원 측에서는 한 번 더 검사하자고 고집했다. 검사결과는 원래보다 더 심했다. 아들딸들은 나보고 계속 입원치료를 받으라고 했지만 나는 치료받지 않고 퇴원하겠다고 고집했다. 지금은 치료를 중지했지만 신체가 날이 갈수록 좋아진다. 죽만 먹다가 지금은 정상적으로 먹을 수 있고 층계를 오르내릴 때 예전에는 기운이 없었지만 지금은 힘들지 않다. 불편한 증상이 사라져 아들딸도 더 이상 나보고 입원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최근 아내와 이 부분 법을 공부했다. “양의(西醫)가 보면 바로 그곳에 궤양ㆍ종양이 자라며, 골질증식 또는 염증이 생겼다는 등 일부 현상인데, 그것이 이 공간에 반영되면 바로 이런 형식이다. 당신이 그것을 떼어버린 후 당신은 곧 이쪽의 신체에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한다. 무슨 요추추간판탈출증, 골질증식도 당신이 그것을 떼어버리고 그 장(場)을 쳐서 내보내면 당신은 즉시 나아지는 것을 발견한다. 당신이 다시 X선 사진을 찍어보면 아무런 골질증식도 없는데,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그것이 작용을 일으킨 것이다.”[1], “하지만 사람은 약을 먹거나 각종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채용하여, 병을 또 신체 속에 짓눌러 들어가게 한다. 수술 역시 다만 표면물질 공간의 살을 잘라버렸을 뿐, 다른 공간 속의 병업은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현대의학의 기술로는 도무지 움직일 수 없다.”[2] 아내와 교류한 후 법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깊어졌고 신사신법에 대한 정념도 강해졌다. 게다가 수련생들이 도와 발정념 해주었기에 현재 내 상황은 갈수록 좋아진다.

사부님께 감사드리고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 – 병업’

원문발표: 2017년 10월 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신수련생마당>대법과의 연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0/1/3515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