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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은 철저히 나를 개변시켰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대약진’ 시대에 태어났다. 문화대혁명 10년 기간에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쳤다. 1977년 고입 시험을 다시 볼 때 한 중등 전문학교에 합격해 나는 졸업 후 국유기업 재무 부서에 배치되어 일했다.

결혼 후 나는 또 성인학교 시험을 보고 3년을 자습해 전문대 졸업장을 받았고 이어서 초급과 중급 전문직으로 승진했다.

일도 바쁘고 학업의 압력도 있으며 아이도 어리고 가사도 힘들어 피로가 쌓여 온갖 병이 찾아왔다. 심한 신경쇠약으로 매일 ‘안정제’로 잠을 청해야 했다. 원래 있던 류머티스 관절염은 갈수록 심해졌다. 삼복에도 긴팔과 긴바지를 입어야 하고 선풍기 바람을 쐴 수 없으며 에어컨을 틀지 못했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통증은 더욱 참기 힘들었다. 사흘마다 열이 나서 한약, 양약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모르지만 치유되지 않았다.

인근 민간에 류머티스 관절염을 전문적으로 고치는 의사가 있다고 해서 약을 한 보따리를 사가지고 왔다. 4~5일 지나도 아무런 좋아진 느낌이 없고 위장이 아파서 복용을 중단해야 했다.

나중에 기공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들어서 나는 한 가지 기공을 배웠으나 소용이 없었다. 30세가 넘은 나는 직장보건실에서 유명한 환자였다. 사는 게 고달프고 힘들었다.

1998년 신년 기간 나는 남편과 함께 남편 동료 집에 갔다. 그 집 부부는 모두 파룬궁을 수련하는데 그때 수련생 몇 명이 함께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매우 평온하고 피부가 부드러우며 흰색에 붉은빛이 돌았다. 그들은 나에게 파룬궁의 건강 효과와 수련체험을 말해주었다. 그 순간 즉시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기로 결심했다. 이튿날부터 나는 매일 그 집에 가서 법공부하고 연공했다. 수개월 후 몸이 가벼운 것을 느끼고 아프지 않았으며 신경쇠약도 나았고 눕기만 하면 잠이 들 수 있었는데 머리도 몽롱하지 않고 정신도 갈수록 좋아졌다. 이렇게 수년간 치유되지 않던 난치병이 파룬궁을 수련한지 몇 달 만에 다 나았다.

나중에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내 상황을 말해주었더니 그녀는 “네가 치마를 입은 것 보면 류머티스 관절염이 나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예전에 너는 치마를 입지 못했잖아. 파룬궁은 정말 좋구나”라고 말했다.

그렇다. 17년간 나는 약 한 알도 먹지 않고 주사도 한번 맞지 않았는데 몸은 갈수록 좋아졌다. 우리 이 5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무신론 교육을 받고 투쟁철학을 주입당했다. 여러 번 사람을 괴롭히는 운동을 겪었고 매일 비판하고 괴롭히는 것이 일이었다. 유가사상을 우리는 봉건미신으로 비판해 무너뜨리고 부패한 것이라고 했다. 중국 5천년 문명을 4가지 낡은 것(四舊)으로 삼아 제거하고 오직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 갔는데 사상이 경직되어 다른 이념과 학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병을 얻고 도처에서 명의를 찾던 상황에서 파룬궁을 접촉했다. 심신의 변화가 경직된 내 관념을 철저히 개변시켰다. 그리하여 이 여러 해 동안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탄압하든 나는 대법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 진선인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모순 중에서 자신을 찾으며 명예와 이익을 점차 담담히 여겼다. 연말 평가에서 나는 영예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며 이익 앞에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98년에 우리 기업은 경영이 잘 되지 않아 직원 월급을 몇 달이나 제대로 주지 못하며 액수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자금이 심하게 부족했다. 당시 전국에서는 한단(邯鄲) 강철공장의 경험을 널리 보급하고 있었다. 가격을 비교해 구매하고 시장으로 들어가며 원가를 낮췄다. 구매 원가를 낮추기 위해 재무부와 구매부는 함께 가격 심사팀을 만들었는데 나는 그 팀에 편성됐다.

어느 날 저녁 어느 거래처 사장님이 선물을 들고 우리집에 찾아왔다. 그때 나는 다른 수련생 집에서 법공부를 하고 있었고 끝나고 집에 오니 그 사람은 이미 가고 없었다. 나는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르고 집도 몰라 물건을 되돌려줄 수 없었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은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는 이치를 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얻으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 덕이다. 그리하여 나는 선물마다 4백 위안으로 삼아 봉투에 담았다. 편지도 함께 적어 넣었다.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니 당신의 물건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귀사의 물건이 좋고 가격이 적당하면 우리는 우선 귀사의 것을 고려할 것입니다. 이 몇 년간 회사 경영이 좋지 않아 비용 지불을 심하게 연체했습니다. 우리가 오히려 당신들의 지지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선물은 받지 않지만 절대로 괴롭히지 않을 것이며 일에도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이튿날 그 사람이 업무를 처리하러 와서 편지를 전해주었다. 그는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하다가 편지를 읽은 후 매우 감동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디에서도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직장에서는 좋은 직원, 가정에서는 부모의 좋은 자녀, 자녀의 좋은 부모, 남편(부인)의 좋은 배우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시아버님은 80여세 고령이고 중풍을 맞은 지 10여 년이 되어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신다. 시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평소에 도우미가 돌보고 있었다. 2008년에 도우미 아줌마가 건강이 좋지 않아 일을 그만뒀다. 남편과 나는 상의해서 시아버님을 우리집에 모셔왔다. 남편의 직장이 파산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 1년 내내 휴일도 없이 일을 해 집안일은 전부 나 혼자 해야 했다. 시아버님은 침대에서 대소변을 봐서 이불에 자주 묻혔고 소화계 질병으로 온몸에 구토를 하기 일쑤였다. 나는 연공인의 평화로움과 평정한 심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세심히 돌보고 제때에 씻고 갈아주며 깨끗이 치웠다. 특히 저녁에 가래를 뱉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가서 파내주어 질식을 막았다.

시아버님은 또 심폐, 위장, 만성기관기염, 비뇨계통 질병이 있어 자주 응급실에 실려 가신다. 남편이 돌아와 휴식하게 하려고 나는 혼자서 밤새 보살펴드린다. 의사와 병실에서는 내가 딸인 줄 아는데 며느리라고 하면 믿지 않는다. 내 친구는 형제들이 번갈아 모셔야 한다며 너는 너무 쉬운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지금은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디에서든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어, 게다가 형님(남편의 누나)도 건강이 줄곧 좋지 않고 연세도 많으셔. 여동생, 남동생도 직장일이 다 바쁘지. 나는 지금 아주 건강한데 좀 더 많은 대가를 치르면 어때. 게다가 시아버님이 우리집에 오시기를 원해. 또 내가 보살펴드리는 것을 원하시지”라고 말했다.

이 몇 년간 나는 시아버님을 보살피는 책임을 맡아 가족의 근심을 덜었다. 남편 형제들은 모두 고마워하며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인정한다. 자발적으로 시아버님을 보러 와서 시중하며 돈이 있으면 돈을 내고 힘이 있으면 힘을 내며 효도하고 있다. 조카들도 모두 숙모가 본보기를 보였다며 나중에 자신들도 그렇게 효도하겠다고 했다.

17년 수련 여정을 회고해보면 나는 원래 백병으로 고통스러웠고, 승부욕이 강하며, 원망하고 질투하던 데에서 지금은 건강하고 즐거우며 온순 선량하고 관용적으로 변했다. 대법은 나를 철저히 개변시켰고 무한한 혜택을 받게 해 나는 사부님의 은혜에 뭐라고 표현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귀한 세인들이여! 중국공산당 거짓말에 미혹되지 마라! 파룬따파는 불법(佛法) 수련이다. 대법을 선하게 대하는 일념에 하늘은 행복과 평안을 내릴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선악을 분명히 가리고 시비를 명백히 구분해 대법제자의 진심어린 말을 들어보고, 대법의 진상을 알아보고 대법을 선하게 대해 아름다운 미래가 있기를 희망한다.

원문발표: 2017년 9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신수련생마당>안으로 찾아 심성을 제고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7/9/28/3489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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