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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심의 표현과 위해에 관한 이야기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며칠간 법공부 팀에서 수련생들이 질투심의 문제를 계속 교류했다. 오늘 수련생들이 교류한 질투심에 관한 체득을 글로써 말해보려 한다.

질투심을 똑똑히 알려면 먼저 질투심의 표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사부님의 법 중에서, 우리는 질투심의 표현은 불공평한 것에 매우 화를 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남을 깔보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초월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강한 것(모든 방면)을 보면 속으로 편안하지 않은 것 등이다.

사부님께서 구세력도 대법제자를 질투한다고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는 구세력의 신이 모두 얻지 못하는 영광을 얻었기 때문이다. 사부님의 설법 중 우리는 구우주의 생명에게 질투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대법제자는 구우주 속에서 산생됐고 층층 아래로 내려오는 과정에 인간 세상도 포함된다. 우리가 배운 유가 문화 중에도 질투심이 있고 사당(邪黨)문화에 이르러 질투심은 사악한 당문화에 의해 아주 강렬하고 강화됐고 변이됐다. 이렇게 긴 세월의 과정에 모두 질투심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질투심은 정말로 우리가 중시할 만하다.

사부님께서 법 중, 질투심에 대해 “단독으로 내놓고 말한다.”[2]라고 말씀하셨다. 질투심의 위해가 아주 심해 사부님께서 단독으로 내놓고 말씀하신 이상 대법제자로서 질투심을 단독으로 내놓고 없애야 한다고 깨달았다.

많은 수련생은 자신의 질투심이 아주 작고 심지어 없다고 한다. 사실 내가 본 정황은 다르다. 이렇게 말하는 수련생은 대부분 질투심의 표현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없앤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나도 그랬었다. 수련생이 내게 “질투심이 있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나는 생각하지도 않고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수련생은 “너무 빨리 대답하네요. 생각하지도 않고 대답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거죠.”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수련생과 교류할 때 모든 사람의 질투심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해 스스로는 전혀 몰랐다. 다음에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A 수련생은 나와 사이가 아주 좋았는데 그녀가 B 수련생을 알게 된 후 그녀와 B 수련생의 사이는 우리보다 좋았다. 그녀가 아주 친절하게 B와 말할 때 나는 갑자기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후에 이것은 질투심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발정념해서 제거했다. 사실은 이기적인 마음이고 사람의 말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독차지하려는 것이다.

이런 감정에 관한 질투심은 여러 방면에서 표현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흔히 관심을 받으려고 다툰다. 시어머니가 어릴 적부터 아들을 키워왔기 때문에 원래 아들 마음속에서 어머니가 제일이었는데 갑자기 아들의 마음속에 며느리 자리가 생긴 것을 보고 이렇게 불편하고 저렇게 불편해하는 질투심은 갈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며느리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마음속에 아직 어머니의 자리가 있고 심지어 자신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보면 질투하기 시작하고 갈등이 없어도 갈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베갯머리 송사를 하고 시어머니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것이다.

이런 것뿐이 아니다! 물론 수련인은 속인처럼 그렇게 강렬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잘해주며 먹고 입는 것에 신경 쓰면 나는 속으로 편치 않지만 별다른 말은 안 한다. 그러나 때론 ‘설마 내가 남편에게 잘하지 않는다는 건가? 못하지 않는데!’라는 생각이 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지금 분석해보면 역시 질투심이다. 남편이 먹고 마실 게 부족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어머니의 행위에 내가 당신 아들을 잘 돌보지 못했다는 뜻이 있다고 여겨 불평하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아들에게만 잘하시고 내겐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조금 서운하기도 하고 모자가 화목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고 소외감을 느꼈다. 아무튼, 질투심 탓이다. 수련생들은 교류 과정 중 많은 질투심의 표현을 찾아냈다. C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남편은 그녀를 아주 사랑했고 맛있는 음식을 사면 먼저 자신에게 줬는데 아이가 태어나 두 살쯤 되자 갑자기 남편은 맛있는 음식을 자신에게 먼저 주는 게 아니라 아이부터 줬다. 남편이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줄 때 C는 갑자기 마음이 편치 않아 안을 향해 찾았다. 이것은 질투심이고 자기 아이를 질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련생은 발정념해서 제거해버렸다.

C가 이 일을 말했을 때 수련생은 제때 안을 향해 찾았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깨달았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갑자기 아이가 태어난 후 줄곧 아이에 대해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도 잘 돌보려는 마음이 있지도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를 돌보는 것은 내가 그의 엄마로서 책임이 있으니 할 수 없다는 게 큰 이유였다. 이것도 아주 강한 자아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 후 많은 시간을 들여 돌봐야 하고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모든 것에 신경 쓰니 바쁘고 힘들고 세 가지 일 하는 것도 영향 있고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강한 자아도 쉽게 질투심을 산생했다.

이런 아주 강한 자아로 인해 아이에 대해 진심으로 선하게 대하지 못하게 했고 아이의 표현에 대해 귀찮아했다.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내게 대들기 시작했고 말하는 태도도 나빠졌다. 나는 이것이 내게 당문화가 있어서 그런 걸로 생각했다. 노력해서 자신을 바꾸려 했지만 바꾸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위장해도 쓸모없고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와 그를 사랑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마지막에 이 자아를 없앤 후에야 비로소 마음에서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왔고 이전처럼 사랑하는 척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는 크면서 무슨 일이건 아빠 편이었다. 나는 속이 좀 불편했다. ‘아이고, 내가 널 힘들게 키웠는데 어떻게 네 마음은 아빠가 우선이니. 아빠는 나보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질투는 기본적으로 번쩍 스치고 지나가거나 잠깐 마음속으로 편안하지 않을 뿐 아주 강렬하게 표현되지 않았다. 한가족이다 보니 이런 표현이 강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질투심은 수련생 사이에서 더욱 강렬하게 표현되고 있고 위해는 더욱 크다. 이전에 C와 D가 함께 나가 대면해서 진상을 알렸는데 C는 말을 잘해 탈퇴시키는 사람이 많지만, D는 말문을 열지 못하고 한쪽에서 발정념만 했다. 후에 D는 C에게 “수련생이 진상을 알릴 때 ‘탈퇴하지 말라, 탈퇴하지 말라!’고 생각했어요.”라고 했다. C는 듣고 화를 내며 “뭘 내보낸 거예요. 발정념하라고 했는데 사악한 생각을 내보냈군요. 발정념하지 않는 것보다 못해요. 혼자서 진상을 알리면 효과가 더 좋았겠어요.”라고 했다. 수련생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모두 우스갯소리로 넘겼다. 지금에야 두 사람에게 다 질투심이 있음을 발견했다. D는 C가 진상을 많이 알리고 삼퇴를 잘 시키지만, 자신은 적게 탈퇴시켜 위덕이 작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C가 탈퇴시키지 못하길 바랐다. C는 D를 깔봤다. 그녀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해 D와 협력해 진상을 알리기 싫어했고 차라리 혼자서 하고 싶어했다. 사실 두 사람이 잘 협력하면 탈퇴시키는 효과가 더욱 좋았을 테지만 분열하고 질투심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힘을 약화했다. 질투심은 우리 내부가 산산이 조각나게 해 정체를 형성하지 못하게 한 경우가 많다.

왕 모 수련생과 리 모 수련생은 늘 함께 교류했는데, 나중에 리 모 씨가 장 모 수련생을 알게 됐다. 리 씨가 장 씨와 많이 교류하면서 리 씨가 많이 향상됐다. 왕 씨가 리 씨와 다시 교류할 때 왕 씨는 “이전엔 저보다 못했는데 지금은 저보다 훨씬 나아졌네요.”라고 했다. 전형적인 질투의 표현이다. 또 한 수련생은 “저는 왜 그런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는데도 왜 기뻐하지 않을까요?”라고 했고 다른 한 수련생은 “네, 저도 그래요.”라고 했다. 이것도 역시 질투심이다.

수련생 두 씨는 늘 류 씨의 결점을 지적해줬는데, 어떤 때는 거의 트집 잡는 것이고 심지어 류 씨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너무 남에게 강요하기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떤 때 류 씨가 어느 일에 관해 자기 견해를 말하면, 두 씨는 즉시 “아니, 그게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틀려요”라고 속사포처럼 말한다. 쉬지 않고 말하고 심지어 법으로 류 씨를 눌러 류 씨는 자기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게 됐다. 또 두 씨는 류 씨 앞에서 다른 수련생을 곧잘 칭찬했다. “봐요, ○○는 얼마나 잘 수련해요.” 두 씨는 칭찬할 때 또 그 수련생이 류 씨 같은 어떤 집착이 없다고 하면서 류 씨를 깔보는 표정을 짓는다. 말 밖의 뜻은 류 씨가 잘 수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류 씨는 “도대체 어찌 된 겁니까. 왜 모두 내게 번거로움을 가져다주는 겁니까”하며 의혹을 풀지 못했다. 마지막에 드디어 문제점을 발견했다. 류 씨는 아주 정진하고 세 가지 일도 잘했다. 특히 진상을 알리고 탈퇴도 쉽게 많이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씨는 감히 대면 진상을 못 하고 삼퇴도 아주 적게 시킬 뿐 아니라 삼퇴를 많이 시키는 류 씨를 아주 질투했다. 그래서 두 씨는 질투심에 이끌려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자기 감정을 분출한 것이다. 물론 류 씨에게도 문제가 있다. 류 씨는 두 씨를 좀 깔보고 과시심도 있다. 그러나 비교해보면 류 씨의 질투심은 두 씨보다 적다. 류 씨는 기본적으로 질투심을 통제할 수 있고 타인에게 주는 상처도 작다. 두 씨는 류 씨에게 아주 심한 상처를 줬고 류 씨가 감당한 것이 많았다. 마지막에 두 씨의 집에는 큰 마난이 생겼고 두 씨도 더욱 큰 고통을 감당했다. 이건 많이 말하지 않으려 한다. 문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두 씨가 자신이 류 씨를 질투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씨는 줄곧 류 씨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 관련해, 자신이 성격이 솔직해 돌려 말하지 않고 류 씨를 위한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사실 류 씨는 아주 큰 상처를 입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런, 두 씨의 소위 ‘돕는’ 과정에서 류 씨가 받은 진실한 느낌은 ‘벙어리가 황련을 먹고, 맛이 쓰지만 말하지 못하는’ 심정이다. 질투심의 위해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수련생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관건은 동기다. 만약 정말로 수련생을 위한 동기라면 문제를 지적할 때 그 수련생에게 상처 주지 않을 것이다. 아니라면 반대로 내부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법 중에서도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질투심의 표현이 극히 강렬하며, 강렬함이 이미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자신마저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2]라고 말씀하셨다.

베이징수련생 M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평소 M은 수련상태가 꽤 좋아 보였다. 그녀는 평소 마음이 아주 조용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점오 상태에 처해있다고 말했다. 나는 가끔 수련생 L이 진상을 알려 많이 삼퇴 시킨다며, 하루에 10여 명에서 수십 명 탈퇴시킬 수 있고 수년간 이미 몇만 명을 탈퇴시켰다고 언급했다. 당시 M은 “베이징 이런 곳에서 그녀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라고 대꾸했다. 불복하는 표정이었다. 이 말은 L이 다만 환경이 느슨한 지역에서 그렇게 많이 탈퇴시킬 수 있고 박해가 심한 지역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당시 내가 수련생 L이 많이 탈퇴시켰다고 말한 것은 부러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역시 한 가지 질투고, M이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진상을 잘 알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평온치 않은 것도 질투다.

가장 무서운 건 이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수련생의 문제를 지적하는데, 대부분 질투심이 있어서 그런다. 질투심에 이끌려, 수련생의 법에 부합되는 행위에 수련생의 방법이 법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모자를 씌워 수련생에게 큰 상처를 가져주지만 많은 경우 당사자 스스로는 모르고 있다. 다음과 같은 실례를 본 적이 있다. 한 수련생이 정념으로 소굴을 뚫고 나왔는데 다른 한 수련생 D는 아마 그렇게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만약 D가 수련생이 잘했다는 것을 질투하는 생각이 스치기만 한다면 다음 생각이 바로 떠오를 것이다. ‘그녀는 정말로 정념으로 소굴을 뚫고 나왔을까? 설마 무슨 좋지 않은 일을 한 게 아닐까. 특무? 내가 그녀를 도와줘야겠다!’ 그러나 수련생을 돕는다는 명의로 질투심에 이끌려 간섭하면서도 스스로는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간섭당한 수련생은 보통 과시심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가서 과시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알 수 없고 질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자기 생각을 유심히 관찰해본다면 질투심은 정말로 자주 튀어나오며 중국인의 질투심은 이미 변태되는 정도에 이르렀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질투심을 닦아버려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용맹정진할 수 있다. 이상 수련생의 이름은 전부 가명이고, 누구를 지적하려는 뜻이 없다. 다만 질투심의 위해에 대해 말하고 함께 정진할 수 있길 바라서다. 부족한 곳은 수련생들께서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경지(境界)’[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문장발표: 2017년 9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9/16/3537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