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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하고 깊은 층차로 자신을 연마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몇 년 전부터 깊은 층차로 안을 향해 찾는 것을 시도해봤다. 즉 표면상 발생한 일이 어떻게 변화무쌍하든 다만 표면 현상을 하나의 단서로 보고 이 단서를 잡고 뿌리를 찾고 관념상에서 개변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잘 아는 한 수련생의 먼 친척이 현지 공안국장인데 평소 아무런 왕래가 없었다. 국장 집에서 결혼 잔치를 할 때 수련생이 갔는데 성공적으로 국장에게 인터넷 돌파 소프트웨어를 건네줬다. 이것은 몇 년 전 사악이 아직 미쳐 날뛰던 시기였다. 당시 우리 둘은 아주 흥분했고 기뻐한 나머지 깊은 층차로 찾기 시작했다. 우리의 흥분, 그리고 수련생이 일부러 외양을 치장함 속에 한 가지 관념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수련생과 잘 알기 때문에 수련생에게 “일부러 외양을 치장한 것은 상대방이 국장이란 신분 요소가 있기 때문에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수련생은 맞다고 했다. 우리가 일할 때 늘 이런 깊은 층차로 안을 향해 찾는 것을 소홀히 하고 관념상에서의 물건 및 관념상의 개변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는 법 중 “온 인류사회는 모두 한 층차 중에 있다.”[1]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에게 속인을 가늠하는 표준으로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이런 관념이 있다면 우리의 기점은 바로 속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속인의 관념을 개변하는 것도 법에 동화하는 것이고 자신을 제고하는 것이다. 자신을 잘 연마해야만 비로소 중생을 더욱 잘 구도할 수 있다. 어느 각도에 서서 관념을 어떻게 개변해야 하는지 봐야 한다.

만약 모든 일념을 예를 들어 ‘내가 또 속인의 표준으로 사람과 일을 가늠했구나’라고 확인해 본다면 긴 시간이 지나면 문제를 생각하고 말하고 일할 때 표면 한 층의 물건은 갈수록 적어지고 점차 속인에서 초탈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표면 이 한 층차의 물건이 담담해질수록 다른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흘려보낸 속인의 그 관념을 포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일부 표면 현상, 예를 들어 ‘이 사람은 그렇게 잘 연마했는데도 어찌 이런 문제가 생길까?’라는 것에 쉽게 미혹당하지 않게 된다. 물론 문제가 있어도 구세력이 강요한 박해를 승인하지 않지만 우리가 수련 중 존재하는 문제를 똑똑히 볼 수 있으면 자신에게 거울로 삼는 외에 타인에게 문제를 지적해 줄 때도 단번에 요점을 지적해주고 진정으로 타인을 도울 수 있다. 만약 모든 일념을 이렇게 한번 확인해 본다면, 학생이 연습문제를 푸는 것처럼 많이 하면 안을 향해 자신을 빨리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

어떤 때 일부 속인의 관념은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다.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보자. 아마 어떤 수련생은 사람 속에서 지위가 있고 돈이 있거나 조상은 누구누구일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즉 물질상 혹은 정신상에서 수련생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곳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번 생각해보라. 만약 이런 것들이 없다면 진상을 알리고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할 때 수련생은 그렇게 자신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자신감 속에 사람의 물질과 정신으로 지탱하는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야 한다. 또 어떤 수련생은 속인 중 무슨 지도자를 한 적이 있어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할 때 그런 강세를 표현하는데 이런 강세의 근원은 속인 중에서 다른 사람보다 강하고 다른 사람보다 우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지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수련생은 속인의 관념으로 다른 사람보다 강하다고 생각한 것이기에 비로소 그런 우월감과 기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을 개변하지 않은 곳이다.

마찬가지로 자신감이 없는 것은 속인이 생각하는 그런 여러 방면에서 좋기 않기에 자신감이 없는 것이 아닌지 찾아봐야 한다. 또 “인간세상에서 휘황한 적이 있고 지금 수련했기에 지나간 휘황들을 모두 담담하게 보고 다시는 그것들을 추구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수련생도 있다. 지금 수련생이 추구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수련생의 관념에 사람의 물건에 대한 인정을 보류했다는 것이고 수련생이 생각하는 과거의 휘황과 아름다움은 고층차에서 보면 다 좋지 않은 것이다. 그건 수련생이 속인의 표준으로 가늠한 것이기 때문에 수련생의 관념은 철저히 개변되지 않은 것이다.

낡은 배치 중 강화한 관념도 있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조상, 혹은 전생에 나는 누구누구, 어느 시기의 유명한 사람이고 고관대작이고 대단한 사람 등이라면 수련생이 태어나서부터 다른 사람보다 높다는 그런 우월감이 생기게 한다. 이런 사상의 출처를 똑똑히 보는 것도 구세력의 배치를 타파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으면 법을 실증할 때 써야 한다. 그건 법이 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사람 속에서 우월하다는 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람 속에서 자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물건은 수련 중 바로 없애야 하는 물건이나 갈아 없애야 할 물건일지도 모르고 쓸모없는 것은 버리고 정화를 취해 법을 실증하는데 사용해야 하는데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보다 한 절차가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상은 표면적인 이 옷을 장식하는 데만 멈춰있고 뛰어나가지 못한다. 예를 들어 우리의 목적은 표면의 이 옷을 벗는 것이지만 우리의 사상은 늘 이 옷을 벗는데 집중하지 않고 이 옷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데 집중한다. 이 옷을 장식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도 옷을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활이 좋고 아이의 학습 성적 등이 좋길 바라는 것은 속인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물론 저층차(低層次)에서 말하자면 건강한 신체를 얻는다는 이 한 방면에서 볼 때, 기공과 체육단련은 일치한다.”[1]라는 것과 좀 비슷하다. 표면 한 층에서 우리가 잘해 인간세상 속에서 잘 살아야 한다는 것과 일치하지만 수련 중 우리는 계속 위로 올라가야 하고 뛰어나가며 초월해야 하지 사상이 이곳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표면의 이 옷을 입지 않았다면 현대과학이란 이 물건을 몰랐을 것이다. 즉 위 한 층에는 무슨 좋은 학교 등 이런 사상이 없다. 이 모든 것은 이 옷을 입었을 때 첨가된 관념이고 이러면 좋고 저러면 나쁘다는 것은 사실 다 옷의 물건이기 때문에 옷을 벗으려면 사상은 옷을 입지 않았을 때 상태로 반본귀진해야 한다. 당시 이 일념이 나오자 또 옷 문제로 돌아온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비록 우리의 본의는 옷에서 어떻게 하려고 하는 것이고 속인 중의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안을 향해 자신을 찾을 때 의식이 아직 뿌리까지 닿지 못했고 뿌리에서부터 인식하고 개변하지 못했기에 뛰어나가지 못하고 다만 이 층차에서만 잘하려는 생각에 멈춰있는 것이다.

인간세상 표면의 한 층 물건을 내려놓자 사람들의 추구의 거품이 빠지는 것을 체득했다. 나는 어려움 속에서 최선을 다한 적이 있다. 물에 빠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처럼 사람의 무엇을 잡고 우리 대법제자가 인간세상 속에서 좋다는 것을 실증하려고 했지만 인간세상 속에서의 자신감을 지탱할 수 있는 무슨 물건을 잡지 못하자 할 수 없이 손을 놓았다. 즉 마음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이때 마음을 내려놓기 전에는 거품을 불고 있었고 내려놓자 거품이 빠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음을 내려놓은 후 ‘BMW를 몰면 진상을 알리기 쉽다’는 이 한 층차의 사상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생각해보라. 한 층 높은 층차의 생명은 나처럼 인간세상 속에서의 높고 낮은 이런 개념이 있거나 속인 중에서 높고 낮음의 이런 사유가 있겠는가?

당시 ‘전법륜-대근기지인(大根器之人)’의 “일반인은 이런 고생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생각한다: 이렇게 살아서 뭣 하겠는가. 밧줄이나 찾아 걸자. 살지 않겠다! 죽으면 만사가 끝이다!”[1]까지 배웠을 때 뒤의 감탄부호는 아주 힘 있게 내 마음속에 찍혔다. 갑자기 “죽으면 만사가 끝이다!”의 한 층의 이치를 알도록 일깨워줬다. 전에는 한 층의 이치의 틀에서 발악했기 때문에 생활이 곤궁할 때 속인에게 우리가 잘 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실 그 한 층의 물건을 꽉 잡고 좋은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집착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생활환경을 개변하려는 것은 마음을 내려놓아야만 한 층의 사람의 마음이 “죽으면 만사가 끝이다!”는 것처럼 비로소 좋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사를 내려놓았다란 말은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고 손을 놓는 그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톈안먼 광장에 갔다고, 병업의 교란을 받아 생사고비에서 다시 걸어 돌아왔다고 생사를 내려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려놓은 후 머리에는 세 가지 일만 잘하면 된다는 간단한 생각 밖에 없었고 이전에 들끓던 사람 마음과 갑자기 단절된 것 같았다. 당시 사상 속에 기점의 전환이 있었다. 제일 처음에 나의 기점은 사람 속에 있었다. 내가 잘 연마하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개념은 모두 사람의 각도에 서서 생각하는 것이다. 이후에 기점을 하늘로 바꿨다. 난 하늘에서 온 것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자 그런 자신을 위로 잡아당기고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등 생각이 없어지고 하늘에서 온 것이니 사명을 완성하면 자연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게 됐다. 법공부를 하는 것도 서 있는 각도가 변하면 이해도 다르다는 것을 체득했다.

또 자신이 자신을 위로 잡아당겨 어디에 내려놓을지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머리가 텅 빌 때가 있다. 이런 느낌을 거친 후 사유는 이전과 다르게 되고 사유방식이 개변된다. 수련 과정 중 끊임없이 이런 위로 잡아당겨지는 체득이 있다. 개인적으로 만약 이런 근본적인 개변을 하나의 점으로 본다면 이런 점이 많아지면 하나의 면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부님께서 설법 중 말씀하신 바처럼 “만약 당신이 매 층마다 이 한 층의 면을 볼 수 있다면, 그래서 한 개의 점이 아니라 분자 한 층의 면, 원자 한 층의 면, 양성자 한 층의 면, 원자핵 한 층의 면을 보았다면, 당신은 곧 부동(不同)한 공간 중에서 존재하는 형식을 본 것이다.”[1]

만약 사상 깊은 속에서 여전히 자신에게 좋은 물질 기초가 있고 사람 속에서 갖고 있는 모든 우월한 것을 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의식 속에서 사람의 좋은 것을 좋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즉 당신의 뿌리는 여전히 가장 표면인 사람 기초 속에 박혀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중시할수록 중요하게 볼수록 이 방면에서 당신의 뿌리가 더욱 깊이 박혀있고 근본적으로 개변하지 않았으며 표면 층차에서 걸어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표면 법리를 초월한 이치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왜 아직도 문제가 생기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잘못된 인식이 무엇인가? 일하면 등가 교환해야 하고 아니면 손해를 본다는 심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속인의 마음이다. 속세를 초탈하려면 보수를 따지지 않아야 하고 일하고 공을 바라는 마음을 순진하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위쪽 그 층차에서는 보수를 따지지 않으므로 잘하든 잘하지 못하든 보수를 얻으려는 생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사람을 구하는 것이지 자신이 그 중에서 무엇을 얻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도 ‘위사(爲私)’로부터 ‘위타(爲他)’로 개변하는 과정이다. 진정한 제고는 결심을 크게 내렸냐 작게 내렸냐를 보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개변한 정도를 보는 것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해냈다면 깨달았다와 해냈다의 구별을 체득할 수 있다.

이상은 수련 중의 일부 체득이다. 정확하지 않은 곳이 있으면 수련생의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7년 9월 2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9/25/3541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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