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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즐거운 대법 수련인

글/ 칭칭

[밍후이왕] 1956년, 나는 교동반도의 한 농민 가정에서 출생했고 장녀로서 어려서부터 외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그 때 외갓집은 그래도 생활이 부유한 셈이어서 외할머니는 늘 내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외할머니 집에는 많은 전통문화 그림책이 있었고 선비 집안과 혈육들의 사랑 속에서 나는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으며 머릿속에는 ‘악비의 정충보국의 충(忠)’, ‘도원결의의 의(義)’를 남겼다. ‘문화대혁명’ 후 나는 첫 번째 대학생이 됐고 졸업 후 광산 탐사원으로 배치를 받았다.

20여 세 쯤부터 몸이 나빠져 부인병과 허리와 다리가 아픈 증상이 생겼다. 신체 단련을 하려고 89년부터 기공을 연마했고 이후에는 어머니도 심장이 나빠 나를 따라 함께 연마하셨다. 기공 연마를 하면서 일부 불교 거사를 만나게 되어 그들을 따라 절에 다녔다. 한 번은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가서 향을 피우는데 절의 주지와 한 할머니가 다투는 것을 보았다. 그 할머니가 “주머니에 20위안 밖에 없는데 1위안만 드리면 안 될까요?”라고 하자 그 주지 스님은 화를 내며 큰 소리로 “거지처럼 그러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이런 정경을 보고 어머니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자. 이런 승려는 돈밖에 모르는데 그들에게서 좋은 것을 배울 수 없을 것 같구나.” 기공 연마를 몇 년 했지만 나와 어머니의 병은 낫지 않았다.

98년 어머니의 심장병이 갑자기 심해져 길도 걷기 힘들었으며 계단도 오르실 수 없었다. 이 때 파룬궁을 연마하는 여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언니와 엄마 모두 파룬궁을 수련해 보세요. 날 보세요. 심장병도 다 나았잖아요.”

사실 나는 96년도에 서점에서 파룬궁 수련서 ‘전법륜’을 샀었고 그때 다 보고나서 파룬궁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깨달음이 좋지 못해 파룬궁을 여전히 일반적인 기공으로 여기고 진정한 불법 수련임을 몰랐으므로 연마하지 않고 책을 여동생에게 줘버렸고 여동생은 수련한 후 심장병이 나았다.

이때야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 어머니와 함께 대법 수련에 들어섰다. 수련을 한지 얼마 안 되어 나와 어머니의 병은 다 나았다. 나는 날마다 아침이면 공원에 나가 연공하고 낮에 출근하며 밤에는 시간만 있으면 ‘전법륜’을 읽었다. 또 함께 연공하는 친구들과 생활 가운데서 갈등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대법의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겠는지 교류했다. 날마다 생활은 충실하고도 즐거웠다.

파룬궁 수련을 한 후 나는 이전과는 달라졌다. 예전에는 개인 일을 보러 택시를 타고 가도 영수증을 받아다가 직장에서 청구했지만 지금은 더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엄격히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고 좋은 사람이 됐다. 1999년이라고 기억되는데 직장에서 새 회사를 꾸렸다. 나는 교수급 고급 엔지니어이고 직장의 핵심이어서 나를 새 회사에 파견해 부사장으로 임명했다. 뜻밖에 사흘 후 아무 이유도 없이 나의 이 부사장 직무를 해임하고 다시 원래 직장에 돌아와 일하게 했다. 당시의 분노, 억울함은 말할 것도 없고 동료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남몰래 눈물만 흘렸다. 하지만 나는 상사와 다투지 않았다. 그것은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수련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법륜’ 공부를 통해 서서히 마음이 열렸고 이런 명리를 담담하게 보게 됐으며 심정도 편안해졌다.

2000년, 회사에서 외국 사업가와 합작해 외국계 기업을 꾸렸는데 외국 전문가와 함께 산에 가서 탐사할 것이 필요했다. 산에 가서 탐사하는 것은 무척 고생스런 사업이어서 일반적으로 모두 가기 싫어했으므로 직장에서는 나를 보냈다. 그 해 10월에야 사업을 시작했다. 나는 여자여서 산기슭 강변의 한 단독 주택에 나를 배치했는데 나무를 지펴서 난방을 해야 했다. 수련 전에 나는 담이 아주 작았는데 수련 후에는 저도 모르게 담이 커졌다. 그래서 혼자 이런 데서 살아도 무섭지 않았다. 이곳의 사업은 아주 고생스러웠다. 낮에는 대부분 시간을 돌 속의 광물질 함량을 측정 후 기록하는데 보냈고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허리와 어깨가 시큰거렸다. 다행히 아침저녁 두 차례 연공한 덕분에 건강에는 별로 큰 영향이 없었다. 날마다 문 앞의 냇물을 지켜보고, 광활한 뭇 산을 바라보노라니 그야말로 옛 수련인의 상쾌하고 소탈한, 속세에 물들지 않는 그런 자유자재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곳 환경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나는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몹시 즐거웠다. 이렇게 내내 석 달을 일하다가 연말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야외에 나가서 고생을 다 하고 직장에 돌아오니 동료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당신이 산에 가 있는 동안 직장에서 집을 분배했는데 누구누구에게 주고 당신의 몫은 없으니 얼른 국장을 찾아가라고 했다. 듣자마자 화가 벌컥 치밀었다. 수련을 한 후부터 나는 부지런히 일했다. 얼마나 어렵더라도 지도부에서 배치하기만 하면 나는 두말없이 잘했고 그래서 해마다 직장 모범으로 선정됐다. 게다가 학력, 등급, 공헌이든 어느 면을 다 따져도 나에게 집을 주어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노기충천해 국장을 찾아가 왜 나에게 집을 주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런데 국장은 생각 밖의 말 한 마디를 던졌다. “당신이 그래도 수련인인가요? 아직도 남과 집을 다투나요?”

이 말은 대번에 나를 일깨웠다. 나는 서리 맞은 가지처럼 순식간에 주눅이 들었다. 그렇다. 내가 왜 자신이 수련인임을 잊었는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한 수련인이 집을 분배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양보한 실례를 말씀하셨다. 그러자 대번에 화가 가라앉았다. 나는 국장에게 계면쩍게 웃어 보이고는 국장 사무실을 나섰다.

내가 54살이 됐을 때 직장은 젊은 직원을 양성하려고 나에게 1년 앞당겨 퇴직하라고 했다. 퇴직 후의 노임은 일할 때보다 1천여 위안은 적었다. 나는 자신이 연공인임을 생각하고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 남을 배려하고 물질 이익을 담담이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지도부의 요구에 응해 1년 앞당겨 퇴직했다.

퇴직 후 직장에서는 다시 나를 초빙해 직장에 돌아와 일하라고 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대학을 다닐 때 절친한 친구가 지금은 외성에서 국장으로 있으면서 내가 그곳에 가서 일한다면 내 등급과 경험에 따라 연봉 15~30만을 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가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발동한 이번 파룬궁에 대한 악독한 박해로 인해 많은 세인이 거짓말 해독을 받았다는 것을. 대법에서 수련해 이익을 얻은 사람으로서 더욱 많은 시간으로 세인에게 파룬궁이 박해 당하는 진상을 알려주어 더욱 많은 세인이 파룬궁 진상을 알게 함으로서 그로 하여금 아름다운 미래를 선택하고 대법의 구도를 받기를 바랄 뿐이다.

현재 나의 퇴직금은 7천여 위안이고 90평방미터 집에 살고 있으며 자신의 차를 갖고 있다. 60여세 사람이 50여세 같고 얼굴에 주름이 없으며 신체 건강하게 날마다 즐겁게 살고 있다. 이 모두는 대법의 덕분이고 대법이 나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사부님 은혜에 감사드린다.

원문발표: 2017년 9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9/10/34966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