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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에 집착하지 말아야 비로소 수련생을 도울 수 있다

글/ 광둥 대법제자

[밍후이왕] 근래 현지의 젊은 수련생 몇 명이 잇달아 사망했다. 겨우 40여 세인 사람도 있었는데, 현지 중생구도에 아주 큰 손실을 조성했다.

수련생에게 병업 가상이 나타나서 사망하기까지 현지 수련생들은 온 마음과 힘을 다해 발정념하고 교류하고 단체법공부와 연공을 했으며 조금도 느슨하지 않았다. 아주 큰 노력을 했지만 수련생을 도와 육신을 남길 수 없었다.

수련생이 생사관을 넘지 못한 주원인은 그 자신이 평소에 실질적으로 수련하는 것이 부족하고 신사신법이 부족하거나 기타 우리가 모르는 요소도 있을 수 있다. 동시에 수련생을 돕는 과정 중에서 나는 수련생들이 정체적으로 일부 표현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됐는데, 꺼내서 교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더욱 좋은 교류를 끌어내 수련생들과 함께 제고하고자 한다. 층차의 제한으로 바르지 못하게 깨달은 부분이 있다면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 바란다.

수련생에게 병업가상이 나타나면 일부 수련생은 아주 조급해 하며 마난 속에 있는 수련생을 한바탕 질책한다. 관념을 바꿔야 한다, 구세력이 강제로 가한 박해를 부정해야 한다,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 등등이다. 지금 수련생의 심리상태가 어떤지, 마음에 어떤 매듭이 있는지 상관하지 않고 우선 자신 혹은 밍후이왕에서 수련생이 병업관을 넘었던 경험을 단번에 마난에 처한 수련생에게 던져주는데, 아는 대로 그저 말한다. 이때 관을 넘는 수련생이 인정하고 이해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만약 그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할 경우에는 또 아주 기분 나빠하며 심지어 톤이 높아져 자기 관념을 가중하고 강화하고 중복한다. 이때 관을 넘는 수련생은 상대방이 이렇게 강세인 것을 보고 수련생과 충돌하지 않으려고 더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교류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곤 한다. 단지 수련생이 일방적으로 관을 넘는 수련생을 향해 ‘주입’하는 식이다.

사부님께서 이렇게 알려주셨다. “나는 항상 한마디 말을 하는데, 만약 한 사람이 어떠한 관념도 없이, 개인의 이익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진심으로 남이 좋아지도록 남에게 그의 부족함을 말해주거나, 혹은 그에게 어떤 것이 바른 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 것이다.”[1]

우리는 왜 사부님의 요구대로 행하지 않고 선한 마음으로 수련생을 대하지 못하는가? 내가 너무나 자기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이렇게 알려주셨다. “그것은 자비심(慈悲心)에서가 아니다. 그는 그 명리심(名利心)을 전혀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비심이 아예 생길 수 없다.”[2]

본의는 수련생이 어떻게 제고해야 하는지를 사심 없이 건의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내심에서 자기 생각이 맞다고 집착하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고, 수련생이 자신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집착해, 언행에서 격한 정서가 반영되고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강세라고 느끼게 했다. 여기에는 명을 구하는 마음이 존재하고 또 당문화가 양성한 일종 강력하게 일하는 방식이 있는데, ‘투쟁’의 방식으로 남들이 자기 관점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습관이 돼서 경청할 줄 모르고 상대가 표현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나는 전에 진상을 알릴 때 사악의 교란을 받았고, 일부 수련생과 교류할 때 수련생에게서 오는 부면 사유를 선명히 느낄 수 있었는데, 수련생이 동정심을 지니고 나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들은 말만 안 했지 이미 마음속으로 내가 이 고비를 넘기 아주 어렵다고 예상하고 있었을 수 있다. 심지어 이는 구세력이 나에 대해 ‘보충시험’을 진행하는 것(구세력은 대법제자를 고험할 자격이 없다)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나는 예전에 내가 병업관에 처한 수련생을 대할 때를 연상시켰다. 그때 나는 가끔 수련생이 표면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가상에 이끌려서 조금은 속수무책의 느낌이 있었다.

또 예를 들어, 주변에서 젊은 수련생이 세상을 떠나자 일부 수련생은 슬퍼서 계속 눈물만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수련생의 어린 자녀가 아버지를 잃은 것을 동정해서 슬퍼하는 것이었지, 수련생이 사부님을 따라 끝까지 가지 못하고 정법제자의 신성한 서약을 완성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게 아니었다. 사실 이런 것은 모두 우리 자신의 정념이 부족한 것이고 법리가 청성하지 못했을 때의 사상 상태다. 자신의 불순한 염두는 수련생에게 부면적인 요소를 가하고 수련생이 안을 향해 찾는 효과를 교란한다.

우리는 마땅히 이런 심태를 바로잡고 마난 속의 수련생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수련생이 어떤 것을 마주했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대법제자며, 일체의 일체는 모두 사부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 만약 우리 자신이 신사신법한다면 또 수련생의 마난의 표현에 이끌리겠는가? 또 속수무책이라고 느낄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구세력이 대법제자를 박해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청성하게 인식했다면, 또 수련생이 구세력의 ‘보충시험’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다 해서 그것을 인정하겠는가? 만약 우리 자신이 정말로 생사를 내려놓고 속인의 명리정의 굴레를 내려놓으면 또 수련생의 후사를 집착하겠는가? 수련생 위에 있다는 사람마음이 없다면 수련생이 마주하는 결과에 대해 제멋대로 결론내릴 수 있겠는가? 수련생을 돕는 과정에서 마땅히 자신을 닦는 데 주의해야 한다.

수련생이 마난을 만났을 때 그 원인은 아주 복잡할 수 있다. 또 마난 속의 수련생은 가끔 주의식이 강하지 못한 표현이 있고 심지어 법공부 기초가 착실하지 못하며 안을 향해 찾는 것이 모두 표면에서 겉돈다. 이때 단체로 수련하는 마당이 그에게 주는 도움이 무척 중요하다. 만약 모든 수련생이 상화한 심태로 겸허하게 마난 속의 수련생과 법공부하고 교류하며, 남을 개변하려 하지 않고 완전히 선념으로 수련생을 대하면 얻는 효과가 아주 좋다. 이때 자아의 인식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마난 속에 있는 수련생의 마음의 소리를 많이 듣고 기타 수련생의 의견을 더 많이 들어야 한다.

현지에 막 세상을 떠난 젊은 수련생이 있는데, 전에 새롭게 수련에 걸어 들어온 후 법공부가 깊지 않아 한편으론 수련하면서 한편으론 부당한 이득을 얻어 업을 지었다. 만약 모두 마음을 조용히 하고 관을 넘는 수련생과 함께 진지하게 대법으로 대조했다면 아주 쉽게 큰 누락을 찾아낼 수 있었다. 생사관 앞에서 한정된 시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보완해야 비로소 죄업을 없앨 수 있다.

당시 일부 수련생이 교류에서 돈 이 방면의 누락을 찾아보자고 제안했지만 다른 수련생이 제지했다. 왜냐하면 제지했던 수련생이 비교적 강성이고 표현력이 좋았는데, 그녀는 이 일을 작은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교류하자고 제안한 수련생은 아주 눈에 띄지 않는 수련생이어서 더 견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수련생을 도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고 아쉬움을 남겼다.

주:[1]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싱가포르 법회 설법’[2]리훙쯔(李洪志)사부님 저작:‘전법륜’

문장발표: 2017년 9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9/6/35340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