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충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60여 세이고 대법을 수련하기 전에는 일생이 쓰라리고 고됐다. 돌이 되기 전에 부모님이 모두 병으로 사망하여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성장 과정에 중공 사당의 중국인에 대한 박해로 중공은 10년에 영국을 초월하고 20년에 미국을 초월한다면서 강철을 만들어 내느라 농민에게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였다. 하여 심어 놓은 곡식도 거두지 못하게 하여 3년 대기근을 조성하여 온 중국인이 밥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 몸이 자라야 할 때 나는 밥을 배불리 먹지 못해 영양이 부족하여 빈혈에 걸려 늘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져 쓰러지곤 했다.
한 차례 ‘문화대혁명’으로 공부할 나이에 공부를 하지 못 하게 되어 초등학교 수준으로, 농촌에 가서 빈농 하층의 소위 ‘재교육’을 받았다. 건강도 좋지 않은 데다 농촌의 무거운 체력 노동에 시달리며 배불리 먹지도 못했다. 열 몇 살에 논밭에 나가 모를 심고 곡식을 심는 일을 하느라 류머티즘까지 걸렸다. 도시로 돌아온 후 명리를 위해 분투하다 류머티즘이 갈수록 심해져 심장에 영향을 주었다. 또 담결석, 담낭염, 위병, 불면증도 걸리고 혈압이 장기간 매우 낮았다. 특히 담결석과 위병으로 닭, 오리, 생선, 고기 등 영양 있는 것은 다 먹지 못했다. 나중에 갈수록 심해져 채소를 먹어도 소화하지 못해 빈혈은 더욱 심해졌다. 오랜 기간 치료약을 먹고 보약을 먹었다. 최후에 담결석 수술을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1997년 11월에 나는 대법을 알게 되었다. 수련을 시작하자마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1년 이내에 아무거나 다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류머티즘, 심장병 등 모든 병이 다 나았다. 이전에 누렇던 얼굴도 희고 혈색이 돌았다. 나는 6층에 사는데 물건 20여 근을 들고 올라가도 숨이 차지 않고 힘든 느낌도 없다. 어지럽지도 않고 눈앞도 캄캄해지지 않았다. 삼복에도 찬물에 손을 대지 못했는데 연공하자마자 추운 겨울에도 찬물로 씻을 수 있게 되었다. 20여 년간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하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지 못했는데 대법을 수련하자마자 먹고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병 없이 온몸이 가벼운 상태가 되어 계단을 올라가도 누가 밀어주는 것 같았다.
1999년 장쩌민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남편도 수련인으로 수련을 견지하다가 1999~2003년에 여러 번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시어머니는 그때 80여 세인 고령이었고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매일 약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성격이 괴팍한 데다 속인 중에서 관직에 오른 적이 있으며 수십 년 사당(邪黨)문화의 독해로 이기적으로 변해 오만하여 자식들과도 어울리기 힘들었다. 또 사당문화가 후세대에 대한 영향으로 효를 다해야 한다는 책임 관념이 변이되어 자식들이 노인을 강제로 양로원에 보냈다. 양로원으로 가는 길에 시어머님이 속상해하시는 것을 보았다. 양로원에 도착해 보니 선전하는 것처럼 그렇게 좋지도 않았다. 나는 수련인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시어머니는 80여 세로, 입원도 해야 하는데 내가 우리 집으로 모셔 가면 모든 부담을 혼자 다 안고 살아야 하는데… 나는 안으로 찾았다. 왜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려 하는가?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고생이 두렵고 힘든 것을 두려워하며 이기적인 마음이 있어 노인에게 효도하기도 싫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연공인의 행위가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머님을 우리 집에서 모시겠습니다.” 시어머님께서 기뻐하셨다. 형님과 시누이도 기뻐했다.
나는 늘 시어머님을 위해 생각하며 매일 입에 맞는 음식을 해드렸다. 어머님은 예전에 제일 작은 계란을 골라 사 드셨지만, 나는 어머님을 위해 제일 큰 계란을 사고 채소도 가장 부드러운 것을 샀다. 중공이 대법제자를 박해한 후 어머님은 심신에 큰 압력과 고통을 받았다. 특히 남편이 감금된 기간에는 매일 우시면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1년에 한 번만 입원하셨는데 아들이 박해받은 후 몇 번씩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한 기간에, 낮이나 밤이나 나 혼자 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며 대소변을 받아내고 씻겨 드렸다. 하루 세끼 모두 집에서 밥을 해서 병원에 갖다 드렸다. 나의 보살핌으로 어머님은 중공 사악이 선전한 거짓말에서 벗어났다.
어머님은 본인의 집을 처리했다. 우리가 사는 집은 엘리베이터도 없고 높은 층이다. 우리는 사당의 경제 박해로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을 살 돈도 없다. 아주버님은 엘리베이터도 있을 뿐만 아니라 집이 몇 채나 된다. 경제 조건도 우리보다 훨씬 좋다. 어머님은 줄곧 우리 집에서 살았고 그들은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는데도 어머님은 집을 아주버님에게 주었다. 나는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으로 나의 이익심을 향해 온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 이익 앞에서 내려놓을 수 있는가? 나는 연공인이다. 나는 주동적으로 어머님께 말했다. “부동산 사람을 불러서 어머님이 살아계실 때 절차를 마치세요.” 나는 조금도 불쾌한 마음이 없었고 아주 기분 좋았다. 어머님은 감동하시어 사람을 만나면 “우리 며느리는 파룬궁을 수련하는데 정말 좋은 며느리다.”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행동으로 실천하여 친척들도 개변되어 그들은 더는 중공 사당의 거짓말을 믿지 않고 대법이 좋다고 인정한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그들 집에서 법공부하고 연공할 수 있다. 특히 삼퇴의 대조류 중에서 그들은 모두 생명의 가장 좋은 선택 삼퇴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위험할 때 자발적으로 마음속에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가 나올 수 있다.
2008년 원촨 대지진 때 언니는 집에서 소고기 요리를 하고 있었는데, 아파트 아래서 ‘빨리 도망가세요, 지진 났어요’ 하는 소리를 들었다. 언니는 듣자마자 열쇠를 들고 아파트 아래로 뛰었다. 제방까지 뛰어가니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모두 불안해하고 있었다. 언니는 가스 불을 켜놓은 생각이 났다. “갔다가 집이 무너지면 어떡하지! 안 가서 불이 나면 어떡하지!”라고 했다. 그때 언니는 파룬따파 제자가 어떻게 좋은 사람으로 사는지 생각이 나서 자신도 좋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고 한다. 급하게 집으로 가스 불을 끄러 갔다. 집이 6층이라 엘리베이터도 없고 올라가자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집도 흔들려 계단 난간을 잡아도 올라갈 수 없었다. 언니는 위급할 때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우면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났다. 즉시 누가 발에 무슨 물건을 넣어준 것 같이 힘이 생겨 후들거리지 않아 금방 집에 가서 불을 껐다. 집 문을 나서니 유치원 선생님이 아직 아이들을 다 내보내지 못했다. 언니는 유치원에 들어가 한 손에 아이 하나씩 안고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나중에 우리 집에 와서 리 대사님께서 위험할 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며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우니 정말 영험했다고 말했다.
원문발표: 2017년 6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6/27/349493.html